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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296화 (28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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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뢰

    루티아의 유도를 따라 조금 전진하자, 대략 3미터 정도 크기로 보이는 트롤 네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5계층 몬스터들이 크다고는 들었지만, 설마 네 마리나 뭉쳐 다니는 트롤 같은 놈들이 이렇게 크다니. 혼자 다니는 몬스터는 대체 얼마나 큰 거야?

    게다가 덩치도 큰 놈들이 각각 한 손에는 몽둥이까지 들고 있어서 위압감은 배가 됐다.

    하지만 긴장한 게 무색할 정도로, 전투는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일단 미리엘, 앨리시아, 루티아, 지니가 각각 한 마리씩 맡아서 어그로를 끌었다.

    앨리시아와 지니는 트롤의 공격을 전부 막으면서 큼지막한 상처들을 입히고 있었고, 루티아에 이르러서는 트롤의 공격을 전부 회피하면서 양손에 쥔 단검으로 트롤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빠른 치유속도의 대명사 트롤답게 상처가 부글부글 끓으며 빠르게 치유되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치유속도보다 상처가 늘어가는 속도가 빨라보였다.

    셋도 거대한 트롤을 혼자 상대하면서 충분히 대단해보였지만, 제일 압권은 미리엘이었다.

    마법검사라는 이름답게 들고 있는 한손 검에서 새빨간 화염이 솟아오르도록 만들더니, 트롤이 상처를 치유하지도 못하게 절단면을 지지면서 순식간에 전투를 끝냈다.

    미리엘은 시시하다는 듯이 검을 한번 휙 털어서 검집에 집어넣고는, 다시 우리 앞으로 나와서 경계하는 자세를 취했다.

    저 셋 역시 스스로 한 마리씩 처리하게 내버려둘 생각인 걸까?

    그러고 보니 우리 뒤에 있는 애들도 각각 주위를 경계만하고 있을 뿐 도와줄 생각은 없어보였다.

    트롤 따위는 혼자 처리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확실히 서로 간에 신뢰가 느껴지는 건 대단하다고 생각 하지만, 뭔가 배울 게 없네.

    좀 더 서로 간에 연계를 살려가면서 효율적인 싸움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곧이어 앨리시아와 지니가 상대하던 트롤도 쓰러졌고, 남은 건 루티아가 상대하던 트롤뿐이었다.

    단검으로 스치듯 지나가며 상처를 입히는 전투방식은 치유속도가 빠른 트롤 상대론 상성이 안 좋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미리엘이 다시 검을 뽑으며 날 돌아봤다.

    "그럼 구원. 부탁할까."

    상성 문제가 아니라, 아무래도 저게 수컷 트롤이라 일부러 남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알았어. 맡겨둬. 루티아씨! 잠깐 트롤에게서 떨어져주세요!"

    나는 한 손을 앞으로 내밀고 성자의 파동을 트롤에게 날렸다.

    이거 타겟팅 기술이 아니니까 말이야.

    괜히 트롤 주위에서 빠르게 이동하고 있는 루티아에게 맞으면 귀찮아진다.

    루티아도 전투 중에 장난 칠 생각은 없는지, 내 목소리를 듣고 빠르게 트롤에게서 휙 멀어졌다.

    그리고 내가 날린 파동은 제대로 트롤에게 명중했다.

    "좋아! 뒤처리는 맡겼다!"

    성자의 파동에 맞은 트롤은 몸을 움찔 떨더니 곧장 성기를 세웠다.

    그리고는 이쪽을 향해서 휙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황급히 미리엘의 뒤로 돌아가 숨었다.

    "고작 손짓 한 번으로 서는 건가. 그동안 우리가 했던 노력은 대체…."

    미리엘은 허무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면서 검에 불길이 솟아오르게 만들었다.

    그동안 했던 노력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꼭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내 앞에서 직접 시범을 보여주면서.

    아무튼 미리엘뿐만 아니라 루티아까지 합세했기 때문에, 눈을 시뻘겋게 뜨고 이쪽으로 돌진해오던 트롤은 순식간에 도륙이 났다.

    휴우. 다행이다.

    딱히 트롤이 무서웠던 게 아니다.

    내가 다행으로 여기는 건, 스킬이 제대로 먹혀들어갔다는 점이다.

    뭐, 일단 먹힐 거라고 생각은 했으니까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나섰던 거지만 말이다.

    근거는 있었다. 실비아한테 내 스킬이 먹히니까 말이다.

    물론 레벨 차이로 훨씬 약하게 먹히고, 그나마도 실비아가 쾌감에 익숙지 않으니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긴 했지만, 그래도 먹힌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몬스터들의 지능이 낮아서 그래서인지 어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몬스터들 상대로는 성자 스킬이 유독 잘 먹히는 경향이 있으니까 말이다.

    2계층에서 내가 밀크 로드 메이커라는 불명예스런 별명을 얻었을 때는, 아직 배운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성역 선포가 오크들에게 전부 먹혔을 정도였다.

    그러니 아예 무효화가 될 수준만 아니라면 분명 제대로 스킬이 먹힐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게다가 성역 선포보다 훨씬 위력이 강한 성자의 파동이었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정말 다행이다.

    만약 파동이 안 먹히면 직접 다가가서 성자의 손길이라도 써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겉으론 태연하게 미소지으며 시체에서 마석을 수거하는 미리엘에게 다가갔다.

    "어때? 성기는 제대로 나왔어?"

    "음. 제대로 나왔어."

    미리엘은 뭔가 거대한 기둥을 손에 쥐고 내게 내밀었다.

    "으악! 저리 치워!"

    내 눈! 저거 안 본 눈 삽니다!

    몸집이 3미터나 되는 만큼, 꽤나 엄청난 크기였다.

    "하하핫. 그나저나 이정도 크기여선 딜도로도 못 쓰겠군. 열쇠, 혹은 성직자들의 스태프 정도로 밖에 쓸 일이 없는 건가."

    "아, 미리엘! 그럼 나중에 하나 더 얻으면 나한테 하나…!"

    "안 돼. 최대한 많이 얻어서 5계층에 다니는 모든 파티에 분배할 생각이니까. 열쇠로 쓰는 게 최우선이야."

    릴리의 부탁을 미리엘은 단칼에 거절했다.

    뭐야. 사제만 아니라 성기사도 성기로 무기를 만드는 거였어?

    그럼 릴리가 들고 있는 저 둔기가 성기로 만든 거?!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또 하나 알아버렸다.

    지금도 가끔 우리 천사님이 몬스터 성기로 만든 스태프를 들고 있는 걸 볼 때마다 움찔 하는데.

    "하지만 꽤나 굉장한 능력이군. 부러울 정도야."

    "훗. 어때? 나란 남자. 꽤나 쓸 만한 남자지?"

    "그렇군. 이왕이면 우리 클랜에서 가지고 싶을 정도야. 앨리시아가 예전에 제대로 했으면…."

    "그러니까 우리 숙소를 보여줘도 안 넘어왔다니까! 언제까지 그걸로 갈굴 거야?!"

    앨리시아는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때? 지금이라도 생각 없어?"

    "없는데."

    "그거 아쉽군."

    앨리시아와 말하는 걸 봐서는 꽤나 집착했던 모양인데, 의외로 미리엘은 쿨하게 아쉽다는 한 마디만 내뱉고 더 권유를 해오지는 않았다.

    "그럼 계속 가지."

    우리는 대열을 정돈하고 계속해서 가기로 했다.

    아라크네의 면면들은 오기 전에 그렇게 자신감을 내비쳤던 게 이해가 될 만큼 강했고, 사냥은 순조로웠다.

    솔직히 말해서 마틸다와 실비아는 괜히 데려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실비아는 그나마 전투 때가 되면 제대로 칼자루에 손을 올리고 주위를 경계했지만, 이동 중에는 나와 딱 붙어서 가야했기 때문에 흐물흐물 풀어지고 가끔 끙끙 대는 게 정말 위험해보였다.

    "야. 아무리 어젯밤이 그렇게 좋았다곤 해도, 그걸 되새기면서 느끼진 마라."

    "아, 아, 아직 안 느꼈습니다!"

    아직인 거냐.

    하여간 골치 아픈 녀석이 아닐 수 없었다.

    왠지 특훈도 하면 할수록 추억만 쌓여서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마틸다로 말할 것 같으면 완전히 던전으로 관광 나온 아가씨였다.

    주변 풍경을 관찰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기도 하고, 뭔가 분위기타서 내 팔짱을 끼더니 뺨이 핑크빛으로 물들기까지 했다.

    "으악! 떨어져!"

    "사, 사람을 벌레 취급하는 건 그만둬주시겠어요?! 잠깐 실수로 닿은 것뿐이잖아요!"

    "실수로 닿은 건데 왜 얼굴을 빨개지는데!"

    "이, 이건…조금 걸었더니 혈액순환이 좋아져서 그런 거예요!"

    미묘하게 리얼한 얘기하지 마라!

    하여튼 어쩌다 내가 짐덩이를 둘이나 데려와서.

    디아나의 걱정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5계층에 와서 느낀 게, 딱히 몬스터의 어그로를 끌지 않아도 위험할 때가 있다는 거다.

    일단 몬스터들의 크기가 너무 크다.

    처음 만났던 트롤이 알고 보니 5계층에서 가장 작은 몬스터였다는 게 말이 돼?

    5, 6미터짜리 덩치를 가진 놈들은 물론, 아직 만난 적은 없지만 10미터를 가뿐히 넘어가는 몬스터도 있다는 모양이다.

    그런 몬스터의 공격은 그냥 휩쓸리기만 해도 끝장이라는 거다.

    그걸 생각하면 확실히 얘들이 붙어있는 게 좋긴 하겠지만 말이야….

    "조심해요! 위에요!"

    내가 미덥지 않은 시선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 갑자기 뒤에서 그런 외침소리가 들렸다.

    "응? 위?"

    내가 시선을 위로 돌림과 동시에,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졌다.

    "구원님!"

    동시에 거센 바람이 전신을 내리누르듯 몰아닥쳤고, 곧이어 ‘까앙!’ 하고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으십니까?!"

    다시 시야가 밝아지고 나서야, 나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엄청난 크기의 괴조가 내 위를 덮쳐왔고, 그 발톱을 실비아가 검으로 막아냈던 모양이다.

    하늘이 보인다 싶었더니 새까지 나오는 거냐. 진짜 가지가지 하네.

    "지니!"

    "흐으읍!"

    미리엘이 지니의 이름을 부르면서 다가가 지니의 대검 위로 올라가자, 지니가 힘껏 대검을 휘둘러 미리엘을 공중으로 날려 보냈다.

    뭐야 저거. 게임 기술이냐. 뭐, 게임 시스템을 가진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공중에 떠오른 미리엘은 곧장 검으로 괴조의 날개를 공격했다.

    하지만 과연 마법검사님이라도 공중에서 검으로 새를 맞추기란 쉽지 않은 듯, 괴조의 날개를 스치는 것에 그쳤다.

    날개에 상처를 입기는 입은 모양이지만, 그래도 괴조는 공중에서 떨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때, 쌍둥이 마법사들의 마법이 허공으로 쏴 올려졌다.

    미리엘의 공격을 피하느라 아직 자세를 정돈하지 못한 괴조의 날개에 그대로 쌍둥이의 마법이 작렬했다.

    "끼에에에엑!"

    괴조는 괴성을 질러내며 그대로 땅으로 곤두박질 쳐졌다.

    과연. 게임에서나 나올 법한 방금 그 연계기술은, 그냥 주의 분산용으로 사용했다는 말인가.

    하여간 화려한 녀석들이다.

    "이 녀석도 수컷이다! 구원!"

    공중에서 접근한 동안 그런 것도 관찰한 거냐.

    미리엘의 신호에 나는 바로 성자의 파동을 날렸다.

    "키에에엑!"

    "뭣?!"

    하지만 녀석은 성자의 파동을 맞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큭! 구원! 아직 멀었나?!"

    아예 처치해버리는 거면 모를까, 저 덩치가 날뛰는 걸 나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억누르고만 있는 건 과연 아라크네 클랜의 간부들도 조금 힘든 건지, 미리엘이 날 닦달했다.

    나는 다급하게 다시 한 번 성자의 파동을 날렸지만, 역시나 효과는 없었다.

    젠장. 우려하던 사태가 벌어져버린 건가.

    "아무래도 안 되겠어! 미리엘! 이 녀석은 내가 다가가지 않으면 힘들 것 같아! 조금 더 힘을 빼줘!"

    "칫! 알겠다!"

    내 명령에 맞춰서 미리엘과 앨리시아, 지니, 루티아의 근접 요원 네 명이 동시에 괴조에게 달려들었다.

    네 명이 동시에 달려드는 걸 보면, 역시 저 괴조는 보통 몬스터하고는 조금 다른 건가?

    날개를 다쳐서 날수 없게 된 괴조는 닥치는 대로 발버둥 치면서 소란을 피웠지만, 넷은 차근차근 상대해가면서 괴조의 힘을 뺐다.

    그리고 한참동안 그렇게 투닥거린 다음에야, 겨우 괴조가 힘이 빠진 듯 쌔액쌔액 거리면서 발버둥 치는 힘이 약해졌다.

    "그 성자의 스킬이란 건, 죽기 전에만 적용 되면 문제없는 거겠지?"

    "응. 맞아."

    "좋아."

    내게 그런 확인을 한 미리엘은, 곧장 괴조의 양 날개를 베어버렸다.

    "키에에엑!"

    괴조는 고통에 꿈틀댔지만, 날개가 완전히 몸체에서 분리된 이상 그다지 큰 위협은 되지 않았다.

    "이 녀석은 좀처럼 볼 수 없는 녀석이라 꼭 성기를 얻고 싶어. 녀석이 죽기 전에 부탁하지."

    "알았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괴조에게 다가갔다.

    아무리 날개가 잘렸다고는 하지만, 저렇게 덩치가 큰 거다. 굴러서 뭉개기만 해도 내 몸은 다진 고기가 돼버릴 거다.

    나는 신중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녀석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녀석은 날개가 잘린 것에 더해 피까지 많이 흘려서 더는 발버둥 칠 힘도 없는지, 생기 없는 눈동자로 날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내 스킬 중 가장 위력이 강한 성자의 손길을 사용해서 괴조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제발 이건 먹혀라.

    이게 먹히지 않으면, 내게는 남은 카드가 얼마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 걱정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성자의 스킬은 내 최고의 스킬답게 괴조에게도 확실히 먹혀들었다.

    오히려 너무 잘 먹혀서 문제일 정도로 말이다.

    내가 성자의 손길을 두른 손을 괴조의 머리에 얹자, 괴조가 회광반조라도 일으키듯 눈을 시뻘겋게 붉히면서 고개를 힘차게 내밀었다.

    제대로 주의하고 있었을 텐데, 나는 괴조의 부리가 내 배에 다가오는 걸 보면서도 피할 수 없었다.

    젠장. 더러운 레벨 빨. 이렇게 빤히 보이는데도 피할 수 없다니.

    나는 괴조의 부리가 내 배를 꿰뚫는 더러운 감각을 맞보면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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