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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295화 (279/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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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뢰

    그렇게 생각하면, 이 여덟 명도 꽤나 무섭단 말이지.

    남자를 말 그대로 잡아먹는 클랜의 최고 위치에 군림하는 여덟 명인가.

    대체 지금까지 몇 명의 남자를 저세상으로 보냈을까?

    "이게 바로 소문의 그 성자? 흐으응…."

    그 중 뭔가 노출도 높은 옷을 입은 섹시한 누님이 품평하듯이 날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전 먹어도 맛없어요."

    방금 전까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그런 말을 내뱉어 버렸다.

    "으응? 후훗. 얘 뭐야? 귀엽다아!"

    아니, 이래 봬도 덩치도 상당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귀여운 인상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 말을 내뱉은 여성을 다시 한 번 자세히 관찰했다.

    일단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의상이었다.

    저거 갑옷?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아무리 이 세계가 판타지 세계라곤 해도, 저게 갑옷일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게, 그냥 여기저기 드러나서 노출도 높은 전신 레깅스잖아.

    등 전체와 허리 양옆까지 크게 구멍이 뚫려있고, 가슴팍과 허벅지 역시 마찬가지로 크게 노출된, 섹시한 전신 레깅스였다.

    거기에 가죽장갑과 가죽 부츠를 신었을 뿐인 차림새.

    누가 봐도 던전에 갈 차림새가 아니었다.

    설마 정말로 저러고 던전에 갈 셈인가?

    "어머? 누나 몸에 관심 있니? 후훗. 정말 귀여워. 맛. 있. 겠. 다."

    내 시선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그 누님은 허리를 굽히고 가슴을 모으는 섹시한 포즈를 취하면서 말했다.

    "아뇨아뇨아뇨. 전 정말로 맛없어요."

    "그건 내가 먹어보고 판단해."

    이 누님 단호하시네. 단 호박인줄.

    "안됩니다."

    그때 뒤에서 실비아가 튀어나와서 내 앞에서 양팔을 벌리고 척 막아섰다.

    오오. 실비아야. 듬직하구나.

    "구원님께 손대는 자는 제가 용서치 않겠습니다."

    나에게 등을 돌리고 있기 때문인지, 실비아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덤덤하고 침착했다.

    역시 내가 상대가 아니라면 이런 태도인 건가.

    언제 한 번 나 없을 때 실비아가 어떤지 관찰해보고 싶네.

    하지만 그런 실비아의 무감정한 목소리에도 전신 레깅스 누님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응? 얘 뭐야? 뭐야? 쟤 먹으면 얘도 따라오는 거야? 얘 둘이서 같이 이 누나랑 재밌는 거 하지 않을래?"

    심지어 좋아하는 눈치였다.

    뭐야 저 누님. 심지어 레즈 플레이도도 가능한 타입이야?

    "흥. 당신 상대론 전혀 재미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비아는 콧방귀를 끼면서 말했다.

    그야 그렇겠지. 애초에 실비아는 날 제외하면 그 누가 상대라도 재미없을 테니까.

    "어머. 그건 모르는 거 아니겠니? 이래 봬도 저 미리엘조차…."

    "루티아."

    "후훗. 부끄러워하긴."

    뭐야? 뭔데? 저 미리엘조차 뭔데?! 궁금하잖아! 왜 거기서 끊어?! 말해줘! 당장!

    젠장. 어떤 말이었을지 예상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확실하게 듣고 싶었어.

    "하지만 얘들 정말 맛있어 보이는 걸. 저기 미리엘. 잠깐 맛보고 가면 안 돼?"

    "안 돼. 나중에 해."

    나중에 라니 뭐야? 제대로 말리라고.

    아니, 말릴 리가 없나. 미리엘도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남자 잡아먹는 클랜의 장인 거다.

    즉, 이런 시스템을 구축한 녀석이 바로 이 녀석이란 말이다.

    쩨쩨한 건 둘째 치고, 앨리시아 말대로 겉모습에 속으면 안 되겠어.

    "아무튼 지금은 가자. 한시라도 빨리 5계층의 성기를 모으고 싶어."

    미리엘은 그렇게 말하고는 앞장서서 저택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야. 아무리 그래도 서로 자기 소개할 시간도 안 주고 바로 나가는 거냐.

    며칠 동안 던전에서 같이 지낼 사이인데 말이야.

    네가 방금 이름을 부른 섹시한 누님이 루티아란 것 말고는, 다른 사람은 이름도 모른다고.

    "자, 잠깐만요! 미리엘! 저기,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저기 계신 거, 마, 마틸다 추기경님으로 보이는데요?!"

    그때 아라크네의 간부들 중 화려한 갑옷차림의 간부가 외쳤다.

    자세히 보니 갑옷에 아라크네 클랜의 심볼인 거미 말고도, 여신교의 문양도 새겨져 있었다.

    과연. 성기사였던 건가.

    "그래. 맞아."

    "어, 어째서…아니. 그, 안녕하세요. 마틸다 추기경님."

    성기사는 상당히 당황한 모양이다.

    마틸다에게 꾸벅 인사를 해봤다.

    "네. 이런 곳에서 여신님을 모시는 분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죄송해요. 분명 얼굴은 본 기억이 있는데 성함이…."

    "성기사인 릴리입니다."

    "잘 부탁해요. 릴리씨."

    "네, 네! 잘 부탁드려요!"

    과연 추기경이란 이름이 꽤나 파워가 있는지, 릴리라는 간부는 마틸다 앞에서 꼼짝을 못했다.

    마틸다도 예전엔 성기사였다고 하니, 더 대하기 힘든 걸까?

    그 모습을 보고, 마틸다는 여봐라는 듯이 날 쳐다봤다.

    뭐. 어쩌라고.

    "그런데 마틸다 추기경님은 어째서 여기에…?"

    "사정이 있어서 이 자와 같이 가게 됐어요."

    사정이 있기는. 네가 따라오고 싶다고 졸라대서 따라온 거잖아.

    그리고 마틸다의 대답과 동시에, 날 바라보는 간부 전원의 시선에 연민의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루티아에 이르러서는 ‘그래서 내 유혹을….’이라고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아직 고자 아니거든! 자! 봐라! 이게 고자로 보이냐?!"

    나는 머리에 피가 몰려서 그만 되살아난 자존심을 사용해 물건을 풀발기 시켜버렸다.

    그러자 간부들의 눈이 순식간에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으로 변했다.

    개중에는 ‘호오….’하고 감탄을 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아, 위험해.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남자를 잡아먹는 클랜 간부들 앞에서 물건 자랑을 하다니.

    "시, 실비아 실드!"

    나는 바로 실비아의 어깨를 붙잡고 다시 내 앞에 세웠다.

    "구, 구원님은 제가 지킵니다!"

    장하다 실비아.

    떨고 있기는 하지만, 그건 간부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내가 만지고 있어서 그런 걸 테니까.

    참으로 듬직하기 그지없다.

    간부들도 그 모습을 보고 뭔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내게서 눈빛을 거뒀다.

    루티아는 왠지 계속 내 고간 쪽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아무튼 성자뿐만 아니라 저 둘도 같이 가게 됐어. 그럼 통성명은 가면서 하기로 하고, 일단 가지."

    미리엘은 뭐가 그리 급한지 이번에야 말로 밖으로 나갔다.

    다들 자유분방한 분위기지만, 그래도 클랜장의 위엄은 살아있는 건지 다른 간부들은 별 군말 없이 그 뒤를 따라 나섰다.

    마지막에 루티아가 살짝 윙크를 날린 게 전부였다.

    "실비아 잘 했어."

    간부들이 다 나가고 나서, 난 따라가기 전에 일단 실비아를 칭찬하기로 했다.

    비록 내가 미리엘의 누드쇼를 맘껏 감상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딱 그 선에서 끝낼 생각이었다. 딱히 바람피울 생각은 없으니 말이다.

    다른 여자랑 잘 생각은 없다고.

    심지어 남자를 잡아먹는 이런 클랜 사람들과는 절대로.

    "네, 네헷!"

    내가 머리를 쓰다듬자, 방금 전의 그 늠름한 모습은 어디가고 실비아는 다시 맥 빠지는 목소리를 냈다.

    5계층 역시도 일단 마을은 세워져있다는 모양으로, 우리는 길드에 가서 곧장 텔레포트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미리엘 말대로 길드에 가면서 나머지 사람들과도 통성명을 했는데, 난쟁이족의 키가 작은 귀여운 쌍둥이 마법사가 레아와 리아. 그리고 아가씨란 말이 잘 어울리는 생김새의 음유시인이 힐다라고 했다.

    특히 쌍둥이는 우리 클랜에 디아나가 있다는 말을 미리엘에게서 들은 건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디아나에 관해 질문하는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이런 귀여운 애들이 남자를 말려 죽였다고 생각하면 섬뜩했지만.

    길드에 도착하고 나서는 미리엘이 길드의 직원에게 뭔가 설명을 하고나서야 우리도 텔레포트를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의뢰를 위해 임시적으로 허가를 내린 것뿐이라 모험가 카드에 5계층이 등록되는 건 아니니까, 제대로 5계층을 다니고 싶으면 나중에 직접 등록할 필요가 있다는 모양이다.

    뭐, 나도 이런 걸로 요행을 부릴 생각은 없으니까 별로 상관없지만.

    그럴 거면 진즉에 디아나한테 부탁해서 전부 뚫었지.

    그렇게 해서 우리는 순식간에 5계층에 도착하게 됐다. 그 감상을 말하자면.

    "…천장이 안 보이는데."

    그랬다. 2계층 때도 상당히 천장이 높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건 그 이상이다.

    위를 올려다보면 파란 하늘만이 보일 뿐이었다.

    저거 그냥 천장이 파란 것뿐이란 결론은 아니겠지?

    "그렇지? 4계층에서 엄청 내려와야 하니까 말이야. 너희도 나중에 고생 좀 할 걸?"

    앨리시아는 쾌활하게 웃으면서 내 어깨를 퍽퍽 두들겼다.

    아프다 이것아. 내게 물리 데미지를 줘도 되는 여자는 사라뿐이야.

    "그것 그렇고 마을 엄청 작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이 바로 마을의 규모였다.

    아직 내가 2계층의 마을밖에 가보지 못하긴 했지만, 식당이며 여관이며 들어서서 정말로 마을 같았던 2계층과는 다르게 5계층은 거의 건물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텔레포트 마법진과, 그 양 옆으로 있는 건물 두 개. 그리고 그 주위를 둘러싼 울타리가 전부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마을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한쪽 건물엔 커다랗게 거미 마크가 있는 걸 보아 아라크네 클랜의 건물이고, 다른 한 쪽은 여관인 모양이다.

    그 외에는 텔레포트 마법진 주위에 잡상인들이 몇 명 있는 게 다였다.

    "뭐, 5계층을 이용하는 모험가는 좀처럼 없으니까, 이 정도 규모로 잠 잘 곳만 있으면 충분해. 괜히 규모가 커지면 지키는 것도 일이니까. 그럼 루티아. 지니를 불러와주겠어?"

    "알았어."

    또 처음 들어본 이름이 나왔지만, 아마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는 간부의 이름이겠지.

    내 예상은 정확했는지, 루티나는 한 여성을 데려왔다.

    뭐라고 할까, 한 마디로 말해서 ‘난 전투밖에 흥미 없다.’라는 대사가 어울릴 법한 날카로운 인상의 미녀였다.

    "…왔나. 그럼 가지."

    지니라 불린 여성은 이쪽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미리엘을 바라보고는 그렇게 말했다.

    "음. 그럼 출발하자. 아참. 그 전에."

    미리엘은 걸음을 멈추고 내 쪽을 쳐다봤다.

    "너희는 웬만하면 중간에서 가만히 있어줘. 구원에게는 수컷 몬스터가 튀어나오면 신호를 줄 테니 그에 맞춰서 성자 스킬을 써주고. 아, 혹시 성자 스킬이란 거, 다가가야만 쓸 수 있나? 일단 2계층에서 오크들 상대로 범위기술을 썼다는 것 같은데."

    "잘 아네. 멀리서도 충분해."

    "그럼 됐어. 쓸 타이밍도 이쪽에서 지시할 테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고 따라와 줘."

    미리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울타리를 나섰다.

    울타리를 나서자마자, 그동안 자유분방하게 풀어져있던 아라크네 사람들이 우리를 가운데에 두고 순식간에 대열을 정돈했다.

    최전방에는 루티아. 그 뒤로 미리엘이 우리 앞을 막고, 좌우로는 앨리시아와 지니가 든든히 지킨다.

    그리고 뒤로는 레아와 리아 자매와 힐다가 자리 잡고, 가장 마지막에는 릴리가 메이스처럼 보이는 둔기를 들고 경계한다.

    역시 최상위 클랜답게 할 땐 제대로 하는 애들이구나.

    루티아가 제일 앞장서는 게 조금 의아했지만, 조금 지나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루티아는 도적 계열의 직업을 가진 모양으로, 주로 정찰임무를 맡고 있는 것 같았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전방을 휘젓고 다니면서 몬스터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뭐, 그야 몸이 가벼울 만도 하지. 입은 게 없는데.

    아무튼 2계층은 사막, 3계층은 설산이니 5계층은 어떨지 궁금했는데, 의외로 평범한 숲이었다.

    분위기만 보면 1계층과 상당히 흡사하다.

    다만 푸른 하늘이 보일 정도로 천장이 높고, 나무들도 거대하고 빽빽하다는 차이점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기온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았다.

    하지만 층이 내려갔는데 난이도가 내려갔을 리는 없을 테니, 그만큼 몬스터들이 힘들다고 생각해야 되겠지. 긴장 풀지 말자.

    "잠깐. 전방에 트롤 네 마리. 한 마리는 수컷이야."

    그때 루티아가 신호를 보냈다.

    "벌써부터 수컷을 만나다니 운이 좋군. 구원. 스킬을 쓸 타이밍은 우리가 알려줄 테니 그때에 맞춰서 써."

    "응."

    5계층에서의 첫 전투.

    과연 나도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내가 직접 싸우지는 않는다고 해도, 성자의 스킬을 쓰는 순간 바로 어그로가 나한테 집중되는 거다.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으니, 그야 긴장할 수밖에.

    나는 최대한 긴장을 푸기 위해 심호흡을 하면서, 전투를 눈여겨보기로 했다.

    그래. 내가 여기 온 목적을 생각하자. 클랜장으로서 좀 더 보고 배우기 위해서잖아?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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