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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아의 마음
레이아의 이름을 외치며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문은 굳게 잠겨서 열리지 않았다.
"레, 레이아? 레이아 누님? 천사님? 저 왔는데요? 잠깐 문 좀 열어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아무리 문을 두드려 봐도, 방 안에선 그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거 내 얼굴도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이지?
망했다. 우리 천사님이 제대로 화나셨나봐.
"정말로 레이아가 여기 있는 거 맞을까? 혹시 없는 거 아닐까?"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막상 이런 일이 닥쳐오니 현실도피가 하고 싶을 정도였다.
"적어도 레이아님이 저택에서 나가시는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등 뒤에서 내 현실도피를 차단하는 냉정한 대답이 들려왔다.
언제 따라온 건지, 바네사가 조용히 내 뒤에 서있었다.
난 분명 전력질주해서 왔는데, 어떻게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멀쩡한 얼굴로 저기 서있을 수 있는 거지?
대체 집사란 건 스탯 보정이 어떻게 되먹은 직업인 거야.
"생각보다 상황이 더 심각한 것 같구먼."
그리고 뒤늦게 따라온 디아나가 복도 저편에서 다가오면서, 내 모습을 보고 말했다.
"이거 어떻게 열 수 없어?"
"왜 없겠나. 하지만 맘대로 열고 들어가도 되겠나?"
"으윽…. 그야 화내겠지. 그래도 이대로 있는 것 보단 훨씬 나을 거야. 열어줘."
"흠. 알겠네."
디아나가 눈짓을 하자, 바네사가 주머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몸에 딱 맞는 집사복을 입고 있는 바네사의 주머니에 도저히 들어갈 것 같지 않아 보이는 크기의 열쇠 꾸러미였다.
저 집사복, 설마 주머니가 아공간 주머니 같은 건가.
역시 대마법사의 집사. 마법을 얼마나 처바른 옷인 거야.
아무튼 바네사는 열쇠로 문을 열어주고, 다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분명 열쇠 소리가 들렸을 텐데도, 여전히 방에선 그 어떤 반응도 없었다.
"그냥. 나 혼자 들어갈게. 디아나 넌 같이 사과하러 안 와도 돼."
"그래도 괜찮겠나?"
"응."
이렇게까지 레이아가 화난 상태에서 주범인 디아나가 같이 들어가면 오히려 역효과만 날 것 같았다.
차라리 지금은 내가 먼저 들어가고, 디아나는 나중에 혼자 사과하라고 하자.
요동치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려 노력하면서, 구원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곧장 레이아의 모습이 눈에 띄지는 않았다.
설마 진짜로 집 나간 거 아니야? 바네사가 못 본 것뿐이고?
하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그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침대의 이불 위쪽으로 황금빛 세모난 귀가 빼꼼 나와 있는 게 보였다.
두껍고 푹신푹신한 이불 아래 있다 보니, 아무리 레이아의 볼륨감 넘치는 몸매라도 티가 안 났던 모양이다.
자, 자나?
하지만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귀가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역시 그럴 리가 없지.
"저기…레이아?"
하지만 레이아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간신히 귀만 살짝 보이는 상태로 엎어져서 레이아는 철저히 반응하지 않을 속셈인 것 같았다.
침대 머리맡까지 다가갔지만, 여전히 레이아는 엎드려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이쪽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정말 미안해!"
나는 그 자리에서 바닥에 쿵 소리가 나도록 무릎을 꿇고 빌었다.
끌고 간 건 디아나니 뭐니 변명을 해봤자, 결국엔 내가 선택한 거다.
전부 내 잘못이니, 변명해봤자 아무 소용없는 짓이다. 그저 용서를 바라며 빌 수밖에.
내가 너무 요란하게 무릎을 꿇자 깜짝 놀란 건지, 아마 레이아의 엉덩이가 있을 거라고 짐작되는 곳의 이불이 위로 살짝 들어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다.
"정말 미안해! 그런 약속을 해놓고도…!"
"…약속."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어서 목소리가 잘 들리진 않았지만, 레이아가 뭔가 말하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잠깐 사과의 말을 멈추고, 레이아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였다.
"약속…지키실 거라고…믿고 있었는데. 계속…기다렸는데…."
크허억.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심장에 꽂혀온다.
저 대사만으로도 약속을 어긴 자신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죄악감이 샘솟는데, 목소리마저 애달프기 그지없어서 그 효과는 배가 됐다.
"으윽…미, 미아…."
"…구원씨는 거짓말쟁이."
내가 재차 사과를 하려고 했을 때, 레이아가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려서 한쪽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며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그 눈동자는 아마 밤새 울었는지 새빨개져 있어서, 내게 마무리 일격을 가하는 데 충분한 위력을 발휘했다.
"으윽. 레, 큭, 레이아. 정말, 정말 미안해. 내가, 내가 생각이 없어서…."
지금까지 무의식중에 외면하고 있던 죄책감이 레이아의 새빨개진 눈동자를 보자 폭발해서, 볼썽사납게도 눈물이 나버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남자답지 못하다든가 그런 문제가 아니다.
잘못은 내가 다 해놓고, 뭘 잘했다고 뻔뻔하게 우는 거야. 이 이상 없을 추태잖아.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어떻게든 눈물을 멈춰보려고 했지만, 한번 터진 눈물샘을 마를 줄을 몰랐다.
"구, 구원씨?! 지금 우는 거에요?!"
내가 갑자기 질질 짜기 시작하자, 역시 천사 그 자체이신 우리 레이아 누님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나보다.
아까까진 이쪽을 보지도 않으려고 했으면서, 화들짝 놀라서 상체를 일으키고 내 쪽을 쳐다봤다.
그렇게 드러난 레이아의 두 눈은 완전히 새빨갰고, 지금까지 레이아의 얼굴이 파묻혀있었던 베개는 딱 봐도 색이 진한 것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 모습에 미안함이 더 폭발해서, 내 눈물샘도 더더욱 폭발해버렸다.
"미안해. 레이아. 내가 생각이 없어서 미안해. 멍청해서 미안해."
너무 강하게 깨물어 피가 터져버린 아랫입술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사과했다.
"자, 잠깐. 진정해요 구원씨.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울지 마시고…."
"아니야. 괜찮지 않아. 정말 미안해. 근데 대체 어떻게 사과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바보라서 미안해."
누가 봐도 레이아가 동정심 때문에 저러는 건 명백했다.
지금 이 상황은, 그저 쓰레기같은 내가 착한 레이아의 동정심을 자극해서 사태를 모면하려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선 안 된다. 물론 내가 쓰레기라는 건 부정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런 때까지 그러고 싶진 않았다.
동정심이 아니라, 제대로 레이아의 마음을 풀어줘서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그래서 레이아의 말을 부정하면서 사과의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사과하면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대체 어떻게 해야지 용서를 구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덤으로 터져버린 눈물샘도 마를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구, 구원씨. 괜찮아요. 괜찮으니까요. 울지 마세요."
레이아는 침대에 내려와서 자신의 가슴에 내 얼굴을 감싸 끌어안고, 그렇게 다독여줬다.
하지만 레이아가 저렇게 나올수록 죄책감은 더더욱 강해져서, 오히려 눈물이 점점 더 기세 좋게 쏟아져 나올 뿐이었다.
얼마나 죄책감이 강했는지, 뺨에 레이아의 가슴이 마구 문대지는 상황에서도 행복한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 평소라면 환장을 했을 텐데.
"미안해. 내가 죽일 놈이야."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인 걸요?"
레이아는 내 얼굴을 끌어안고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레이아는 왜 이렇게 대책 없이 천사 같은 거야.
잘못한 건 난데 왜 레이아가 날 달래주고 있는 거야.
일단 내가 울음을 그치지 않는 이상 계속 이런 상황이 유지될 것 같았다.
우선 심호흡이라도 하면서 울음부터 멈추자. 제대로 사과하는 건 그 다음이다.
하지만 심호흡을 하면서 호흡을 가다듬으려고 해도, 좀처럼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눈물이 많은 타입은 아닌데, 이상할 정도로 계속 눈물이 나네.
"이제 조금 진정이 되셨나요?"
그렇게 레이아의 품안에서 한참을 훌쩍인 다음에야 겨우 울음을 멈춘 날 가만히 쓰다듬으면서, 레이아가 여전히 천사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여서 미안해."
"아뇨. 구원씨의 그런 모습은 처음 봐서, 조금 귀여웠어요."
으으윽. 그러니까 왜 이렇게 천사 같은 거예요! 사실 진짜 천사 맞지?! 실은 날개도 꺼낼 수 있는 거지?!
이대로라면, 내가 약속을 깬 것도 흐지부지 넘길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럴 순 없지.
쓰레기라도 쓰레기 나름대로의 선이란 게 존재한다.
이번 일은 제대로 사과하고 용서를 받아야 할 일이야.
적어도 난 여전히 붉은 레이아의 눈가를 보고 그냥 넘어갈 수 있겠다고 좋아할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었다.
"약속을 어긴 거 정말 미안해."
레이아의 품에서 살짝 떨어져 레이아 마주보고, 고개를 푹 숙이면서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사과했다.
"…괜찮아요. 사실 구원씨가 돌아오지 않으셔서, 많은 생각을 했었어요. 혹시 이대로 버려지는 걸까? 날 좋아한다고 해줬던 건 그냥 동정심이 아니었을까? 역시 늦게 만난 나같은 것 보다 구원씨는 사라씨나 디아나씨가 더 좋은 게 아닐까…."
"그,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런 거 아니야! 절대 그렇지 않아! 누굴 더 좋아하고 누굴 덜 좋아한다니! 내 주제에 어떻게 그래?! 하물며 동정심이라니! 절대 그런 거 아니야!"
레이아가 저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솓아올라 다시 한 번 눈물이 나올 뻔 했지만, 아까 너무 울어서 눈물샘이 마른 건지 이번엔 어떻게든 참을 수 있었다.
"네. 구원씨가 우는 걸 보고 저도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어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하지만 그렇게 쉽게 용서해주면 내가 납득이 안 돼. 어떻게든 널 울린 책임을 지고 싶어. 뭐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을까?"
"…네? 응…. 그러네요. 그렇다면 저도 사라씨처럼 반지라도…."
"그건 안 돼."
"네, 네에?!"
설마 거절당할 거라곤 생각 못했는지, 레이아는 살짝 울상을 지었다.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니니까 울지 말아요, 천사님.
레이아는 아직 디아나도 반지를 끼고 있는 것 못 봤으니 저런 요구를 한 거다.
인벤토리에서 레이아를 위해 샀던 반지를 꺼내 내밀면서, 거절한 이유를 말했다.
"반지는 원래 주려고 했던 거니까 그 걸로는 보상이 안 돼. 다른 요구사항을 말해봐."
"구, 구원씨…!"
하지만 레이아는 다른 요구사항을 말해보라는 내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반지를 보면서 감격스런 표정만을 지었다.
"이거 말고 또 바라는 거 없어?"
"그, 그렇게 말하셔도…."
"널 밤새 울린 거잖아. 네가 그런 기분이 들게 했는데 고작 이런 걸로 해결한다는 건 내가 납득이 안 돼. 부탁이야. 뭔가 내가 널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그러면…그러면 저도 디아나씨처럼 하루 종일같이 있어주세요."
"하, 하지만 고작 그런 걸로…!"
"고작 그런 게 아니에요. 전 구원씨하고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한걸요. 구원씨가 같이 있어주는 게 저한테는 무엇보다도 더 큰 보상이에요."
"레, 레이아아아!"
레이아가 너무 천사 같아서, 결국 다시 눈물샘이 폭발해버렸다.
나랑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는 애를, 하루 종일 방치했다니. 난 대체 얼마나 쓰레기인 거야.
레이아를 꼭 껴안고, 또 바보처럼 눈물을 주륵주륵 흘렸다.
"미안했어. 레이아. 이렇게 착한 레이아를 두고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정말이에요. 이제 저한테 소홀히 하면 계속 이번 일로 못살게 굴 테니까 각오하세요. 앞으로 조심하셔야 돼요."
레이아는 내가 갑자기 끌어안자 살짝 놀랐는지 몸을 움찔 떨었지만, 이내 날 마주 안아주며 살짝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응. 내가 앞으로 진짜 잘할게."
"후훗. 자, 그럼 구원씨. 입술 내밀어주세요."
으, 응? 여기서 키스하면 구미호가 될 텐데? 아니, 상관없나. 어차피 오늘은 하루 종일 레이아와 있기로 한 날이다. 대낮부터 구미호로 변하면 어때.
바로 떨어져서 레이아가 말한 대로 입술을 내밀었지만, 레이아가 하려는 건 키스가 아니었다.
레이아는 부드럽게 빛나는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가볍게 어루만져줬다.
살짝 따끔한 느낌이 지나가더니, 이내 간질간질한 느낌과 함께 입술이 치료되는 게 느껴졌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피 났었지.
힐끔 내려다보니 레이아의 가슴에도 내 입술에서 난 피가 묻어있었다.
"후훗. 키스할 줄 알았나요? 하지만 아직 안 돼요. 모처럼 구원씨를 독점할 수 있는 날인데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보내긴 싫은 걸요. 조금만 참아주세요."
레이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도 키스하고 싶다는 듯이, 부드럽게 내 입술을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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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아는 천사인데 왜 다들 얀을 외치시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