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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의 각오
"내 생각엔 역시 거절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진심인가? 실비아양 정도면 남성들이 상당히 좋아하는 외모라고 생각하네만?"
"물론 나도 남자니까, 혹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 되겠지. 하지만 난 그보다 너희를 사랑하는 마음이 훨씬 더 커. 괜히 마음에도 없는 여자를 받아서 너희가 불편해지는 건 싫어."
그래. 내가 낸 결론은 이거다.
쓰레기 새끼가 왜 갑자기 이제 와서 착한 척 하냐고?
눈치 보는 거 아니냐고?
……완전히 부정하진 않겠어.
아니, 생각해봐. 그럼 눈치 안 보게 생겼어?
분명 디아나가 마치 내 의견에 따르겠다는 듯이 말하긴 했다.
자신들을 신경 쓰지 말고 내 소신껏 말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실비아를 받아들이고 싶다고 말하면, 과연 얘들이 좋아할까?
천만의 말씀. 분명 엄청나게 싫어할 거다.
사라나 디아나뿐만 아니라, 이미 실비아를 받아들이라고 말했던 레이아마저도 내심 속상할 거다.
내가 아무리 여자 마음을 모르는 놈이라곤 해도, 그것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
난 확신한다. 이게 분명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나와 두 눈을 마주치고 똑바로 바라보던 디아나의 표정만 봐도 그건 확실했다.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던 디아나는 내 말을 듣자마자 표정이 화악하고 밝아지더니, 순식간에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이 몸이 아까도 말했네만, 이 몸들을 신경 쓸 게 아니라…."
"어떻게 그래. 너희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어. 그리고 그것뿐만이 아니야. 실비아를 받아들이면, 반드시 너희와 지내는 시간에도 영향이 있을 거야. 아주 조금이라고 할지라도, 너희와 지내는 시간이 줄어들게 되겠지. 난 그런 건 싫어."
"흐, 흐흠. 그, 그런가…?"
장담할 수 있다. 얘 지금 속으로 엄청나게 좋아하고 있다.
만약 얘도 레이아처럼 꼬리가 달려있다면, 지금 엄청난 기세로 붕붕 휘둘리고 있을 거다.
고개를 돌려 레이아를 바라보자, 안심하면서도 한편으론 죄책감이 뒤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레이아는 너무 착하다보니 실비아를 받아들이라고 말했지만, 역시 독점욕이란 게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그리고 사라로 말할 것 같으면, 감격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진지한 표정이 되어 뭔가를 골똘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라의 반응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역시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그리고 만약 실비아를 받아들였다는 게 소문이 나면, 온갖 여자들이 내 은총을 받기 위해 달려들 거 아냐? 그걸 일일이 다 받아주면 아무리 내가 절륜하다고 해도 전부 감당할 자신이…잠깐! 농담! 농담이야!"
농담 좀 한 건데 바로 디아나의 토닥토닥 공격이 날아왔다.
"자네는 항상! 이런 상황에서 꼭 그렇게 분위기를 깨야 성이 풀리나!"
"다들 너무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나도 모르게 그만…아, 아무튼! 실비아한텐 미안한 일이지만, 난 거절할 생각이야. 레이아도 기껏 실비아를 생각해서 허락해줬는데 미안해."
"아뇨…."
그렇게 고개를 젖는 레이아의 모습에서, 레이아가 진심으로 날 좋아한다는 게 느껴졌다.
레이아는 처음부터 내 성자의 힘을 여신님이 보내준 선물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지금도 변치 않았다면, 실비아 같은 사람을 구해주는 게 성자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다.
신앙심이 깊은 레이아인 만큼 그 생각은 확고하겠지.
그런데도 계속해서 실비아를 구해주라고 주장하지 못 한다는 건, 그만큼 날 좋아하고 독점하고 싶은 마음 역시 크다는 얘기가 된다.
"구원."
그때 갑자기 사라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응?"
"난 당신이 그 여자를 안아도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니까 난 전혀 신경 쓸 것 없어."
"뭣?! 사라양!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디아나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줬다.
얜 또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가 다른 여자랑 자는 걸 보면 흥분하는 성벽이 갑자기 또 도졌나.
눈이 흥분한 사람 눈 같지는 않은데.
"그냥 다시 한 번 깨달았을 뿐이에요. 구원이 설령 다른 여자랑 육체관계를 맺더라도 절대 마음이 흔들릴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렇다면 사람 하나 구하는 셈 치고 받아들일 수 있어요."
아무래도 사라는 복수를 마치고 나한테 고백하면서 했던 말을 다시 떠올린 모양이다.
케이트와 아무리 해도 흔들리지 않았던 나.
그리고 나한테 다른 여자가 더 생기더라도, 자신을 계속 바라봐 준다면 전혀 상관없다는 생각.
믿어주는 건 기쁘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건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라니까.
괜히 나까지 결심이 흔들리려고 하잖아.
디아나의 얼굴을 힐끔 보자, 디아나는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이중에서 실비아와 가장 인연이 깊은 건 디아나이니, 제일 동정심이 생기는 것도 디아나일 거다.
그런데도 내가 다른 여자를 안는다는 사실이 싫어서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던 거다.
자신마저 그랬는데 나머지 둘이 이렇게 나와 버리니 당황스럽겠지.
이해한다. 나도 비슷한 기분이거든.
이럴 땐 확실히 말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믿어줘서 고마워. 그래도 역시 거절하는 게 좋겠어. 실비아한테는 미안하지만 말이야."
애초에 성자라고 해도, 여신이 나한테 뭔 사명을 전달하면서 보낸 것도 아니고. 굳이 내가 도울 수 있다고 해서 전부 도우면서 살아갈 필요는 없지.
솔직히 실비아처럼 예쁜 애를 성노예처럼 부릴 수 있는 기회라는 건 남자로서 엄청나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지만, 결국 나랑 계속 살 건 실비아가 아니다. 여기 있는 셋이지. 나한테는 제일 소중한 사람들을 챙기는 게 최우선이다.
"그, 그런가…."
디아나는 안도하는 것 같은, 하지만 죄책감이 남아있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만 끝까지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 걸까?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
"음…."
내가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하자, 디아나는 드물게도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 품에 안겼다.
"미안하네…. 이 몸이 욕심쟁이라."
"미안할 게 뭐있어? 그만큼 날 좋아한다는 거잖아? 그리고 넌 선택권을 줬잖아? 이건 내가 결정한 거야. 네가 미안해할 건 하나도 없어."
"그렇게 말하면 꼭 허락해준 저랑 레이아는 디아나만큼 구원을 좋아하지 않는 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구원씨…! 아니에요! 저도 구원씨를 사랑해요!"
사라가 살짝 삐진 것 같은 말투로 말하자, 레이아가 물기어린 목소리로 말하면서 내 팔을 꼭 끌어안았다.
크흑. 레이아누님. 제가 그걸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천사님 마음은 팔에 닿은 가슴의 촉감보다도 더 확실하게 느껴집니다.
"물론 알지!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너희가 나한테 푹 빠진 건 충분히 알고 있어!"
"흥. 과연 어떨지."
"방금 전까지 날 믿겠다는 애가 그러기냐?"
"구원이…꺄악!"
뾰루퉁해있는 사라의 허리를 끌어당겨, 뜨거운 입맞춤으로 내가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알려줬다.
진한 입맞춤을 하고 나자, 사라는 뾰루퉁한 표정을 풀고 기분 좋은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구원 당신 이제 큰일 났어."
…응. 나도 너랑 키스하면서 도중에 느꼈어.
내 팔을 끌어안고 있는 레이아와, 내 품에 안겨있는 디아나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어제 사라양과 하루 종일하더니 심각하게 친밀해진 모양이구먼."
"구원씨…역시 처음만난 사라씨가 제일…."
"아, 아냐! 그런 거 아냐! 난 너희 다 똑같이 좋아해! 그러니까…자, 잠깐! 디아나! 거긴 안 돼!"
디아나는 무려 무릎을 올려 차서 날 공격하려고 했다.
내 허리를 부둥켜안고 딱 달라붙어있는 상태다 보니, 그 상태로 무릎을 올리면 타격점이 어디가 될지는 뻔했다. 내 고간이다.
아무리 디아나의 물리 공격이 아무렇지 않다고 해도 말이야. 알은 안 되잖아, 알은.
방어력 덕분에 의외로 아무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걸 실험해볼 생각은 죽어도 없었다.
"너 거기 치면 평생 자식 못 본다?!"
내 협박이 먹혀들었는지, 디아나는 쳐올리려던 무릎을 멈췄다.
하지만 공격을 그만둘 생각은 없는지, 내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을 풀어서 결국 토닥토닥 공격을 시작했다.
위험했다. 방금 디아나 무릎이 알 끝에 스쳤어.
하지만 이렇게 토닥토닥 공격이라면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다.
일단 디아나에게 내가 디아나도 사라만큼 좋아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려주기로 했다. 물론 방법은 사라와 동일하게.
"바, 방금 사라양과 맞댄 입술을…으으음."
디아나는 뭐라고 저항하는 것 같았지만, 입술이 맞닿자 금방 조용해졌다.
혀를 집어넣자, 까치발을 들고 자기도 필사적으로 내 입술에 달라붙으면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할 정도였다.
"그렇지? 사라만큼 너도 좋아한다는 거 확실히 알겠지?"
"으, 으음…."
디아나는 얼굴을 붉히면서 손등으로 내 침이 묻은 입술을 닦으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곤 입술에 바른 립스틱을 바르게 펴듯이 입술을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귀엽다.
그럼 이제 레이아만…아차.
옆을 바라보니, 레이아가 엄청나게 기대에 찬 눈동자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이거 어쩌지. 키스하면 구미호로 변할 텐데.
하지만 레이아만 키스를 안 하면, 레이아는 엄청나게 상처를 받을 거다.
어쩔 수 없지.
"치, 침실로 갈까?"
"당신, 방금 똑같이 좋아한다고 해놓고 레이아만 차별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사라는 왠지 눈이 무서웠다.
이건 누가 봐도 발동 걸린 눈이다. 내가 다른 여자랑 키스하는 것만 봐도 발동 걸리는 구나.
"어, 어쩔 수 없잖아! 레이아는 키스하면 변하니까!"
"…괜찮아요. 구원씨."
"으, 응?"
"어쩔 수 없는 걸요. 하는 수 없죠. 전 구원씨를 믿으니까 괜찮아요. 대신 제 차례 때 잔뜩 키스해주셔야 되요?"
그렇게 말하는 레이아는 의외로 실망한 표정이 아니었다.
평소와 달리 부드러운 미소를…아니, 평소랑은 조금 느낌이 다른가?
미묘하게 어딘가 다른 것 같은데, 어떻게 다른지 콕 찝어 말할 수는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 정말 그걸로 괜찮겠어?"
"네."
레이아는 살포시 웃으면서 말했다.
역시 천사님이야. 내 팔에 닿고 있는 가슴크기 만큼이나 마음도 넓으셔. 치유된다.
아무튼 결론이 나왔으니, 미룰 필요는 없다.
거절할 거면 당장 가서 거절의 의사를 밝히는 게, 차라리 실비아를 도와주는 길이겠지.
"그럼 일단 성으로 갈까?"
"음? 지금 말인가?"
"응. 디아나가 아까 약속했잖아. 우리끼리 얘기 해보고 부른다고. 그런데 쫓아내고 얼마 되지 도 않은 애를 다시 부르긴 미안하고, 직접 가서 거절의 뜻을 전하고 오자."
"흠. 그도 그렇군."
"나도 같이 갈래."
"저, 저도요."
"너희도? 하지만…특히 레이아는…."
안 그래도 실비아와 자신의 처지를 동일시하면서 동정하고 있었던 만큼, 거절하는 자리에 따라가면 괜히 마음만 불편해지는 게 아닐까?
"괜찮아요. 이것도 구원씨의 곁에 있는 사람으로서 필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레이아는 가슴 앞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굳은 의지가 엿보이는 눈동자로 말했다.
솔직히 내 곁에 있는데 그런 거창한 각오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레이아가 저렇게 결심한 거다. 이해해줘야겠지.
"알았어. 같이 가자."
"네."
그렇게 이번엔 디아나의 마차를 타고 영주성으로 향하게 됐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전혀 인연이 없던 곳인데, 이렇게 빈번히 드나들게 되다니.
하지만 정말로 이번이 마지막이다.
실비아에게 거절의 말만 전하면 다신 영주성에 올 일이 없다.
"오, 오셨습니까! 그, 그래서 얘기는…."
영주성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실비아가 튀어나왔다.
상당히 긴장돼 보이는 모습을 보니, 또 거절하기 미안해졌다.
하지만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되지.
과연 여기서 복도 한 가운데서 거절하고 가버리는 건 너무 예의가 없는 것 같아서, 일단 어딘가 차분히 대화할 수 있는 곳으로 안내를 부탁했다.
그러자 전에 실비아가 포박되어 있던 방으로 안내됐다.
아마 여기가 실비아의 방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어째선지 도중부터 펠리시아도 합류하게 됐다.
얜 영주라는 애가 할 일도 없나.
"그, 그래서 얘기는 끝나셨습니까?"
"응. 그게 말인데. 미안하게 됐어."
"…네?"
"역시 널 받아들일 순 없을 것 같아."
"자,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정말로 주제넘게 애인자리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데리고 다니면서 가끔 절 상대로 성욕만 풀어주시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실비아가 절박하게 외치면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다들 실비아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시선을 피해버렸다.
"아…읏…!"
실비아는 자기가 아무리 외쳐도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지, 눈물을 그렁이면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럼…그럼 적어도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실비아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다시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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