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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
"우우우…죄송합니다."
"아냐. 내가 너무 신나서 해댄 게 잘못인데 실비아가 사과할게 뭐있어. 오늘부터 다시 힘내자."
"우읏…. 네, 네…."
결국 어젯밤은 생각만큼 레벨 업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언제 초월종을 만날지 모르는데, 일이 잘 풀린다고 내가 너무 나댔어.
오늘 밤부터라도 다시 힘을 내면 되기야 하지만, 당장 오늘 초월종을 만나버리면 끝장이다.
다만 그런 와중에도 한 가지 희소식은 있었다.
바로 암살자 레벨이 엄청나게 올라간 거다.
아마 다른 사람이 근처에 있는데 들키지 않고 실비아를 느끼게 만들었던 게 주요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도중부턴 실비아가 소리를 참는 것도 잊고 신음성을 질러서 다 들켰겠지만, 그래도 암살자의 레벨이 상당히 낮았던 만큼 처음에 잠깐 올릴 상황이 된 것만으로도 상당히 레벨이 올랐다.
덕분에 민첩이 상당히 올랐으니, 저번에 가루다에게 당했던 것처럼 두 눈 똑바로 뜨고 당하지는…뭐 당하려나. 그래봤자 아직 민첩은 250도 안되고.
"무슨 문제라도 있어?"
실비아가 나한테 사과하는 장면이 이상했던 건지, 미리엘이 다가오며 물었다.
"아, 아니! 전혀! 아무 문제없어!"
들키면 강간당한다!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가. 그러고 보니 어젯밤은 꽤나 즐겼던 모양이지만…."
역시 미리엘에게도 실비아의 신음소리가 들렸던 모양이다.
"으, 응! 그냥 섹스가 하고 싶어서! 실비아를 안으면 기분 좋거든! 결코 레벨을 올릴 목적으로 안았던 게 아니라!"
미리엘에게 위축된 나는 쓸데없는 말까지 해버리고 말았다.
옆에선 실비아가 "하우우…." 같은 소리를 내면서 부끄러워 죽으려고 하고 있고, 멀리선 루티아가 재미있다는 듯이 쿡쿡 웃으면서 이쪽을 바라봤다.
"나도 기분 좋을 자신 있는데 한 번 안아볼래? 어젯밤에 저 아이 자지러지는 소리를 들어보니까, 우리 귀염둥이 꽤나 절륜한 모양인데."
"아, 아뇨! 전 지조 있는 남자라서!"
"어머. 아쉽네."
저 사람은 진짜 진심으로 그러는 건지 장난으로 그러는 건지 구분이 안 돼!
"루티아. 그쯤 해둬. 그보다 구원. 그렇게 당황할 필요 없어. 난 딱히 하지 말라는 소리를 하고 싶었던 게 아냐. 남자의 성욕이 강하다는 건 나도 알아. 다만 조금 주의를 하고 싶었을 뿐이야. 물론 알아서 잘 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컨디션이 망가지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해두라고 쉬라고 말이야."
"으, 으응! 충고 고마워! 앞으로 조심할게!"
내 말을 들은 미리엘은 고개를 끄덕이고 식사준비를 하는 곳으로 돌아갔다.
"실비아. 오늘부터 목소리는 더 죽여서 하자."
"네, 네헵…."
어차피 힐링 섹스가 있으니 컨디션 걱정은 안 해도 된다.
그보다는 레벨 업이 중요하지.
아무튼 식사를 마치고 나서, 우리는 원래대로 대열을 유지한 채 길을 나섰다.
오늘 초월종을 만나면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머리가 복잡했지만, 이걸로 혼자 골머리를 썩여봤자 해결되는 건 없겠지. 그냥 초월종을 만나지 않거나, 만나더라도 그 초월종이 암컷이길 빌자.
나는 괜히 골머리를 썩이지 않기 위해서, 다른 데에 신경을 집중하기로 했다.
"그게 아냐. 좀 더 자연스럽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라고! 그래선 마치 먹이를 놓고 미소 짓는 육식동물 같잖아!"
"뭐 이 새끼야! 말 다했냐?!"
바로 앨리시아에게 여성스러움을 학습시키는 것에 말이다.
이거 하다 보니 꽤나 재미있단 말이지.
"지금은 날 좋아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연습하라고 했지! 뭐야 그 말투는! 여성스런 말투는 어디로 갔어!"
"으드득…구, 구원씨?!"
"미소가 딱딱해!"
응. 상당히 재밌다.
이 난폭한 육식동물 같은 앨리시아가 억지로 여성스런 미소를 지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난다.
게다가 날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연습하라는 말까지 덧붙여서, 다루기도 쉽고.
아아. 재미있다.
"이, 이 새끼…끝나면 죽여 버린다…."
그래봤자 어차피 의뢰를 하는 동안은 나한테 손도 못 대면서.
의뢰가 끝나면? 그야 당연히 도망가야지.
게다가 앨리시아도 말은 저러면서도 일단 여성성을 익히려고 노력을 한단 말이지.
진짜 좋아하는 남자가 있긴 있는 모양이지?
이 맹수 같고 남자 같은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라는 게 상상은 잘 안 되지만.
뭐, 난 이 상황을 즐기면 그만이지.
"앨리시아씨. 감이 잘 안 오시는 것 같은데, 제가 모범을 보여드릴까요?"
앨리시아가 보고 있기 불쌍했는지, 옆에 있던 마틸다가 그런 제안을 했다.
뭐냐. 사람이 모처럼 즐기고 있는데. 방해하지 마라.
"자, 보세요. 구원씨…저 구원씨를…."
"으아아악! 거절한다!"
이 녀석 지금 시범 보여준다면서 날 모르모트로 삼았어!
게다가 말하면서 점점 뺨이 핑크빛으로 물드는 게, 분명 말하는 도중에 분위기에 취해서 진심이 돼가고 있었어!
뭐 이런 위험한 녀석이! 건드리지 않아도 터지는 폭탄이라니! 최악이잖아!
"시, 실례로군요! 이쪽도 전혀 진심이 아니었거든요?!"
"거짓말하지 마! 눈이 진심이었어!"
"흥! 자의식과잉이 아니신가요?!"
"너흰 또 뭘. 그런 걸로 싸우고 있냐. 그보다 마틸다. 한 번 봐서는 잘 모르겠는데 한 번 더 시범을 보여주겠어? 너 정말로 여성적이네. 꼭 본받고 싶어."
"어머? 그럴까요? 그럼 다시 한 번…."
"하지 마! 야!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뭐가?"
이, 이 녀석…이런 식으로 복수를 하다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조금 가지고 놀았다고 고자로 만들려는 건 심하지 않냐?!
그런 식으로 장난도 쳐가면서, 우리는 던전 탐험을 계속했다.
뭔가 새로운 발견을 하려는 게 아니라 빤히 알고 있는 길을 가는 것뿐이라 아라크네 애들도 내심 지루하긴 했던 모양인지, 내 장난을 꽤나 잘 받아줘서 생각만큼 던전 탐험이 재미없진 않았다.
그래도 우리 애들 얼굴이 그립기는 했지만.
"곧 야영할 때로군."
그리고 오후 5시가 됐을 쯤, 앨리시아가 문득 그렇게 중얼거렸다.
얘들은 우리 클랜과는 다르게, 시간이 되면 쉬기보다는 쉴 수 있는 장소를 발견했을 때 쉰다.
아직 시간이 이르더라도, 야영할 장소를 발견하면 거기서 하루를 묵는 거다.
뭐, 아래 계층으로 갈수록 야영하기 쉬운 곳을 찾기는 힘들겠고, 모험가로서는 이게 정석이겠지.
다행이다. 오늘도 결국 이렇게 아무 일 없이 끝나는 건가.
"뭐, 그 전에 초월종을 한 마리 잡아야하지만 말이에요."
하지만 뒤에서 내 허를 찌르는 말이 들려왔다.
"그, 그게 무슨…?"
"조금만 가면 야영하기 좋은 곳이 하나 있는데, 거기가 바로 초월종의 둥지 같은 곳이거든. 안심해. 초월종 한 마리뿐이고, 다른 녀석은 안 튀어나오니까."
지금 그 초월종이 문제라는 거다!
"수, 수컷?!"
"아마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뭐, 네가 그 이상한 발견을 하기 전까지는 몬스터 성별 따위 크게 신경 안 썼으니까, 정확한 건 아니지만."
왜 나는 이렇게 하나같이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을까.
성자의 길은 언제나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란 거냐.
이것도 여신님의 시련이라면 받아…들이겠냐?! 들키면 강간당한다고!
어쩌지. 어쩌면 좋지?
내가 대책을 세우기도 전에, 아라크네의 일원들은 다들 무기를 꺼내들고 자세를 잡았다.
어느 샌가 저 멀리서 일반 오우거보다도 훨씬 더 거대한 오우가 한 마리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럼 간다!"
미리엘의 신호와 함께, 아라크네의 전위멤버가 동시에 오우거 초월종을 향해 돌진해나갔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아라크네 클랜원들이 제대로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거의 힘에 맡겨서 찍어누르는 방식이었다면, 이번에는 제대로 서로를 보안해가면서 연계를 취하고 있었다.
우선 미리엘, 앨리시아, 지니가 오우거를 공격하면서 어그로를 먹는다.
미리엘에게 어그로가 쏠리면 앨리시아와 지니가 힘을 주면서 미리엘은 살짝 빠지고, 앨리시아에게 어그로가 쏠리면 나머지 둘이 힘을 주는 방식으로 환상적인 어그로 핑퐁을 구사한다.
그리고 셋이 충분히 어그로를 먹었다고 생각했을 때 쯤, 나머지 멤버들도 공격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쌍둥이 마법사는 위협적인 마법을 연달아 날려대고, 음유시인인 힐다가 노래를 하자 모두의 몸에 활기가 돌면서 동시에 오우거의 움직임은 조금 둔해졌다.
그리고 루티아는 오우거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역할을 하는 듯, 오우거가 시선을 돌리거나 손에 든 나무를 휘두르려는 움직임을 하는 타이밍에 맞춰서 계속해서 관절부분을 공격하며 귀찮게 만들었다.
오로지 성기사 릴리만이 날 지키려는 듯 내 앞으로 나와 가만히 버티고 서있을 뿐이었다.
그래. 이런 연계 행동을 보고 싶어서 온 거였다고.
나는 그 환상적인 연계 행동에 잠깐 눈을 뺏겼지만, 이내 그럴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하반신에 걸친 가죽의 중앙부분이 덜렁거리는 것이, 저거 확실히 수컷이다.
뭔가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들키게 되는데.
…어쩔 수 없지. 도박을 하는 수밖에 없나.
나는 옆에 있는 실비아를 끌어안고 그 귀에 속삭였다.
"실비아. 지금부터 내가 조금 무리를 할지도 몰라. 너만 믿을게."
"…네.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전투모드에 들어간 실비아는 바짝 긴장한 채로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에 그렇게 흐물흐물해지면서 몇 번이나 절정을 느꼈던 애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믿음직스럽다.
나는 실비아의 대답을 듣고 마음을 굳혔다.
좋아. 해보자고.
다른 걸 하려는 게 아니다.
그저 성자의 파동이 먹힐 때까지 계속해서 성자의 파동을 날리려는 것뿐이지.
아마 내 스킬이 먹히지 않는 다는 건, 아예 효과가 0이라는 얘기가 아닐 거다.
다만 초월종이 흥분하지 않을 정도로 효과가 미미하다 뿐이지.
하지만 내 스킬은 한 번 먹히면 해소가 될 때까지 계속 몸에 남아있다.
그 특성을 이용해서 계속, 몇 번이고 스킬을 사용하다보면, 언젠가는 초월종에게도 효과가 나타날 거다.
언제 효과가 나타날지 나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게 문제지만, 그건 도박을 할 수밖에 없지.
난 해내보이겠어! 내 정조를 걸고!
받아라! 이게 바로 정조의 위기에 처한 성자만이 쓸 수 있다는, 시전자의 생명을 깎아내리는 오의!
다연발 파동궈…성자의 파동!
나는 엄숙한 분위기로 손바닥을 번갈아가면서 앞으로 내밀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내 손에서 뻗어나가는 파동들이 보이지 않아서 얼핏 미친놈처럼 보일 지도 모르지만, 난 지금 한없이 진지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물론 파동을 날리면서 숫자를 세는 것도 잊지 않는다.
몇 번 날려야 먹히는지를 알아야, 나중에 또 이런 위기가 닥치더라도 넘길 수 있는 거 아니겠어?
그리고 내가 서른 번쯤 성자의 파동을 날렸을 때, 드디어 오우거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마침 오우거 사냥도 막바지에 이르러서, 놈은 무릎을 꿇고 헉헉대며 힘겹게 숨만 몰아쉴 뿐이었다.
"어그로가! 후위진! 공격중지! 마무리는 우리가 한다! 구원! 슬슬 스킬 준비하도록!"
아무래도 미리엘은 후위진의 공격이 너무 강해서 어그로가 뺏겼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전위진들이 마지막 공격을 가하려고 했을 때, 사건이 벌어졌다.
"우워어어어어어!"
오우거가 갑자기 상체를 꼿꼿히 세우더니, 큰 소리로 울부짖은 거다.
그리고 동시에 하반신을 덮은 가죽을 뚫을 기세로 물건이 우뚝 섰다.
"꺄악!"
우아아아. 굴욕적이겠다.
마침 그 근처에서 트릭키한 움직임을 하고 있던 루티아는, 오우거의 성기가 갑자기 솟아오르는 바람에 맞고 튕겨져 나갔다.
루티아를 성기로 튕겨낸 오우거는 벌떡 일어나더니, 그대로 눈을 시뻘겋게 붉힌 채로 나를 향해 돌진해왔다.
"큭! 구원씨! 뒤로 빠지세요!"
오우거 초월종 사냥을 지루하다는 듯이 보고있던 릴리는, 바로 방패를 고쳐들면서 말했다.
"하아아앗!"
그리고 큰 기합소리와 함께, 방패를 전면에 내세우고는 그대로 돌진했다.
10미터를 가볍게 넘기는 오우거와, 170센티미터도 안 되는 여자가 중간에서 격돌했다.
겉보기에는 끔찍한 결과가 상상되는 격돌이지만, 결과는 생각과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릴리의 방패가 제대로 오우거의 발목을 노렸고, 오우거는 그 다리를 중심으로 몸을 휘청거리며 지면에 곤두박질쳤다.
다만 릴리가 한 가지 실수한 것이 있다면, 성자의 스킬에 영향을 받아 맹목적이 된 오우거가 얼마나 집요한지를 계산에 넣지 않았다는 거다.
오우거는 넘어지는 와중에도 몽둥이를 놓치지 않고, 내가 있는 방향으로 휘둘렀다.
넘어지는 기세까지 더해지는 바람에, 몽둥이는 다른 아라크네 클랜원들이 반응조차 할 수 없는 속도로 내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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