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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져가는 던전의 비밀
스킬을 쉽게 찾은 이유는 간단하다. 이미 배울 수 있는 스킬로 표시되어있었거든.
응? 성녀만 배울 수 있는 스킬 아니었어?
아니, 그냥 성녀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왔을 뿐, 성녀가 아니면 배울 수 없는 건 아니었던 건가?
아무튼 레이아의 스킬 창에는 확실히 여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스킬이 배울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사도 임명을 하고도 레벨을 꽤나 올린 덕분에, 레이아는 현재 스킬 포인트가 몇 포인트 존재하고 있었다.
어차피 대부분의 스킬은 신전에서 직접 배울 수 있을 거고, 게다가 레이아는 자원 봉사를 열심히 하는 만큼 스킬 레벨 성장도 무척이나 빠를 거다. 그 증거로 현재 레이아가 배우고 있는 스킬들은 하나같이 스킬 레벨이 꽤나 높은 상태였다.
그러니 굳이 스킬 포인트 하나를 아낄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나는 레이아의 스킬 창에서 발견한 ‘여신 강림’이라는 스킬에 포인트를 투자했다.
우우우우웅.
스킬 포인트를 찍는 것과 동시에, 갑자기 귀에서 이명 같은 게 들렸다.
기분 탓인지, 주변 공기가 조금 무거워진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리고 시야 한 구석에서 강렬한, 하지만 그러면서도 눈부시지는 않은 따뜻한 빛이 넘실거렸다.
바로 레이아의 몸에서 말이다.
레이아가 대사제가 될 때도 비슷한 현상이 있기는 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멀리까지 퍼져나가는 느낌의 빛이었다.
"레이아!"
내가 레이아의 어깨를 붙잡으면서 레이아를 부르자, 그때까지 감겨 있던 레이아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이제는 익숙해진 예쁜 황금빛 눈동자지만, 역시 평소와는 조금 느낌이 다르다. 눈뿐만이 아니라, 그냥 레이아의 전신이 그랬다.
몸에서 빛이 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이유만으로는 설명이 안 될 정도로 분위기가 평소와는 달랐다.
뭔가 신성해 보인다고 할까. 아니, 물론 우리 천사님은 언제나 신성해보였지만, 지금은 그런 게 아니다. 마치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느낌마저 받았다.
눈을 뜨고 날 곧게 바라보던 레이아는 역시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뿜어내며 가볍게 미소 짓고는, 입을 열었다.
"드디어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됐군요. 그것도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이른 때에. 정말로 잘 해주셨습니다."
분명 레이아가 입을 열어 말하고 있었는데, 목소리는 레이아의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 들은 적 있는, 그래. 게임 오프닝에서 들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역시 여신이 레이아의 몸을 빌린 건가.
아니, 여신 강림이라는 스킬 명으로 조금 짐작은 했지만 말이야.
보통 강림이라고 하면 말이야, 뭔가 하늘에서 빛 한줄기가 내려오고, 그걸 타고 공중에서 스으윽하고 나타나는 그런 거잖아? 왜 빙의를 하고 있는 건데.
게다가 내가 스킬 포인트를 찍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이거 절대 레이아가 스킬을 사용한 게 아니다.
던전에 관련해서 여신에 대해 약간 의혹이 생기고 있었던 만큼, 이렇게 멋대로 레이아의 몸을 빌려 나타나는 여신이 마냥 좋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혹시 이대로 여신이 계속 우리 천사님의 몸을 맘대로…아니. 여신이 날 농락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건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하다. 그것도 근거라곤 여신이 던전을 만든 것 같다는 내 추측밖에 없을 정도로 가능성이 낮은 가정 말이다. 지나친 생각은 그만두자.
"…여신님?"
나는 일단 정체를 확인하는 것도 겸해서 말을 걸었다.
"그래요. 성자 구원. 우선 감사와 칭찬의 말을 전해야겠군요. 당신이 지금까지 보여준 성과는 제 기대를 아득히 뛰어넘은 것이었습니다. 전생술을 사용하여 무한한 생명을 얻은 하이 엘프와의 교류를 통해 무한한 생명을 획득하고, 용사와 구미호에게 사도 임명을 내리다니. 게다가 선천적인 체질로 고통 받던 아이를 구원해주기까지. 정말로 훌륭합니다. 이 이상 없을 정도의 성과입니다. 던전 공략이 생각보다 지지부진하기는 하지만, 그것도 허용 범위. 당신이 해온 일들을 생각하면 사소한 일이겠죠. 과연 당신을 계약자로 선택한 제 눈은…."
"자, 잠깐만요."
여신님의 말을 도중에 끊어도 되는 건지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나는 도저히 말을 끊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다행이도 여신님이 빙의한 레이아는 전혀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고 조용히 내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정말 다행이다. 여신님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신전 안에서, 여신님이 불경하다고 외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까 싶었는데.
하지만 그걸 걱정하면서까지 여신님의 말을 끊은 건, 도저히 묻지 않곤 견딜 수 없는 단어가 지금 여신님의 말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저…계약자란 게 대체 뭔가요? 무슨 계약이요?"
"……."
내 질문에, 여신님도 허를 찔렸는지 멍하니 입을 벌리고 벙찐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신성하게 벙찐 표정이라니. 안 어울리는 조합이다.
"…성자 구원. 당신이 게임을 통해서 이 세계로 오게 된 건 기억하십니까?"
"네. 물론이죠."
"당신은 평소 게임 홈페이지를 꼼꼼히 살펴보는 건 물론, 게임을 받고도 내용물을 꼼꼼히 살펴보는 성격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네. 설명서까지 확실히 읽는 성격이죠."
대체 여신이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조금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건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뭐니 뭐니 해도 신이니까 말이야. 그 정도는 알 수 있는 거겠지.
"그럼 게임을 인스톨할 때 나오는 주의사항도 제대로 읽으셨겠죠?"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인스톨할 때 나오는 주의사항이라니.
이번엔 내가 당황할 차례였다.
"…아, 아뇨. 인스톨은 항상 디폴트 폴더에 하니까, 그냥 다음만 연타하고 설치되는 동안 설명서나 읽었는데요."
나는 차마 여신님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면서 대답했다.
"이럴 수가!"
내 대답을 듣고, 여신님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목소리를 올렸다.
으아. 신성한 목소리로 저러시니까 왠지 죄악감이…. 내가 딱히 잘못한 부분은 없는 것 같은데 말이야.
"혹시나 싶어서 설치 전의 주의사항에도 써 놓고, 인스톨이 되는 동안에도 계속 반복 재생되도록 만들어놓았는데…. 구원씨의 디스크에만 추가 사항을 넣기 위해서 열심히 추가 작업을 하고, 그 디스크가 제대로 구원씨에게 갈 수 있도록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네. 생각해보니 제가 잘못한 부분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감히 설치 전 주의사항을 소홀히 하다니.
그러니까 제발 그 신성한 목소리로 그런 말을 중얼거리는 건 그만둬주세요.
여신님의 목소리는 중얼거리는 소리조차도 왠지 공간 전체를 울리듯이 퍼져나갔고, 당연히 옆에서 그걸 듣고 있는 대사제님마저 황당한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으윽. 그런 표정으로 날 바라보지 마! 대체 요즘 누가 그런 걸 일일이 읽냔 말이야!
살짝 의기소침하게 중얼거리던 여신님은, 살짝 고개를 좌우로 흔들더니 표정을 다잡고 다시 날 쳐다봤다.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놀랍군요. 계약의 내용을 전혀 모르고도, 이렇게까지 성과를 낼 수 있다니. 역시 제 사람 보는 눈은 정확했다는 거겠죠."
날 선택한 본인이 꽤나 자랑스러우신지, 가슴을 펴고 말했다.
마치 디아나가 생각나는 행동이지만, 몸이 레이아인 만큼 박력이 장난 아니다.
그, 불경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엄청나게 강조되고 있는데요.
게다가 몸에 딱 붙도록 개조된 사제복이라서 더더욱.
잠깐. 그렇다는 말은…우리 디아나도 성장만 하면 항상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다는 말인가?!
디아나야. 얼른 무럭무럭 자라라. 아, 물론 지금 상태도로 전 충분히 좋습니다만.
윽. 여신님을 앞에 두고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아무튼 나는 여신님이 화나지 않으셨단 걸 확인하고, 다시 한 번 설명을 요구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 계약이란 게 대체 뭔가요? 죄송하지만 다시 한 번 설명해주실 수 없을까요?"
"…그렇군요. 제 본의는 아니었지만,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이 세계에 오게 된 거니까요."
본의는 아니라는 말에 왠지 힘이 들어간 것처럼 느껴진 건, 내 기분 탓일까?
"하지만…지금은 시간이 없군요."
"네? 그게 무슨…."
"이 이상은 이 아이의 몸에 지장이 생길 우려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레이아의 몸에 빙의해있는 여신님은 살짝 스스로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 말은 즉, 더 이상 빙의해있으면 레이아가 위험하다는 말인가?! 그럼 안 되지!
"그러니까 성자 구원. 우선은 이것만 명심해두십시오. 던전의 가장 깊은 곳. 지금은 아무도 가지 못하게 된 그곳을 목표로 하십시오."
그 말만을 남기고, 레이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레이아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서서히 줄어들어가더니, 이내 레이아가 힘을 잃고 휘청거렸다.
"레이아!"
물론 레이아가 쓰러지기 전에 내가 받아냈지만 말이야.
"으음…구원씨…저…."
아무래도 정신을 잃은 건 아닌 모양이다.
레이아는 현기증이라도 나는 것처럼 내 품에서 스스로의 얼굴을 감싸 쥐고 살짝 고개를 흔들더니, 이내 멀쩡한 얼굴로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제대로 섰다.
"레이아, 괜찮아?"
"후훗. 네. 물론이에요. 하지만 설마 여신님께서 제 몸을 빌리시다니…."
"기억이 나는 거야?"
"네. 여신님이 하신 말 한 마디 한 마디까지 전부 기억이 나요."
"그래서, 여신 강림 스킬을 배운 느낌은 어때?"
"…그렇군요. 제 몸이지만,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은 신기한 느낌. 하지만 싫은 기분은 결코 아니고…. 신비한 경험이네요."
일단 레이아의 반응을 봐서는, 레이아에게 뭔가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닌 모양이다.
뭐, 생각해보면 그도 그런가. 여신이 사제의 몸을 통해 신언을 전달한 건데, 그걸로 뭔가 문제가 생기면 그거야말로 문제지.
"하지만…."
"응?"
"어째선지 다시 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요. 이상하네요. 분명 쓰는 방법은 알 것 같은데 말이에요."
"아, 그거라면…."
간단한 얘기다.
저 여신 강림이라는 스킬, 이 게임의 스킬 중에는 드물게도 쿨 타임이 존재하는 스킬이었다.
마냥 마나만 있다고 쓸 수 있는 스킬이 아니라는 말이다.
게다가 쿨 타임은 무려 1년.
스킬 설명으로 봤을 때 레벨을 올리면 쿨 타임이 줄어드는 모양이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무식하게 긴 쿨 타임이 아닐 수 없었다. 고작 몇 분 대화를 나누는 게 전부인 스킬인데 말이야.
아무튼 그렇게 레이아가 무사한 걸 확인하자 안심이 됐다.
그리고 아까 여신님이 했던 말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던전을 향하라고 했던 여신님의 마지막 말에 대해서 말이다.
이왕이면 빗나가길 바랐지만, 역시나 내 예상대로 여신님은 던전을 답파시키기 위하여 날 이 세계로 보낸 것이었다.
하지만 내 예상이 맞는다면, 저 던전은 여신이 만든 거다.
굳이 자기가 만든 던전을 끝까지 가보라고 하는 이유가 대체 뭐냔 말이야? 정말로 던전을 답파하는 과정이 뭔가의 시험이거나, 그도 아니면 정말로 순수하게 그저 유흥을 즐기기 위해서 이런 짓을 했단 말이야?
아니, 하지만 아까 그 여신님을 봐라. 물론 외모는 레이아였지만, 태도를 보면 대충 그 사람의 됨됨이를 짐작할 수 있는 법이다. …상대는 사람이 아니지만.
아무튼 그렇게 신성하고 친절해보였던 분이, 그런 고약한 짓을 하기 위해서 날 이 세계로 보냈다고?
내가 그런 진실을 믿고 싶지 않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도저히 그렇겐 생각되지 않았다.
이래 봬도 사람 보는 눈은 있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당장 우리 애들을 봐라. 얼마나 이쁘고 착해.
게다가 원래 여신님은 아무 말도 없이 날 이 세계로 보낼 계획이 아니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즉, 여신님은 내가 그 뭔지 알 수 없는 여신님의 목적에 대한 설명을 읽고도, 이 세계에 올 것을 선택할 거라고 생각하신 거다.
그렇다면 그렇게 나쁜 의도일 리는 없는 거 아닐까?
아니. 하지만 계약이라고 했다.
서로 주고받는 게 있다는 말이다.
아마 내가 받은 건 이 힘이다. 나만이 적용되는 게임 시스템과, 이런 세계에선 더욱더 압도적인 효과를 자랑하는 성자로서의 힘.
지금까지 유효활용하고 있었던 만큼, 이 힘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그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 힘이 조금 두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받은 게 큰 만큼, 여신님의 요구사항도 뭔가 엄청난 것이었던 게 아닐까?
으아아!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그래! 결정했어! 일단 던전은 계속 다닌다!
어차피 여신님이 그러라고 하기도 했고, 그게 아니더라도 원래 던전에 대해서 알아볼 생각이었다.
일단 원래 예정대로 나는 나대로 여신님의 목적이 무엇일지 파헤쳐본다.
그래도 여신님이 직접 나서서 설명까지 해주려고 했던 만큼, 마음의 짐이 조금 덜어진 느낌도 들었다.
설마 별 일이야 있겠어?
"대사제님! 이건 대체!"
내가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짐했을 때, 누군가가 노크도 없이 방문을 열고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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