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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142화 (126/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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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자 스킬의 숨겨진 효능

    결국 구원이 샤워를 마치고 나올 때 까지도 레이아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구원과 얼굴 마주치기를 부끄러워했다.

    "레이아. 씻고 밥 먹으러 가야지."

    "…네. 곧 갈게요. 먼저 가주세요."

    구원은 어쩔 수 없이 먼저 방을 나왔다.

    저기 있어봤자 역효과만 날 뿐이고 말이다. 그냥 시간이 해결해주기를 바라야지.

    문 앞에는 웬일로 바네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저택에 있을 때는 바네사가 내 전임 메이드라도 된다는 듯이 행동해왔다. 그래서 아침 시간에는 항상 방 문 앞에 대기하고 있다가 시간이 늦으면 알려주기도 하고 했었는데, 이렇게 모습이 안 보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어디 한 번 천천히 저택 안을 돌아다녀볼까.

    구원은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식당으로 향했다.

    자, 과연 밤새 발동시켜둔 성역 선포는 어떤 결과를 불러왔을까.

    구원은 제일 먼저 양 옆의 방문에 귀를 가져다대봤다.

    분명 내가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는 둘 다 빈 방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마법사 협회의 수장들과 그 수행원들도 저택에 묵는 상황. 누군가가 이 방을 배정받아 살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기대감을 가지고 방문에 귀를 대고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들어보려고 했지만,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그래. 이사 온 애들은 전부 여자일 텐데 아무리 그래도 내 바로 옆방에 묵게 하진 않겠지.

    하지만 이 저택이 그렇게 방이 넘쳐나는 게 아니다. 옆옆방, 그게 아니면 그보다 더 옆방엔 누가 살고 있겠지?

    방 하나하나가 디아나의 명성에 걸맞게 호화로운 방이기 때문에, 물론 넓이도 상당하다. 덕분에 발동시켜 놨던 성역 선포의 범위를 생각해보면 영향을 줄 수 있는 방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대충 눈대중으로 계산해봤을 때 기껏해야 옆으로 서너 칸 떨어진 방 정도다.

    구원은 차례차례 방문에 귀를 가져다댔지만, 기대하던 소리는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이런 젠장. 설마 아무도 영향을 안 받은 거야?

    제발. 그럴 순 없어. 처음 상상했던 것처럼 여러 미녀들이 자위 삼매경에 빠진 그림은 바라지도 않는다. 단 한 명. 적어도 단 한 명이라도….

    하지만 방문 하나하나를 확인할 때마다 구원의 기대는 차례차례 배신되어갔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방문에 귀를 가져다댔을 때, 뒤에서 구원에게 말을 거는 목소리가 있었다.

    "…뭐하시는 겁니까?"

    바로 바네사였다.

    "어? 응? 아냐. 아무것도. 안녕. 바네사. 잘 잤어?"

    "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바네사는 평소와 전혀 다를 것 없는 무표정으로 구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살짝 의심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니, 그게 옆방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라고. 그런데 내가 알기론 옆방은 빈 방이거든? 그래서 그럼 혹시 그 옆방인가? 아니면 또 그 옆방인가? 하다가 여기까지…."

    구원은 그 눈초리에 찔려서 횡설수설 떠들었다.

    "소리? 아시다시피 이쪽은 전부 빈 방입니다만."

    하지만 바네사는 냉혹한 현실을 구원에게 알려왔다.

    "그, 그래? 난 또 마법사 협회의 사람들이 이쪽 방에 배정받은 줄 알았지."

    "마법사 협회에서 오신 분들은 전부 저택의 오른쪽에 방을 배정했습니다."

    참고로 나를 포함한 우리 클랜원들의 방은 전부 저택의 왼쪽에 있는 방들이었다. 한마디로 정 반대편에 위치한 곳에 배정되었다는 말이다.

    젠장. 그럼 그쪽 사람들은 완전히 포기해야겠군.

    그럼 이제 믿을 건 사라랑 디아나밖에 없다. 걔들 방이 성역의 범위에 닿을 거리던가? 층이 다르다보니 잘 모르겠다.

    구원은 미약한 기대를 품고 바네사의 뒤를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자네 왔는가."

    "좋은 아침이에요."

    하지만 역시나 구원의 기대는 보란 듯이 배반당했다. 사라도 디아나도 둘 다 멀쩡한 얼굴로 식탁에 앉아있었다.

    아니, 디아나는 살짝 피곤한 표정이었지만 디아나의 방이 사라의 방보다 내 방에서 더 멀다. 사라가 영향을 안 받았으면 디아나도 영향을 안 받았을 테니, 저 피곤한 표정은 다른 이유 때문일 거다. 예를 들어 지금 테이블에 앉아있는 마법사 협회의 사람들이 밤늦게까지 괴롭혔다던가.

    저 표정을 보면 역시 방까진 닿지 않은 모양이다. 자위로 해소하고 왔다고 해도, 내 스킬을 아는 둘이라면 따지고 들었을 거다.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건, 아예 성역의 영역 밖에 있었다고 봐야겠지.

    "응. 좋은 아침. 둘 다 잠은 푹 잘 잤어?"

    "네. 아무리 여관에서 잤다고 해도 역시 던전을 나와 자는 건 다르네요."

    "음. 그거야 그렇구먼…."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봤지만, 둘 다 별다른 의심 없이 대답했다.

    뒤에 늘어서있는 메이드들 중에도 딱히 흥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메이드는 없는 것 같고, 이거 완전 꽝이네.

    어쩔 수 없지. 그냥 성역 선포의 레벨이 올랐다는 사실에나 만족하자.

    그리고 뒤이어 레이아까지 도착한 후, 아침 식사가 시작됐다.

    레이아는 아직도 부끄러운지, 가끔 구원과 눈이 마주치면 살포시 얼굴을 붉히고 배시시 웃었다. 가련하시다.

    구원은 식사를 하면서 마법사 협회의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봤다.

    하석 쪽에 위치한 사람들이 아마 각 학파에서 데려온 수행원들일 거다. 예상대로 전부 젊은 여성이었다.

    훌륭해. 역시 머리로 먹고사는 마법사들답게 내 의도를 완벽히 간파했군.

    이왕 같은 지붕 아래에서 살게 된 거니 가볍게 통성명이라도 하며 대화도 나눠보고 싶었지만, 다들 그럴 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는 채 열기가 느껴지는 시선으로 디아나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추종하던 디아나를 드디어 보게 된 거니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어쩔 수 없지. 이름 같은 건 어차피 계속 지내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고, 지금은 저대로 내버려두자.

    식사를 마치고, 구원은 레이아와 함께 신전으로 향했다. 대사제와의 약속으로 마을에 돌아오면 꼭 한 번은 들러야하니 말이다.

    이제 와서 눈치 챈 거지만, 아마 사라가 저번에 따라왔던 건 날 감시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 같다. 신관들은 다들 한 미모 자랑하는 사람들뿐이니 말이다. 질투한 거겠지.

    하지만 저번에 구원이 대사제와 진지하게 공부하는 모습을 봐서 그런지, 이번에는 따라오지 않았다.

    "음? 그 얼굴…어떻게 된 거죠?"

    응? 얼굴? 아, 그러고 보니 매력 왕창 찍고 나서 처음 보는 건가.

    "그냥 좀 레벨이 올라서요."

    "대체 그 사이에 레벨이 얼마나 올랐기에…."

    폭렙이라도 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대사제는 아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뇨. 그렇게 많이 오른 건 아니에요. 다만 제 성자라는 직업이 조금만 레벨이 올라도 이렇게 얼굴에 확 티가 나는 직업이거든요."

    사실 성자의 레벨 업으로 오르는 매력 자체는 다른 스탯과 마찬가지로 1이지만, 스킬 계수는 매력이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그렇군요. 역시나…."

    그제야 납득한 듯 대사제는 진지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그리고 또 다시 공부가 시작됐다.

    "…그래서, 이 세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혼혈이죠. 특정 종족이라고 칭해도 그 종족의 특징이 가장 강하게 나온 사람일 뿐, 순혈인 경우는 없다고 봐도 무방해요."

    그렇구나. 과연 이런 세계관이다 보니 다들 피가 섞여있는 건가.

    "그럼 순혈은 아예 없는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보통 순혈주의자들이 자기들끼리 순혈을 유지한다던가 하는 경우도 있을 법 한데 말이야.

    "네. 순혈만을 고집하여 스스로의 가능성을 한정시키는 건 여신님의 가르침에 반하니까요. 제가 아는 한 이 세계에서 순혈 종족인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어요."

    "네? 누구요?"

    "구원씨도 아시잖아요? 같은 클랜원이시니."

    "아, 디아나!"

    "네. 제가 알기론 그 분이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다른 종족의 피가 섞이지 않으신 분이시죠."

    과연. 그런 건가. 디아나가 유일한 순혈 엘프였다니.

    앗, 그러고 보니….

    디아나의 얘기가 나오니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마침 좋은 기회니 한 번 물어볼까?

    "그런데 대사제님. 질문이 있는데요. 이 세계에서 키스는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네? 그야 물론 사랑하는 사람끼리 하는 행위죠. 당신이 있던 세계에선 달랐나요?"

    대사제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뭔가 좀 더 다른 의미는 없나요?"

    "네. 적어도 제가 알기론 그래요."

    그렇다는 건 뭐야. 디아나가 키스를 거부하는 건 그냥 단순히 날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거란 말이야? 키스에 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하지만 그 반응은 절대 그것만이 아닌 것 같았는데…. 내가 그렇게 믿고 싶은 것뿐이라 그런 생각이 드는 걸까?

    아니, 그렇지 않다. 절대 그것만은 아닐 거다.

    무엇보다 디아나가 단순히 사랑운운 때문에 키스를 거부한 거라면, 오히려 잘 된 일이다. 요즘엔 키스해도 되냐고 물어보면 디아나가 꽤나 고민하는 반응을 보였으니 말이다. 소위 말하는 떡정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예 마음이 없는 반응은 아니었다.

    하지만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 거부하는 것 같지 않으니 애먹고 있는 건데 말이야.

    "뭐 문제 있나요?"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계속해주세요."

    그렇게 구원은 한동안 상식 공부를 계속했다.

    공부를 마치고 나서도 구원은 대사제와 차를 마시며 한동안 잡담을 나눴다. 주로 레이아의 근황에 관련된 얘기였다.

    "그럼 호전이 되고 있는 건가요?"

    "네. 조금씩이지만 확실히 나아지고 있어요. 얼마 전에는 레이아도 의식을 잃지 않기도 했고요."

    "그렇군요. 역시 당신과 같이 다니게 하는 건 옳은 선택이었네요. …처음에는 걱정도 했지만요."

    "하하. 걱정 마세요. 레이아의 안전은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확실히 지킬 테니까요. 제가 이래 봬도 던전에서 날아다니거든요."

    "네. 그러고 보니 들었어요. 이번에 2계층에서 꽤나 활약했다죠?"

    대사제가 깐깐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꽤나 장난기 있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으윽. 벌써 여기까지 소문이 퍼진 건가. 물론 소문이 퍼지라고 한 행동이었지만, 저 표정을 보면 마냥 좋은 소문만 난 건 아닌 것 같다.

    "밀크 로드 메이커라고 했던가요? 꽤나 재밌는 별명까지 얻으셨더군요. 설마 그 직업을 가지고 그런 식으로 전투를 할 줄이야. 여신님을 모시는 입장에선 불경한 느낌마저 드는 전투법이지만, 기발하기는 하네요."

    젠장. 역시나. 그놈의 밀크 로드.

    게다가 불경하다니. 여신의 가르침이 그렇다보니 성직자 입장에선 그런 인상까지 받는 건가. 그럼 설마 티는 안냈지만 레이아도? 이건 변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아뇨. 불경하다니요. 오히려 전 그 야만적인 몬스터들에게 여신님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있는 거라고요."

    "…정말 발상은 기발하시네요."

    구원이 되는대로 내뱉은 변명에, 대사제는 기가 차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같은 남성 모험가에게도 여신님의 가르침을 전파한 건가요?"

    그 소문까지 퍼진 건가.

    "그, 그건 뭐…하하. 어떻게 아셨어요?"

    "남성 모험가끼리의 분쟁은 상당히 드문 일이니까요. 아무래도 소문이 퍼지기 마련이죠."

    대사제는 이상한 말을 해왔다.

    남성 모험가끼리의 분쟁이 드물어? 어째서? 오히려 만나기만 해면 으르렁 거려야 정상 아닌가? 전부 경쟁자잖아?

    "분쟁이 드물어요? 어째서?"

    "네? 그야 워낙 수가 적으니까요. 서로 같은 처지로서 유대감을 느끼고 보통 다들 친하게 지내잖아요. 당신은 안 그런가요?"

    전혀 안 그런데. 유대감은 무슨. 전부 경쟁자라는 인식밖에 없는데.

    다른 남자 모험가가 있다는 건, 어떤 미인이 그 놈이랑 자고 있다는 말이 되잖아. 언젠가 나와 자게 될 지도 모를 미인이 말이다.

    그것뿐 만이면 다행이지. 개중에는 내 여자를 가로채려고 노리는 놈들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 놈들은 그런 의식이 없는 건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구원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모험가만 놓고 보면, 남성이 여성에 비해 압도적으로 수가 적다. 즉, 잡히는 대로 여자를 골라먹을 수 있는 상황이라는 거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귀찮게 남의 여자를 뺏어먹으려는 놈이 있을까?

    물론 그런 성벽이거나, 여자가 엄청나게 예쁘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귀찮게 남의 여자를 뺏을 노력을 하기 보다는 그냥 자기 주위에 있는 여자를 골라 먹을 거다.

    그렇다면 다들 다툼 없이 친하게 지내는 것도 수긍이 간다.

    서로 안전한 놈이라는 게 확실하면, 몇 없는 같은 처지의 동지끼리 친근감이 느껴질만도 하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여관에 남자들이 대부분 모여 있었지. 설마 남성 모험가 친목회 같은 거라도 있는 걸까?

    그리고 내 어깨에 손을 얹었던 그 놈도 처음 보자마자 이상할 정도로 친근하게 굴었다. 테이블에 정말 파티라도 할 것처럼 음식을 잔뜩 쌓아두고 있었고.

    난 그저 놀리기 위해서 그러는 줄 알고 그랬는데, 설마 그게 진짜로 그냥 친근감이 느껴져서 그런 거였나?

    난 그것도 모르고 남들 다 보는 앞에서 개망신을 톡톡히 시켰는데.

    그뿐만이 아니다. 직접 당한 놈 말고도, 다른 놈이 보기엔 갑자기 혼자 파티 분위기를 초친 또라이로 보였을 거다.

    설마 내가 이 세계의 남자 모험가들이 그런 유대감으로 뭉쳐있는지 알았겠냐.

    설명 좀 해주지. 내 스킬 봤으면 내가 이방인이란 것쯤은 알았을 것 아냐. 물론 그때 내가 그런걸 설명해 줄 분위기는 아니었다는 건 인정하지만.

    아무튼 미안하게 됐네.

    구원은 뒤늦게 진상을 깨닫고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다음에 만나면 사과라도 할까? 적어도 내가 직접 손을 봤었던 그 놈한테는 미안하다는 한 마디 정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레이아와 처음 할 때도 아침에 일어나서 맨정신인 레이아와 한 번 더 했었죠.

    구원이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라, 밤새 찐득하게 맨정신인 레이아의 반응을 즐기면서 하는 겁니다.

    이번에도 결국 레이아가 스킬의 영향에 발정이나서 급한 불을 끄는 것처럼 한 번 한게 전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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