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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152화 (136/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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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수

    구원이 아무리 불러 봐도, 디아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시험 삼아 허리를 가볍게 쳐올려보자, "흐잉!" 이란 귀여운 소리를 내더니 구원의 가슴을 퍽 때리고 다시 조용해졌다. 일단 살아는 있는 모양이다.

    어쩔 수 없지 일단 이대로 내버려 둘까.

    구원은 물건을 뽑고 살며시 디아나의 아래에서 빠져나왔다. 그러자 디아나는 곧바로 이불을 뒤집어썼다.

    구원이 샤워를 마치고 나와도, 여전히 침대 위에는 동그란 이불 덩어리만 놓여있었다.

    "디아나. 슬슬 씻어. 밥 먹어야지."

    하지만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혹시 저 이불 덩어리 안에는 아무것도 없고, 디아나는 방을 나간 건가?

    검지를 들어 콕하고 찔러보자, 이불 덩어리가 움찔하고 떨렸다.

    뭐야. 아직 있잖아.

    하지만 아무래도 나로선 저런 상태의 디아나는 회복시킬 수 없을 것 같았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그런데 디아나님은? 어젯밤은 같이 주무신 것 아니었습니까?"

    문 앞에는 여느 때처럼 바네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아…응. 안에 있어. 한 번 들어가 봐."

    구원은 바네사에게 모든 걸 맡기고 먼저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사가 준비되고 다른 모두가 도착한 다음, 마지막으로 디아나가 도착했다.

    이제 멘탈이 조금 회복된 건가?

    "디아나. 괜찮…."

    "자, 자네! 그러고 보니 어제 알려준 마법 말이네만…."

    구원이 말을 걸려고 하자, 디아나가 고개를 홱 돌리고 마법사 협회의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디아나가 자기 스스로 쟤들한테 먼저 말을 걸다니. 아직 회복이 다 된 건 아닌 모양이다.

    덕분에 디아나가 먼저 말을 걸어준 마법사는 거의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 직전의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언제까지고 이런 상태로 있을 수도 없다. 일단 대화를 하는 데 성공하면 조금 더 상황이 나아질 것 같은데. 무슨 수를 써야하지 않을까.

    "그런데 구원씨. 저 오늘 고아원에 갈 예정이에요."

    구원이 디아나를 빤히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있자, 옆에서 레이아가 살짝 구원에게 몸을 가까이 가져다대며 말을 걸었다.

    "아, 그래?"

    "…네."

    생각하던 중에 갑자기 말을 걸어오니 일단 반사적으로 그렇게 대답한 건데, 레이아가 살짝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지? 아, 고아원에 갈 때는 같이 가기로 했었지.

    "그럼 나도 같이 가야지. 신전에 갈 때 나도 불러줘."

    카일놈의 더러운 마수에서 레이아를 보호해야 한다.

    그게 아니더라도 오늘은 카일에게 볼 일도 있고 말이다.

    "네!"

    역시 그것 때문이 맞았는지, 구원의 말에 레이아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음. 가련하시다. 역시 천사님에겐 미소가 어울려.

    레이아와 신전에 가기 전에, 구원은 사라를 붙잡고 단단히 일러뒀다.

    "알겠지. 절대 혼자서 처리하려고 하지 마. 나도 열심히 생각해보고 있으니까. 절대로, 절대로 혼자 일을 벌이려고 하면 안 돼."

    아침에 생각했던 작전도 지금 말할까 했지만, 이제 곧 레이아와 나가야 하는데 지금 말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느긋하게 생각할 시간이 있을 때 말을 해야지.

    "…네."

    나는 사라 같은 경험이 없으니, 사라의 심경을 완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얘기만 들어도 눈이 돌아갈 만한 상황이라는 건 짐작이 가능했다.

    솔직히 불안 불안해서 곁에 두고 싶지만, 내가 계속 붙어있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약속이다? 꼭이야? 이 약속 어기면 나 네 얼굴 두 번 다시 안 볼 거야."

    "알겠어요."

    사라에게 두 번 세 번 다짐을 받고, 그것도 불안하여 아예 바네사까지 찾아가서 얘기를 해뒀다.

    "바네사. 오늘만 사라한테 몰래 사람을 붙여서 감시해줄 수 있어?"

    "…무슨 일이시죠?"

    "사실 사라는 사정이 있어서 강해지려는 욕구가 강하거든. 이렇게 며칠 동안 쉬면 안달이 나서 혼자서라도 던전에 들어가려고 할지도 몰라. 그동안은 내가 붙어 있으면서 마크를 했는데, 오늘은 아무래도 좀 떨어져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혹시 사라가 혼자 던전에 가려고 하면 좀 막아줘."

    사람 하나 묻으려고 던전에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걸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니, 이렇게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대비를 해두고 나서야, 구원은 고아원을 향할 수 있었다.

    먼저 신전에 들러서 물건들을 챙기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먼저 고아원에 간 모양인지 레이아와 둘이서 고아원에 가게 됐다.

    "미안해. 괜히 우리 편의 봐준다고 저택에 묵느라 이런 것도 혼자 늦어지고."

    "아니에요. 제가 좋아서 저택에 묵는 건데요. 그리고 혼자가 아니에요. 구원씨도 같이 가주시잖아요."

    레이아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 누님님은 대체 어디까지 천사 같은 걸까.

    대체 왜 직업이 그냥 사제인지 이해가 안 된다. 성녀 같은 거라고 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잖아. 오히려 우리 천사님 말고 누가 성녀에 어울린다는 거지?

    아니, 뭐 실제로 성녀라는 직업이 진짜 있는 건지 어떤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렇게 둘이서만 가니까 꼭 데이트 같네."

    "그, 그러네요."

    구원의 말에 레이아는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뒤에 있는 꼬리가 붕붕 세차게 흔들리며 레이아의 감정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이거 살짝 좋은 분위기 아냐?

    "아…."

    때마친 나란히 걷던 구원과 레이아의 손이 살짝 닿았다.

    레이아의 손가락이 움찔하고 오므려졌지만, 곧 다시 구원의 손끝에 맞닿아졌다. 그리고 주저하듯, 조심스런 움직임으로 구원의 손가락에 레이아의 손가락이 얽혀왔다.

    겨우 손을 마주잡고 걸을 뿐인데, 구원은 뇌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감각을 맛봤다.

    위험해. 너무 달달해서 제 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아.

    "레이아 누나!"

    하지만 그 달콤한 시간은 순식간에 끝을 맞이했다.

    저 멀리 고아아원이 보일 즈음이 되자, 꼬맹이들이 우르르르 달려 나왔다.

    마주잡고 있던 레이아의 손은 순식간에 떨어져서 아이들을 끌어안았다.

    젠장. 하여간 꼬맹이란 것들은 하나같이 눈치란 게 없어요. 니들 그렇게 레이아가 좋으면 연애 사업은 방해하지 말고 응원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애초에 레이아 말고 다른 사제가 먼저 와 있을 거 아니야. 왜 나와 있는 건데?

    뭐 꼬맹이 상대로 욱 해봤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구원은 일단 여기 온 다른 목적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야. 꼬맹아. 카일은 어디 있냐?"

    "꼬맹이 아냐! 세렌! 전에도 말했잖아."

    몰라. 꼬맹이들 이름이 일일이 저장될 공간 따위 내 머릿속엔 없다.

    "그래. 세렌아. 카일 어디 있냐?"

    "카일 아저씨? 저기!"

    아저씨라. 뭐 그런 나이이긴 하지. 그래도 얼마 전까진 말 놓고 지내던 사이였을 텐데, 바로 그렇게 적응이 되는 걸까? 꼬맹이들의 적응력은 무섭다.

    꼬맹이가 가리킨 방향에 가자, 카일이 뒷짐을 지고 서있었다.

    "어서 오시오."

    구원이 다가오는 걸 눈치 챈 카일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뭐야 이거.

    솔직히 말하면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온 거다. 남자의 생명을 끝장내버린 거니 말이다.

    그때 당장은 그다지 실감이 안 났겠지만, 이쯤 되면 슬슬 엄청나게 실감이 되고 있을 거다. 그래서 이놈이 날 보자마자 달려들 것도 상정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카일의 태도는 너무 평온했다.

    "너 뭔 일 있었냐?"

    "그게 무슨 말이오?"

    "아니. 너 나 보고 화도 안나?"

    "분노에 휩싸이면, 그 화가 자신도 화를 입히는 법이라오."

    그렇게 말하는 놈의 눈동자에선 일종의 현기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말투도 이상하고. 알 두 개가 날아가 버리더니 아예 해탈해버렸나. 마치 알을 날려대는 기계 스님이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뭐, 아무튼 이쪽을 적대시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잘 된 일이다. 얼른 용건부터 말하자.

    "너 혹시 암살자 일 의뢰하면 하냐?"

    카일은 대답을 하지 않고 구원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대 안에 어둠이 도사리고 있군."

    이거 은근히 빡친다.

    "그래서. 한다는 거야. 안 한다는 거야."

    "그 누구도 다른 이의 목숨을 앗아갈 권리는 없소."

    "상대방이 다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살인범이라고 해도?"

    "복수는 정의가 아니오."

    원래 암살이나 하던 변태 새끼가 놀고 있네. 안 할 거면 됐다. 어차피 이쪽은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으니.

    카일이 말하는 게 상당히 짜증났지만, 구원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애초에 이놈이 이렇게 된 건 내 책임도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그럼 그건 됐고.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암살자 레벨이란 게 암살 말고 다른 방법으로 오르기도 해?"

    "암살 말고 다른 방법? 예를 들어 어떤 방법 말이오?"

    "예를 들어 그냥 은밀한 행동을 취한 다던가 말이야."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어서, 구원은 그렇게 얼버무렸다.

    지금까지 암살자 레벨이 딱 두 번 올랐었다. 그리고 그 두 번 다 남에게 들키지 않게 몰래 섹스를 했을 때 올랐었다. 하지만 솔직히 그게 암살과 관련된 행동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이놈을 찾아온 거다. 암살자가 본업이었던 이놈이라면 뭔가 아는 거 아닐까?

    "흠…. 미안하지만 짐작 가는 바가 없소."

    "잘 생각해봐. 혹시 암살이 아니더라도, 훈련 중에 은밀 행동을 하면 오른다거나 한 적 없어?"

    "없소. 그게 가능했다면, 암살자 길드에서도 굳이 암살만으로 암살자들을 키우지는 않았을 거요."

    카일은 깊게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단언했다.

    암살만으로 암살자들을 키웠다니. 그 말은 즉, 카일 뿐만 아니라 카일이 있던 암살자 조직에서 암살자들을 키우던 놈도 나와 같은 방법으로 레벨을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거다.

    하지만 실제로 내가 그런 방법으로 레벨이 오른 이상, 암살 이외의 방법으로밖에 레벨이 오르지 않는다는 카일의 말은 틀렸다. 그럼 일종의 히든 피스라고 봐야 하는 건가?

    암살자들은 단지 그런 행위로도 암살자 레벨이 오른다는 걸 몰랐을 뿐이고? 하긴 모를만하기는 하다. 다른 사람이 옆에 있는 상황에서 안 들키게 섹스를 하는 게 흔한 경험은 아니지. 우연히 발견한 놈이 있어도, 다른 암살자들과 방법을 공유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일이고.

    "궁금한 점은 더 없소?"

    "응? 응. 더 없어. 왜?"

    "그럼 이 몸은 실례하겠소."

    카일은 그렇게 말하더니, 곧장 레이아를 향했다.

    이 새끼 해탈한 줄 알았더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그냥 컨셉이었나.

    구원은 황급히 레이아에게 붙었지만, 레이아를 바라보는 카일의 눈은 완전히 평온함 그 자체였다. 전에 보였던 그 변태 같은 욕망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진짜 해탈한 건가? 저 눈은 컨셉질만으로 만들 수 있는 눈이 아니다.

    다가오는 카일을 보고 레이아가 살짝 움찔하자, 카일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상태에서 말했다.

    "걱정 마시오. 예전과는 다르다오. 전 이제 조화의 길을 걷고 있소. 욕망에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이오. 그저 못 다한 감사의 인사를 드리기 위해 찾아왔소."

    "…네?"

    놈의 말에 레이아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레이아는 널 구해준 일 같은 거 기억 못한다니까.

    아무튼 카일과의 일은 일단락되고, 레이아와 고아원 아이들을 돌봐주고 빈민가를 한 바퀴 돈 후 저택으로 돌아왔다.

    하루 종일 지켜본 결과, 카일이 해탈한 건 역시 컨셉이 아니었다. 꼬맹이들한테도 은근슬쩍 물어봤는데, 저번에 우리가 다녀온 이후로 계속 저 상태라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이제 카일이 레이아에게 찝쩍대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고아원에 따라가지 않을 건 아니지만 말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레이아와 같이 있는 시간은 치유가 되니 말이다.

    "사라!"

    저택에 돌아온 구원은 곧바로 사라를 찾아갔다.

    "왜, 왜요?"

    "나 없는 동안 얌전히 있었지?"

    "제가 어린앤가요. 걱정 마세요. …당신이 두 번 다시 얼굴을 안 본다는데 참아야죠."

    사라는 살짝 얼굴을 붉히고 말했다.

    뭐야. 그 말, 고백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지?

    "그래서. 뭐하고 있었어?"

    "여기 앉아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계속 생각해봤어요. 하지만 역시 뾰족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네요. 아무래도 그 케이트라는 여자를 치우지 않고는 일을 벌일 수가 없어요."

    사라는 미간에 살짝 주름을 만들며 대답했다.

    구원은 그런 사라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눌러서 펴주며 말했다.

    "나도 계속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한 가지 좋은 계획이 떠올랐어. 그것도 놈의 최대한 고통스럽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말이야. 다만 이 계획을 실행하려면 딱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말이야."

    "문제요? 어떤 문제죠? 일단 얘기라도 해봐요. 지금으로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에요."

    얘기하면 사라한테 욕부터 먹겠지?

    하지만 정말 이 방법 말고는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구원은 사라에게 오늘 아침 떠올린 계획을 상세히 설명했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전 모든 히로인을 동등히 사랑합니다.

    표지가 전생 전 디아나인 건…사실 첫 히로인인 사라로 하려고 했는데 사라 머리색이 워낙 특이해서 자유롭게 이용 가능한 일러 중에서는 적당한 일러를 찾을 수 없었어요.

    정신병원탈출자 //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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