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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270화 (25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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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어져가는 던전의 비밀

    "어머, 꽤나 오랜만이군요."

    대사제님의 방에 들어가자마자, 역시나 바로 한 소리 들어버렸다.

    아무리 신뢰를 쌓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일단 매번 공부하러 들르겠단 약속이 무효화된 건 아니었는데 말이야. 역시 무단으로 빼먹은 건 문제였나.

    참고로 양옆에 찰싹 붙어있던 레이아나 실비아하고는 일단 떨어진 상태다.

    과연 나도 신전에서까지 양옆에 여자를 낀 상태로 돌아다닐 정도로 철면피는 아니다.

    내 입장에서 보면 여긴 처가댁이나 마찬가지고, 대사제님은 장모님이나 마찬가지인 거니까 말이야. 나도 그 정도 상식은 있다고.

    "죄, 죄송합니다."

    내가 곧장 사과하자, 어째선지 오히려 대사제님이 당혹스런 표정이 됐다.

    "네? 아, 아뇨. 책망한 게 아니에요. 그저 순수하게 오랜만이라고 말한 것뿐이에요."

    "앗, 그렇군요. 네. 오랜만입니다. 대사제님."

    아무래도 내 오해였던 모양이다.

    대사제님은 꽤나 깐깐해 보이는 페이스의 소유자이시니 말이야. 지레 겁먹었네.

    "그래서 무슨 일이시죠? 아무래도 교육을 받으러 오신 건 아닌 것 같군요."

    대사제님은 내 옆에 있는 레이아와, 조금 뒤에 떨어져있는 실비아를 향해 시선을 보내면서 말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 저렇게 뒤에 떨어져서 따라오고 있는데다가, 심지어 심장부근을 움켜쥐고는 하으, 후아, 흐앗 같은 이상한 소릴 내뱉고 있는 상황이다.

    꽤나 호기심을 자극하는 장면일 텐데도,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만으로 끝내고 내게 용건을 물어보는 점은 과연 대단했다. 어른의 풍격이 느껴져.

    그러고 보니 몇 살인 걸까? 레이아가 어머니처럼 생각할 정도니, 적은 나이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하지만 겉보기엔 30대 초반의 미인으로 밖에 안 보인다.

    이 세계는 당최 외모로 나이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으니 곤란하단 말이야.

    뭐, 그런 분야의 끝판 왕이라고 볼 수 있는 디아나를 곁에 두고 있는 내가 따질 입장은 아니지만.

    "대사제님. 사실 오늘은 제 전직에 관한 일 때문에 구원씨가 같이 오시게 됐어요."

    내가 대답하기보다 더 먼저, 레이아가 살포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어째선지 대사제님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이번엔 결코 내 착각이 아니다.

    "전직? 레이아, 그런 거라면 전에도 말했지만 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당신은 누구보다도 독실한 사람이니까요. 아직 때가 아닌 것뿐이에요. 조만간 여신님께서도 당신을 인정해줄 때가 올 거예요. 그보다 당신. 그런 일로 찾아오다니 레이아를…."

    "아, 아뇨! 대사제님! 그런 게 아니에요!"

    레이아는 자신의 말에 대사제님이 오해하고 있음을 깨닫고는, 황급히 대사제님을 말렸다.

    "저, 대사제가 됐어요!"

    "…네? 뭐라고요?"

    레이아의 고백에 대사제님은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눈썹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면서, 레이아가 한 말을 곰곰이 되씹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저 대사제가 됐어요."

    레이아가 다시 한 번 말하자, 대사제는 그제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레이아를 바라봤다.

    "그게 대체 무슨…아니, 대체 어떻게 의식을 치른 거죠? 저 말고 다른 대사제 분에게 부탁을 한 건가요?"

    그렇게 말하는 대사제님은 살짝 쓸쓸한 표정이었다.

    레이아도 그걸 알았는지, 살며시 대사제님께 다가가서 대사제님의 두 손을 꼭 붙잡고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역시 저거 습관이었구나.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었어.

    아무리 그래도 나 말고 다른 사내놈한테 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중에 살짝 주의해줘야지.

    나 말고 다른 놈이 저 감촉을 맛보게 할 순 없지.

    "아니요. 의식은 치르지 않았어요."

    "…자세한 말을 들어볼까요."

    레이아의 말에, 대사제님은 드디어 생각하길 포기했단 표정으로 말했다.

    "네, 그게 말이에요…."

    레이아는 차분한 목소리로 내가 레이아를 전직시켜준 경위에 대해서 설명을 시작했다.

    얘기가 점점 진행될수록 대사제님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하지만 한 편으론 왠지 모르게 그럴 것 같았다는 표정으로 대사제는 날 지긋이 바라봤다.

    전자의 감정은 이해가 되지만, 후자는 대체 뭐지?

    "그러니까, 요약하면 당신의 힘이란 거군요."

    "네. 레이아도 놀라긴 하던데,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다른 직업은…."

    "성직은 다른 직업과 달라요. 순전히 여신님께서 내려주시는 직업이니까요. 그리고 그런 직업을 마음대로 전직시킬 수 있는 당신은 역시나…."

    대사제님은 그렇게 말하면서 살짝 말을 흐렸다.

    그러더니 이내 평소보다 더 사무적인 표정으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래서,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네? 뭔데요?"

    "그 성직자를 전직시키는 힘. 레이아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도 사용 가능한건가요?"

    "대사제님!"

    대사제의 물음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건 레이아였다.

    레이아는 평소와는 다르게 격한 반응을 보이면서 대사제님을 향해 외쳤다.

    하지만 대사제님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여전히 시선을 내 두 눈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미안해요. 레이아. 당신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이건 꼭 알아야만 하는 일이에요."

    대사제님의 표정을 보면, 정말로 본인도 심정적으론 이러고 싶지 않다는 게 보였다.

    그건 나보다 대사제님과 훨씬 오래 알고지낸 레이아가 더 잘 알거다.

    때문에 레이아는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서, 불안한 눈동자로 날 쳐다봤다.

    괜찮아. 레이아.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

    "그래서 어떤 거죠?"

    "레이아 이외의 다른 사제들을 전직시켜주는 건 아마 불가능해요."

    "어째서죠? 당신들의 설명에 따르면, 전직을 시킬 수 있었던 것도 일종의 스킬 효과인 거죠? 그렇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충분히 사용 가능한 것이 아닌가요?"

    "그 스킬의 발동 조건이 꽤나 까다로워서요.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발동되지 않아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주체가 누구인지 설명하지 않았을 뿐.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발동하지 않는 건지, 나를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발동하지 않는 건지.

    후자가 정답이기 때문에, 사실 레이아가 아니더라도 날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충분히 발동이 가능하다. 이미 실비아 같은 경우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굳이 애매모호한 표현을 썼다.

    아마 진실을 알리게 되면, 날 정말로 사랑하기 위해서 정말로 많은 여자들이 노력하고 들이댈 거다. 굳이 사제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예전의 나였다면 당장 진실을 밝히고 그런 상황을 즐겼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이미 셋이나 있고, 덤으로 실비아까지 붙어 있는 상황이다.

    과연 여기서 여자를 더 늘리고 싶단 욕망은 그다지 없단 말이지.

    내 대답을 듣자, 레이아와 대사제님 둘이서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대사제 역시도 내가 무분별하게 아무나 전직시켜줄 수 있는 사태는 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조금 다른가.

    내게 그런 게 가능한지 확인한 거니까 말이야. 아마 성직자로서의 대사제님은 내가 모두를 전직시켜줄 수 있기를 바랐겠지.

    하지만 레이아의 어머니 같은 입장으로서는 그걸 원치 않았을 거고.

    저 안도의 한숨은, 레이아의 어머니로서 내뱉은 거라고 생각하는 게 맞을 거다.

    "그런 조건을 다시다니. 역시 여신님이시군요."

    대사제님은 어째선지 여신님에 대한 신앙심이 더 깊어진 모습이었다.

    아니, 뭐 성자 자체가 여신님이 내려준 직업이라고 봐야 될 테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레이아가 전에 했던 말도 마냥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네? 뭐가요?"

    "당신이 여신님의 대리자라 것 말이에요."

    "네, 네에?!"

    아니. 레이아도 요즘 들어서 유독 더 그렇게 생각하는 거 같긴 했지만, 설마 대사제님까지 그런 말을 하실 줄이야.

    표정을 보면 완전히 진담은 아닌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농담 같지도 않았다.

    "뭘 그렇게 놀라나요? 본인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죠? 그렇게 여신님의 은총을 한 몸에 받으시고는."

    "은총이라니…아니, 뭐 틀린 말은 아닌데 말이에요."

    "당신 정말로 이 세계에 올 때 아무 말도 여신님께 못 들었나요? 혹시 뭔가 사명을 지니고 이 세계에 온 게 아닌 건가요?"

    내 애매모호한 태도가 재밌었던 건지, 대사제님은 살짝 눈웃음을 치면서 놀리듯이 말을 했다.

    그렇게 말해도 말이야. 정말로 아무것도 못 들었다고. 애초에 여신님 얼굴도…아니. 굳이 말하자면 한 번 보기는 봤구나.

    처음 게임 시작할 때 오프닝에서.

    분명 그때 오프닝 동영상에서 여신이 튀어나와 뭐라고 한 마디 하긴 했었는데. 뭐였더라?

    꽤나 오래돼서 정확히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아마 ‘섹스를 통해 성장해라!’였던가? 그 비슷한 미친 소리였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줘도 믿어주지 않겠지.

    여신님이 섹스 많이 하라면서 보냈어요. 라니. 말하는 즉시 어떤 취급을 당할지 모른다.

    이 세계는 섹스가 성장 수단이면서, 미묘하게도 정조 관념 같은 게 없는 건 또 아니니까 말이야.

    성장을 위해서 가장 무분별하게 섹스를 해대는 모험가조차, 임자가 생기면 그 사람하고만 할 정도다.

    그런데 이미 임자가 셋이나 있는 내가 ‘여신님이 섹스 많이 하라고 보냈어요.’라고 하면, 분명 여신님이 그러실 리 없다고 반박해올 거다.

    그러니 내가 할 말은 정해져있었다.

    "아뇨. 정말로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요."

    여신님과 내 명예를 위해서, 그 오프닝 얘기는 꺼내지 말자.

    "정말인가요? 그저 당신이 잊고 있을 뿐인 건 아닌가요?"

    그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순 없지만 말이야.

    나는 게임에 접속하자마자 바로 이 세계에 들어왔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은 그 사이에 뭔 일이 있었는데 내가 잊고 있을 뿐일 가능성도 있다.

    원래 세계에 있을 때 봤던 여러 창작물에서도 그런 식의 전개는 꽤나 흔했고.

    "일단 제가 기억나는 건 없네요."

    "그렇군요. 만약 이럴 때 여신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확인해 볼 수도 있었을 텐데요."

    "지금은 그런 사람이 없나보죠?"

    "…그러고 보니 아직 그 얘기는 교육 시간에 하지 않았었죠. 실은 그래요. 저희 성직자들 입장에선 부끄러운 얘기지만, 지금은 아무도 여신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죠. 원래는 대대로 성녀님들 사이로 여신님의 목소리를 듣는 방법을 전수되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성녀님이 안 계시는 건가요?"

    "네. 그래요. 성녀가 될 최소 조건을 가진 대사제님은 몇 분인가 계셨지만, 그 누구도 여신님의 선택을 받지는 못하셨죠."

    성녀가 될 최소 조건…아, 직업 레벨을 말하는 건가.

    게다가 말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성녀는 대사제에서 전직할 수 있는 모양이다.

    그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거잖아?

    "그런 거라면 걱정 마세요! 제가 언젠가 레이아를 성녀로 만들 수 있을 테니까!"

    어차피 던전에 계속 다니다보면 성장은 하게 될 거고, 언젠가는 레이아를 성녀로 만들 수도 있을 거다.

    "그렇군요. 그건 무척이나 기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요…."

    하지만 그래도 대사제는 뭔가 석연치 않은 태도였다.

    "그래도 뭔가 문제가 있나요?"

    "레이아가 성녀가 된다고 해도, 이미 실전된 기술까지 복원할 수는 없는 거니까요."

    대사제는 그런 생각을 하자 우울해졌는지, 이마에 살짝 주름을 만들면서 중얼거렸다.

    "할 수 있는데요?"

    "네? 그게 무슨 말이죠?"

    대사제님께는 사도 임명에 관한 모든 걸 다 설명한 건 아니니까, 꽤나 놀라신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꽤나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대대로 여신님의 목소리를 듣는 방법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는 건, 한 마디로 말해서 스킬이잖아?

    그럼 스킬 창에서 포인트를 투자하기만 하면 끝나는 간단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 레이아는 사도 임명을 한 다음에 스킬 창을 확인해본 적이 없구나.

    사도 임명을 한 직후에는 레이아가 너무 요망했으니까 말이야.

    윽. 그 생각은 지금 여기서 하지 말자.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서는 건 위험해.

    나는 머릿속에서 스물스물 기어오르는 번뇌를 억누르고, 레이아의 스킬 창을 열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있잖아!

    그리고 목표로 하는 스킬은 꽤나 쉽게 찾을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파들, x8w //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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