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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192화 (176/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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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주성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하아…."

    저택을 뛰쳐나온 디아나는, 가슴속에서 복잡하게 얽힌 감정을 다 토해내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지고의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이 몸이, 지성의 화신이라 자부하는 이 몸이 그렇게 감정만 앞세운 행동을 하고 집에서 뛰쳐나오게 될 줄이야.

    이번만 그런 게 아니다. 언제나 그렇다.

    구원과 함께 있으면 언제나 답지 않게 그만 감정적으로 행동해버린다.

    전부 구원이 문제다.

    이 몸이 세계 최고의 마법사로 추앙 받고 난 이후로 이미 셀 수도 없이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 몸과 대등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사람들은 전부 여신의 곁으로 돌아간 지 오래.

    이제 이 세계에는 얼굴만 마주쳐도 스스로를 낮추고 존대를 해오는 사람밖에 남지 않게 됐다.

    이 세계에서 자라지 않은 이방인이라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이 몸의 용모만 보고 들이대는 자들도 있었지만, 이 몸의 위치와 위상을 알게 되면 지레 겁먹고 아부를 떨기 바빴다.

    그에 반해 구원은 어떤가?

    이 몸의 정체를 알고 난 이후에도, 편히 말하라는 한 마디에 바로 반말을 한 녀석은 처음이다.

    그뿐인가? 구원은 그 이후로도 전혀 이 몸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아니, 어려워하기는커녕 이 몸의 외모만 보고 자신의 손아래 누이 취급을 할 때마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종종들 정도로 친근하게 대했다.

    너무 멍청해서 이 몸의 위치가 실감이 나지 않는 것 아닌가?

    그런 의혹도 들었지만, 가끔 이 몸이 화낼 때 바로 비는 걸 보면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하여간 이상한 남자다.

    덕분에 이 몸도 저 남자와 있다 보면 그만 과거의, 원시 마법을 연구하던 모임에서 가장 막내였던 시절의 이 몸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 같았다.

    그만 지금의 위치도 잊고 어렸던 시절로 돌아가 어리광도 부려보고, 감정적이 되기도 하고.

    그것 때문에 지금 이렇게 저택 밖에서 있는 거지만 말이다.

    하지만 구원도 구원이다.

    성자 특유의 정신을 쏙 빼놓는 쾌감을 절정에 달하기 바로 직전까지만 계속 주면서 애태우고, 그러면서 입으로는 계속 달콤한 말들을 쏟아냈으니까.

    안 그래도 신경 쓰이는 남자에게 저런 걸 당해버리면, 그만 이성보다 감성이 우선시 되어버리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래서 그만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구원의 제안을 승낙하는 대답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래선 안 되는데.

    하렘이라니. 절대 그럴 수는 없다.

    물론 이 몸 정도나 되는 사람이 다른 여자와 한 남자를 공유할 수 없다는 자존심 같은 것도 없다면 거짓말이 된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구원이 이 몸만을 바라봐주길 원하는 건, 이 몸뿐만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서 그러길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사라양이나 레이아양에게 미안하기는 하다.

    특히 사라양과 맺어진 다음에도 구원이 바로 저렇게 들이댔다는 걸 생각해보면, 사라양은 구원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들과의 관계를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것도 허락했다는 얘기겠지.

    그걸 생각해보면 더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구원이 저들과 영원을 맹세할 정도로 깊이 빠져들기는 원하지 않았다.

    구원이 그러도록 설득하기 위해선 이 몸의 사정을 전부 솔직하게 말하는 게 제일이겠지만, 지금까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 몸의 사정을 전부 밝히고 나서도 거절당한다면, 구원이 하렘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만 실패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구원이 이 몸과의 관계를 완전히 포기하고, 단절해버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 두려움 때문에 선뜻 사정을 밝히지 못했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사라양에게 추월당하고 말았다.

    그래도 이 몸과는 키스까지 약속한 사이였는데.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격식 없이 대하는 태도에 끌리게 된 것이지만, 그런 구원이기 때문에 이 몸과 키스를 약속하고도 다른 여자와 깊은 관계가 됐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이 몸과 키스를 약속한 이후엔 다른 여자와 대화하는 것도 눈치를 살폈을 텐데.

    아무튼 이렇게 뛰쳐나온 이상, 곧바로 저택에 다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지금은 머리를 식혔지만, 구원의 얼굴을 보면 또 다시 감정적으로 변하게 될 거다.

    우선 조금 돌아다니면서 머리를 더 식히자. 그리고 각오를 다지자.

    디아나는 그 와중에도 챙겨온 애용하는 로브를 푹 뒤집어쓰고, 마을을 돌아다니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서 정처 없이 무작정 돌아다니기만 하는 건 아니다. 각오를 다지기위해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구원과 추억이 있는 곳들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감정을 재확인하는 게 제일 좋겠지.

    우선은 제일 먼저 구원과 만났던 여관이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 처음 듣는 직업의 존재를 알고 구원에게 접근했었지. 그땐 설마 상대에게 이런 감정을 품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었지만.

    식당을 확인해보니, 그때 구원이 앉아있던 테이블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앉아있었다.

    으으음. 어쩔 수 없지. 기다리도록 할까.

    "손님? 왜 이런데서…."

    "신경 쓸 것 없네. 일 보게."

    살짝 곤란한 듯이 영업 스마일을 띠우며 다가오는 종업원에게 쿨 하게 대답하고, 디아나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렸다.

    식당에는 그 외에도 빈자리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꽤나 시선을 받았지만, 디아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남들이 힐끗힐끗 시선에는 익숙해진지 오래다. 시선을 받은 이유가 지금과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기다림 끝에 테이블이 비자마자, 디아나는 누가 또 앉을세라 잽싸게 테이블에 착석했다.

    아직 테이블이 치워지기도 전이 종업원이 살짝 당황했지만, 디아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역시 추억이 담겨있는 곳은 다르군.

    여신의 축복을 받았다고까지 칭해지는 뛰어난 머리덕분에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은 없지만, 여기 앉으니 구원과의 추억이 더 선명해지는 기분이었다.

    "저…손님? 주문하실 거라도 있으신가요?"

    한동안 추억에 잠겨있자니, 어느 샌가 테이블은 말끔히 치워져있었다.

    이런. 이 몸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렇게 시간가는 줄 모르고 멍하니 있다니.

    "음? 그렇군. 그렇다면 아침 식사를 하나 내주겠나. …그렇군. 이것과 이것, 그리고 이것도 주게나."

    디아나는 자신이 아침도 먹지 않고 뛰쳐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식사를 주문했다. 물론 구원과 처음 식사를 같이했을 때 시켰던 음식 그대로.

    식사를 마치고 여관을 빠져나온 디아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음엔 어디에 가볼까. 그렇군. 여관 다음에는 역시….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시야 한 구석에 익숙한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디아나는 반사적으로 숨고, 그대로 마법까지 사용했다.

    완전히 투명해지는 마법은 아직 레벨이 부족하여 사용이 불가능하지만, 그 비슷한 마법은 사용할 수 있었다. 이걸 사용하면, 이쪽을 유심히 보지 않는 이상 존재를 들키진 않을 거다.

    디아나가 봤던 사람은 급하게 달리느라 이쪽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방금 디아나가 나왔던 여관으로 들어가 버렸다.

    물론 그 사람이 누군지는 말 할 필요도 없겠지.

    바로 구원이었다.

    혹시 이 몸을 찾으러 나온 건가?!

    분명 싸우고 나온 것인데도, 디아나의 마음은 환희로 물들었다.

    으윽. 안되지 안 돼. 이렇게 쉬워서야 대체 어쩌자는 겐지. 진정하지 않으면. 아직 기뻐할 때가 아니지 않은가.

    디아나가 마음을 다잡는 사이, 구원이 실망스런 표정으로 터벅터벅 여관에서 걸어 나왔다.

    당연한 결과라네. 이 몸이 마법사 협회의 눈을 피해 몇 년 동안 자유롭게 다녔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일세.

    하지만 구원은 곧 마음을 다잡은 듯, 바로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디아나는 숨어서 바로 그 뒤를 쫓았다.

    구원이 도착한 곳은 바로 옷가게였다.

    그걸 안 순간, 디아나는 다시 한 번 감격했다.

    역시 이 몸을 찾으러 다니는 거였군! 게다가 이 몸과 마음이 완벽히 통하지 않는가! 이 몸이 가려고 했던 곳도 바로 여기였다네!

    디아나는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로브의 끝을 꽉 움켜쥐었다.

    이 옷가게는 구원이 이 로브를 사줬던 바로 그 곳이다.

    구원이 처음으로 이 몸에게 뭔가를 선물해줬던 곳.

    사실 선물이라고 하기엔 조금 어폐가 있었지만, 그래도 구원이 처음 뭔가를 준 곳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다.

    그래서 디아나는 저택에 돌아온 이후로도 쭉 이 로브만 입고 다니는 걸 고집하고 있었다.

    사실 저택에는 이 로브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호화로운 효과를 가진 로브들이 즐비해있지만, 굳이 사막 도마뱀의 숨통으로 강화까지 해가면서 특별한 효과도 없는 이 로브를 입고 다닌 거다. 구원이 처음 준 선물이니까.

    그리고 구원이 여관 다음에 바로 이곳으로 왔다는 건, 이 로브를 특별히 생각하는 게 디아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마치 서로의 마음이 완전히 통한 기분이 들어서, 디아나는 옷가게로 들어가는 구원의 뒷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게 보였다.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끌어안아주고 싶었지만, 디아나는 꾹 참았다.

    싸우고 뛰쳐나갔던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끌어안는 건 너무 이상해보일 거고, 자칫하면  구원의 하렘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또 하나, 구원이 이다음에 어디로 갈지가 너무 기대됐다.

    이 몸을 찾으러 다니는 이상, 구원이 돌아다닐 곳은 분명 이 몸과의 추억이 있는 곳일 터.

    디아나는 아까 느낀 그 마음이 통하는 느낌을 다시 한 번 맛보고 싶었다.

    좋아. 이 몸도 생각해보도록 할까. 다음 갈 곳은…그렇군. 클랜 신청을 위해 옷을 사러 갔던 옷가게? 아니지. 순서를 따지자면 그 전에 휴일에 돌아다녔던 곳을 먼저 들리겠군.

    디아나는 앞으로 구원이 갈 곳을 예상하면서, 구원의 뒤를 미행했다.

    그렇게 구원이 디아나를 찾아다니고, 디아나는 그 뒤를 미행하는 시간이 한동안 계속됐다.

    구원이 가는 곳과 디아나의 예상했던 곳이 완벽히 일치할 때마다, 디아나는 구원과의 연결이 더 강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역시 이 몸의 마음에 거짓말은 할 수 없겠군.

    이 몸은 구원과 함께 있고 싶다.

    그리고 구원도 반드시 그럴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사정을 말하면, 구원도 반드시 이해해줄 테지.

    디아나는 그동안 다잡을 수 없었던 마음을 드디어 다잡을 수 있었다.

    좋아. 구원에게 제대로 말하자.

    …마지막으로 구원이 어디로 가는지 확인하고.

    솔직히 구원과 디아나가 함께 갔던 곳은 전부 들른 것 같아서, 디아나도 더 이상은 짐작 가는 곳이 없었다.

    구원도 그건 마찬가지인지 한동안 멈춰 서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래도 뭔가 생각난 곳이 있는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디아나는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구원의 뒤를 쫓아갔다.

    그리고 구원이 도착한 곳은 신전이었다.

    으음? 신전? …그러고 보니 이곳도 구원과 오기는 왔었던 곳이지. 이 몸보다는 레이아양과의 추억이 어린 곳이니 생각지 않고 있었지만.

    구원도 이 몸이 신전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온 건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구원의 발걸음이 너무도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구원이 도착한 곳은 대사제가 있는 곳이었다.

    그러고 보니 구원은 대사제에게 교육 같은 걸 받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대사제라면 모든 걸 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조언을 들으러 온 건가?

    하지만 잘못 생각했네. 이 몸을 찾을 거면 차라리 아까 길드에 갔을 때 길드장을 찾아가는 게 더 나았을 걸세.

    그쪽이 디아나와 친분도 있으니, 그나마 디아나가 갈만한 곳을 더 제시해줄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뭐, 구원도 최선을 다 해서 생각한 후에 이곳에 왔을 테니까 비난할 수는 없지.

    그럼 이쯤 돼서 그만 나타나줄까.

    이미 각오는 다졌다.

    이제 구원에게 사실을 말하고, 받아들여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디아나는 자신에게 걸어뒀던 마법을 풀고, 방문의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디아나가 막 방 문을 열려고 했을 때, 안쪽에서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사제님! 안녕하세요! 갑자기 들이닥쳐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레이아는 어디 있나요?!"

    디아나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또 뭔가가 뚜둑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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