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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153화 (137/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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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수

    구원이 말을 이어나갈 때마다 사라의 표정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

    심지어 사라의 손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움찔움찔 떨리는 것 같아서, 구원은 황급히 양 손으로 사라의 손을 감쌌다.

    "하고 싶은 말은 알겠어. 하지만 그 전에 이거 하나는 분명히 말할게. 내가 하고 싶다는 게 아냐. 어디까지나 이런 방법도 있다고 제안하는 거지. 이것 외엔 아무런 방법도 떠오르지 않고 있잖아? 물론 선택은 네 몫이야. 난 어디까지나 네 의견에 따를게."

    "안돼요. 싫어요."

    구원의 말을 듣고, 사라는 생각해볼 것도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 방법대로라면 케이트란 사람의 도움이 필수 불가결인 거잖아요?"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거절당하면 그때 가서 다른 방법을 생각하면 그만이야."

    "하지만 그 여자가 그 남자에게 말해버리면요?"

    "그럼 어쩔 수 없이…."

    "역시 싫어요."

    사라는 단호하게 말했다.

    복수 하나만을 바라보고 온 사라가 저렇게 반대를 하다니. 역시 케이트의 협력 이전에, 그냥 내가 다른 여자랑 자야 한다는 사실이 싫은 거 아닐까?

    "알았어. 그럼 다른 방법을 한 번 생각해보자."

    그걸 아는 구원은 이유도 묻지 않고 쿨하게 대답했다.

    "네. 그리고 미안해요. 당신이 기껏 절 위해서 생각해 준 건데."

    "아냐. 괜찮아. 분명 또 다른 방법도 떠오를 거야."

    오히려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맙다. 말하기 전에는 그렇게 다른 여자랑 자고 싶냐고 질책당하며 귓방망이라도 한 대 맞는 거 아닐까 싶었는데.

    사라의 나에 대한 신뢰도가 살짝은 올라간 걸까?

    구원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사라를 다독이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다음 날, 일행은 다시 던전에 향하기로 했다.

    참고로 레이아의 구미호화는 진전이 없었다.

    이번에도 저번과 마찬가지로 의식은 있지만 욕구를 자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밤새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래도 두 번 연속해서 그 상태가 됐다는 건, 저번에 그 상태가 된 게 우연의 산물은 아니라는 얘기다. 확실히 예전보다는 나아졌다는 증거니, 좋아할 일이겠지.

    그래도 그런 모습을 보여준 건 부끄러운지, 레이아는 아침에 일어나서 한참 꼬리를 파닥파닥 거리며 부끄러워했지만 말이다.

    던전에 가기 앞서, 사라는 후드 망토를 하나 구입했다.

    2계층에는 포츠가 있을 테니 말이다. 녀석도 사라의 얼굴은 기억하고 있을 테고, 그럼 앞으로 무슨 일을 꾸미든 일이 힘들어질 거다.

    "오오. 그러니까 이제 진짜 궁사 같아."

    "그럼 지금까진 궁사처럼 안보였단 말인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솔직히 활이랑 오른 손의 검지 중지 약지만 끝까지 덮은 장갑을 제외하면, 그냥 가죽 갑옷을 입은 게 전부였으니 말이야.

    역시 판타지 세계에의 궁사하면 후두 망토를 두르고 있어야지. 이건 로빈 후드 때부터의 전통이라고.

    2계층에 도착한 일행은 곧장 사냥을 개시했다.

    저번 오크 토벌에서 다들 직업 레벨이 엄청나게 올랐다. 직접 적 한가운데서 무쌍을 찍었던 구원과 멀리서 오크들을 대량 학살한 사라는 물론, 끊임없이 생겨나는 부상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아낌없이 회복 마법을 사용해줬던 레이아 역시 직업 레벨을 엄청나게 올릴 수 있었다. 덕분에 안 그래도 쉬운 전투가 더더욱 쉬워졌다.

    이제는 진짜 성자 스킬의 도움 없이도 2계층 몬스터들 상대로는 당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말은 즉 디아나가 할 일이 아예 없어졌다는 말이다.

    디아나는 그저 일행을 졸졸 따라오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하는 게 없었다.

    "디아나. 심심하지 않아?"

    "…괜찮네."

    그렇게 대답하면서, 디아나는 고개를 홱 돌려 시선을 피해버렸다.

    참고로 디아나는 아직도 나를 살짝 피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니, 뭐 이해는 한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아마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을 테니.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당황하고 부끄러워하는 것도 이해는 한다.

    그래도 언제까지 그럴 건데. 너무 그렇게 상대 안 해주면 슬슬 나 상처받는다.

    역시 저대로 스스로 회복되길 기다리는 것보다는, 내가 나서서 극약처방이라도 하는 게 좋을까?

    아무튼 그런다고 해도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다.

    우선은 사냥에 집중하자.

    "그래도 이렇게 여유로우면 사냥하는 느낌이 안 드네. 상처받을 일이 없으니 레이아는 성장도 더뎌지고."

    그래 전투가 너무 수월해지니 이런 문제점도 있었다.

    지금까지는 전투를 할 때마다 레이아 누님의 손길을 느끼며 정신적인 피로를 회복했는데, 그게 없어지니 죽을 맛이었다.

    천사님의 손길이…. 내 마음의 오아시스가….

    "그렇지만도 않아요. 다른 스킬들도 많이 익혔으니까요."

    레벨이 많이 오른 레이아는, 각종 버프 스킬들을 왕창 익혀왔다. 이제는 방어력뿐만 아니라 온갖 스탯에 버프를 줄 수 있게 됐다.

    덕분에 전투가 더 쉬워져 버렸지만 말이다.

    크흑. 난 누님의 손길이 그립다고요.

    "앗, 그리고 스태프 공격 스킬도 더 익혀왔어요! 이번에야 말로 저도 불침번을 설 수 있어요!"

    레이아는 주먹을 불끈 쥐고 의욕을 보였다.

    응. 귀엽다. 그리고 불끈 쥔 두 주먹 사이로 가슴이 모아져서, 귀여운 와중에 섹시함까지 더해져 무지막지하게 매력적이다. 하지만….

    "안 돼. 그래도 혼자 몬스터들을 상대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레이아는 바로 귀와 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시무룩해졌다.

    으윽. 저런 모습을 보면 약해지는데.

    아냐.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돼. 괜히 불침번을 서게 했다가 불상사가 일어나면 어떻게 하려고.

    아직 마을 주변에서 사냥을 하니 불침번을 설 일도 없지만, 구원은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그렇게 거의 나들이 간 기분으로 돌아다니며 사냥을 마치고, 마을의 여관을 향했다.

    그리고 여관에 들어가자마자, 기분 나쁜 얼굴과 대면했다.

    "여어! MRM!"

    1층의 식당에서 포츠와 케이트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재수도 더럽게 없지. 하필 또 이렇게 얼굴을 마주치네.

    같은 계층에서 사냥을 하면 당연히 얼굴을 마주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그게 또 그렇지만도 않다.

    던전 안은 낮과 밤의 경계가 없다. 모험가 그 비싼 시계를 우리처럼 던전에 가지고 다닐 리도 없으니, 당연히 던전 안에서 모험가들의 생활 패턴도 각자 달라진다.

    그러다 보니 작정하고 여관에서 죽치며 기다리고 있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같은 계층에서 사냥을 한다고 해도 얼굴을 마주칠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다.

    하지만 이놈과는 그 낮은 확률을 뚫고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게 된 거다.

    이것도 악연이라고 해야 할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한다. 한 번만 더 날 그 별명으로 부르면 네놈의 그 자랑스러운 여자 친구 앞에서 비참한 꼴로 만들어주지."

    "오오. 그거 무섭군 그래. 그런데 옆의 아가씨들은 네 동료인가? 캬~소문대로 장난 아니게 미인들이로군."

    "포츠!"

    "아아. 걱정 마. 당연히 나한텐 케이트가 제일 예뻐. 그냥 친구 여자니까 빈말을 해 준거지."

    "놀고 있네. 어딜 어떻게 봐도 우리 애들이 훨씬 예쁘거든?"

    구원은 그렇게 말하며 사라를 뒤에서 꼭 껴안았다.

    왜 예쁘다고 자랑하면서 하필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얼굴도 안 보이는 사라를 껴안았냐고? 이러지 않으면 사라가 지금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사라의 몸은 지금 구원의 품 안에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훗. 사람 취향은 제각각인 법이지."

    "그 말 그대로 돌려주마."

    케이트한텐 미안한 말이지만, 만약 케이트의 매력 수치가 지금보다 10배는 더 높아져도 우리 애들 발뒤꿈치도 못 쫓아올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나저나 넌 왜 던전에 있는 거야?"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도 그렇잖아. 저번 오크 토벌로 한 몫 단단히 벌은 거지? 저번에 참가한 다른 놈들은 지금 다들 돈쓰기 바쁘다고. 브린 녀석은 앞으로 한 달은 던전에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하던데?"

    "날 그런 녀석들이랑 똑같이 취급하지 마라. 나에겐 네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숭고한 목적이 있다."

    그래. 마왕 토벌이라는 숭고한 목적이 말이야.

    "핫. 숭고한 목적은 무슨. 너도 그런 거냐? 전투가 좋고 강해지는 게 좋다는 변태 같은 케이스냐?"

    "변태라뇨! 사과하세요! 향상심을 가지는 건 좋은 거라고요!"

    드물게 레이아 누님이 화를 내며 나섰다.

    덕분에 구원은 뻗으려던 손을 멈췄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내 성자의 손길이 작렬할 뻔 했다.

    청순하신 레이아 누님이 눈을 이글이글 불태우며 화를 내자, 포츠 녀석도 기세가 눌렸는지 나불대던 입을 멈췄다.

    "그래 포츠! 아무리 그래도 실례야!"

    포츠와는 다르게 케이트는 상식이 있는 모양이었다.

    진짜 어쩌다가 포츠 같은 놈이랑 눈이 맞은 거지?

    "미안. 잘못했어. 내가 말이 심했어. 화내지 마. 내 사랑."

    대체 누구한테 사과하는 거냐.

    구원은 더는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있는 비어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이봐! 어디 가? 이왕이면 같이 한 잔 하자고!"

    "됐다. 난 우리 애들이랑 마시는 게 더 좋다!"

    "헹! 나도 우리 케이트랑 마시는 게 더 좋거든?!"

    그럼 그 케이트랑 잘 마셔라. 앞으로 같이 마시게 될 수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정말 실례되는 사람이네요!"

    웬만하면 사람을 싫어하는 일이 없는 레이아도 화를 냈다. 그것만으로도 포츠 놈이 얼마나 쓰레기인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천사님이 저렇게 화를 내주시니, 쓰레기와 대화해서 더러워졌던 귀가 정화되는 것 같았다.

    "…저주를 걸었네."

    그리고 조용히 있던 디아나도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응? 갑자기 무슨 말이야?"

    "온 몸에 힘이 평소보다 살짝 덜 들어가는 저주를 걸었네. 지속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네만."

    "화내주는 건 고맙지만, 뭐 하러 그런 쓸데없는 짓을…. 보아하니 쟤들도 사냥을 마치고 온 모양인데."

    "남성은 발기가 잘 되지 않는 부가 효과도 있지."

    소소하게 무서운 저주였다.

    아니, 잠깐 같은 모험가들끼리 저주는 걸어도 되는 거야? 그건 공격으로 인식 안 되나?

    "모험가끼리 적대하는 행위를 하면 카드에 기록이 남지 않아?"

    "치명적인 저주도 아니고, 그 정도는 괜찮네. 조금만 더 강하게 걸었으면 문제였겠지만 말일세."

    아무래도 디아나는 모험가 카드가 적대행위라고 인식하는 수준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도 그런가. 이런 것도 다 마법일 텐데. 얘가 모르면 누가 알겠어.

    살짝 기대했는데 아쉽게 됐다. 혹시 카드에 기록이 안 남게 적대행위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포츠를 처리하는 데 지금처럼 골머리를 썩이고 있지 않아도 되는데.

    "고마워. 나 때문에 화 내준 거지?"

    "…으, 으음."

    디아나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조용해져 버렸다.

    이제 좀 괜찮아진 건가 싶었는데 또 이러네. 너무 부끄럼을 많이 타는 거 아니냐.

    "…구원."

    그리고 포츠와 마주친 이후로 계속 조용히 있었던 사라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어제 구원이 말했던 계획. 그대로 실행해주세요."

    사라는 떨리는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하지만 확실한 의지를 담아서 말했다.

    푹 눌러쓴 후드의 틈새에서 사라의 아름다운 두 눈이 활활 불타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진심이야?"

    구원은 상당히 놀랐다.

    솔직히 스스로 제안한 거지만, 사라가 그 계획을 허락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엔 사라의 질투심이 장난 아니고, 무엇보다 너무 음흉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사라의 복수심을 너무 얕본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지금 포츠의 모습을 보고 더 열이 받은 것도 있겠지. 할아버지를 죽인 범인이 저렇게 느긋하게, 옆에 여자 친구까지 끼고 행복해 보이는 모습을 보여주니 말이다.

    그야 꼭지가 돌아가지 않는 편이 이상하다.

    "네. 진심이에요."

    "…알았어."

    사라의 확고한 대답에 구원도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소리인가요? 계획이라니?"

    옆에서 듣고 있던 레이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디아나도 신경 쓰였는지, 이쪽을 힐끔거렸다.

    부끄러워하든지 관심을 가지든지 한 가지만 해라.

    "응? 아냐. 아무것도."

    "치이. 뭐에요? 둘만의 비밀인가요?"

    레이아가 일부러 살짝 토라진 표정을 지으며 입을 삐죽였다.

    평소 같으면 저 표정 한 방에 바로 비밀 같은 건 내팽개치고 이실직고 했겠지만, 과연 이번만은 그럴 수도 없었다.

    구원은 애매한 미소로 얼버무렸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조금 오해가 있는 것 같네요.

    표지가 디아나가 맞기는 한데 전생 전의 디아나입니다.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이미지에서 가져온 거라 소설상의 묘사랑 완벽히 일치하는 모습도 아니고요.

    지금 디아나는 표지 모습보다 훨씬 어린 모습이라고 생각해주세요.

    레이아의 가슴은 표지보다 미묘하게 살짝 더 큰 수준입니다.

    머리색은 사라는 어두운 와인 빛. 레이아는 금발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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