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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209화 (193/1,205)
  • 209====================

    레이아의 마음

    "그럼 우선 밥이나 먹으러 갈까?"

    일이 일단락되고 난 다음, 마음을 다잡고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단락됐다고 해도, 솔직히 내가 제대로 사과했다는 느낌보단 레이아가 너무 천사 같아서 포용해줬다는 느낌이었지만.

    하지만 레이아도 내가 어두운 분위기로 축 처져 있는 걸 바라진 않을 테니까.

    천사님이 하루 종일 같이 있고 싶은 나는 그런 내가 아닐 거다.

    그러니 평소처럼 돌아가,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하자.

    "어제부터 계속 방에 있었다면서? 배고프지?"

    청순하게 생겨서 별로 안 먹을 것 같은 이미지와는 다르게, 레이아는 꽤나 많이 먹는 타입이다.

    이해한다. 저 가슴을 유지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만약 나 때문에 어제 굶어서 저 가슴이 1그램이라도 줄어들게 됐다면, 난 결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거다.

    "네. 가요."

    레이아는 내가 내민 손을 붙잡고 다가오더니, 그대로 내 팔을 휘어감아 자신의 품으로 꼭 끌어안으며 매달렸다.

    역시. 행복하다.

    이걸 위해서라면 난 뭐든 할 수 있을 거야.

    "으, 으음. 나왔는가."

    방문을 열고 나가자, 바로 문 앞에서 디아나가 엉거주춤 서서는 어색하게 손을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나한테는 전부 내 잘못이니 뭐니 한 주제에, 실은 정말로 미안하긴 했던 모양이다.

    "앗, 네…."

    레이아는 내 팔을 더더욱 강하게 끌어안은 채로, 어색하게 대답했다.

    레이아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어제 혼자 남겨지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디아나다.

    끌려 나가고 나서는 나 스스로 결정했다고 하지만, 결국 원인을 제공한 건 끌고 나간 디아나니까.

    난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면서 용서를 받았지만, 과연 레이아가 디아나도 쉽게 용서해줄까?

    …뭐 용서해주겠지.

    천사님이 괜히 천사님이겠어?

    잠깐동안 레이아와 디아나가 서로를 바라보면서 미묘한 정적이 흘렀다.

    레이아는 내 팔을 더더욱 꽉 끌어안으면서 디아나를 미묘한 표정으로 쳐다봤고, 디아나는 나와 레이아가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이 꽤나 신경 쓰이는지 계속 힐끔힐끔 쳐다보며 다리를 미묘하게 움찔움찔 떨었다.

    그리고 난 그 레이아가 꽉 끌어안는 바람에 더더욱 팔에 생생하게 전해지게 된 가슴을 감촉을 느끼고 있었다.

    일단 난 사과했으니 말이다.

    디아나야. 이젠 네 차례다. 어디 고생 좀 해봐라.

    그렇게 미묘한 대치가 이어졌지만, 디아나는 일단 사과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레이아양에겐 정말 미안하게 됐네. 이 몸이 오랜 세월에 걸쳐 드디어 반려를 만났다고 생각하니 너무 들떠서 말일세."

    꽤나 놀랐다. 디아나가 누구한테 머리를 숙인 건 처음 아니었던가?

    난 맨날 신경 안 쓰고 놀려먹어서 잊기 십상이지만, 이래 뵈도 그 펠리시아가 함부로 못 대할 정도로 높으신 분이다.

    설마 이렇게까지 미안해할 줄이야.

    "…반려? 구원씨, 결국 디아나씨를 선택…."

    "아니, 나한텐 레이아도 반려니까! 반지도 줬잖아?!"

    "앗, 그, 그런 건가요. 반려…."

    레이아는 아직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던 건지, 한 손으로 자신의 뺨을 감싸고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내 팔을 끌어안고 있는 손을 풀지 않는 것이 레이아의 좋은 점이다.

    "디아나씨. 괜찮아요. 고개를 드세요."

    "이 몸을 용서해주는 겐가?"

    "저도 디아나씨 마음은 이해하니까요."

    역시나 천사님. 이럴 줄 알았다니까.

    너무 이렇게 착하기만해서 지금까지 어떻게 세상을 살아왔는지 궁금할 정도다.

    그리고 앞으로 손해만 보고 사는 게 아닌가 걱정 된다.

    역시 내가 옆에 달라붙어서 지켜봐주지 않으면 안 되겠군.

    "앗, 그래도 대신 오늘은 제가 구원씨를 독점할 거예요."

    "으, 으음."

    레이아의 말에 디아나는 쓴 표정을 지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자기는 날 독점했어도, 다른 여자가 날 독점하는 건 싫은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내 하렘이란 상황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역시 싫은 건 싫은 건가.

    하긴 나 같아도 그럴 것 같기는 하다.

    미안한 말이지만, 이건 정말로 시간밖에 해결해줄 수 없는 문제다. 그냥 다들 익숙해지길 바라는 수밖에 없겠지.

    아무튼 디아나의 사과도 우리 천사님이 한없이 넓은 포용력으로 받아들여줘서, 같이 식당으로 향하게 됐다.

    그리고 식당으로 가자, 바네사가 불러온 건지 이미 사라가 식탁에 앉아있었다.

    "…왔나요."

    어, 어라? 어쩐지 엄청 노려보고 있는데?

    "사, 사라? 혹시 화났니?"

    "그럼 안 날거라고 생각했나요?"

    레이아한테 고백한 날 같이 밤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어겼다는 사실이 너무 임팩트가 커서, 지금까지 레이아만 신경 쓰고 있었다.

    솔직히 사라는 스스로 먼저 다른 여자들과 사귀는 것도 인정해 주겠다는 발언도 했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화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내 오산이었던 모양이다.

    다시 말투도 존댓말로 돌아간 걸 보니, 이거 상당히 화나있는 것 같은데.

    "저기, 레이아. 오늘 계속 같이 있어주겠다고 말한 직후라 미안한데, 아주 잠깐이면 되니까…."

    "싫어요."

    "으, 응?"

    "저번에도 그렇게 말하시고 절 내버려두셨잖아요?"

    용서해주긴 했지만, 그래도 천사님 안에서 내 말에 대한 신뢰도가 대폭 깎인 건 어쩔 수 없는 문제인 모양이다.

    자업자득이라서 뭐라고 할 말도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사라는 이대로 달랠까.

    "사, 사라야? 왜 그래? 너 내가 다른 여자하고 깊은 관계가 되도 인정해준다고…."

    "그건 당신이 절 소홀히 대하지 않았을 때 얘기죠! 당신 어젯밤은 제 차례였던 거 알고 있는 건가요?"

    …그러고 보니 순서대로 따져만 보면 그랬다.

    엄밀히 따지면 레이아와 약속했던 밤은 그대로 영주성에 끌려갔었던 날이다.

    어젠 사라 차례였지.

    "미, 미안."

    "게다가 그 모습! 레이아하고는 잘 풀린 모양이네요! 오늘도 레이아랑 보낼 셈인 거죠?!"

    "그, 그래도 레이아는 처음 고백하고 계속 방치되어있었으니까 네가 이해 좀 해주면 안 될까?"

    "저도 고백하고 며칠 안 지났거든요?!"

    "그래도 넌 고백한 당일엔 디아나 차례였는데도 밤 되기 전까지 실컷…앗."

    "…지금 그게 무슨 소린가?"

    실언이 나온 걸 인지하고 황급히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 일단 진정하면 안 될까? 디아나."

    "그냥 고백만 한 게 아니라, 그날 둘이서 실컷 같이 뒹굴기까지 했었다는 말인가!"

    디아나의 분노가 나와 사라를 향해 터져 나왔다.

    "사, 상관없잖아요. 어차피 차례는 밤에 누구와 지낼 건지 정한가고, 낮에는 뭘 하든."

    사라는 아예 정색하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그럼 이 몸도 아무 잘못 없지 않나! 이 몸도 낮에 저자를 끌고 다닌 것 밖에 없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디아나는 어제 밤새도록…."

    "이 몸도 밤에는 별로 같이 못 있었네! 저 자는 어젯밤에 다른 여자와 뒹굴었으니 말일세!"

    "자, 잠깐만! 디아나 너 오해받을 소리 하지 마라!"

    "뭐가 오해받을 소리인가?! 이 몸이 어디 틀린 말 했나?!"

    "아니 여러모로 생략이 너무 됐잖아?! 난 어쩔 수 없이…."

    "뭐가 어쩔 수 없었나! 자네가 조심만 했으면 벌어지지도 않았을 일 아닌가?!"

    크윽. 난 대체 언제 얘한테 정론대결에서 한 번 이겨보냐.

    "…구원씨."

    디아나와 사라의 설전을 가만히 옆에서 듣고만 있던 레이아가 나지막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설명해주실 수 있죠?"

    "무, 물론이지."

    레이아에게 묘한 박력을 느끼면서, 난 그제와 어제 벌어졌던 일들을 필사적으로 설명했다.

    권력과 무력을 앞세운 펠리시아 공주에게 덮쳐진 가련한 나.

    그리고 그 와중에 발동한 성역 선포가 실비아에게도 영향.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실비아와의 성교.

    그리고 밝혀지는 실비아의 기구했던 운명.

    성자 스킬을 이용해 실비아를 구원해준 것까지.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드라마가 한 편 완성됐지만, 우리 여자들의 반응은 냉혹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전부 구원 잘못이라는 거잖아요."

    "이 몸이 말하지 않았나."

    "구원씨, 왜 더 조심하지 못하신 건가요?"

    사라와 디아나는 원래 저러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레이아의 저 말과 책망하는 것 같은 눈동자가 내 심장을 사정없이 쑤셔댔다.

    "정말로 구원을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은데요?"

    "동의하네."

    "역시 다른 분들이 보기도 구원씨는 매력적이신 분이니까요."

    이상하다. 분명 아까까진 자기들끼리 싸우는 분위기였는데.

    어느 샌가 내가 공적이 돼서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분위기가 됐다.

    "역시 한명은 꼭 달라붙어서 감시하는 편이…."

    "차라리 정조대를…."

    게다가 점점 더 얘기가 뒤숭숭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안 된다.

    내 본능이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자, 잠깐만 기다려! 아무리 그래도 정조대는 너무하잖아?! 너희들 날 그렇게 못 믿는 거야?!"

    "당신이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그래. 확실히 내가 좀 이성보다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경향이 있기는 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희들을 향한 마음이 변하는 건 아니야. 내가 몸과 마음이 같이 따라가는 게 아니란 건 누구보다 사라 네가 잘 알잖아?"

    "으윽!"

    그 말에 사라는 날 책망하던 걸 잠깐 멈췄다.

    사라도 내가 뭘 얘기하는지 잘 알 거다.

    바로 케이트 얘기다.

    그렇게 몸을 겹쳤지만, 결국 난 케이트에게 전혀 마음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복수를 위해 케이트를 안아달라고 했던 사라이기 때문에, 더더욱 내 말을 긍정할 수밖에 없을 거다.

    "다시 한 번 말할게. 사라야. 오빠 믿지?"

    "그야…. 믿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른 여자랑 자게 된 건 미안해. 하지만 설명한대로 정말 어쩔 수 없어서 그랬었다니까."

    "…응."

    좋아. 설득했다.

    "훈훈한 분위기를 풍기는 와중에 미안하네만, 이 몸은 자네를 못 믿겠네. 애초에 갑자기 사라양이 설득된 이유도 모르겠군."

    훗. 디아나야. 사라가 설득된 이상, 너 혼자만의 발악은 아무런 소용이 없단다.

    "레이아는? 레이아는 나 믿지?!"

    "네?! 네. 물론 구원씨는 믿어요."

    갑자기 자기한테 얘기가 돌려져서 깜짝 놀랐는지, 레이아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역시 천사님. 천사님은 그렇게 말해줄 거라고 믿었어요.

    "사라도 레이아도 이렇게 날 믿어주는데, 디아나는 날 못 믿는 거야? 설마 고백한지 며칠 됐다고 벌써 사랑이 식은 건…."

    "그, 그럴 리가 있겠나?! 그런 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뭐야?! 정조대라니. 어떻게 그렇게 끔찍한 발상을 할 수 있어?! 날 향한 네 마음은 고작 그 정도야?!"

    "우웃. 그, 그것이…."

    이겼다.

    디아나의 말문이 막힌 순간, 난 승리를 확신했다.

    너무 쓰레기같이 이긴 거 아니냐고?

    정조대 같은 걸 차고 다니는 것보단 쓰레기가 되는 게 나아!

    "애, 애초에 사라양은 갑자기 왜 저자에게 설득당한 겐가?!"

    "하지만, 정말로 마음이 흔들리진 않을 거라고 믿는 걸요. 어차피 본처는 저고…."

    "잠깐 기다리게. 뭔가 그 말투는. 마치 자네만 본처인 것처럼 얘기하지 말게."

    그리고 또 갑작스럽게 사라와 디아나의 혈투가 다시 벌어지기 시작했다.

    "앗, 그렇군요. 그래도 어차피 처음은 저니까요."

    "어, 어, 어쩌다 고백은 자네가 먼저 했을지 모르겠네만, 애초에 이 몸은 저자와 미래를 약속하고 있었네! 확정되는 게 조금 더 빨랐다고 해서…."

    "하지만 먼저 만난 것도 저고, 애초에 전 구원이 꼬드겨서 파티가 됐는걸요? 구원도 그때부터 날 좋아했던 거지?"

    화, 화살을 이쪽으로 돌리지 마라.

    "아니, 뭐, 예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솔직히 처음 만났을 땐 사랑보단 성욕 때문에 들이댄 거였긴 하지만, 그걸 말할 수는 없지.

    "그것 봐요. 저도 처음 봤을 때부터 구원이 신경 쓰였어요. 앗, 그런 구원하고 난 디아나를 만나기 전부터 서로 좋아한 거네? 고백이 너무 늦었잖아."

    "그, 그래도 어차피 결국 승자는 이 몸일세! 어차피 이 몸의 허락이 없는 한 저자의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말일세! 저자에게 피임 마법을 걸고 있는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겐가!"

    잠깐만. 뭐야 그거. 나도 지금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그런 건 다른 마법사한테 풀어달라고 하면…."

    "이 몸의 모든 마법사들이 존경하는 지고의 대마법사! 게다가 이미 저 자는 이 몸의 남자라고 영주성에서 공표까지 했네! 그 상황에서 다른 마법사가 저 자의 몸에 손을 댈 것 같은가?"

    …진짜네. 그럼 나 진짜로 디아나 허락 없이는 다른 애들이랑 애 못 가지는 거야?

    "그럼 제가 오늘부터 마법 배울 거예요!"

    사라는 용사 보정으로 진짜로 쉽게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서 무섭다.

    용사 보정이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상황을 대체 어쩌면 좋지? 역시 내가 나서는 게 낫겠지?

    솔직히 저 지뢰밭 사이로 돌진하긴 무섭지만, 그래도 이것도 하렘을 꾸린 자로서의 숙명. 받아들이자.

    본처고 뭐고 그런 게 어디 있어. 다들 똑같이 좋아하는데.

    "구원씨."

    내가 사라와 디아나 사이를 중재하려고 했을 때, 옆에 있던 레이아가 내 팔을 더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서 조용히 식사를 하긴 힘들 것 같은데, 그냥 방에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고 저흰 방으로 갈까요?"

    레이아가 포근한 목소리로 그런 달콤한 제안을 해왔다.

    난 다시 한 번 시선을 식탁 쪽으로 향했다.

    용사와 대마법사가 내 본처 자리를 놓고 박 터지게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래. 저 피 튀기는 곳 사이에 내가 굳이 들어갈 이유가 뭐 있겠어.

    둘 다 적당히 싸우다가 지치면 알아서 관두겠지.

    서로 말싸움을 하느라 이쪽에 신경을 안 쓰게 된 사라와 디아나를 뒤로 하고, 난 레이아와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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