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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361화 (345/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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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용사

    "그럼 다녀오겠네."

    길드의 정문에 다다른 후에, 디아나가 날 돌아보며 말했다.

    "응. 조심해. 어디 다치지 말고. 필요한 건 다 챙겼어?"

    "괜찮네. 이 몸이 어린아이인가."

    디아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가 이렇게 챙겨주는 게 마냥 싫지만은 않은 표정이었다.

    어젯밤은 결국 약속대로 잘해줬으니까 말이다.

    그어떤 변태 같은 행위로도 빠져들지 않고, 철저하게 디아나가 원하는 대로 해줬다.

    낮에 그런 짓을 했는데 밤까지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하면 정말 화냈을지도 모르기도 했고, 다음날부터 며칠간 못 보는데 더 장난칠 생각도 안 들었고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충분히 만족시켜준 결과, 디아나는 지금 매우 기분이 좋다는 얘기다.

    "자네야말로 이 몸이 없는 동안 사고치지 말게."

    "에이. 사고는 무슨. 집에 틀어박혀서 애들이랑 얌전히 있을게."

    "으음. …적당히 하고 말일세."

    "응. 디아나가 돌아오자마자 바로 안아줄 수 있을 정도로 모아놓고 있을게."

    "그, 그런 얘기가 아닐세!"

    디아나는 내 입을 틀어막고 혹시 누가 들었을까 주변을 살피면서 그렇게 말했다.

    이제 와서 입을 막아봤자 무슨 소용이냐.

    "아, 아무튼 얌전히 지내게나! 얌전히!"

    디아나는 부끄럽다는 듯 그 말만을 외치고는, 길드 안으로 쪼르르 달려가 버렸다.

    그리고 그 뒤를 마법사협회의 누님들도 그 모습을 흐뭇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따라갔다.

    자, 그럼 난 디아나 말대로 얌전히 집으로 돌아갈까.

    사실 여기까지 따라온 것도 장비를 나르기 위해서였으니까 말이다.

    디아나는 던전에 가기 위해서 당연히 장비를 맡긴 대장간에 들러야했다.

    대장간에서 바로 던전으로 향할 계획이니 당연히 다른 애들의 장비는 챙기기 힘들었고, 난 그걸 옮기기 위해 따라왔다.

    그리고 겸사겸사 길드 앞까지 따라와서 배웅을 하게 됐다는 말이다.

    사실 바넷사가 끄는 마차를 타고 왔기 때문에 바넷사에게 장비 운반을 맡기면 되는 문제이기는 했지만, 우리 디아나 얼굴을 며칠 동안 못 볼 거라고 생각하니 쓸쓸해서 말이야.

    "좋아. 그럼 바넷사. 우선 어디로 놀러갈까?"

    "…………."

    "노, 농담이야. 그런 얼굴로 쳐다보지 마라."

    아니. 무표정이지만 말이야.

    말없이 무표정으로 빤히 쳐다보는 건 그만두라고.

    "그러십니까."

    야. 진짜 농담이었거든? 내가 너 같이 목석같은 애랑 놀러가서 뭐하게.

    게다가 난 지금 도시 전체에서. 아니, 어쩌면 전 세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성자니까 말이야.

    지금도 사람들의 시선이 무척이나 따갑다.

    어차피 디아나의 마차를 타고 있는 시점에서 들킨 거나 마찬가지니까 로브를 안 걸치고 그냥 왔는데, 이건 상상이상이로군.

    차라리 이 시선이 여자들의 시선이라면 참 기분 좋았을 텐데.

    사방에서 사내새끼들이 열망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게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 없었다.

    "자, 얼른 가자."

    나는 호화롭기 그지없는 마차에 올라타고는 바넷사를 재촉했다.

    마법사 협회 누님들이 전부 오는 게 아니었다면 작은 마차를 타고 왔을 텐데, 따로 올 수도 없었기 때문에 오늘은 디아나의 저택에 있는 마차 중에서도 가장 크고 호화로운 마차를 타고 왔다.

    "…왜 거기 앉으시는 겁니까?"

    마부석에 앉아있는 날 보고, 바넷사가 또 경계의 빛을 잔뜩 띄운 채로 물어봤다.

    쟤는 저번에 자기가 들이대는 대도 내가 끝까지 참아냈던 건 벌써 잊었나.

    뭘 저렇게 경계하고 있는 건지.

    "응? 아, 마차 모는 거 옆에서 직접 한 번 보고 싶어서. 재밌어 보이기도 하고. 왜? 안 돼?"

    "…아닙니다."

    바넷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점프만으로 내 옆에 가볍게 올라왔다.

    하지만 바넷사는 앉을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날 내려다보고 가만히 서있었다.

    아무리 큰 마차라고 하더라도 마부석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으니, 혹시 내 바로 옆에 앉는 게 싫다는 건가?

    과연 나라도 이렇게까지 거부당하면 조금 마음에 상처를 입는데.

    나 보기보다 여린 놈이라고.

    "바넷사?"

    "네. 출발하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이름을 부르자, 바넷사는 결심했다는 듯이 내 옆에 엉덩이를 내렸다.

    바넷사가 여자치고는 꽤나 덩치가 있는 편이다 보니, 엉덩이부터 한쪽 허벅지까지 완벽하게 밀착하게 됐다.

    과연. 이건 조금 부끄러울 만 하네.

    물론 난 전혀 부끄럽지 않지만. 오히려 즐겁기 짝이 없다.

    "그러고 보니 바넷사."

    "…네."

    "옷은?"

    "……네?"

    "메이드 복 말이야 메이드 복. 언제 돌려줄 거야? 언제 쓸 일이 있을 줄 모르니까 되도록 빨리 돌려받고 싶은데."

    "……돌아가서 드리겠습니다."

    아, 지금 표정은 왠지 모르게 감정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쓸 일이라고 하지 말고 적어도 입힐 일이라고 하라는 표정이다.

    "음. 그렇게 해주게…."

    "카아아악! 퉤!"

    내가 디아나의 흉내를 내면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을 때, 갑자기 가까이에서 그런 천박하기 그지없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웬 평범남 하나가 이쪽을 향해 띠꺼운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바로 어제 만났던 그 용사라는 놈이었다.

    어제에 이어서 오늘까지 만나다니.

    저놈 저거 그렇게 날 욕해댔으면서, 실은 스토킹이라도 하는 거 아냐?

    실비아처럼 귀여운 스토커라면 모를까, 사내새끼가 그러면 나도 내 자신이 어떻게 나올지 장담할 수 없는데 말이야.

    사라와 뭔가 관계있는 놈이라면 모를까, 어제 디아나의 말을 생각해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용사에 대해서 자세히 안 물어봤네.

    길드에 가던 도중에라도 물어볼 수 있었을 텐데.

    디아나와 며칠 못 본다는 생각 때문에 노닥거리는데 집중하느라 그만 깜빡하고 말았다.

    아무튼 그건 뭐 나중에라도 물어보면 되는 일이고, 저 놈은 왜 갑자기 튀어나와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

    맘에 안 든다 이거냐?

    어제도 분명 내 욕을 하기는 했지만, 정작 얼굴 대면하니 제대로 욕도 못하는 찌질한 놈이었는데 말이야.

    아, 그런가. 어제는 디아나가 있어서 제대로 욕을 못 한 건가.

    일단 난 그 놈의 시비를 받아주기로 했다.

    걸려온 시비는 전부 무시하지 않고 받아준다. 이게 내 지론이거든.

    나는 바넷사에게 손짓을 하여 마차를 세우게 만들고는, 놈을 업신여기듯 내려다봤다.

    "야. 거기 못생긴 놈. 지금 나 보고 그런 거냐?"

    "못생긴 놈?! 지금 나보고 그런 거냐?!"

    단순한 새끼. 도발 효과 제대로 먹히네.

    역시 저 놈은 생긴 게 상당히 콤플렉스인 모양이다.

    혹시 나한테 저렇게 시비를 터는 것도, 잘생긴 날 질투해서 그러는 건가?

    뭐, 그렇다고 시비를 건 놈을 봐줄 생각은 없지만.

    "그럼 지금 여기서 못생긴 놈이 너 말고 또 있냐? 그보다 내가 먼저 물었다. 지금 나 보고 침 뱉은 거냐?"

    아무리 길거리라 마차가 천천히 가고 있었다고는 하더라도, 지나가는 마차를 붙잡고 저런 짓이라니. 이거 상상을 초월한 또라이다.

    "이익…! 그렇다면 어쩔 거냐?!"

    "일단 묻겠는데, 너 나 언제 봤다고 시비냐?"

    "네, 네 놈! 날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너같이 생긴 놈을 내가 무슨 수로 기억해. 너 누군데?"

    "이, 이, 이이이이익!"

    놈은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는 방방 뛰었다.

    응? 설마하니 어제 식당에서 만난 게 전부가 아닌 건가?

    저 반응은 도저히 어제 일만으로 날 적대하는 반응이 아닌데.

    대체 언제 봤다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짐작 가는 게 전혀 없었다.

    애초에 사내새끼 얼굴을 일일이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나는 녀석과 언제 만났는지 기억해내는 걸 쿨하게 포기하고는, 이 싸움에 결착을 내기로 했다.

    "야. 그런데 너 말이야. 지금 내가 탄 마차에 그려진 인장은 안 보이냐?"

    "뭐? 그게 무슨 상관…크으윽!"

    놈은 그제야 디아나를 상징하는 인장을 확인했는지, 안색이 조금 파래졌다.

    이거 진짜 상상 이상으로 멍청한 놈 아니야?

    "디아나. 뉘신지도 모를 놈이 갑자기 우리 마차보고 시비 거는데 뭐라고 해줄까?"

    "으드드득…지, 지고의 대마법사님. 죄송합니다…."

    내가 아무도 없는 마차 안을 들여다보면서 말하자, 놈이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역시 강자에 약한 전형적인 소인배 같은 모습이었다.

    "잘 기억해둬라. 못생긴 놈아. 지금 너와 나의 눈높이가 바로 너와 나의 격차다. 외모뿐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말이야. 알았으면 앞으로 행동 조심해라. 못생겼으면 적어도 마음씨라도 고와야지."

    "으드드드드득."

    놈이 고개를 숙인 채 이를 갈든 말든, 나는 할 말만 하고 다시 바넷사에게 마차를 움직이도록 시켰다.

    말들이 천천히 움직이는 걸 보면서, 나는 놈에게 한 마디만 더 해줬다.

    "야. 참고로 지금 디아나 없다. 넌 그냥 나한테 고개 숙인 거야."

    "이 개새…!"

    내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놈은 화를 내며 마차로 달려들려고 했지만, 그 다음 이어지는 말에 놈은 바로 걸음을 멈췄다.

    "마차는 디아나 것이 맞으니까 망가뜨리면 무척이나 곤란해지겠지만."

    "크아아아! 두고 보자아아아!"

    저런 녀석이 용사라니. 아니, 디아나까지 용사라고 해줬으니 맞기는 맞겠지만 말이야.

    보면 볼수록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인배 같은 행동이었다.

    일단 애널라이즈라도 써볼까.

    나는 마차 옆으로 고개를 빼고 놈에게 애널라이즈를 사용해봤다.

    레벨 : 198

    직업 : 용사 전사

    종족 : 마인

    그러자 타이밍 좋게도 애널라이즈의 레벨이 오른 건지, 지금까지 보였던 레벨과 직업 말고도 하나의 정보가 추가로 더 보였다.

    어? 잠깐만. 종족이 마인?

    이거 사라랑 똑같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마차가 코너를 돌았고 놈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됐다.

    마인이라니.

    분명 어제 디아나의 말을 생각해보면 사라와 녀석의 혈연적 관계는 없는 것처럼 생각됐다.

    저 녀석의 가계 말고도 다른 용사가 있었다는 모양이니까 말이다.

    유전자 몰빵이 아닌 이상 저런 녀석과 사라가 같은 핏줄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드니, 사라는 분명 그 다른 용사의 핏줄이라고 생각했는데.

    게다가 생각해보면 유명한 용사 집안의 딸을 몰래 시골 처녀로 기른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얘기고 말이다.

    심지어 용사가 아까 그 놈 하나밖에 안 남았다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하지만 종족이 같다니.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는 건가?

    같은 용사에 같은 마인. 우연치고는 너무 기묘하다.

    나는 마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인간처럼 생긴 사람에게 무작위로 애널라이즈를 써봤다.

    하지만 역시 마인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사라와 같은 핏줄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용사가문과 사라가 어떤 식으로든 뭔가 관계가 있을 것 같다는 의혹이 점점 커져만 갔다.

    전에 디아나는 마인이 그냥 여신님이 다른 세계에서 데려온 수많은 종족중 하나가 아니냐고 했었다.

    나도 그때는 그런가보다 싶었지만,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어쩌면 마인이라는 종족은 용사 혈통과 뭔가 관계가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안 그래도 던전이란 건 혹시 마신의 육체로 만든 게 아니냐는 의혹이 생긴 직후니까 말이다.

    마신과 마인. 엄청나게 관계있어 보이잖아.

    대체 마인이란 종족은 뭐냔 말이야.

    물론 마신과 관계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도 궁금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우리 사라가 종족이 마인이라는 거다.

    물론 마인이 마신과 관련된 종족이라고 해도 사라에 대한 내 사랑이 변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두려움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종족으로 인한 비극적인 스토리 전개는 이런 판타지 세계의 왕도니까 말이다.

    그런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도 마인에 대해서는 더 자세히 조사할 필요가 있어보였다.

    하지만 어떻게?

    그 누구보다도 오래 살았을 디아나마저도 마인이란 종족에 대해서 모르는 모양이고.

    단서라면…그러고 보니 아까 그 녀석의 집안은 대대로 용사 집안이라고 했었다.

    그 말은 바꿔 말하면, 대대로 마인이었다는 가능성도 있는 게 아닐까?

    혹시 집안대대로 그에 관한 정보가 전해 내려져 오는 게 아닐까?

    디아나에게 그에 대해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저 용사 집안이라는 게 디아나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어져왔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면 디아나가 모르는 어떤 전승 같은 게 존재하는 것도 충분히 있을만한 얘기라는 거다.

    역시 아까 그 녀석을 다시 한 번 만날 필요가 있어 보이는군.

    "구원님."

    내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 옆에서 바넷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응?"

    "주제넘지만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 사람은 그쪽 방면으로 유명한 귀족들 사이에서도 가장 예의가 없고 천박한 성격으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맞상대를 해봐야 같이 비슷한 수준으로 떨어질 뿐입니다. 구원님의 행동은 곧 디아나님의 체면과도 이어지게 되니, 아까 같은 행동은 삼가시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니. 앞으로는 되도록 만나지도 않는 편이 가장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아, 응. 앞으로 조심할게."

    뭐랄까. 이렇게 딱 잘라서 얘기를 들으니 미묘한 기분이다.

    솔직히 나도 방금 전에는 비슷하게 유치했다는 자각이 있으니까 말이다.

    눈에는 눈, 이에의 이의 전법이었다고 설명해야하나?

    아니. 그래도 바넷사가 배려해서 같은 수준이라고 딱 잘라 말해주지 않았으니, 오히려 변명하면 구차해지나?

    애초에 배려해준 게 맞긴 맞는 걸까?

    나는 바넷사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지만, 여전히 바넷사의 얼굴근육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니. 방금 말를 어떤 의도로 한 건지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건 그렇다 쳐도 말이야, 나정도로 매력수치 높은 애가 옆에 딱 달라붙어서 이렇게 빤히 바라보면 좀 부끄러워하기라도 해야 정상 아냐?

    바넷사를 꼬실 생각이 있는 건 절대 아니지만, 뭔가 패배한 기분이야.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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