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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 구원
방에 들어온 건 한 명이 아니었다.
다수의 사제들이 놀란 얼굴로 대사제님을 쳐다봤다.
"바, 방금 그건…밝은 빛과 함께 여신님의 목소리가 들렸는데요!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요?!"
아, 어쩐지 작은 목소리마저 선명하게 들린다싶었더니, 여신님의 목소리는 이 방뿐만이 아니라 더 넓은 곳까지 퍼져나간 모양이다.
설마 내용까지 확실히 들리진 않았겠지? 그거 들렸으면 꽤나 쪽팔린데.
여신님과 계약하고 왔을 터인 놈이 부주의로 인해 계약 내용은 아무것도 모른 채 던져졌단 사실이 소문이라도 나봐라. 아무리 철면피인 나라도 꽤나 창피하다.
아니, 그래도 보통 인스톨 할 때 나오는 문구를 전부 읽는 놈은 없잖아?!
여신님도 좀 더 보통 사람들이 읽을 만한 곳에…이 이상은 불경죄로 천벌 받을 거 같으니까 그만두자.
"당신들이 들은 대로에요. 여신님이 레이아의 몸을 빌려 저희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대사제님 역시도 꽤나 혼란스러워보였지만, 그래도 역시 이 거대한 던전 도시의 신전을 관리하는 대사제님이었다.
대사제님은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면서 사제들에게 사실을 말해줬다.
"역시! 아, 그렇다면…!"
여신님이 강림했단 사실이 그렇게 기쁜 건지, 사제들이 하나같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뭐, 대사제님 말에 따르면 여신님이 강림하지 않은지 꽤나 지난 모양이니 말이야. 교단의 숙원 중 하나가 풀렸으니 기쁘겠지.
"네. 레이아가 새로운 성녀 후보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아니, 성녀가 되는 건 이미 확정이라고 봐야겠지요. 뭐니 뭐니 해도…."
하지만 대사제님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사제님은 꽤나 복잡한 얼굴로 날 쳐다봤다. 마치 이걸 말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시선을 레이아쪽으로 한 번 돌리더니, 이내 결심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내뱉었다.
"성자 구원이…여신님의 사자께서 선택한 사제이니까요."
그 말과 동시에, 방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집중됐나.
훗, 그래. 내가 좀 대단하긴…잠깐만. 왜 일제히 날 바라보면서 양손을 모으는 건데?! 무지막지하게 부담되는데?!
"여신님의 사자…."
방 안에 들어온 사제 무리 중 누군가가 그렇게 동경이 잔뜩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저, 대사제님…?"
"소피아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구원님."
"아뇨아뇨. 그럴 수는…."
"구원님 곁에도 대사제가 있는데, 절 대사제라고 부르면 혼동되기 쉽잖아요?"
대사제님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레이아가 있었다.
아, 그도 그런가.
"그, 그럼 소피아…씨. 저한테 왜 존대를 하세요. 구원님이라니. 그러실 필요 없어요."
"아뇨. 여신님의 사자께 무례한 행동을 할 수는 없지요. 성자 구원님. 당신은 역시나 여신님에게 사명을 받고 이 세계에 온 것이었군요. 그 과정에서 이해하기 힘든 사고가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래도 당신이 여신님의 사자라는 것에 변함은 없습니다."
그래. 하긴. 인스톨이니 게임 설명서니 그런 단어를 이해하기 힘들긴 하겠지.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러니 앞으론 저희 교단이 앞으로 구원님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응?! 아니, 필요 없는데! 지원은 이미 우리 디아나가 해주는 걸로 충분하고도 남아!
그러니까 괜히 그런 기대에 넘치는 표정으로 보지 마! 부담스럽잖아!
"네?! 아뇨! 그러실 필요는…애, 애초에 말이죠! 그, 대사, 소피아씨 혼자서 정하실 문제가 아니잖아요?!"
"걱정 마십시오. 교황청에 계시는 교황님께서도 같은 결정을 내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군요. 불안하시다면 지금 당장 연락을 하도록 하죠."
"아니, 그러실 필요는…!"
"그럼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소피아 대사제님은 그렇게 말을 하고 방을 나섰다.
뭐야 이거. 갑자기 스케일이 엄청나게 커졌는데.
내 목표는 그냥 적당히 우리 애들이랑 뒹굴 거리면서 잘 먹고 잘 사는 건데.
신전에서 이렇게 나와 버리면 전력으로 던전 탐험을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 시달리게 되는 거잖아!
하지만 그런 본심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금 난 신전 안에 있으니까. 그것도 날 향해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는 사제들에게 둘러싸여있는 상황이다.
저런 불경한 말을 했다간 정말로 무슨 꼴을 당할지 몰라.
게다가 꼭 그런 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내가 그런 말을 하면 우리 레이아가 실망하게 될 거다. 그런 꼴은 못 보지.
아무튼 소피아 대사제님이 나가자마자, 그동안 눈을 초롱초롱 빛내던 사제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날 향해서가 아니라 레이아를 향해서.
힐끔힐끔 쳐다보는 걸 보니 관심은 있는 모양이지만, 아무래도 바로 말을 걸기는 부담되는 모양이었다.
"레이아! 성녀가 된 거야?!"
"아뇨. 아니에요. 이제 막 대사제가 된걸요."
"그런 거야? 하지만 그럼 여신님께선 어떻게 강림을…?"
"그건…구원씨께서 제게 뭔가를 하시니까, 그냥 왠지 모르게 할 수 있게 됐어요."
"오오오!"
레이아. 레이아까지 그러지 말아줘. 부담감이 더 커지잖아.
"그, 그런데 말이야. 그럼 구원님과 레이아는…그…결혼하는 거야?"
"네?! 그, 그야 언젠가는…."
부끄러워하는 레이아 누님은 무척이나 사랑스럽고 좋았지만, 이 전개는 왠지 좋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언젠가는 이라니. 왜 당장하지 않는 거야? 어차피 서로 마음이 통하고 있다면, 당장하면 되잖아? 여신님께서도 분명 축복하실 거야. 성녀가 될 사람과 여신님의 사자가 결혼한다니. 로맨틱해…."
이봐. 거기 이름 모를 사제. 넌 그냥 자신이 생각하는 로맨틱한 장면이 보고 싶을 뿐인 거 아냐?
"다녀왔습니다."
그때, 소피아 대사제님이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꽤나 빠르잖아. 신전 내에 마법으로 된 전화 같은 거라도 존재하는 건가?
"어떻게 됐나요?"
"그렇군요. 일단 구원씨가 여신님의 사도인 것이 확실하다면, 전폭적인 지원은 당연하다는 것이 모든 교황청에 계신 여러분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습니다. 다만 아무래도 쉽사리 믿어질 일은 아닌 모양인지라…."
소피아는 살짝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휴우. 다행이다.
아니, 미안할 거 없어요. 진짜로. 오히려 덥석 믿어버리고 지원해준다고 나서면 어쩌나 싶었는데.
"추기경 한 분이 직접 오셔서 확인하시겠다고 합니다."
"역시 그렇…아니. 잠깐. 네?!"
"마법사 협회를 통해 오시게 될 테니, 시간이 조금 걸릴지도 모릅니다. 바쁘신 게 아니라면, 조금만 기다려주실 수 있을까요?"
아니, 바쁘진 않은데 말이야. 오히려 시간이 남아돌기는 하는데 말이야.
곤혹하는 나를 놔두고, 사제들은 다시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대사제님!"
"네?"
"저희끼리 생각해봤는데요. 신전에서 구원님과 레이아의 결혼식을 준비하는 건 어떤가요? 무척 로맨…성녀가 안 계셔 다들 은연중에 불안해하는 지금, 모두에게 힘이 될 거라도 생각해요."
라고 외친 건, 아까도 로맨틱이니 뭐니 떠들어대던 머리가 꽃밭인 사제였다.
야. 아무리 그래도 저 깐깐한 소피아 대사제님이 그딴 말에 넘어갈 것….
"흠…. 확실히 그러네요. 추기경님이 오시면 얘기를 해볼 가치가 있겠어요."
넘어갔다! 심지어 엄청나게 손쉽게!
레이아를 힐끔 바라 보고 그런 말을 한 걸 보니, 아무래도 소피아 안에 잠든 어머니의 마음이 발동한 모양이다.
그래. 딸의 행복을 바라는 건 모든 어머니들의 공통적인 마음일 테니까.
나도 소피아가 레이아를 정말 친딸처럼 애지중지하고 잘 챙기는 게 흐뭇하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말이야, 그래도 이런 전개는 바라지 않았는데!
"구원씨…."
볼을 살포시 붉히고 전혀 싫은 표정이 아닌, 오히려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레이아가 날 바라봤다. 저 면전에다대고 아직 결혼 생각은 없단 소릴 할 수도 없고. 미치겠네.
아니, 우리 천사님과 결혼하는 게 싫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좋다.
그야 당연하지. 천사님과 결혼할 수 있다는데 싫어할 남자가 어디 있어?
문제는 말이야.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나는 우리 애들 셋을 동등하게 좋아한다.
결혼은 아직 먼 얘기라고 여기고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긴 하지만, 일단 막연하게나마 생각해본 적이 있기는 하다.
만약 결혼을 하게 되면 셋과 동시에 결혼식을 치르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고.
그도 그렇잖아? 만약 셋 중 하나와 먼저 결혼식을 치러봐라.
분명 나머지 둘에게는 평생 시달리면서 살 거다.
그런데 갑자기 신전 주최로 레이아와 결혼이라니.
주최가 주최고 의도가 의도인 만큼, 셋과 동시에 결혼식을 치르는 건 절대 불가능하겠지.
그러니까 이 결혼 얘기는 회피하는 게 제일이다. 레이아에게는 미안하지만 말이야.
그럼 어떻게 얘기를 해야 레이아에게 상처주지 않고 결혼식 얘기를 무효화할 수 있을까.
"실례할게요. 소피아 대사제."
그렇게 내가 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때, 또 다른 인물이 소피아의 방으로 들어왔다.
다른 성직자들보다 조금 더 화려한 성직자복을 입고 있는, 이건 또 엄청난 미인이었다.
뭐, 이 세계는 성직자들이 기본적으로 다들 미남미녀인 것 같지만 말이야.
아무튼 그 미인은 마치 고위귀족이라도 되는 마냥 고고한 시선으로 주변을 스윽 훑어봤다.
고고한 걸 넘어서서 조금 오만하게까지 보이는, 그야말로 서민을 깔보는 전형적인 귀족 아가씨처럼 보였다.
"직접 보는 건 오랜만이군요. 인사는 아까 했으니 생략하도록 할게요."
그 미인의 시선은 소피아와 레이아, 그리고 다른 사제들을 지나서, 방 안에서 유일하게 남성인 나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뭐냐. 그런 내려다보는 것 같은 눈으로 쳐다보지 마라. 공주마저도 나한테 그런 시선을 보낸 적이 없는데. 뭐, 펠리시아는 공주치고 좀 특이한 녀석이기는 했지만.
"이 사람이 바로 그 여신님의 사자라는 사람인가요?"
그 미인은 시선을 내게 고정시키고, 뭔가를 파헤치는 것처럼 나를 빤히 쳐다봤다.
"네."
"흐으으으음…."
소피아 대사제의 대답에도, 그녀는 지긋이 나를 관찰하는 시선을 보내왔다.
야. 초면에 좀 무례한 거 아니냐?
"소피아 대사제님. 이거 누구에요?"
"이, 이거?! 지금 이거라고 했어요?!"
내 말에, 그녀는 바로 히트업해서 덤벼들 태세였다.
"그게 싫으면 적어도 자기소개라도 해라. 초면인 사람 무례하게 빤히 쳐다보지 말고."
전에도 말한 것 같지만, 난 기본적으로 상대방의 태도에 따라 맞춤 대응을 추구하는 성격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잘해주는 상대한테 무조건 잘해주는 건 아니지만.
"제 얼굴도 모르다니. 열두 추기경 중 하나인 저, 마틸다를 모른다는 말씀이신가요?!"
"응. 몰라. 뉘신지?"
얘기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여기로 직접 온다던 추기경인 모양이다.
빨리도 왔네.
그런데 추기경이면 상당히 높은 사람이잖아?
종교의 높은 사람이면 좀 더 고귀하고 인자해야 되는 거 아니냐? 태도가 왜 이래?
우리 천사님의 반의반만이라도 좀 닮아봐라.
"이, 이이익! 소피아 대사제! 이 남자가 여신님의 사자라는 게 정말인가요?!"
"네. 여기 있는 모두가 여신님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습니다."
"믿을 수 없는데요?!"
"후하하. 네가 믿을 수 있냐 없냐가 중요한 게 아니야. 사실이 그렇다는 게 중요한 거지. 알았으면 얼른 이 여신님의 사자에게 납작 엎드려 발이라도…."
"구원씨."
"응. 미안. 레이아. 내가 너무 나댔지?"
시건방진 애가 분해하는 걸 보니까 너무 통쾌해서 말이야.
앗, 젠장! 그러고 보니 얘 때문에 나 스스로 내가 여신의 사자란 걸 인정해버렸잖아!
젠장…. 도움이 안 되는 년 같으니라고….
"으으윽…."
하지만 내 말에 자존심을 무척이나 상처받은 모양이니, 그거 하나만큼은 통쾌하다.
"소피아 대사제나 여러분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 자가 어떤 속임수로 모두를 희롱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어요! 지금도 증명 가능한, 좀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해요!"
"실전됐다던 여신 강림까지 재현해줬는데 못 믿네. 그럼 어디 한 번 실전된 기술이 더 있으면 말해봐. 레이아에게 배우게 해주지."
"뭐, 뭐라고요?! 그, 그럼…이 상처를 고쳐보시죠!"
마틸다는 자신의 소매를 걷고는, 팔에 난 상처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번개가 내리쳐 검은 흉터를 남긴 것 같은, 무척이나 기괴한 모양의 상처였다.
뭐야 저거.
"고대의 저주를 받은 흔적이에요. 예전에는 저런 강력한 저주도 치료할 수 있는 신성마법도 있었다고 문헌에 있기는 하지만…."
내 의문을 알아챘는지, 뒤에서 소피아 대사제님이 설명을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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