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289화 (273/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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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 준비

실비아에게 밤을 양보해준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오늘은 하루 종일 사라와 노닥거리면서 보냈다.

아까 아침 식사 이후부터 계속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실비아는, 저녁식사시간부터는 완전히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서 풀죽어있었다.

실비아도 아라크네 클랜에서 내가 자기를 안을 거란 얘길 들었고, 아마 오늘 낮에 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겠지.

그리고 저녁시간 이후로는 난 무조건 그날 같이 잘 애랑 지낸다.

그러니 실비아는 지금 내가 자신을 안겠다고 한 걸 까먹은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일부러 깜짝 놀라게 해주기 위해서 아무렇지 않은 티를 내면서 낮 동안 사라와 노닥거리기는 했는데, 저렇게 풀죽은 모습을 보니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저렇게까지 시무룩해할 거면 직접 나한테 말하면 될 텐데.

굳이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었나?

안기고 싶으면 말하라고.

난 우리 애들 눈치가 보이니까 직접 나서서 적극적으로 실비아를 안을 생각은 없지만, 실비아가 말하면 언제든 안아줄 생각 정도는 있는데 말이야.

아무튼 그렇게 시무룩한 상태인 실비아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우리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식당을 빠져나갔다.

평소엔 항상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실비아지만, 저녁 식사 이후로는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이 스토킹을 안 하고 곧장 자기 방으로 돌아가는 실비아였다.

낮에는 나랑 사라가 노닥거리는 걸 뒤에서 부러운 듯 쳐다보면서도 졸졸 따라다녔는데 말이야.

스토커도 스토커 나름의 철칙이란 게 있는 걸까?

실비아가 식당을 빠져나가자마자, 이미 식사를 마치고 애들과 잡담을 하고 있던 나는 곧장 실비아의 뒤를 쫓았다.

비록 레벨은 낮지만 이래 봬도 암살자란 직업도 가지고 있는 나다.

발소리를 죽이고, 기척을 최대한 숨긴 채로 실비아의 등 뒤로 접근했다.

완전히 풀이 죽은 실비아는 내 접근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내가 바로 등 뒤에 붙어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터덜터덜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큰 소리로 외치면서 실비아의 몸을 꽉 껴안았다.

"붙잡았……크헉!"

아니, 껴안으려고 했다.

내 양팔이 실비아의 몸을 감싸려는 찰나, 갑자기 시야가 반전하면서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그리고 직후, 온몸을 엄습하는 통증과 함께 내 몸이 바닥으로 메다 꽂혔다.

이 감각, 낯설지 않다. 언젠가 한 번 맛본 적 있는 감각이야.

"누…구, 구원님?! 으아, 으아, 괘, 괜찮, 괜찮습니까?!"

실비아는 멍하게 생기 없는 눈으로 날 내려다보다가, 습격자의 정체가 나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당황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손을 가슴께로 들어 올려서 손바닥을 이쪽으로 향하고, 손을 뻗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된다는 듯이 열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모습이 묘하게 귀엽다.

"크허억. 쿨럭. 쿨럭. 흐억. 크하악. 나, 나 주, 죽어…."

나는 실비아를 더 당황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과장되게 바닥에 드러누워서 브레이크 댄스를 췄다.

누가 봐도 절대 속지 않을 발연기였지만, 실비아는 속았다.

아니, 속았다기 보다는, 너무 놀라서 진위를 판단할 정신머리가 없어서 그런 것 같았지만. 아무튼.

"으, 으아아앙! 죽으면 안 됩니다아!"

정말로 큼지막한 눈동자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실비아가 바로 무릎을 꿇고 내 몸에 손을 댔다.

눈물이란 게 저렇게 순식간에 나오기도 하는 거구나. 양심의 가책이 장난 아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는 법. 나는 장난을 계속하기로 했다.

무릎을 꿇은 실비아가 내 몸에 손을 댄 순간, 나는 확하고 몸을 일으키면서 실비아를 끌어안았다.

"붙잡았다아!"

"히야아아아아악!"

뒤에서 암살자의 스킬까지 쓰고 다가갔을 땐 바로 반응한 애가, 앞에서 이렇게 대놓고 끌어안는데 반응을 못하다니.

뭐, 울고 있었으니까 당연한 건가.

내가 끌어안자마자, 실비아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고양이가 털을 곤두세우듯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놀랐어?"

"……히끅. 히끅."

실비아는 잠시 동안 멍하니 날 올려보더니,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장난치고 이정도로 죄책감이 든 게 대체 얼마만일까.

"미안. 장난이 좀 심했지."

"…아닙니다. 등은 괜찮으십니까?"

실비아는 양손으로 눈물을 쓱쓱 닦고는, 그래도 내 몸을 걱정하는 것처럼 물어봤다.

닦아도 닦아도 눈물이 계속 흐르는 게 더욱더 애처로워보였다.

그래. 알아. 내가 죽일 놈이다.

"아, 응. 괜찮아. 난 튼튼한 거 빼면 시체거든. 그러니까 울지 마."

나는 손을 뻗어서 실비아의 눈물을 엄지로 스윽 훑어줬다.

하지만 그래도 실비아의 눈물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군. 충격 요법을 줘서라도 눈물을 멈추게 할 수 밖에.

나는 고개를 숙여서 실비아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혀를 살짝 내밀어, 실비아의 눈물을 핥아먹었다.

"히윽! 으아으으…."

"눈물 그칠 때까지 계속 핥아먹을 거야."

"그, 그, 그, 그쳤습니다! 그쳤으니까!"

효과는 굉장했다!

하염없이 흐르던 눈물은 순식간에 멈추고, 실비아의 몸이 여느 때처럼 진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 실비아는 이래야지.

"뭐야? 겨우 이런 걸로 부끄러워하는 거야? 너 지금 나랑 껴안고 있는데?"

"엣? 으아, 으아아! 아으으으…."

겨우 현재 우리가 어떤 자세를 하고 있는지 깨달은 실비아는 파닥파닥 거리면서 내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물론 내게 놔줄 생각이라곤 전혀 없었다.

분명 아까 메칠 때 힘을 생각해보면 얘가 나보다 근력이 낮은 건 아닐 텐데 말이야.

이렇게 내 팔을 못 벗어나고 있다는 건, 실은 의외로 바둥거리는 척만 하고 있는 거 아냐?

뭐, 그럴 리 없나. 방금 내 발연기에 속아서 진짜로 울기까지 한 앤데.

"실비아. 오늘은 너에게 긴히 할 말이 있다."

나는 실비아의 복슬복슬한 머리카락에 얼굴을 파묻고,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하, 햐, 햘 말, 말입니까아?"

"그래. 난 오늘 너랑 잔다."

"넵?! 아팟! 네엣?!"

실비아는 얼마나 놀란 건지, 혀를 깨물고도 입을 떡 벌리면서 놀랐다.

크게 벌려진 입 안으로 보이는 핑크빛 혀끝에서 새빨간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으음. 이거 완전히 키스할 타이밍인데.

우리 애들 같았으면 당장에 키스를 해서 혀끝에 나는 피를 빨아먹었을 거다.

하지만 상대가 실비아이기 때문에, 나는 주저하고 말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실비아한테는 일부러 키스를 안 하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는 섹스보다 오히려 키스가 더 연인관계를 나타내는 지표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우리 애들 셋과는 구별을 짓기 위해서, 일부러 실비아하고는 섹스할 때조차도 키스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스스로도 느끼고 있기는 했다.

내가 얘를 우리 애들과 이런 식으로 구분 짓는 건, 더 좋아하는지 아닌지의 문제보다는 오히려 오기에 가깝다는 걸 말이다.

나도 남자다. 이렇게 예쁜 애가 날 이렇게 좋아해주고, 또 이렇게 같이 지내는데 끌리지 않는 게 이상하지. 우리 애들에 대한 애정과는 또 별개로 말이다.

그걸 스스로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실비아에게 더 매정하게 군 감도 없잖아있었다.

아무리 끌리더라도, 이미 셋이나 임자가 있는 이상 참는게 좋은 거겠지.

이미 셋이서 서로 인정해준 것만으로도, 걔들은 나에게 많이 양보해준 거다.

게다가 실비아를 안아도 된다고 한 것조차, 날 믿기 때문에 거기까지 양보해준 거다.

그래. 난 틀리지 않았어. 이게 맞는 거야.

나는 마음을 다잡고, 실비아와 키스를 하고 싶은 감정을 꾹 억눌렀다.

"너랑 잘 거라고. 오늘 밤은 재우지 않을 거야."

"흐아아아…아, 안 댑니다아…. 저, 저…."

"뭐가 안 돼? 나랑 자기 싫다고? 나 갈까?"

"아, 아닙니다! 그런게 아니오라!"

내가 살짝 떨어지려고 하자, 실비아는 화들짝 놀라서 날 붙잡았다.

"어떻게 하고 싶다고? 확실히 말해."

"아우…가, 같이 자고 싶습니다."

"난 잘 생각 없는데?"

"그, 그게 무슨…."

"무슨 말인지 너도 잘 알잖아. 자, 다시 말해봐. 나랑 뭘 하고 싶어?"

"세, 세, 세, 섹스 하고 싶습니다!"

예전에 박력 있게 자길 성노예로 삼아달라고 했던 실비아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실비아는 두 눈을 꼭 감고 겨우 섹스라는 단어를 외쳤다.

"밤새 한 숨도 안자고 할 건데? 그래도 상관없어? 버틸 수 있어?"

"하우…괘, 괜찮습니다! 구원님과 밤을 보낼 수 있다면…죽어도 좋습니다!"

아니, 죽으면 내가 곤란한데.

"무슨 소리야. 내가 하는 말은 뭐든 듣겠다고 한 애가. 날 놔두고 먼저 죽으려고?"

"하으으으으…쥬, 쥭어도 버티겠습니다아."

죽어도 죽는 걸 버티겠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실비아를 들어 올리고 그대로 내 방으로 향했다.

"흠. 그럼 일단 씻을까."

"네, 넵!"

"같이 씻을래?"

"네헵?!"

실비아의 시선이 욕조와 나 사이를 쉴새없이 왕복하기 시작했다.

고민하고 있군. 귀여운 어린 양 같으니라고.

"왜 싫어?"

"아닙니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사, 살아남을 자신이 없습니다…."

야, 어디 전쟁가냐?

"그, 그래…. 그럼 따로 씻자."

"네…."

실비아는 안타까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시무룩해져서 중얼거렸다.

두 번 다시없을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야. 너무 그렇게 풀죽지 마라. 괜히 물어본 내가 미안해지잖아.

"너무 실망하지 마. 나중에 특훈의 성과가 나와서 내가 끌어안아도 떨지 않고 버틸 수 있게 되면 상으로 같이 씻어줄게."

"저, 정말입니까?!"

방금 전까지 시무룩했던 실비아의 얼굴이 화악하고 밝아졌다.

애도 참 표정 변화가 심하단 말이야.

분명 처음 만났을 땐 표정변화 하나도 없이 시종일관 멍한 표정이었는데.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만 이러는 건가?

"그래. 그러니까 오늘은 먼저 씻어!"

"가, 감사합니다! 얼른 끝내고 오겠습니다."

실비아는 허리를 90도로 꾸벅 숙였다.

"안 돼. 밤새 뒹굴 거니까 시간 걸리더라도 구석구석 꼼꼼히 닦아."

"네, 네에…."

실비아는 그러고는 욕조로 들어가 커튼을 쳤다.

그러고 보니 쟤 귀족이잖아. 혼자 씻을 수 있긴 한 걸까?

여기 와서도 목욕은 아마 계속 그 큰 욕실에서 메이드들의 시중을 받으면서 했을 거고, 던전에선 디아나가 마법으로 간단하게 씻겨줬었다.

혼자 씻은 적이 있기는 한 걸까?

걱정된다.

이거, 이거, 어쩔 수 없군.

내가 직접 씻겨주는 수밖에 없는 건가.

결코 처음부터 노린 게 아니다.

실비아가 욕조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야 그런 생각이 든 거니까 어쩔 수 없다.

지금 커튼 너머로 물어보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런 멋없는 짓을 할 리가 없잖아?

궁금한 건 얼굴을 맞대고 직접 물어본다.

이거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이라고.

그런고로, 그럼 어디 한 번 저 욕조에 난입해볼까 합니다.

나는 우선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은신 스킬을 사용해서 기척을 완전히 감췄다.

그리고 살금살금 욕조로 다가갔다.

일단 욕조에 달려있는 마법을 조작할 수는 있는 건지, 욕조에 물이 채워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순 없다.

저걸 사용할 수 있다고 해서, 혼자 몸을 씻는 방법을 안다고는 장담할 수 없으니까.

나는 조심스레 커튼을 붙잡고, 확 옆으로 젖혔다.

"실비아!"

마음 같아서는 바로 욕조에 다이빙도 하고 싶었지만, 아까의 전례가 있는 만큼 그건 자제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런 내 선택은 정답이었다.

"……!"

실비아의 주먹이 순식간에 내 명치 바로 앞까지 날아왔거든.

하지만 내가 아까 전의 일로 학습을 했듯이, 실비아 역시도 학습을 한 모양이다.

주먹은 내 몸에 닿기 직전에 멈췄고, 잠깐 동안 주먹을 뻗은 자세로 굳어있던 실비아는 바로 욕조에 쭈그리고 앉았다.

"구, 구, 구원님?! 무, 무, 무슨 일로…?!"

"응? 생각해보니까 귀족 아가씨인 실비아가 혼자 씻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서 내가…."

"씻을 수 있습니다! 기사 수행을 하면서 혼자 많이 씻어 봤습니다!"

"그래서 내가 씻겨주려고."

나는 실비아의 말을 무시하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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