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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258화 (242/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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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어져가는 던전의 비밀

    3계층으로 간다고 해도, 그냥 통로를 따라가서 확인만 하고 오면 끝나는 간단한 작업이다.

    가는 도중에 몬스터를 만날 일도 없으니, 사실 이렇게 우르르 몰려갈 필요는 없지만 말이야.

    하지만 나와 레이첼 누님이 통로로 향하자, 당연하다는 듯이 디아나를 제외한 일행들은 우릴 따라왔다.

    사라와 레이아는 물론, 실비아까지.

    실비아 넌 나랑 눈만 마주쳐도 도망갈 준비를 하는 주제에 따라오긴 따라오는 거냐.

    의외로 고지식한 부분이 있는 사라는 마법사 협회 누님들에 의해 안전한 상황에서도 나보다 후방에 서서 따라왔었지만, 과연 몬스터 출몰 위험이 아예 없는 곳에서까지 그럴 생각은 없었나보다.

    이번엔 내 옆에 찰싹 붙어서 걷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팔짱을 끼거나 하는 건 아니고, 그저 새초롬한 표정으로 옆에서 걷는 것뿐이다.

    아닌 척 새초롬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아까 전에 있었던 소동으로 레이첼 누님을 살짝 경계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얘도 참 생긴 것만 보면 절대 이런 짓 안하게 생긴 애가 가끔 이렇게 귀여운 짓을 한다니까.

    걱정 마. 레이첼 누님이 예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바람은 안 피워. 나한텐 너희가 최고야.

    난 사라의 허리 아래쪽, 사도 인장이 새겨져있을 부분에 손을 올리고 사라를 내 쪽으로 더 바싹 끌어당겼다.

    그러자 사라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내 쪽으로 쓱 끌려 들어왔다.

    표정은 여전히 새초롬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귀여워보였다.

    "앗, 사라씨만 치사해요."

    그러자 레이아가 반대편 팔에 팔짱을 끼고 자신의 풍만한 가슴을 밀어붙여왔다.

    그리고 그렇게 내가 사라와 레이아를 끼고 있는 모습을, 레이첼 누님이 귀엽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레이첼 누님도 사라가 살짝 자신을 경계하고 있단 사실을 눈치 챘는지도 모른다.

    "양손의 꽃이네요."

    라고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날 놀려왔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 목소리에 질투심 같은 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3계층으로 향하는 통로를 내려갔다.

    양 옆에 둘이 찰싹 달라붙어있는 상태지만, 걷기 힘들다든가 좁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건 따로 있었다.

    젠장. 내가 왜 갑옷을 안 벗고 왔을까. 여긴 몬스터도 안 나오는 구역인데.

    3계층으로 이어지는 이 통로는, 경사가 꽤나 급한데다가 잘 포장된 길도 아니다.

    당연히 바닥은 울퉁불퉁하고, 그만큼 옆에 걷고 있는 레이아의 가슴도 내 팔에 찰싹 달라붙어 출렁출렁 튀어 오르고 있었다.

    난 왜 저 느낌을 맛보지 못하고 있는 건데! 갑옷만, 갑옷만 없었다면…크흐흑!

    "어머. 막다른 길이네요."

    그렇게 길을 내려가던 도중, 앞장서서 가던 레이첼 누님이 걸음을 멈췄다.

    레이첼 누님은 빛나는 마석을 들고 있었는데, 저게 바로 마력을 불어넣으면 발광하도록 가공된 랜턴 같은 것이라고 한다.

    빛을 비춰줄 디아나가 없는 만큼, 레이첼 누님이 저걸 들고 앞장서고 있었다는 얘기다.

    확실히 시야를 확보할 정도는 됐지만, 과연 디아나의 마법처럼 주변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밝진 않았다.

    그래서 앞쪽의 눈으로 막힌 곳이 그냥 벽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 거기 눈으로 막힌 거예요. 이 통로 출구는 눈 아래에 파묻혀 있는 상태거든요."

    "어머, 정말이네요. 이건 조금 귀찮긴 하겠네요."

    레이첼 누님은 살짝 눈의 벽에 손끝을 댔다가, 황급히 떼면서 말했다.

    차가운 곳에 닿았던 손끝을 살짝 입가에 가져가서 입김을 불어넣는 모습이 살짝 요염하시다.

    "귀찮다니, 뭐가요?"

    "사실 전 화염 마법을 사용하지 못해서요. 그래도 괜찮아요."

    레이첼 누님은 손을 앞으로 뻗어서, 개미들을 공격할 때처럼 맹렬한 바람을 일으켰다.

    디아나의 화염마법을 썼을 때 보단 조금 과격한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눈을 헤치고 길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럼 저는 잠깐 밖을 확인해보고 올게요. 눈까지 본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 확실히 3계층인지 모습을 확인해야 하니까요."

    "네? 혼자 가시게요?"

    "네. 어차피 정말 3계층이 맞는지 확인해보고 오는 것뿐인걸요. 그리고 사실…여러분 모두에게 한기를 차단하는 마법을 사용하는 건 조금 벅차서요."

    과연. 화염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만큼 그런 부분에서 살짝 취약점이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위험하실 텐데요."

    아무리 이 누님이 개미들을 학살했다고는 해도, 그 정도는 우리 파티에서 레이아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이 앞에서 나오는 아이스 골렘은 차원이 다르다.

    혼자 못 잡을 건 없겠지만, 꼭 아이스 골렘이 하나라는 보장도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서 가는 건 위험하게 느껴졌다.

    "괜찮아요. 정말로 잠깐 얼굴만 내밀고 올 건데요."

    "그래도요. 그럼 누님. 저 하나한테만 더 스킬을 써주는 건 어때요? 그것도 힘드신가요? 아무래도 한 명은 더 붙어 가야할 것 같아요. 만약을 생각해야죠."

    "그런 거라면…."

    내가 굳은 표정으로 완고히 말하자, 레이첼 누님도 계속 혼자 간다고 우길 순 없었는지 꺾여줬다.

    기분 탓인지 볼이 살짝 붉은 것처럼 보였다.

    오, 레이첼 누님. 저렇게 연상의 여유 있는 누님이라는 느낌이면서, 실은 강압적인 남자가 취향이신가?

    응. 알아. 너무 나갔지. 그냥 눈이 휘날리면서 온도가 내려갔으니 볼이 상기된 것뿐이겠지.

    그리고 만약 정말로 강압적인 남자가 취향이라고 해도, 그걸 알아서 뭐 어쩔 건데?

    내가 꼬드길 것도 아니고, 다른 남자를 소개시켜줄 것도 아니고.

    "그럼 내가 레이첼 누님이랑 같이 갔다 올게."

    "굳이 구원이…."

    "여기서 내가 제일 적임인거 사라도 알잖아?"

    아까 개미들을 상대하면서 보여준 모습을 생각해보면, 레이첼 누님은 딜러로 분류하는 게 맞겠지.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딜러인 사라가 따라가는 건 그다지 좋지 못한 선택이다.

    그리고 혼자서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 없을 레이아가 따라가는 건 어불성설.

    나와 마찬가지로 탱커 역할도 할 수 있는 실비아라면 가능하겠지만….

    "그, 그렇다면 제가…!"

    "아니. 내가 갈게. 남자인 내가 안전한 곳에 있으면서 여자한테 위험한 걸 시키는 건 안 내켜."

    "하, 하으으으…."

    자신이라면 적임일 거라고 기세 좋게 나섰던 실비아는, 내 말에 바로 기세가 죽으면서 무너져 내렸다.

    사실 여자 모험가가 남자 모험가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이 세계에선 안 어울리는 발언이겠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난 이 세계 출신이 아니라고.

    20년 넘게 고정돼있던 사고방식을 이제 와서 이 세계의 상식에 맞게 전부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게 하기도 싫고.

    "응…조심해서 다녀와."

    결국 사라도 알고는 있었지만 그냥 투정부려 본거였다는 듯이, 살짝 한숨을 내쉬면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사라의 엉덩이 위쪽 사도 인장이 새겨진 부분을 장난스럽게 톡톡 건드려 주고, 레이아에게도 인사를 했다.

    "그럼 금방 다녀올게."

    "네. 다녀오세요."

    레이아는 자신의 사도 인장이 새겨진 부분에 살며시 손을 올리고 말했다.

    으윽. 천사님.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아무리 그래도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천사님 것을 만지긴 힘들어요.

    가슴은 아니라고 해도, 저길 만지면 남들이 보기엔 가슴골에 손을 집어넣으려는 것처럼 보일 거다.

    천사님 인장은 나중에 듬뿍 만져주자. 그런 다짐을 하고, 나는 레이첼 누님과 눈으로 이뤄진 통로를 향했다.

    "무척 사이가 좋으시네요."

    "네? 하핫. 이것도 다 제 인덕이죠."

    "후훗. 정말로 그런가 봐요."

    으아아. 능청 떤 걸 정면으로 긍정해주면 오히려 부끄러운데!

    누님이란 존재는 어쩌면 나 같은 놈한테 하드 카운터일지도 몰라. 그래도 좋지만.

    아무튼 그렇게 레이첼 누님의 마법으로 눈을 파헤쳐나가면서, 우리는 겨우 3계층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네. 역시 3계층이군요. 역시 조금 춥네요. 여기가 어딘지 정확한 위치는 아직 확인 못하셨다고 하셨죠?"

    레이첼 누님은 자신의 노출된 피부를 살짝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화염 마법을 쓸 수 없는 만큼, 확실히 디아나 때보다는 피부에 한기가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나마 난 전신이 덮여있어서 괜찮았지만, 레이첼 누님은 조금 추울지도 모른다.

    "네. 조만간 본격적으로 탐험하게 되면 보고할게요."

    나는 인벤토리에서 로브를 꺼내 레이첼 누님의 어깨에 둘러주면서 대답했다.

    레이첼 누님은 조금 놀란 듯이 살짝 눈이 커졌지만, 이내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로브 앞섶을 동여 맺다.

    "후훗. 부탁드릴게요. 그럼 돌아…꺄악!"

    쿠구구궁

    레이첼 누님이 웃으면서 몸을 돌리려는 순간, 갑자기 땅울림과 동시에 우리가 지나왔던 통로가 무너져 내렸다.

    레이첼 누님은 뒤를 돌던 찰나에 일어난 땅울림에 쓰러질 뻔 했지만, 아직 가만히 서있던 난 무게 중심을 잡고 레이첼 누님이 넘어지기 전에 캐치해낼 수 있었다.

    진짜 몬스터란 놈들은 양반이 못되는구나. 내가 따라왔으니 망정이니.

    우리의 전방 약 5미터 정도 앞에, 거대한 아이스 골렘이 눈 속에 파묻혀있던 몸을 일으키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럼 제가 앞에서 막고 있을 테니까, 누님은 공격을 부탁드릴게요."

    "네, 네."

    내가 품에 안겨있는 레이첼 누님에게 말을 걸자, 레이첼 누님이 당황해서 자세를 고쳐 잡으면서 대답했다.

    사실 나도 조금 떨렸다.

    저번엔 탱커 역할을 완전히 실패했던 아이스 골렘을 상대로 다시 탱커를 맡게 된 거다.

    이번엔 잘 할 수 있을까?

    잘 할 수 있겠지? 실비아한테 요령도 배웠으니까.

    사실 실비아의 특훈 명목으로 마냥 끌어안고 놀기만 한 게 아니다.

    일단 탱커의 요령같은 것도 물어보긴 했었다.

    뭐, 말로만 설명을 듣고 실전 연습 같은 건 전혀 안했지만.

    아무튼 실비아에 따르면, 딜러 진들이 공격하는 타이밍에 맞춰 공격함으로서 어그로를 먹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이쪽의 공격력이 더 약하더라도, 딜러진의 공격에 맞춰서 공격하면 가까이 있는 이쪽을 더 주목하게 된다나.

    사라와 디아나의 무차별 공격이 이어질 때 그런 짓을 하는 건 지금의 나로선 힘들겠지만, 딜러가 레이첼 누님 하나만 있는 상황에선 어떻게든 될 거다.

    나는 주먹을 움켜쥐고 아이스 골렘에게 돌진했다.

    성자 스킬은 전혀 필요 없다. 순전히 공격력과 방어력에 의존하는 육탄 승부다.

    나는 저놈의 얼음을 부숴버리겠단 각오로 주먹을 뻗었다.

    콰드드득! 하는 시원한 얼음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놈의 다리에 금이 갔지만, 그뿐이다.

    놈은 아무런 데미지도 없다는 듯이 내게 주먹을 뻗어왔다.

    뭐, 첫 어그로를 먹기 위해서 때린 것뿐이니까 괜찮지만 말이야.

    전혀 분하지 않다. 정말이라고?

    젠장. 요즘 무투가 스킬 레벨을 올릴 시간이 없었단 말이야.

    레이첼 누님은 개미를 상대할 때와는 다르게 원거리 공격을 행하려는 듯, 멀리서 바람 마법을 날려댔다.

    골렘의 몸이 부서지는 걸 보니, 마법의 위력은 한 방 한 방이 사라의 화살 한 발과 비슷한 정도의 위력으로 보였다.

    용사 사라의 공격력이 그만큼 엄청난 건지, 아니면 그냥 바람 마법과 아이스 골렘의 상성이 나쁜 건지.

    아무튼 나쁘지 않다. 이대로 내가 어그로만 먹고 있으면, 이 놈 한 마리 정도는 가볍게 처리 가능할 거다.

    나는 레이첼 누님을 곁눈질하여 공격 타이밍을 읽으면서, 그에 맞춰서 아이스 골렘에게 공격을 가했다.

    결국 시간은 좀 걸렸지만 아이스 골렘의 어그로를 뺏기는 일 없이, 가볍게 놈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럼 가볼…누님 조심하세요!"

    "네? 꺄악!"

    아이스 골렘의 마석을 회수하고 레이첼 누님을 돌아봤을 때, 누님 뒤편으로 또 뭔가가 나타난 게 보였다.

    거센 눈발에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얼핏 보기엔 사람 형체로 보였다.

    하지만 이런 던전 한복판에서 사람 형체를 하고 있다고 방심할 수는 없지.

    나는 황급히 레이첼 누님에게 달려가서 팔을 붙잡고 누님의 몸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바로 누님의 머리가 있던 자리에 날카로운 창이 지나갔다.

    역시나 몬스터인가.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아마도 새벽에 한 편 더 올라갈 겁니다.

    제가 다 쓰기 전에 잠들지 않는다면.

    멀라몰라머 // 아닙니다. 성역 선포가 다른 스킬들에 비해서 위력이 무척이나 약한만큼, 정말로 잠깐 걸리는 건 괜찮은 수준입니다.

    걸린 사람은 스스로 체감하기 힘들 정도로 조금 성욕이 늘어난 정도의 효과만 영구히 가지게 되는거죠.

    만약 성역 선포에 잠깐 영향 받았다고 실비아처럼 되어버리면, 구원이 밀크 로드 메이커라는 별명을 얻었을 때 주변에 있던 모험가들을 전부 찾아가서 풀어줘야 합니다.

    14C2A58H2 //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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