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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259화 (243/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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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어져가는 던전의 비밀

    레이첼 누님을 끌어안음과 동시에, 갑자기 온 몸에 한기가 엄습해왔다.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말이다.

    "레, 레이첼 누님. 온도 마법…."

    "앗, 죄송해요."

    레이첼 누님이 가볍게 손짓을 하자, 바로 다시 주변 한기가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갑작스런 일로 잠깐 마법이 끊겼던 모양이다.

    아무튼 레이첼 누님을 등 뒤로 보내면서 다시 앞을 보니, 거리가 가까워진 덕분에 창을 휘두른 놈의 얼굴이 좀 자세히 보였다.

    온몸이 비늘에 덮이고 파충류의 얼굴을 가진 일명 리자드맨이라고 불리는 놈들이었다.

    그것도 한 놈이 아니라 세 놈이 있는 걸 보니, 대충 감이 왔다.

    이 녀석들이 고블린이나 오크 같은 포지션의 3계층 몬스터로군.

    바꿔 말하면 그다지 강한 몬스터는 아닐 거란 얘기다. 겉모습만 봐도 아이스 골렘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약해보이고.

    서걱.

    거봐. 약하잖아. 아니, 레이첼 누님이 강하신 건가?

    뒤에서 날아온 레이첼 누님이 날린 날카로운 바람이 바로 리자드맨 한 놈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역시 아이스 골렘은 그냥 상성 문제였구나.

    내가 어그로를 끌 것도 없이, 나머지 두 놈도 곧바로 머리통이 날아가면서 허무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 그럼 빨리 가죠! 이쪽으로 파시면 되요!"

    리자드맨들이 쓰러지자마자, 나는 맵을 보고 방향을 가리키면서 황급히 말했다.

    레이첼 누님이 바로 한기를 차단하는 마법을 다시 써주긴 했지만, 그래도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으니까.

    레이첼 누님의 마법은 따듯해지게 만드는 게 아니라 그저 춥지 않게 만들어주는 거다.

    하지만 그 마법으론, 마법이 풀렸을 때 내 몸을 파고든 한기를 완전히 없애주지 못했다.

    가죽 갑옷을 입은 몸통부분은 괜찮지만, 철을 두르고 있는 손이나 발은 말도 못하게 차가웠다. 물론 건틀릿이나 부츠 안에도 가죽을 덧대고 있었지만, 그래도 차가워진 철의 감촉을 완전히 막아줄 순 없었다.

    "네? 갑자기 왜 그렇게…아, 미안해요."

    레이첼 누님은 내 표정을 보고 어떤 상황인지 이해를 했는지, 갑자기 내 손을 자신의 풍만한 가슴팍으로 꼭 끌어안아줬다.

    따듯한 레이첼 누님의 체온이 차가워진 내 건틀릿을 녹여주는 게 느껴졌다.

    "누, 누님?! 그럼 누님도 추우신 게…?!"

    "어머, 이런 상황에서도 제 걱정이신가요? 제 실수였으니까요. 이 정돈 괜찮아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구원씨. 조금 멋있었어요."

    "아, 아뇨. 별 말씀을."

    "후훗. 구원씨는 모험가에, 그렇게 예쁜 분들도 데리고 다니시면서 아직도 그렇게 파릇파릇한 반응을 보여주시네요."

    "그, 그야…레이첼 누님이 그러시면 누구나…."

    "어머, 꼬드기는 건가요? 안돼요. 디아나님한테 혼나긴 싫은 걸요. 아, 이렇게 해드린 것도 다른 사람들에겐 비밀이에요?"

    "네, 넵."

    레이첼 누님은 잠깐동안 그렇게 내 손을 끌어안고 있더니,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떨어져서 방금 내가 가리켰던 곳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파면되나요?"

    "네, 네."

    솔직히 말하자면 건틀릿에 막혀서 가슴의 부드러운 감촉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왠지 레이첼 누님 얼굴 보는 게 어색했다.

    레이첼 누님도 막상 해놓고 괜한 짓을 했단 생각이 들었는지, 이쪽으로 고개 한 번 안 돌리고 묵묵히 앞장서서 눈을 파내려갔다.

    "구원!" "구원씨!" "구원님!"

    그리고 사라와 레이아, 실비아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자마자, 셋이 동시에 나에게 달려들었다.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눈이 무너져 내려서 걱정했잖아."

    "괜찮으신 거죠?"

    사라는 내 멱살을 잡을 기세로 다가와선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고, 레이아는 회복 마법을 손에 두르고 내 몸 이곳저곳을 만져댔다.

    심지어 실비아마저 내게 딱 붙어서 내 안색을 엿봤다.

    "괜찮아. 갑자기 아이스 골렘이 나타나서 잠깐 무너진 것뿐이야. 가볍게 해치우고 왔어."

    "정말 안 다쳤지?"

    "그럼. 그런 몬스터보다 평소에 네가 때리는 게 더…."

    "바보야!"

    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안심했는지, 사라가 새초롬한 표정으로 내 가슴을 찰싹 때렸다.

    크흑. 그래. 이게 더 아프다고. 왜 갑옷을 입었는데 데미지가 뚫고 들어오지? 이게 바로 사랑의 힘인가?

    아무튼 내가 능청떠는 모습에 다들 안심한 모양이다.

    겨우 안심한 표정으로 내게서 조금 떨어졌다.

    음. 사랑받는다는 건 역시 기쁜 거야.

    "그런데 실비아. 너 이제 좀 극복된 모양이다? 나한테 딱 달라붙고."

    "넷?! 앗, 으아?! 아, 아니?! 죄,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하긴. 상관없는데. 오히려 왜 떨어져. 어디 더 붙어봐. 특훈의 성과를…."

    "히아아아아!"

    내가 실비아의 머리를 턱 잡고 그대로 품에 끌어당기려고 하자, 실비아가 귀여운 소리를 내지르면서 순식간에 후다다닥 사라의 뒤로 숨었다.

    왜 하필 사라의 뒤냐? 본능적으로 내게 데미지를 줄 수 있는 애를 짐작한 건가.

    "구원. 그러니까 실비아 좀 그만 괴롭히라니까."

    "아니, 딱히 괴롭힌 건…죄송합니다."

    실비아야. 너 나중에 저택에서 두고 보자.

    부비부비 세 시간 코스의 지옥, 아니, 천국을 보여주지.

    아무튼 그렇게 3계층의 모습도 무사히 확인하고, 우리는 디아나가 있는 여왕개미의 방으로 돌아갔다.

    "디아나. 어때? 일은 잘 되가?"

    "음? 돌아왔는가. 아니. 잘 되고말고, 아직 시작 단계일세. 일단 마석에서 뻗어져나가는 마나의 흐름을 분석중이네만. 아마 완전히 분석하기 위해서는 며칠 걸릴 걸세."

    "그럼 여기서 묵어야겠네?"

    "음. 심심하면 사냥이라도 다녀오게나. 이 방을 거점으로 삼으면 안전하게 사냥이 가능하지 않겠나?"

    지당하신 말씀이다.

    다만, 예전처럼 그렇게 무투가 레벨을 올릴 이유가 딱히 없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앗, 그런 거라면 전 먼저 길드로 돌아가 볼게요."

    그때 레이첼 누님이 타이밍을 노린 듯 그런 말을 해왔다.

    "네? 혼자서요?"

    "네. 어차피 이곳 몬스터들 상대론 저 혼자서도 충분할 테니까요."

    "그래도 혼자서 던전을 돌아다니시는 건…. 저희도 호위로 따라갈게요. 디아나, 괜찮지?"

    "음. 물론일세."

    "하지만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어차피 할 게 없어서 사냥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겸사겸사 마을까지 왕복하면서 오는 것도 나쁘지 않죠 뭐."

    레이첼 누님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누님이 신경 쓰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말했다.

    아까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인지, 레이첼 누님이 저런 표정을 지으면 왠지 아까 전 기억이 떠오른단 말이야.

    그래서 아까와 마찬가지로 나와 사라, 레이아, 그리고 실비아가 2계층의 마을까지 다녀오게 됐지만, 정말로 특별한 일이 없었다.

    특히 갈 때는 레이첼 누님이 무쌍을 찍어주신 덕분에 괜히 따라가는 우리가 무안할 지경이었다.

    마을에 도착해서, 레이첼 누님은 우릴 돌아보면서 언제나처럼 사무적인 미소가 아닌, 조금 더 진심이 담긴 것 같은 미소를 보여줬다.

    "그럼 여기서 헤어져야겠네요. 여러분 정말 고마워요."

    "아뇨. 저흰 그냥 따라오기만 했지 한 것도 없는걸요."

    정말로 한 게 없다. 실은 레이첼 누님도 괜히 이동속도만 느려져서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하지만 레이첼 누님은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뇨. 지금 말고도 전부 다요."

    그렇게 말하면서 다른 애들은 안 보이는 각도에서 살짝 내게만 윙크를 하는 레이첼 누님.

    누님. 꼬드기는 게 안 된다고 하셨으면 누님도 저한테 그러지 마세요. 괜히 설레잖아요.

    "그럼 여러분. 다음에 봐요."

    레이첼 누님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이내 텔레포트 마법진 쪽으로 자취를 감췄다.

    "이걸로 한 건 해결했네."

    "그러네요. 이제 디아나씨의 연구가 끝나기만 기다리면 되겠어요."

    그래. 그리고 디아나의 연구가 끝나고 다시 여기 올라올 때쯤이면, 길드에서 내가 알려준 정보를 대대적으로 발표하여 모험가들 사이에 널리 퍼진 상태일 거다.

    그렇다면 몬스터들 상대로 성기를 세우려는 모험가들의 모습을…크크큭, 크, 크흠. 아니. 딱히 이상한 생각을 한 건 아니라고? 그저 어떻게 세우려는 건지 궁금할 뿐이야.

    그럼. 나한텐 우리 애들뿐이라니까.

    내가 이래 봬도 저 레이첼 누님이랑 묘한 분위기가 되고도 그냥 넘어간 사람이에요.

    아무튼 그렇게 우리는 다시 디아나가 기다리는 개미굴로 돌아갔다.

    그리고 디아나가 연구를 하는 며칠 동안, 여왕개미의 방을 거점으로 삼아서 개미들 퇴치나 계속했다.

    개미들의 방은 우리가 지나온 길 말고도 무수히 퍼져있어서, 정말로 무한 사냥이 가능했다.

    이러니까 그렇게 토벌하고 난 후에도 금방 개미들이 채워지지.

    그렇게 우리가 사냥을 하는 동안, 디아나와 마법사 협회 사람들은 밤을 새면서까지 마석에 매달려서 뭔가를 조사했다.

    "흐으음…."

    "왜 그래? 연구가 잘 안 돼?"

    식사를 하면서도, 디아나는 뭔가 안 풀린다는 얼굴로 낮게 신음했다.

    디아나의 이런 얼굴은 처음이다. 도와주고 싶지만, 나로선 도와줄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게 더 안타까웠다.

    마석 녀석. 내 여자가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들다니.

    "아니. 잘 안 된다고 할까…오히려 연구 자체는 제법 잘 됐네. 오히려 꽤나 많은 걸 알 수 있었지. 다만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나오는 결론이 터무니없어서 말일세."

    "그게 무슨 말이야?"

    "저 마석은 예상대로 던전을 이루는 중핵 중 하나로 보이네. 그저 던전의 틀만 구성할 뿐만 아니라, 저 마석의 기운이 던전의 기후나 생활하는 몬스터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걸로 보이네. 다만 말일세. 아무래도 인위적인 느낌이 드는 것이 문제일세."

    "응? 그게 왜? 어때서?"

    "잘 생각해보게. 저 물건이 인위적으로 조작된 물건이라는 말은, 바꿔 말해서 이 던전 자체를 누군가 만들었다는 얘기가 되네. 그 끝이 어딘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하고, 살고 있는 몬스터의 종류만 수백, 수천 종이 넘어가는 이 던전을 말일세. 그런 건 세계 최고의 마법사라고 불리는 이 몸조차도 꿈도 못 꿀 얘기일세. 아니. 오만해질 생각은 없네만, 애초에 이 몸은 이 몸보다 뛰어난 마법사를 본적이 없네. 그럼 대체 누가 이런 던전을 인위적으로 만들었다는 말인가? 여신님이 아니고서야…."

    얘기를 하면서 점점 더 머리에 열이 올라오는 건지, 디아나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열변을 토했다.

    하지만 디아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마지막 말이 난 오히려 걸렸다.

    "만약 정말로 여신님이 이 던전을 만들었다면?"

    "글쎄. 그렇게 생각하기는 힘들구먼. 여신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드신 존재일세. 만약 여신님이 이 던전을 만들었다면, 대체 어떤 목적으로 이곳을 만들고 여기 있는 몬스터들을 만드셨다는 말인가? 차라리 이곳에 있는 몬스터들을 다른 생명체들처럼 세계 각지의 생태에 맞는 곳에 배치하시는 게 오히려 더 자연스럽지 않나?"

    그도 그렇다.

    게다가 내가 말해놓고 스스로 반박하긴 좀 그렇지만, 나에겐 디아나가 모르는 또 한 가지 반박 근거가 있었다.

    애초에 난 여신님이 날 여기 보낸 이유가 던전을 클리어하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추정하고 있으니까.

    만약 이 던전을 여신님이 만드신 거면, 굳이 자기가 만든 던전을 다른 세계 사람을 보내서 클리어하게 만들 이유가 없다.

    진짜 성격 더러운 오락거리로 생각하는 거면 몰라도.

    …아니겠지? 그럼. 이렇게 좋은 능력을 주고,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신 여신님인데.

    그렇게 성격 더러운 짓을 할 리가 없지.

    하지만 그렇다면 내가 원래 세계에서 해왔던 게임들과, 이 던전의 기믹이 같은 건….

    키기기긱.

    그때 멀리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응? 지금 이거 무슨 소리지?"

    "저, 저기!"

    귀가 밝은 사라가 소리가 난 곳을 가리켰다.

    사라가 가리킨 곳은 바로 디아나가 연구 중인 마석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마석 앞에서 뭔가 거대한 덩어리가 보였다.

    덩어리는 점차 크기가 커지면서, 일정한 형체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그래. 전에 봤던 그 여왕개미의 형체를 말이다.

    "뭣?! 다들 조심…!"

    나는 식기를 내던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콰아아아앙!

    하지만 여왕개미는 태어나는 것과 동시에 흔적도 없이 소멸됐다.

    그러고 보니 누님들이 계셨죠.

    "흠. 저 마석은 설마 계층의 주인까지 만들어내는 것인가. 흥미롭구먼."

    디아나도 아무렇지 않은 태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야. 그렇게 나한테 아무 반응안하면 오히려 더 쪽팔리잖아.

    "구원. 그냥 자리에 앉아."

    "…응."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다. 이미 땅 속에 파묻힌 개미굴 안이지만.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새벽에 올릴 거라고 했는데 거의 아침이 되어버렸네요.

    왠지 글이 잘 안써지더군요.

    고립을 기대하신 분들껜 죄송합니다.

    구원은 맵이 있어서 웬만하면 고립시키기 힘들어요.

    Tigerfish //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인비 // 자세히 보시면 그다지 부주의하게 쓰지 않았습니다. 구원이 성역 선포를 파티원 이외의 사람이 영향 받도록 쓴 적은 2계층 오크 공방전 때, 바네사 때, 실비아 때밖에 없습니다.

    실비아로 한 번 데인 다음에는 단 한번도 다른 사람에게 쓴 적이 없죠.

    실비아 외의 사람은 잠깐 영향 받아도 괜찮을 거라는 독백도 상황을 보시면, 레이첼이 만약 위기에 처하면 구하는 용도로 쓰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구할 수 있는데 죽게 내버려두는 것보단 훨씬 나으니까요.

    무엇보다 레이첼이나 마법사 협쇠 사람들은 구원보다 레벨이 훨씬 높아서 정말로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

    성역 선포로 정말 영향을 느낄 정도의 사람이면 실비아 같은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구원보다 레벨이 낮거나 비슷하다는 건데, 그 경우엔 성자의 손길만으로 간단히 풀어줄 수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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