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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져가는 던전의 비밀
운 좋게도 앨리시아와 만났을 때가 레이아를 길드에서 처음 만난 그날이었던 걸 기억해 낼 수 있었기 때문에, 오해는 쉽게 풀 수 있었다.
레이아와 만난 것이 점심 즈음이었으니, 즉 아라크네 클랜 하우스에 오래 있었던 게 아니라는 말이 되니까 말이다.
게다가 내가 그 때 유혹에 빠졌다면,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지도 않았을 거고.
"나 참! 사람을 그렇게나 못 믿다니! 난 너희들한테 실망했어!"
오해를 모두 풀어준 다음, 내가 일부러 화난 척하면서 말하자, 우리 애들은 다들 미안한 표정이 돼서 내게 달라붙어왔다.
이렇게 울상을 지으면서 내게 매달려오니, 바로 화가 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좋아하는 애들이 이러는 데 어떻게 화가 안 풀리겠어? 긴장을 풀면 바로 표정이 헤실헤실 풀릴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 상황을 조금 더 즐기기 위해서 일부러 안면 근육에 힘을 주고 화난 표정을 지어보였다.
"미안하네. 용서해주게나. 그래. 이 몸이 쓰다듬어 주겠네."
아니. 그러니까 내 머리를 쓰다듬는 건, 나보다 네가 더 좋은 거잖아.
뭐, 나도 좋긴 하다만.
"정말 미안해. 어떻게 하면 용서해줄래? 구원이 시키는 대로 다 해줄게."
"정말로 시키는 대로 다?! 그, 그럼 마침 오늘 밤은 사라 차례니…크흠. 내가 지금 뭘 원해서 화를 내는 게 아니잖아."
위험해. 지금 살짝 가면이 벗겨질 뻔 했어.
아니. 지금은 가면이 벗겨지더라도, 이 기회를 이용해서 사라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하는 게 더 이득인가?
"죄송해요. 구원씨. 저도 참…."
"아, 아니. 미안해할 거 없어요. 응. 저야 말로 죄송합니다."
"구, 구원씨? 그렇게 화나셨나요?"
내가 존댓말을 사용하자, 레이아가 살짝 충격 받은 얼굴로 날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아니. 이 존댓말은 그냥…왠지 모르게. 응. 그냥 왠지 모르게 튀어나온 거야.
역시 천사님은 이렇게 온화하실 때가 최고야.
내가 이런 천사님의 화난 모습을 궁금해 했었다니.
앞으로 다시는 그런 황당무계한 호기심을 품지 말자. 절대로.
하지만 그건 그렇고 내가 셋한테 구박받는 와중에도 아무도 안 말려주다니. 너무하지 않아?
실비아는 그래. 그렇다 쳐. 쟤도 입장 상 표현을 안했을 뿐, 생각해보면 질투하는 입장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마법사 협회 누님들은…아니지. ‘감히 디아나님을 배신하다니!’라면서 오히려 공격에 가담해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하나.
아무리 내가 요즘 누님들과 조금 친해졌다고 해도, 결국 디아나와 비교해보면 보잘 것 없는 친분일 테니까.
나 진짜 살아있는 게 다행이네.
그렇게 오해가 모두 풀리고 나서, 우리는 저택으로 돌아갔다.
며칠 동안 개미굴에서 지내면서 햇빛이 그리웠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자고 입을 맞춘 것도 아니었는데, 어느새 다 같이 정원에 모여서 일광욕을 즐기게 됐다.
먼저 레이아가 정원의 커다란 나무에 기대어 앉았고, 그다음 살짝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면서도 날 바라보면서 자신의 허벅지를 가리켰다.
저 동작은 즉, 그러라는 말이죠?
나는 사양하지 않고 바로 레이아의 허벅지를 베고 벌러덩 드러누웠다.
이렇게 누울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역시 박력 있네.
원래도 나무 밑이긴 했지만, 레이아의 거대한 가슴이 얼굴에 더더욱 완벽하게 차양을 만들어줬다.
이 광경은 레이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광경이다.
천사님만 만들어낼 수 있는 광경이라니. 그럼 이 광경이 바로 천국의 모습인가?
내가 천국을 만끽하고 있자, 내 양 옆으로 사라와 디아나가 찰싹 달라붙어 누워왔다.
"또 레이아한테만 정신을 뺏기고. 나도 까먹으면 안 돼?"
아까 오해를 해서 나한테 조금 심하게 대한 직후이기 때문일까? 사라가 평소완 다르게 질투심을 억누르면서 귀여운 말투로 말했다.
그러면서 내 한 쪽 다리 위에 자신의 허벅지를 올리고, 다리를 꼬면서 몸을 찰싹 밀착해왔다.
"이, 이 몸도 잊지 말게나!"
그런 사라의 모습을 보고 디아나도 질 수 없다는 듯이 날 꼬옥 껴안아왔다.
하지만 사라나 레이아에 비하면 볼륨이 부족하단 자각이 있는 건지, 묘하게 자신감이 없는 태도였다.
왠지 가슴은 되도록 밀착하지 않으려는 것 같고.
괜찮아. 넌 너만의 매력이 있으니까.
나는 그런 마음을 담아서 팔에 힘을 줘 디아나를 꼭 껴안아줬다.
그러자 디아나는 그제야 함박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내 가슴에 자심의 뺨을 부비부비 비벼왔다.
"흠. 흠. 자네도 참. 이 몸이 그렇게 좋은가?"
얜 한 번 잘 해주면 자신감이 급상승해서 이렇게 기어오른단 말이야.
아니, 원래 자기 자신한테 자신감이 넘치는 타입이긴 하지만 말이야.
이런 모습을 보면 또 괴롭혀서 시무룩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게 사람 심리란 거다.
뭐, 귀여우니까 됐나. 괴롭히는 건 나중에, 그래. 밤에 하도록 하자.
"실비아. 너도 거기 있지 말고 여기로 와."
우리 애들 셋에게 둘러싸인 상태로,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서 말했다.
내가 고개를 돌린 방향에는 저 멀리서 실비아가 이쪽을 부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몸 절반은 나무 뒤로 숨기고 있는 것이, 영락없이 스토커의 모습이었다.
"네, 넷?! 하, 하지만 어디에…."
어디에? 왜 내 몸을 훑어보면서 그런 말을 하는데?
아, 설마….
"야. 내가 언제 너한테 나보고 달라붙으라고 했냐. 그냥 거기서 그러지 말고 가까이 오라고."
"앗, 넷! 그, 그렇군요."
역시나.
아무래도 실비아는 또 특훈을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무리 네가 좀 애완동물 느낌 나고 귀엽다곤 해도 말이다, 이렇게 우리 애들이랑 달라붙어 있는 상태로 널 껴안고 부비부비 할 생각은 없다 이것아.
실비아는 내 말 뜻을 그제야 제대로 파악했는지, 살짝 안도한 표정으로 하지만 한편으론 실망한 표정으로 다가와 앉았다.
정작 껴안으면 파닥파닥 거리면서 도망가려고 하는 주제에. 막상 안 껴안아 준다니까 실망하는 거 보게.
아무튼 좋아. 이걸로 완벽해.
미인 넷에게 둘러싸여 일광욕. 그야말로 하렘을 이룬 자만이 할 수 있는 전유물.
지금 이 순간. 난 그 누구보다도 하렘왕에 가까운 남자다.
이 세계에 왔을 때의 꿈을 이룬 기분이군.
나, 정말로 하렘왕이 된 걸까?
아니. 이 정도로 만족할 순 없지. 진정한 하렘왕이라면, 이후에 다 같이 목욕이라도….
"이렇게 다들 모여 있으니 다시 한 번 얘기를 해두고 싶은 게 있네."
내가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고 있을 때, 옆에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던 디아나가 문득 그런 말을 꺼냈다.
"응? 무슨 얘기?"
"이 몸들이 연구했던 마석에 관한 얘기일세."
그렇게 운을 띄운 후, 디아나는 얘기를 풀어나갔다.
요약해보면 이런 얘기였다.
일단 저 마석이야말로 던전을 이루는 핵과 비슷한 존재라는 것.
또한 디아나의 예측이 정확하다면, 저 핵과 같은 존재가 던전 이곳저곳에 존재할 것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 핵들이 연결되어서 뭔가의 마법 술식을 이루고 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한다.
하지만 그 술식을 파악하기에는 너무나 고차원적인 술식이고, 우리가 발견한 마석으론 그 술식의 극히 일부밖에 관찰할 수 없으며, 또한 마석에 포함된 마나가 말도 안 되게 방대하기 때문에 현재로선 그 술식을 파악하기 힘들다고 한다.
뭐, 대부분은 개미굴에서 다 들은 내용이었지만, 그래도 모두 모인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제대로 얘기하고 싶었던 거겠지.
"그러니까 디아나는 던전을 탐험하면서 그 마석과 비슷한 마석을 더 발견해내고 싶다는 거지?"
"음. 그뿐만이 아닐세. 이 몸은 저런 걸 만들어낸 인물이 그대로 죽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하기 힘드네. 저렇게 막대한 마나를 다루고, 저렇게 엄청난 술식을 만들어낸 자가 말일세. 정말로 근거 없는 예측에 불과하네만, 어쩌면 저걸 만든 인물은 던전 깊은 곳에 아직도 살아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군. 만약 그렇다면, 이 몸은 꼭 그자를 만나보고 싶네."
아무래도 디아나는 던전을 탐험할 이유가 생긴 모양이다.
디아나가 그렇다고 한다면, 나도 기꺼이 같이 던전을 탐험해줘야지.
게다가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굳이 디아나뿐만 아니라, 나 역시도 던전을 탐험할 동기가 생겼다.
바로 전에 디아나가 신이 아닌 이상 저런 게 가능할 것 같지가 않다고 했던 말이 걸렸기 때문이다.
디아나는 자신이 그렇게 말한 주제에 신이 던전을 만들었다는 가정은 전혀 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아무래도 저 던전은 정말로 신이 만든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든단 말이지.
내가 즐겨왔던 그레이트 어스의 게임들과 저 던전의 기믹이 같다는 것이 내 의심에 불을 지폈다.
만약 정말로 던전을 신이 만들었다고 한다면, 난 그걸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던전을 공략하는 게임을 통해서 이 던전 도시로 차원이동한 건 절대로 우연이 아닐 테니까.
여신님은 분명 던전 공략을 위해서 날 이 세계에 보낸 거다.
하지만 저 던전은 여신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앞뒤가 안 맞잖아? 굳이 뭐 하러 그런 짓을?
이런 훌륭한 세계를 만든 여신님을 의심하고 싶진 않지만, 정황상 의심을 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있던 세계에서 본 소설들도 그런 식의 소설들이 많았기 때문이지, 더더욱 그런 식으로 생각이 유도되기도 했다.
성격 고약한 신이 순전히 자신의 유희를 위해서 사람들을 굴리며 즐거워한다든가, 뭔가를 시험하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굴리고 그걸 통과한 사람에게 또 다른 의무를 부과한다든가.
뭐, 그런 소설에 비하기에는 여기 여신님은 지금 나한테 아무것도 강제하지 않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만약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결국 내가 정보를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180도로 달라질 수도 있을 테니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얘들이 있는 이 세계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런데 만약 여신이 날 던전 탐험하라고 보낸 이유가 자격이 충분한지 보기 위해서고, 던전을 답파하는 즉시 신들의 싸움 같은 데로 끌려간다면?
만약 내게 정보가 있다면, 일부러 던전을 답파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끌 수 있을 거다.
그러니까 난 던전 탐험을 통해서 저 던전이 대체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진 건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다행이도 내 곁에는 세계 최고의 마법사 디아나가 있다.
전에 발견했던 마석 같은 물건을 더 발견하고, 그 술식인지 뭔지를 더 해석하다 보면 답이 보일지도 모른다.
사실 앨리시아의 의뢰를 받아들인 것도, 이런 이유가 가장 컸다.
나를 위해서든 디아나를 위해서든 앞으로 우린 던전을 탐험을 나서야할 거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숙련된 모험가들의 싸움을 지켜보는 건 앞으로의 행보에 큰 도움이 될 거다.
이 눈으로 심층을 보고 싶다는 건, 말 그대로 심층의 경치나 몬스터들을 보고 싶다는 뜻만 있는 게 아니었다는 말이다.
심층에서 싸우는 모험가들의 전투방식을 이 눈으로 직접보고,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 보이겠어.
물론 우리 파티엔 모험에 익숙한 디아나가 있어서 도움을 주긴 하지만, 그래도 직접 보면서 경험하는 것과는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역시 직접 경험해보는 게 제일이야.
그게 아니라면 내가 그런 의뢰를 받을 리가 없지.
고작 며칠 동안이라곤 해도 우리 애들이랑 떨어져 있어야 하는 거다.
으아아. 왠지 얘들이랑 떨어져있을 생각하니까 벌써부터 뭔가 가슴 한편이 답답해지기 시작했어.
이렇게 다들 달라붙어서 일광욕을 하고 있으니, 더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그냥 의뢰 때려 칠까?
응. 알아. 그냥 해본 말이야.
던전이 만들어진 목적을 파악하는 건, 앞으로 얘들과 오래오래 이렇게 지내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잠깐 떨어져 지내는 건 그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일이라고 생각하자.
"디아나. 우리 꼭 그 마석의 비밀을 파헤쳐보자."
"음. 물론일세."
디아나는 내가 자기 일처럼 나서준다는 게 기특하다는 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왔다.
뭐, 자기 일 맞지만 말이야.
하지만 이 모든 게 내 추측에 불과하다.
어쩌면 여신님은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날 이 세계에 던져놓은 것일 수도 있고,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거창한 게 아닌 아무 사소한 이유로 던져놓은 것일 수도 있다.
괜한 걱정을 끼치긴 싫으니까, 지금은 잠자코 있도록 하자.
그보다는….
"꺄악!"
"으앗! 갑자기 무슨 짓인가!"
아라크네의 의뢰를 수행하러 가기 전까지, 가능한 한 최대한 얘들을 성분을 보충해둬야지.
나는 머리를 레이아의 허벅지에 더 깊숙이 파묻으면서, 양 손으론 사라와 디아나를 꼭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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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후쯤에 한 편을 더 올릴 예정입니다.
내용이 길어지면 조금 더 걸릴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