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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
"그…너만 괜찮다면, 우리 클랜 하우스에서 지내지 않을래?"
"네? 그, 그 말은 저도 구원씨 파티에…."
역시나 케이트가 원했던 건 이거였다는 듯이 케이트의 얼굴빛이 확하고 밝아졌다.
하지만 구원은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다.
"아니. 미안해. 우리 파티에는 마법사가 들어올 자리가 없어."
"…그렇군요. 아뇨. 알아요. 그렇겠죠. 신경 쓰지 말아요. 애초에 우린 그런 관계였는걸요. 협력이 끝나면 끝날 관계. 이제 와서 구차하게 매달리진 않아요."
케이트는 그렇게 말했지만, 얼굴에는 실망스런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변명이 아냐. 정말이야. 너도 마법사면 알 거 아냐? 지고의 대마법사란 이름을."
"네? 자, 잠깐만요. 갑자기 텔루나님 얘기가 왜 나오는 거죠?"
"나랑 같이 다니던 애들 중에 제일 조끄맣고 마법사 모자 뒤집어쓰고 있던 애 있지? 걔가 지고의 대마법사 다이애나 텔루나야."
"뭐, 뭐에요?! 잠, 엣?! 농담이죠?!"
케이트의 씁쓸해하던 표정이 일변해서 경악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니. 농담이 아냐. 너도 내가 걔한테 디아나라고 부르는 거 한 번쯤은 들어봤잖아? 걔 애칭이 디아나야."
"정말로?! 그 텔루나님?! 농담이 아니라요?! 그 당신한테 찰싹 달라붙어있던 말투 이상한 꼬맹…유독 고귀해보이셨던 분이?! 잠깐. 그럼 당신 텔루나님이랑 어떤 관계에요?!"
찰싹 달라붙어있다니. 남들이 보기엔 그렇게 보였던 건가.
그리고 예상대로, 케이트는 디아나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
어쩌면 마법사 협회 내부의 사람들 말고, 모험을 다니는 마법사들에게 디아나가 가출을 그만 둔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구원의 가정은 맞아떨어졌다.
계속 이상했단 말이지. 아무리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다지만 그 많은 마법사 모험가들 중 아무도 디아나를 신경 쓰지 않는 다는 게 말이다.
역시 마법사 협회 쪽에서 정보를 차단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야 하나?
뭐, 디아나도 그게 편한 것 같으니 아무 문제없지만. 오히려 디아나가 시켰을 수도 있다.
"어떤 관계라…. 글쎄. 앞으로 키스할 약속을 주고받은 사이?"
"거, 거짓말 하지 말아요! 그 오랜 세월동안 어떤 남자에게도 마음을 준 적 없다는 텔루나님이 그럴 리가…!"
"거짓말이라니. 난 그런 걸로 거짓말 안 해. 직접 데려와서 확인이라도 시켜줄까?"
"자, 잠깐! 그러지 마요! 믿을게요! 믿으면 되잖아요! 그럼 정말로 텔루나님의 남자?!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이렇게 좋은 남자가, 대형 클랜에 소속되지도 않고 있을 리가 없는데!"
디아나의 남자라니. 디아나가 내 여자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는데.
케이트는 패닉상태가 되어서 소리 질렀다.
그리고는 문득 뭔가 생각난 듯, 창백한 안색으로 구원을 쳐다봤다.
"잠깐. 잠깐잠깐잠깐. 기, 기다려 봐요. 그럼 혹시, 혹시 저랑 관계를 맺던 밤에, 당신 방에선 텔루나님과 자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는 거예요?!"
"응."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아, 아아…이, 이 죄를 대체 어떻게…."
역시나 마법사들 사이에서 디아나의 위상은 엄청나구나.
케이트의 반응은 거의 믿고 있던 신을 본의 아니게 모독한 독실한 신자의 표정이었다.
솔직히 얜 그동안의 쾌감에 중독되어서라도 절대 내게 떨어질 수 없게 된 거 아닐까 걱정했는데, 이 반응을 봐선 오히려 쾌감보다 디아나가 더 심각한 문제인 모양이었다.
"케이트 일단 진정해봐."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구원씨…구원님은 텔루나님을 놔두고 어떻게 저 같은 여자랑…!"
"님이라니. 그냥 평소처럼 불러. 아무튼 그래서 우리 파티에 마법사의 자리가 없어.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우리 클랜 하우스로 오지 않을래? 어차피 갈 데도 없잖아?"
"거에 텔루나님도 계실 거 아니에요! 대체 어떤 얼굴로 텔루나님을 보라고…!"
"그래도 너 원래 마탑에 있었다면서. 각 학파의 수장들과 에이스들이 전부 모인 꿈의 자리인데. 마법사로서 욕심 생기지 않아?"
"그, 그건 또 무슨 소리에요?"
케이트와의 관계를 가지면서, 케이트의 신상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원래 케이트는 모험가가 아니라 마탑의 마법사였다.
그리고 마탑에 볼 일이 있어서 방문한 포츠가 케이트에게 한 눈에 반해서 집요하게 쫓아다닌 끝에, 둘이서 모험가 생활을 하게 된 거다.
그렇다면 케이트도 모험가 생활을 계속하기보다, 우리 클랜 하우스에서 지내는 게 더 좋지 않을까?
각 학파의 수장들이 모여 있고, 거기에 시중이란 명목으로 각 학파의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리고 구원은 그들 사이에 케이트를 꽃아 줄 능력이 있다.
그렇게 되면 나도 케이트를 계속 지켜봐줄 수 있고, 케이트도 마법사라면 누구나 가보고 싶어 하는 꿈의 장소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다.
구원이 그런 제안을 케이트에게 하자, 케이트는 한 번에 너무 많은 정보를 들어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에? 각 학파의 수장님들이 전부? 수제자도 모여 있어? 거기에 제가? 아니 잠깐. 지금 클랜 하우스가 텔루나님의 저택이라고…?!"
"그래. 어때?"
"자, 잠깐. 너무 갑작스런 얘기들이 많아서 정리가…. 그, 그러니까…."
너무 엄청난 제안에 케이트는 공황상태에 빠진 모양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자신이 감히 지고의 대마법사님의 남자를 건드리고 있었다는 공포가 더 큰 모양이었다.
디아나의 이름이 나온 직후부터, 묘하게 구원의 반대편으로 몸을 빼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건 이해해. 그래도 마법사들한텐 꿈의 장소잖아? 아무튼 잘 생각해봐. 결심이 서면 디아나의 저택으로 찾아와. 마법사들의 성지인 모양이니, 장소정도는 알지? 정문에서 내 이름을 대면 들여보내줄 거야."
결국 그 자리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케이트를 향해 그렇게 말하고, 구원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는 사라가 어딘가 공허한 눈으로 우두커니 서있었다.
"…끝났네요."
"그래. 조금 예상외의 결말을 맞이하게 됐지만. 기분은 좀 어때?"
"…그러네요. 신기한 기분이에요. 솔직히 아직 실감이 안나요."
"확실히 조금 김빠지는 모양새로 끝나긴 했지만, 그래도 놈이 느낀 고통은 굉장했을 거야. 네가 느낀 고통을 전부 갚아줬다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다고 느낄지 몰라도, 확실한 복수였어."
"알아요. 오죽했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겠어요. 하지만 뭔가…마음 한 구석이 텅 빈 기분이에요. …이럴 것 같았으면 복수 같은 건 안할 걸 그랬나 봐요."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걸 위해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
"그랬죠. 처음 여기 왔을 때는 복수밖에 머릿속에 없었어요. 하지만 사실 당신과 만나고, 함께 지내면서 복수보다 당신을 생각하는 일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어요. 그에 따라 제 안의 복수심은 점점 작아져만 갔죠. 그 남자를 보고 느낀 기분도, 복수심보단 할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이 더 컸던 것 같아요. 할아버지를 죽인 남자가 저렇게 멀쩡히 살아있는데, 전 복수도 잊고 당신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더 지독하게 마음을 먹고 복수를 실행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상관없는 당신까지 끌어들여서…."
"그게 무슨 소리야? 난 내가 원해서…."
"아뇨.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당신이 원해서 그랬다고 하지만, 제 입장에선 마찬가지에요. 전 복수를 위해 당신의 호의를 이용한 거예요."
"상관없어. 난 전혀 신경 안 써."
"제가 신경 써요. 정말로, 그런 짓은 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라는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구원은 그대로 두면 사라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사라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구원은 그렇게밖에 해줄 말이 없었다.
"그 남자도…. 할아버지를 죽였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어요. 정말로, 정말로 이걸로 된 걸까요?"
역시 포츠가 그런 식으로 죽은 건, 사라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을 준 것 같았다.
어쩌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포츠의 사랑에 뭔가 미안한 기분이 든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구원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놈은 대가를 치룬 것뿐이다.
아니. 애초에 정말로 사랑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걸까?
그냥 케이트를 찌른 사실과 관계없이,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져서 목숨을 끊은 것에 지나지 않을까?
"당연하지. 넌 당연한 복수를 한 거야. 네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
구원은 사라가 어디 가지 못하도록 꽉 끌어안았다.
그러나 사라의 몸의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놈은 당연한 대가를 치른 것뿐이야. 네 행동은 정당하니까, 놈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 이유는 전혀 없어."
사라는 구원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제 진정된 걸로 보이는 사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치사하네요."
"뭐가?"
"이런 상황에서도, 당신이 안아주고 위로해줘서 기뻐하는 제가 있어요. 이기적이죠?"
역시 완전히 진정되지는 않았나.
사라는 아직 불안정한 상태라서 그런지, 평소보다 훨씬 더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토로했다.
"이기적이기는. 오히려 난 기뻐. 네가 그런 식으로 날 생각해준다는 것 자체가. 그리고 네가 아무리 이기적이라도, 난 다 받아줄 수 있어."
"…왜 저한테 그렇게까지 해주는 건데요?"
"그거야 당연히…."
구원은 사라를 쳐다봤다.
여러 감정이 휘몰아쳐 불안정해 보이는 표정, 하지만 그 눈동자에는 어떠한 기대가 담겨져 있었다.
구원은 그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좋아하니까 그러지."
구원의 말을 듣고, 사라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사라는 울 것 같은 표정이 됐지만, 구원을 끌어안고 그 가슴에 얼굴을 파묻어 우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역시 전 이기적이고, 비겁해요. 당신이 그런 대답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런 질문을 했으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이런 비겁한 여자라도 당신이 받아들여준다고 한다면, 절 좀 더 받아들여주세요. 당신과 더 깊은 관계가 되고 싶어요. 단순한 모험가 동료 관계가 아닌, 좀 더 깊은 관계가."
구원도 사라와 그런 관계가 되고 싶은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디아나와 레이아도 있어서, 지금까지 사라의 마음을 알면서도 직접적인 말을 하는 건 피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역시 언제까지나 결정을 회피할 수는 없었다.
사라가 이렇게 고백해온 거다. 이제 결정할 때가 온 건가?
이런 순간이 오니, 디아나와 레이아의 얼굴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특히 디아나하고는 나중에 키스를 할 약속까지 주고받은 거다. 과연 이대로 사라 하나만을 선택하는 게 옳은 걸까?
"사라. 비겁한 건 나도 마찬가지야. 네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 지금까지 일부러 아무 말 않고 있었어. 하지만 역시 난…."
"알아요! 당신이 다른 두 사람에게도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거 잘 알아요. 하지만 지금은 그저 당신이 절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관계가 되고 싶은지. 그것만 말해줘요."
"…그야 물론 너도 좋아해. 너와 더 깊은 관계가 되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야."
"구원!"
사라는 구원의 목에 매달려서 애달픈 표정으로 키스를 했다.
서로 꽉 끌어안고 혀와 혀가 얽히는 진한 키스 후에, 사라가 지근거리에서 구원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전에 약속한 적 있었죠. 제가 말하는 건 뭐든지 하나 들어주겠다고."
"그랬지."
설마 그 약속을 이런 타이밍에 꺼낼 줄이야. 혹시 그때부터 이런 상황을 대비하고 아껴둔 건가?
아무튼, 이제는 정말로 마음을 굳힐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런 절 당신의 여자로 삼아주세요.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감정을 품고 있어도 상관없어요. 다만 약속해줘요. 언제까지라도 저에 대한 마음이 식지 않겠다고. 언제까지나 제 곁에 있어주겠다고."
사라의 부탁은 구원이 예상했던 것과 비슷한 내용이면서, 한편으론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내용이었다.
저 말은 마치, 구원이 다른 여자를 더 만들어도 계속 자신만 좋아해준다면 상관없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뭐? 하지만…."
"괜찮아요. 디아나와 레이아의 마음을 알면서도, 제가 이렇게 먼저 새치기를 해버린 걸요. 그리고…. 자신의 복수를 위해 당신이 다른 여자를 안도록 만든 저한테, 당신을 독점할 권리는 없는 걸요."
"사라, 그건…!"
"정말로 괜찮아요. 아니면 당신은 디아나와 레이아를 포기할 수 있는 건가요?"
비겁하지만, 구원은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은 그런 얘기보다, 대답해줘요."
"…그래. 지금부터, 그리고 언제까지나. 넌 내 여자야. 너 앞으로 후회해도 소용없다?"
"…응. 구원이야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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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케이트는 처음부터 히로인 후보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저택에서 지내면서 마법사로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줬습니다.
슈리온 //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