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297화 (281/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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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뢰

    "구원님! 구원님!"

    "구원! 정신 차려요! 구원!"

    날 부르는 아리따운 아가씨들의 목소리에, 난 천천히 의식이 각성했다.

    "흔들지 마. 어지러워."

    "구원님!"

    내가 눈을 뜨자마자, 딱딱한 뭔가가 내 몸을 꽉 끌어안았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 이름에 님자를 붙여가며 부르는 애는 한 명밖에 없지.

    "실비아야. 판금 갑옷을 입고 그렇게 껴안으면 아무리 나라도 좀 아프단다."

    "죄, 죄송합니다."

    일단 분위기가 무거워 보여서 농담을 던져봤는데, 실비아는 미안해할 뿐 분위기가 나아지지는 않았다.

    껴안은 팔에도 힘만 조금 풀었을 뿐, 여전히 껴안고 있고.

    역시 슬플 때는 스스로 날 껴안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구나.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괴조한테 배가 뚫린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일어나자마자 거기까지 제대로 기억하는 걸 보면 별 문제는 없는 모양이군. 짜식 그것도 못 피해서 다치기는."

    옆에서 서서 날 내려다보던 앨리시아는 내 옆구리를 한 대 툭 치면서 말했다.

    야. 방금 배 다친 사람 옆구리를 때리지 마라.

    뭐, 이렇게 옆에서 보고 있었다는 건 그래도 걱정을 하긴 했다는 얘기니까 고맙긴 하지만.

    "물론이죠. 누가 치료했는데요!"

    옆에서 마틸다가 눈가를 훔치면서도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일어날 때 실비아 목소리 말고도 다른 목소리가 더 들렸었는데.

    "네가 치료한 거야?"

    "그, 그래요?! 뭐 불만이라도 있나요?!"

    그동안 내가 워낙 갈군 덕분인지, 마틸다는 은근히 경계하는 모습으로 대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목숨을 살려줬는데 그렇게 까진 안 한다고.

    "아니. 고마워. 덕분에 살았다."

    "꽤, 꽤나 솔직하시군요."

    "이럴 때 정도는 나도 제대로 감사한다고. 고마워. 마틸다."

    "아뇨. 전 애초에 이러려고 따라온 거고…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방금까지 틱틱대는 목소리였던 마틸다의 기세가 갑자기 확 줄었다.

    뭔가 몸을 꼼지락 대면서 뺨을 붉히고 쑥스러워하는 모습이 심상치 않다.

    아아. 젠장. 진짜 얜 제대로 감사도 못하겠네.

    "하긴 그런가. 감사할 필욘 없지. 할 일을 한 건데. 음. 수고했어. 앞으로도 맡은 바 일을 더 열심히 하도록."

    나는 결국 이럴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다. 마틸다. 이것도 다 내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야.

    "다,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로 무례하네요!"

    뺨이 핑크빛으로 물들었던 마틸다는 금새 태도를 바꾸고 다시 틱틱대면서 화를 냈다.

    좋아. 이걸로 내 아들은 지켜졌어.

    "거기서 그럴 게 아니라 일어났으면 밥이라도 먹지."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미리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서 보니, 앨리시아를 제외한 나머지 아라크네 멤버들은 다들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매정한 녀석들. 아니, 뭐 마틸다가 완벽히 치료할 수 있다고 알았을 테니까 저리 태연히 식사 준비를 한 거겠지만.

    릴리라는 성기사는 마틸다를 원래부터 아는 모양이고.

    "실비아. 난 괜찮으니까. 슬슬 밥이나 먹자."

    나는 여전히 내게 찰싹 달라붙어있는 실비아에게 말을 걸었다.

    "우읏. 네…."

    하지만 실비아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좀처럼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조금 강제로 떨어지게 만들까.

    "아니면…좀 더 끌어안고 있을까? 내가 안아줘?"

    "히아앗! 괘, 괜찮습니다!"

    역시 잘 먹힌다니까.

    실비아는 내게서 후다닥 떨어졌고, 나는 그제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오오. 상처 하나 없이 깔끔하네. 갑옷은 관통돼서 상당히 보기 안 좋지만."

    "미안하군. 우리가 좀 더 주의했어야 했는데. 설마 죽기 직전인 녀석이 그런 힘을 낼 줄이야."

    "아니. 나도 예상 못했었으니까 사과할 거 없어. 결국 이렇게 살아있기도 하고. 그나저나 그 놈은 내 배를 관통하자마자 바로 잡은 모양이네?"

    "잡았다고 할까…널 공격하자마자 그대로 힘이 다해서 죽었지."

    "성기는 나왔고?"

    "그래. 그건 문제없어. 다만 한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왜 아까는 그렇게 다가가야만 했지?"

    "아…그게 말인데. 실은 다가가서 쓰는 스킬이 가장 강력하거든. 아까 그놈은 멀리서 쓰는 스킬이 안 먹히더라고. 아무래도 내 레벨이 조금 부족한 게 원인인 것 같은데."

    "과연. 방금 그 놈은 트롤같은 몬스터에 비하면 확실히 강한 몬스터지. 하지만 그래서야 앞으로가 문제로군. 초월종을 만날 수도 있고, 하물며 우리 목표는 계층의 주인이다. 방금 그놈보다도 훨씬 강한 녀석이지. 아무리 우리라도 네가 계층의 주인에게 다가가게 할 수는 없어."

    "으윽. 역시 그래?"

    "그래. 뭔가 대책을…그런가. 그래서 텔루나님이…."

    미리엘은 뭔가 깨달은 것처럼 중얼거렸다.

    "응? 디아나가 뭐 어쨌다고?"

    "아니. 그저 내가 잠깐 오해를 했었다는 걸 깨달아서 말이지. 그런 줄 알았다면 클랜 하우스에서 곧장 오는 게 아니었는데."

    미리엘은 뭔가 알 수 없는 소리를 계속 중얼거렸다.

    "좋아. 그럼 이 근처에서 자고 가는 걸로 할까."

    "응? 벌써? 아직 저녁인데?"

    "응? 정말이군. 막 기절에서 깨어났으면서 시계도 안 보고 잘도 아는군."

    미리엘은 품에서 시계를 꺼내 확인하더니, 신기하다는 눈초리로 이쪽을 쳐다봤다.

    "아무튼 던전에서 그런 걸 신경 쓸 필요는 없잖아. 너도 막 기절에서 깨어났으니, 오늘은 그만 쉬고 정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마침 이 근처는 야영하기 적합한 곳이기도 하고."

    뭐, 그렇긴 하지.

    낮밤이 없이 항상 같은 밝기를 유지하는 던전에서 그런 걸 따지는 모험가들은 많지 않다.

    우리 클랜처럼 꼬박꼬박 시간을 따져가면서 생활리듬을 유지하는 게 이상한 거지, 보통 모험가들은 잘 수 있을 때 자는 편이라고 하니까.

    "다들! 야영 준비다!"

    "어머, 여기서 묵는 거야?"

    "그래."

    "후훗. 기대되네."

    루티아가 내 쪽을 바라보면서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구원님은 손끝하나 못 건드립니다!"

    "후훗. 그렇게 경계하지 마. 그쪽도 덤으로 같이 귀여워해줄 테니까."

    실비아의 냉랭한 태도에도 루티아는 살짝 눈웃음을 짓고는 야영준비를 하러 갔다.

    저 사람은 진짜 진심으로 그러는 건지 장난인 건지 분간이 안 된단 말이야.

    …진심은 아니겠지? 에이 설마. 아무리 그래도 던전 안인데.

    아라크네 클랜원들이 분주히 움직인 덕분에 야영 준비는 금방 끝났다.

    인원수가 많은 만큼 텐트도 꽤나 여러 개를 쳐놓았는데, 나도 그 중 하나를 배정받았다.

    "불침번은 우리 쪽에서 맡는 걸로 하지. 너는 최대한 피로를 회복해줘."

    미리엘은 어째선지 피로 회복이란 말에 힘을 줘서 말했다.

    "그럼. 사양 않고."

    뭐, 오늘도 거의 죽을 뻔 했으니, 푹 쉬라는 의미겠지.

    나는 사양하지 않고 미리엘의 제안을 넙죽 받아들였다.

    문제는 혹시 덮치러 올지도 모르는 루티아인데 말이야.

    "실비아."

    "네?"

    "너 오늘 나랑 같이 자야겠다."

    "네, 네엡?! 하, 하지만 여, 여긴 던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말 그대로 같이 잠만 잘 거라고. 자는 도중에 누가 덮치면 지켜줘야지."

    "아웃. 네, 그, 그렇군요."

    "그런 거라면 저도 같이 자드리죠!"

    어째선지 마틸다가 끼어들어왔다.

    "아니 넌 필요 없어."

    "어쩜! 은혜도 모르는 사람 같으니!"

    야. 그런 말 하지 마라. 괜히 양심에 찔리잖아. 진짜 고맙게 생각은 하고 있다고.

    "저기 성기사랑 같이 친목이나 다지라고."

    "어?! 저, 저랑 마틸다 추기경님이 같이?!"

    내게 지목당한 릴리는 무척 당황한 눈치였지만, 난 신경 쓰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내겐 내 아들의 생명이 최우선이야.

    "흥. 사람의 선의를 무시하다니. 언젠가 천벌 받을 거예요."

    마틸다는 삐진 듯이 내뱉고는 릴리에게 다가갔다.

    미안하지만 난 여신님이 보낸 거라 천벌 같은 거 웬만하면 안 받을 거라네요.

    "그럼 잘까."

    "네, 네헵!"

    실비아는 긴장한 모습으로 나와 같이 텐트에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사라가 양보해줘서 기껏 실비아랑 같이 잤는데, 결국 연속으로 실비아랑 이렇게 같이 자게 생겼네. 사라가 알면 분해하려나?

    "실비아. 진동하지 마라. 잠 안 온다."

    "죄, 죄, 죄송합니다. 그, 그런데 구원님?"

    "응?"

    "이, 이, 이렇게 끌어안고 있을 필요가 있습니까?!"

    실비아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심장부근을 부여잡고 말했다.

    "난 잘 때 뭐 끌어안고 자지 않으면 잠이 안와."

    "그, 그렇습니까…."

    "사실 끌어안는 것 뿐 아니라 삽입도 하고 자는 게 제일이긴 한데."

    "제, 제발 그건! 용서를…!"

    "뭐야. 실비아 나랑 연결되는 게 싫어?!"

    "아, 아닙니다! 하지만 다들 들리는 데서…우우읏."

    실비아가 진짜로 울 것 같아서 나는 그만 놀리기로 했다.

    "알았어. 그냥 끌어안고만 잘테니까 이걸로 참아."

    "우으읏. 네…."

    삽입하고 자는 것에 비하면 끌어안고 자는 건 현저히 난이도가 낮게 느껴진 건지, 실비아의 몸의 떨림이 조금 약해졌다.

    사실 몸을 최상의 컨디션으로 만들려면 힐링 섹스를 발동시키면서 자는 게 제일이기는 한데 말이야. 어쩔 수 없지. 실비아는 삽입하면 진짜로 참지도 못할 거고.

    "안녕. 벌써 자?"

    내가 실비아의 진동을 느끼면서 막 잠들려고 했을 때, 누군가가 우리 텐트로 난입해왔다.

    "나왔다!"

    "어머. 뭐니, 그 반응? 누나 조금 상처받는데."

    루티아가 정말로 우리 텐트에 들어온 건다.

    "무, 무슨 일로 오셨는지?"

    "후훗. 알면서."

    "저, 전 정말로 먹어도 맛이 없어요!"

    "그건 내가 먹어보고 판단해준다니까."

    "구원님께 손대지 마십쇼!"

    "후훗. 앙칼지네. 걱정 마. 너도 내가…."

    그렇게 말하면서 루티아는 실비아의 가슴에 손을 뻗었다.

    "어때? 기분 좋지 않니? 언니의 손가락 기술은 우리 클랜 안에서도 알아주…."

    "서투르기 짝이 없군요."

    루티아가 요염하게 말했지만, 실비아는 표정도 변하지 않고 말했다.

    그야 그렇겠지.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실비아를 만져봤자 얘가 느낄 리가.

    "후훗.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어, 어라?"

    루티아는 실비아의 고간에까지 손을 뻗었지만, 정말로 젖어있지 않자 당황한 눈치였다.

    "손 떼시죠. 혹시 겉보기만 잘하는 척 할 뿐 숫처녀 아니십니까?"

    "뭐, 뭐어?! 수, 숫처…."

    실비아는 카운터를 날렸다! 효과는 굉장했다!

    루티아는 충격 받은 표정으로 조금 떨어졌다.

    "소란스럽군. 뭐하는 거지?"

    그때 우리 텐트로 또 한 명이 난입해왔다.

    바로 미리엘이었다.

    "미리엘! 말 좀 해줘! 나 테크닉 좋지?"

    왜 그걸 동성인 미리엘한테 묻는 거냐?

    역시 던전에 오기 전에 살짝 그런 냄새를 풍겼던 것처럼, 얘들 진짜로….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보다 루티아 할 말이 있어."

    "뭐야?"

    "텔루나님의 부탁을 너한테 맡긴다고 했는데, 그거 취소해야겠어."

    "뭐?! 그건 무슨 뜻이야?!"

    "아무래도 텔루나님은 다른 뜻으로 그런 부탁을 하셨던 것 같아. 내가 오해하고 있었어. 기대하게 만들고 미안하지만, 여긴 내가 맡을게."

    "안 돼! 내가 얼마나 기대했는데! 그럼 차라리 같이…!"

    "그럼 효율이 나빠질 뿐이야. 나 혼자 상대하는 게 제일이야. 이해해줘."

    얘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니. 대충 무슨 말인지 짐작이 가려고 하기는 하는데 말이야, 이왕이면 내 예상이 틀렸으면 좋겠다.

    "쳇. 알았어. 대신 미리엘이 나중에 보답해줘야 돼?"

    "알겠어."

    루티아는 그 말만 남기고, 텐트를 빠져나갔다.

    이제 텐트에는 나와 미리엘, 그리고 내 앞에서 양팔을 벌리고 철저히 마크하고 있는 실비아만 남게 됐다.

    실비아야. 난 너만 믿는다.

    "그럼 할까."

    미리엘은 실비아를 신경 쓰지도 않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묻겠는데…뭘?"

    "섹스."

    젠장! 내 예상이 맞았어!

    결국 멀쩡해 보여도 얘 역시 아라크네 클랜의 일원이었어!

    "거절하겠다면?"

    "…그런 취미인 건가?"

    미리엘은 내 대답을 듣고 잠깐 생각하더니,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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