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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342화 (326/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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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조 의뢰

    수건 얘기를 하는 대신, 나는 레이첼 누님이 정령을 부리는 걸 보고 떠오른 또 하나의 생각에 대한 얘기를 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디아나."

    "음?"

    "전에 나도 정령을 다룰 수 없냐고 했었잖아."

    "음. 그런 얘기도 했었구먼. 그렇군. 그러면 어디 식사를 마치고 간단하게 기초라도 한 번 익혀보겠나?"

    "여기서?"

    "어차피 할 일도 없지 않은가."

    뭐, 그건 그랬다.

    아직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모험가들과 지친 우리 힐러 둘을 위해서 이 자리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한 우리지만, 그렇다고 잠을 자기에는 꽤나 시간이 이르기는 했다.

    "뭐, 기초를 시작하는 것도 자네가 정령과 친화력이 있을 때의 얘기지만 말일세."

    그러고 보니 전에도 그 얘기를 했었던 것 같다.

    우선 친화력을 확인해봐야 한다고 말이다.

    "말해두지만, 그다지 기대는 하지 말게. 자네는 육체파니까 말일세."

    "아, 그 문제는 걱정할 거 없어."

    "전에도 그랬지만, 상당히 자신만만하구먼."

    "뭐 그렇지."

    내 자신에는 근거가 있었다.

    그레이트 어스의 모든 게임에 적용되는 시스템이 바로 그 근거였다.

    내가 이 세계로 날아오게 된 계기가 된 게임도 그렇지만, 그레이트 어스의 게임들은 하나같이 직업을 여러 개 가질 수 있다는 특징이 있었다.

    여러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우선 가장 먼저, 그러면 직업을 여러 개 가져서 모든 면에서 완벽한 만능 캐릭터를 만들고 무쌍을 찍는 것도 가능한 거 아니냐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일단 그런 식의 플레이가 가능하기는 했다.

    다만, 그레이트 어스는 어떤 제약을 걸어서 그런 식의 플레이를 힘들게 만들었다.

    바로 스탯 성장 시스템에 제약을 걸어서 말이다.

    일부 특수한 직업을 제외하면, 직업 레벨이 올랐을 때 스탯이 오르는 건 랜덤이다.

    내 경우를 얘로 들어 보자.

    성자의 경우 레벨 업할 때 무조건 모든 스탯이 1씩 오르게 되지만 무투가의 경우에는 관련 있는 스탯, 그러니까 근력 내구 민첩 체력의 스탯이 랜덤하게 1씩 오른다.

    한 번의 레벨 업에 네 가지 스탯이 모두 1씩 오를 수도 있고, 반대로 네 가지 스탯이 전부 다 오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스탯이 오를 확률을 결정하는 게 바로 재능이다.

    재능이란 눈으로는 볼 수 있는 숨겨진 스탯같은 녀석인데, 일반적으로 두 가지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선천적 재능과 후천적 재능.

    선천적 재능은 말 그대로 타고나는 재능이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그 사람만의 고유한 재능.

    예를 들어 디아나의 경우, 매력에 관련되는 직업이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적어도 250레벨까지는 매력을 최고치로 찍고 있었다.

    이건 그냥 타고난 재능, 그러니까 날 때부터 예쁘기 때문에 매력 스탯이 오르기 쉬운 거라고 밖에 설명이 되질 않는다.

    그리고 후천적 재능은, 바로 직업과 관련이 있었다.

    모든 직업을 자유롭게 가질 수 있다고는 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직업 레벨이 높은 직업은 그 사람의 스탯 성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종의 주 직업과 부 직업을 나누는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는데, 만약 가장 직업 레벨이 높은 직업이 전사 계열이라면 근력이나 내구 같은 스탯은 오르기 쉬워지고, 반대로 지력이나 정신 같은 스탯은 오르기 힘들어진다.

    그리고 만약 둘 이상의 직업의 레벨이 같다면, 가장 먼저 그 레벨에 도달한 직업이 주 직업이 된다.

    그렇게 선천적 재능과 후천적 재능이라는 요인이 합쳐져서, 직업 레벨이 오를 때 스탯이 오를 확률을 정하게 된다는 거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 재능이란 녀석은 직업 레벨이 오를 때 스탯이 오를 확률뿐만 아니라, 단련을 통해 스탯이 오를 확률 역시도 관여를 하게 된다.

    또 디아나를 예로 들어보자.

    디아나의 주 직업은 마법사다.

    때문에 근력이나 내구 같은 스탯은 오르기 힘들어 지고, 지력이나 정신 같은 스탯은 오르기 쉬워진다.

    그리도 모르긴 몰라도 선천적 재능 역시 비슷할 거다.

    근력이나 내구에 대한 재능은 거의 없다시피 할 거다. 그리고 지력이나 정신, 덤으로 매력에 관한 재능은 거의 최고수준이겠지.

    때문에 디아나의 스탯이 그 모양이었던 거다.

    3천년 가까이 살았다는 애가 아직도 근력이나 내구는 50도 넘기지 못하고 있었고, 반면 지력 정신 매력은 한계까지 찍고 있는 상황.

    뭐, 설명이 길어졌지만, 다시 말해서 만능 캐릭터를 키우는 게 무척이나 힘들다는 얘기다.

    일단 주 직업과 반대되는 스탯은 관련 직업을 얻더라도 거의 올리기 힘들다고 보면 되니까 말이다.

    아라크네의 클랜장 미리엘이 마법 검사라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검술로만 싸운 것도 그 때문이겠지.

    미리엘의 전투 방식을 보면, 마법은 검에 속성을 부여하여 강화하는 데만 사용할 뿐, 싸우는 방식은 거의 검사나 마찬가지였다.

    아마 일반적인 방식으로 마법을 사용하기에는 스탯이 모자란 거겠지.

    물론 관련 스탯이 비슷한 직업끼리 키우는 것도 별로 의미는 없다.

    레벨 업 제한을 푸는 방법을 생각하면 알 수 있겠지만, 한 가지 직업만 올리더라도 관련 스탯은 웬만하면 최고치를 찍을 수 있다.

    이미 관련 스탯이 최고치를 찍었는데, 또 그와 관련된 다른 직업을 키워봤자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거다.

    물론 직업 레벨에 따른 행동 보정 같은 걸 받기는 하겠지만, 그걸 위해서 그 노가다를 하느니 차라리 주 직업 레벨이나 더 올리는 게 낫다.

    애초에 한 가지 직업도 제대로 올리기 힘드니까 말이다.

    특히 여기는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다.

    한 가지 직업이라도 마스터하기란 극히 힘든 일이라는 거다.

    미리엘을 봐라. 이미 레벨은 250인 모양이던데, 레벨 한계가 풀리지 않고 있는 것 같잖아.

    그렇게 열심히 던전을 다니는 모양인데도 말이다.

    물론 이 모든 게 플레이어와는 관련 없는 얘기다.

    지금까지 한 얘기는 전부,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동료들을 육성할 때나 생각해야 될 얘기였다.

    플레이어의 분신 캐릭터만 놓고 본다면, 이런 얘기들은 거의 상관이 없어진다.

    기본적으로 그레이트 어스의 모든 게임은 성인 게임이었고, 플레이어는 그에 관한 직업이 처음부터 주어지니까.

    플레이어는 무조건 그 직업이 주 직업인 거다. 내 주 직업이 성자인 것처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식의 플레이를 할 수 없게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성자가 주 직업이라도 마법사 플레이나 전사 플레이를 해보고 싶은 유저는 존재할 테니까.

    때문에 기본적으로 플레이어는 모든 스탯에 평균 이상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

    무투가나 암살자도 레벨이 오를 때마다 적당히 스탯이 오르고 있었고.

    말이 길어졌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내 정령에 대한 친화력도 마찬가지로 일정 수준 이상은 기대할 수 있다는 거다.

    아니, 정령사라는 직업을 얻으면 내게서 가장 부실한 지력과 정신 스탯을 올릴 수 있어서 오히려 더 좋다고 볼 수 있다.

    어차피 정령사라는 직업을 마스터하려는 생각을 가진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그 친화력 확인이라는 건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식사를 마치고 나서, 나는 바로 디아나에게 물었다.

    참고로 제일 눈이 좋은 사라가 주변의 경계를 나서서 맡아줬고, 실비아와 레이첼 누님은 마법으로 씻기 좋게 식시를 한데 모으고 있었다.

    레이아와 마틸다는 환자들을 데리고 텐트 안에서 휴식을 취하게 했다.

    "흠. 기다려 보게. 우선은 4대 원소 정령과의 친화력만을 확인해보겠네. 그것으로 괜찮은가?"

    "응."

    어차피 원하는 건 물의 정령이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디아나는 마석을 몇 개 꺼내 손에 쥐었다.

    그리고는 그 손을 앞으로 내밀고 주문을 외우면서 천천히 손을 펴자, 손에 있던 마석들이 가루가 되며 떨어져서는 바닥에 마법진을 만들어갔다.

    "후우. 됐네. 그럼 이 위에 서게."

    내가 마법진 위에 서자, 디아나가 내 가슴에 손가락을 대고는 몸 위에 그림을 그리듯 천천히 움직였다.

    "이 몸의 손을 따라 마나를 운용하면서 주위에 느껴지는 정령의 기색을 살피…빠르구먼."

    디아나의 말대로 할 것도 없이, 마법진에 올라가자마자 눈앞에 정령과의 계약을 하겠냐는 시스템창이 떴다.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승낙했고, 이내 사대 원소 정령 모두와 계약을 마칠 수 있었다.

    "호오. 4대 원소 정령을 모두 다룰 수 있는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디아나는 제법이라는 듯 중얼거렸다.

    "네?! 4대 정령을 모두요?! 굉장하네요. 부러워라."

    그리고 그저 덤덤하게 감탄만 한 디아나와는 다르게, 옆에서 같이 보고 있던 레이첼 누님은 정말 부러워 죽겠다는 듯이 날 쳐다보면서 말했다.

    뭔가 디아나와 반응이 극적으로 다른 것 같은데.

    아, 그런가. 디아나도 정령을 다룰 수 있다고 했지. 그리고 아마 얘도 4대 정령을 모두 다룰 수 있을 거다.

    이 반응의 차이는, 이미 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라고 봐야 되나.

    "헤헷. 그런가요? 제가 좀 재능이 넘치기는 하죠."

    "떽기. 또 그렇게 금방 우쭐해져서는. 그럼 이 몸의 지도도 더 필요 없는가?"

    "훗. 물론…."

    생각보다 훨씬 손쉽게 정령을 다룰 수 있게 된 거다.

    나는 바로 정령을 소환해서는, 시험 삼아 실비아를 씻겨보려고 했다.

    왜 실비아냐고? 아무 이유 없어. 그냥 시야에 들어와서.

    하지만 나는 곳 게임 시스템을 이용해 정령을 소환하는 것의 중대한 문제점에 대해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스킬 창을 열었는데, 정령을 이용해 전투를 하는 스킬밖에 보이지 않아.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말로 하면 알아들으려나?

    "헤이! 정령! 실비아를 씻겨! 워싱!"

    "엣? 흐아아아!"

    내 목소리에 식기를 정리하던 실비아는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두 눈을 꼭 감고 뭔가에 견디려는 듯 몸을 굳혔지만, 손바닥만 한 물의 정령은 꼬물꼬물 움직이면서 날 바라보기만 할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자네 지금 뭐하는 겐가? 그리고 또 가만히 있는 실비아양은 왜 괴롭히는 겐가."

    디아나가 바로 까치발을 하고 손을 뻗어서 내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사라도 그랬지만, 디아나도 실비아를 꽤나 아낀단 말이야.

    물린 디아나의 경우, 그냥 본처취급 해줘서 그런 게 전부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야. 실비아가 가슴이 없다고 해서 친절하게 대해주는 건 그만둬라.

    그런 유대감은 아무것도 낳질 않아.

    애초에 자기는 성장하면 실비아를 배신하게 될 주제에 말이야.

    "크흠. 괴롭히는 거 아냐. 실비아가 정리하고 있는 식기를 씻으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그만 말이 헛나갔어. 아무튼 디아나님. 제게 정령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주세요."

    "음? 아까의 그 우쭐한 태도는 어디로 갔나? 한 번 스스로 해보는 게 어떻겠나?"

    "네? 우쭐? 누가요? 설마 제가 그랬었나요?"

    "아무래도 자네의 그 능력도 만능은 아닌 모양이구먼."

    디아나는 안 봐도 뻔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역시 디아나님. 날카로우셔.

    "후우. 어쩔 수 없구먼. 그럼 이 몸의 얘기를 잘 듣게나."

    하지만 디아나는 그러면서도 내게 정령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정령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말이 통하지 않는다.

    때문에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마나로 의사를 전달해야 하는데, 이게 생각만큼 쉽지가 않았다.

    마치 새로운 언어를 하나 더 배우는 기분이 들 정도로 학습 난이도가 높은데다가, 마나를 세밀하게 운용까지 해야 되서 난이도가 더 높아졌다.

    심지어 이게 정령을 다루기 위한 기본과정이라니.

    이걸 마스터한 이후로는 정령과 마나의 대화를 통해 유대를 쌓아 친화력을 올려야한다.

    정령사라는 거, 진짜 힘든 직업이구나.

    디아나가 쓸데없이 정령을 부르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가 마법을 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정령으로 마법을 쓰는 것보다는 그냥 자기가 쓰는 게 속편할 것 같아.

    그래도 난 해내고 말겠어.

    정령으로 몸을 씻을 수 있게 될 그 날을 위해.

    "그러니까…이렇게?"

    하루 만에 마나를 이용해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배울 수도 없는 일이니, 우선은 간단한 대화만 몇 개 배웠다.

    일단 언어의 기본이라는 인사부터.

    내가 마나를 다뤄서 인사를 건네자, 물의 정령이 꼼지락 거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너무 작아서 이목구비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수준이지만, 이거 인사한 거겠지?

    손바닥 위에서 꼬물꼬물 대는 것이, 의외로 귀여울지도 모르겠다.

    그런가. 정령사들은 이런 재미로 정령을 다루는 건가.

    "귀엽네. 이거라면 이제 굳이 실비아가 없어도…."

    "네, 네에에?"

    내가 일부러 그렇게 중얼거리자, 우리의 귀여운 실비아는 또 바로 낚여서 불안한 목소리를 흘렸다.

    "실비아는 내가 안으려고만 하면 도망 가버리고 말이야. 차라리 정령이 나을지도. 어차피 귀여운 건 마찬가지고. 그렇게 생각 안 해?"

    "아, 아, 안 합니다!"

    실비아는 양 손으로 내 팔을 붙잡고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뭐야. 자기가 더 귀엽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으엣? 아, 아니요. 그, 그런 건 아니지만…."

    "좋아. 그럼 실비아가 스스로 내 품에 안겨오면 인정해주지."

    "엣?"

    "자, 뭐해. 어서."

    나는 양 팔을 벌리고 실비아와 마주봤다.

    실비아는 갑작스런 전개에 몸이 굳어서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안 할 거야? 역시 난 정령이랑…."

    "하, 하겠습니다. 하앗! 하, 후, 후, 후야아아아…."

    실비아는 기합을 넣고 필사적으로 내 품에 달라붙더니, 바로 녹아내렸다.

    훗. 이렇게 쉽게 낚여서는. 실비아야. 그래서 네가 내 애완동물인….

    "이 바보가 진짜! 적당히 안 해?!"

    결국 보다 못한 사라가 경계를 하다 말고 날 한 대 때렸지만, 난 내 행동에 한 점 후회도 없었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쓰다가 잠깐 졸았더니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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