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83화 (167/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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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아의 진심. 그리고 디아나, 또 다시

"레이아라면 지금쯤 언제나 가는 고아원에 가있을 거예요."

그리고 구원은 당장 신전으로 향해서, 대사제에게 레이아의 행방을 물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잠깐만요. 어디 가려는 거죠?"

"네? 그야 당연히 레이아한테…."

"교육을 받으러 온 게 아니었나요?"

"아, 아하하. 저기, 그게, 오늘은 조금 바쁜 일이 생겨서요. 나중에 다시 올게요."

"…그러고 보니 어젯밤엔 그 애가 오랜만에 여기서 잤었죠. 혹시 레이아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겠죠? 전에도 얘기했다고 생각합니다만, 우리 레이아를 울리면 가만두지 않겠어요."

"무, 무슨 일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잠깐 오해가 생긴 것뿐이에요. 대사제님이 보기엔 제가 레이아를 울릴 놈으로 보입니까?"

마치 장모님에게 압박받는 사위가 된 심정으로, 구원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서, 저도 당신에게 조금 신뢰가 생기고 있었어요. 모쪼록 제 신뢰를 배신하지 않기를 바라죠."

"무, 물론입니다. 믿어주십쇼! 그럼 오늘은 이만!"

대사제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압박감을 뒤로 하고, 구원은 재빨리 고아원으로 향했다.

빈민가라는 이름답게, 거리는 정리가 전혀 되어있지 않아서 고아원으로 가는 길은 상당히 복잡했다. 하지만 맵이 있는 구원에게 한 번 가본 곳을 다시 찾아가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고아원에 도착하자, 레이아가 건물 밖에서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었다.

아이들과 놀아주며 언제나처럼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레이아를 보고, 구원은 조금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그래. 저 미소야. 저 미소가 바로 내 마음의 안식처야.

아직 이쪽을 알아채지 못한 레이아에게 다가가며, 구원은 큰 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레이아!"

"엣?! 아…. 구, 구원씨…."

하지만 레이아의 그 환한 미소는, 구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순식간에 흐려졌다.

"여긴…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이냐니?! 그야 당연히…!"

구원은 레이아에게 당장이라도 자신의 진심을 전하고 싶었지만, 숨을 고르고 참았다.

디아나를 설득할 때 실패한 것도, 이렇게 서두르다가 행동이 앞서서 그렇게 된 거다. 조금 진정하자.

그리고 레이아와 진심을 털어놓기엔 주변에 시선이 너무 많았다.

일단은 평소처럼 행동하면서 레이아의 저 슬픈 표정부터 조금 완화시키고, 기회를 노리자.

"당연히…네가 여기 있다는 소리를 들어서 왔지. 전에 말 했잖아. 여기 올 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꼭 나랑 같이 오자고."

"하, 하지만…."

"뭐하고 있었어? 도와줄게."

그때 꼬맹이들도 구원을 발견하고 이쪽에 다가왔다.

"앗, 레이아 누나 남자 친구다!"

나이스 어시스트다. 꼬맹이들아.

그동안 귀찮은 것도 무릎 쓰고 좀 놀아준 보람이 들게 만들어주는구나.

"얘, 얘들아! 그런 거 아니야! 구원씨한테 실례잖니!"

레이아는 평소보다 강한 어조로 아이들을 타일렀다.

"괜찮아. 애들한테 왜 그래? 레이아답지 않게."

"하, 하지만…!"

"괜찮다니까. 자, 얘들아. 형이랑 뭐하고 놀까."

구원은 일단 평소처럼 애들을 데리고 놀아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곤혹스런 표정을 짓던 레이아도 일단은 다시 아이들을 보살피기 시작했다.

"어머? 왔네요. 오늘은 웬일로 세트로 안 오나 싶었더니."

그리고 곧 고아원 안쪽에서 크리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리스의 말로 보나, 아까 대사자와의 대화로 보나, 레이아는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과 무슨 일이 있었다는 티를 내지 않았던 모양이다.

마냥 가련하게만 보이지만, 심지가 굳다고 해야 할지. 역시 레이아다.

"그냥 조금 늦잠을 자서. 너도 마나풀 서식지에서 나왔나보네?"

"그럼요. 그때부터 얼마나 지났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보다 당신."

"응?"

"레이아랑 무슨 일 있었죠?"

말 자체는 의문형이었지만, 크리스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느껴졌다.

어, 어라? 레이아가 티 안내고 있었던 거 아니었어?

"…어떻게 알았어? 레이아가 말해줬어?"

"레이아가 자기 힘든 일을 다른 사람한테 말할 리가 없잖아요? 당신 레이아랑 같이 다닌 시간이 얼만데 아직까지 그런 것도 몰라요? 그냥 보면 알아요. 저기 안보여요? 레이아가 당신을 볼 때만 마치 비극의 여주인공 같은 표정이 되잖아요."

진짜다. 구원이 레이아 쪽을 보자 레이아는 바로 고개를 홱 돌렸지만, 그 사이에 힐끔 보인 레이아의 표정은 확실히 크리스가 말한 대로 비극의 여주인공 같은 표정이었다.

"…괜찮아. 약간 오해가 생긴 것뿐이야. 내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어. 맡겨둬. 대사제님한테도 그렇게 얘기하고 왔는걸."

"꼭 그러길 바랄게요. 레이아를 울리면 대사제님한테 갈 것도 없이 제가 당신 가만 안 둘 거예요."

크리스는 구원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 아이들에게 향했다.

이거 왠지 점점 더 부담감이 심해지는 걸?

아니. 어차피 여기서 제대로 못하면 레이아를 잃을 뿐이다. 그것보다 더 끔찍한 것도 없으니, 부담감이 더 심해질 것도 없지.

구원은 아이들과 놀아주면서 기회를 살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의 낮잠 시간이 돼서야 겨우 레이아와 조금 얘기할 시간이 생겼다.

"레이아. 오늘은 왜 나한테 얘기도 없이 혼자 온 거야?"

"하, 하지만…. 사라씨가…. 구원씨야 말로 사라씨와 같이 안계시고 여기 오셔도 괜찮으세요?"

"당연히 괜찮지. 왜? 내가 너 도와주러 오면 사라가 뭐라고 할까봐?"

"그,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구원씨는 이제 사라씨와…."

레이아는 가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꼬리도 귀도 힘없이 축 쳐져서, 보는 내 마음이 쿡쿡 쑤실 정도로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역시 우리 천사님한테 이런 모습은 어울리지 않아.

한시라도 빨리 레이아에게 내 진심을 전하지 않으면.

하지만 막상 얘기를 하려고 하니, 꽤나 용기가 필요했다.

디아나의 경우와는 다르다. 디아나는 그 누구에게도 한 적 없는 키스를 약속한 것도 있어서, 얘기만 제대로 하면 날 확실히 받아들여 줄 거라는 확증이 있었다.

…뭐, 그 얘기도 제대로 못해서 이 지경이 되기는 했지만. 아무튼 디아나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레이아는? 아무것도 없다.

있는 거라곤 요즘 레이아와도 분위기가 좋았다는 구원 혼자만의 생각과, 사라와의 관계를 알리자 레이아가 슬퍼했다는 정황상 증거뿐이다.

만약 레이아가 날 좋아한다고 해도, 그 마음이 과연 내 하렘 선언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클까? 솔직히 자신이 있다고 말하면 거짓말이 된다.

그래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레이아. 잘 들어. 그래. 난 사라와 깊은 관계가 됐어."

"흐윽."

구원이 말하자, 레이아가 마치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축 처진 귀를 양 손으로 접듯이 덮어버리고, 고개를 저었다.

구원은 그런 레이아의 손목을 붙잡아 귀에서 떨어뜨려놓고, 말을 이어나갔다.

"들어봐 레이아. 하지만 내가 사라와 깊은 관계가 됐다고 해서…."

"레이아. 슬슬 환자분들을 보러…어머."

구원이 레이아에게 마음을 토하려고 했을 때, 마치 노리기라도 한 것 같은 타이밍에 방해가 들어왔다.

"크리스 너…."

"어머. 미, 미안해요. 중요한 얘기 중이었나 보네요? 그런 전 밖에서 기다릴게요."

다행히 크리스는 눈치가 빨라서, 금방 자리를 비켜줬다.

하지만 크리스가 자리를 피해줬다고 해서, 이미 깨진 분위기까지 원상복구 되는 건 아니었다.

"…기, 기다려요, 크리스! 저도 지금 갈 거예요."

레이아는 자리를 벗어날 기회를 얻었다는 듯이 순식간에 크리스를 따라가 버렸다.

"그대 안에 혼돈이 있소."

어느 샌가 다가온 카일이 한 손을 구원의 어깨에 얹으며 말했다.

시끄럽다. 고자 돼서 강제 해탈한 짝퉁 땡중놈아.

카일의 손을 뿌리치고, 구원은 레이아의 뒤를 쫓았다.

밖에 나가자, 크리스가 이쪽을 보며 미안하다는 듯이 두 손을 모았다.

늦었다, 이것아. 넌 내가 레이아랑 잘 되길 기도해라. 잘못되면 평생 원망해줄 테니까.

그리고 빈민가를 돌아다니면서 치료를 하는 동안, 아까까지는 볼 수 없었던 레이아의 이상 행동이 시작됐다.

레이아는 평소에 빈민가 사람들을 치료할 때도 손에 빛을 두르고 치유 마법을 사용해왔다.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신성력을 아끼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을 치료해 줄 수 있다는, 레이아 특유의 천사 같은 마음씨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오. 레이아님. 오늘도 치료를…잘 부탁드립니다."

"앗, 네…. 에잇."

허리에 문제가 있는지 웬 노인이 상체를 걷고 허리를 내밀자, 레이아의 손이 방황했다. 그리고 레이아는 어째선지 구원의 눈치를 보더니, 손을 허공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노인의 허리에 직접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오, 오늘은 직접 어루만져주시지 않는 겁니까?"

"네? 앗, 네. 그게, 이제는 저도 성장해서 이 정도는 괜찮아요."

레이아의 대답에 노인은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역시나 저런 노인일지라도, 레이아가 직접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는 걸 기대했던 모양이다.

쌤통이다 이것아.

마치 너 때문이라고 하는 것처럼 이쪽을 노려보는 노인에게 구원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그 다음 환자도, 또 다음 환자도, 레이아는 직접 손을 대지 않고 치료를 했다.

레이아가 성장을 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건, 그 다음 환자에서 밝혀졌다.

다음 환자인 여성 환자에게는 평소처럼 손을 대서 치료를 한 거다.

그렇다면 아까 그 변명은 뭐였던 거지?

설마 거짓말을 한 거야?

그때부터 구원은 레이아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눈치 챘다.

레이아는 남자 환자들을 대상으로 할 때 치료만 신성력 소모가 더 큰 원거리 치료를 하는 게 아니라, 아예 접촉 자체를 피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구원도 레이아가 다른 남자를 피하는 건 좋았다.

하지만, 그래도 저건 아니다. 저런 건 평소 천사 같은 레이아로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행동이다.

구원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레이아의 손을 붙잡았다.

"레이아, 잠깐 나 좀 봐. 크리스, 미안한데 잠깐만 혼자서 치료 하고 있어줘."

"구, 구원씨…?!"

"네? 혼자서는…! 다, 다녀오세요."

크리스는 불평을 하려고 했지만, 구원이 노려보면서 입을 벙긋벙긋하자 금방 말을 바꿨다.

제대로 입모양을 읽은 모양이다. ‘아까 방해’ 라고 한 입모양을 말이다.

그리고 구원은 레이아를 데리고 무작정 사람이 없는 곳으로 향했다.

"구, 구원씨. 어디에 가시는 거예요?"

레이아는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상황도 마음에 안 든다. 레이아가 나를 향해 저런 목소리를 내다니. 역시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간에 확실히 할 필요가 있겠어.

구원은 레이아를 데리고 좁은 골목길로 들어간 다음,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레이아. 우리 얘기 좀 하자."

"얘, 얘기요? 이런 곳에서요?"

레이아의 불안한 표정과 몸짓을 보고, 구원은 괜히 더 슬퍼졌다.

그리고 천사님을 저렇게 만든 자기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갑자기 이런 데로 끌고나온 건 미안해. 그래도 도저히 당장 얘기하지 않으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어, 어떤 얘기를…."

"…그렇군. 일단, 레이아. 오늘 조금 이상했잖아? 왜 그런 거야?"

솔직히 바로 하렘 선언부터 할 용기는 없어서, 구원은 비겁하지만 일단 변화구를 던졌다.

레이아가 먼저 자신의 심경을 말해주도록 말이다.

"이, 이상하다니요? 저는 평소처럼…."

"아니. 전혀 평소 같지 않았어. 성장을 해서 신성력 소모가 더 큰 방법으로 치료를 해도 된다니. 내가 아는 레이아라면 절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아. 내가 아는 레이아라면, 아무리 자기 자신이 성장해도 계속 효율적인 방법으로 더 많은 사람을 치료해주려고 할 거야."

구원의 말에 레이아의 눈동자가 거세게 떨렸다.

하지만 곧 레이아가 구원을 원망스런 눈동자로 쳐다봤다.

"구원씨가…구원씨가 절 얼마나 아신다고 그런 말을 하시는 건가요?"

마냥 천사 같던 레이아가 저런 표정으로 저런 말을 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서, 구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전편에서 구원이 디아나를 찾으러 뛰쳐나가는 부분부터 내용을 전부 수정했습니다.

디아나를 찾다가 포기하고 레이아부터 찾아가는 방향으로요.

앞으로 생각해둔 전개로 가려면 이쪽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아서요.

Damaoka, 슈리온 //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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