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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137화 (121/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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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크 로드 메이커

    앞서 나가던 물방울 마크의 클랜원들은 마을에서 어느 정도 떨어지자 다들 멈춰 서서 각자 전투에 대비했다.

    물론 혼자서 눈에 띄겠다는 목적을 가진 구원은 그들이 멈춰 선 곳을 지나쳐서도 계속해서 달려 나갔다.

    "앗, 잠깐! 당신 뭔가요?!"

    뒤에서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구원은 깔끔히 무시했다.

    이런 일은 무엇보다 임팩트가 중요하다.

    여럿이 난전을 펼치는 와중에 무쌍을 찍는 것과, 혼자 달려들어 무쌍을 찍는 것. 임팩트가 큰 쪽이 어느 쪽인지는 누가 봐도 명확했다.

    오크 떼에 가까워질수록, 1계층 오크들과 이놈들과의 또 다른 차이점을 알 수 있었다.

    1계층의 오크는 부락 전체가 떼로 몰려나와 싸울 때도 질서란 게 없었다. 그냥 되는대로 달려 나와 마구잡이로 싸울 뿐이었다.

    하지만 이놈들은 마치 군대처럼 오와 열을 맞춰 진군해오고 있었다. 이것만 봐도 주술사 초월종의 통솔력이 얼마나 굉장한지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주술을 통해 더 강화되기도 하는 모양이라니까. 2계층에 있는 몬스터치고는 지나치게 위험한 녀석들이긴 하다.

    이제 오크들의 얼굴 표정이 보일 정도의 거리까지 와도, 놈들의 진열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바로 앞에 있는 놈들만으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뭐, 상관없지만.

    놈들이 제대로 진열을 갖추고 있는 건 구원에게 아무런 문제가 안됐다. 얼마 전에 광역 도발기를 배운 참이니까.

    그럼 간다!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구원은 성역 선포 스킬을 최대 범위로 설정하고 발동했다.

    "쿠뤠에엑!"

    질서정연하게 진군하던 오크들 군세 한쪽에 혼돈이 발생했다.

    구원을 중심으로 9미터 이내에 있는 오크들이 진열이고 뭐고 죄다 무시한 채 구원에게 달려들기 시작한 거다.

    저기 멀리서 다른 오크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온 몸에 문신을 새겨놓은 초월종이 시끄럽게 꽥꽥 떠들면서 필사적으로 진열을 가다듬으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구원의 스킬 범위 안에 들어오게 된 오크들은 전혀 통솔이 되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성역 선포가 너무 잘 먹히는데? 원래 성욕이 강한 오크라서, 미약한 자극에도 주체를 못하고 덤벼대는 건지도 모르겠다.

    광기에 찬 눈빛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오크들을 바라보며, 구원은 손발에 성자의 손길을 발동하고 자세를 잡았다.

    성역 선포 스킬을 계속 발동해두고 있으면 정기 소모가 극심하기 때문에 싸울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사이에 최대한 많은 오크들을 쓰러뜨려 강한 인상을 남겨야 한다.

    구원은 놈들 사이에 파고들어 마치 춤이라도 추듯 가볍게 움직이며 한 명씩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다.

    강하게 때릴 필요는 없다. 데미지를 주려는 게 아니니까. 그저 스치듯 건드리기만 해도 성자의 손길은 확실히 효과를 발휘한다.

    구원의 손발에 닿은 놈들은 여지없이 몸을 부르르 떨며 아래쪽에서 액체를 내뿜고 쓰러졌다.

    평소라면 내뿜어지는 액체에 기겁을 하며 피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걸 피할 시간에 한 놈이라도 더 많은 오크를 건드리기 위해 노력했다.

    조금 찝찝하긴 하지만, 어차피 마석을 캐면 몸에 묻은 것들은 전부 사라질 거다.

    차례차례 밀려들어오는 오크들을 건들며 구원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목표는 정해져있다.

    저기 저 초월종이다. 초월종만 전부 해치워도 오크들의 전력을 상당부분 깎아낼 수 있을 거다.

    구원은 오크들의 벽 사이로 툭 튀어나와있는 돼지 머리를 바라보며 일직선으로 곧장 전진했다.

    초월종 근처에는 마치 호위라도 하듯 다른 오크들보다 제대로 차려입은 오크들이 둘러싸고 있었지만, 놈들 역시도 성역의 범위에 들어오자 정신줄을 놓고 구원에게 달려들었다.

    다만 초월종은 이름값을 하는지 성역의 효과에 살짝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명색이 초월종인데 이정도로 이성을 잃지는 않는다는 건가.

    하지만 성자의 손길을 맞으면 어떻게 될까?

    "쿠웨엑! 쿠뤡!"

    아무리 외쳐봤자 네 부하들은 이미 틀렸어.

    구원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놈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쿠웨에엑!"

    오오. 버텼어.

    구원의 주먹이 닿자마자, 놈은 허벅지를 오므리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덕분에 온 몸을 감싼 비계도 출렁출렁 흔들려서 미관상 상당히 보기 안 좋았다.

    하지만 놈은 버텨냈다.

    눈을 시뻘겋게 붉히고, 아랫도리를 감싸고 있는 이상한 문양의 천도 높이 텐트를 쳤지만, 놈은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지지대 삼아 쓰러지지 않았다.

    2계층에 들어와서 내 성자의 손길을 맞고 쓰러지지 않은 건 네가 처음이야.

    구원은 가벼운 감탄을 담아서 놈의 복부지방을 연속으로 두드려 팼다.

    "쿠웩! 켁! 쿠륵!"

    안 그래도 전사 타입이 아니라 마법사 타입의 몬스터다.

    맷집도 상대적으로 약할 텐데 이렇게 주술도 사용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얻어터지면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놈은 결국 절정을 맞이하여 행복한 미소를 띠우고 뒤로 벌러덩 쓰러졌다.

    왠지 지폐를 꽂아줘야 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퀘에에에에엑!"

    그리고 일대에 혼란이 야기됐다.

    구원이 초월종에게 다가갈 때부터 점점 흐트러지기 시작하던 오크들의 대열은, 초월종이 쓰러지자 그대로 붕괴했다.

    오크들은 자신의 전투본능에 모든 것을 맡기고 그저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래. 이래야 오크답지.

    구원은 새로 성역에 들어오는 오크들을 쳐내며 정기를 확인했다.

    슬슬 한 번 돌아가서 정기를 채우고 와야 하나.

    초월종을 한 마리밖에 못잡은 건 아쉽지만, 괜히 욕심 부리다가 다치면 혼날 테니까.

    일단 한 번 돌아가자.

    결심을 내린 구원은 뒤를 돌아봤다.

    …가관이네.

    구원이 지나온 곳에는 절정에 달해 쓰러진 오크들이 1자로 길을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놈들의 몸은 쓰러지면서 싸지른 하얀 액체들로 범벅이 되어 있어서 참으로 더러워 보였다.

    이거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네.

    하지만 이놈들이 쓰러져있는 이 모습이 내 활약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모습이다.

    구원은 당당하게 놈들을 짓밟으며 동료들에게로 걸어갔다.

    근데 이거 마석은 언제 캐지?

    그냥 내버려두고 가기엔 아깝다. 돈이 궁한 처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까운 건 아까운 거다.

    하지만 사방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마석이나 캐고 있을 수도 없어서, 구원은 일단 그대로 돌아왔다.

    사라와 디아나, 레이아는 전투가 벌어진 곳에서 조금 후방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라는 특유의 사정거리를 이용해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재주 좋게 오크들을 잡아가고 있었고, 레이아는 부상을 입고 후퇴한 모험가들을 치료해주고 있는 모습이었다.

    둘이 열심히 움직이는 와중에도 디아나는 오크들이 있는 곳까지 마법의 사정거리가 닿지 않는 건지,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서서 전투를 관전하고 있었다.

    너 어디 높으신 분이냐.

    아니, 뭐 따지고 들면 높으신 분 맞기는 하지만.

    "나 왔어. 거봐, 내가…."

    "음? 히익! 가, 가까이 오지 말게!"

    구원이 다가가자, 디아나가 질색을 하면서 비명을 질렀다.

    "뭐, 뭐야?! 왜 그래?"

    "가만히! 거기 가만히 있게!"

    디아나는 필사적으로 외친 후 빠르게 뭔가 마법을 발동했다.

    그리고 디아나의 지팡이 끝에서 커다란 물방울이 소환되어 구원에게 날아왔다.

    그걸 보고 나서야 구원은 디아나가 질색을 한 이유를 깨달았다.

    "야, 이 인정머리 없는 것아! 너…어푸푸."

    구원의 항의는 전신을 감싸는 물방울에 가로막혀 허무하게 사라졌다.

    구원을 감싼 물방울은 마치 세탁기라도 돌리듯 한동안 거세게 휘몰아치더니, 그대로 바닥에 가라앉았다.

    "너 너무한 거…어푸."

    심지어 한 번도 아니었다.

    디아나는 차례차례 계속해서 물방울을 생성해내더니 거의 10분 동안 구원의 전신을 세탁했다.

    "…이제 만족했냐?"

    한동안 물방울에 시달린 구원은 기진맥진해서 말했다.

    전투하고 온 것보다 더 지치는 것 같아.

    "으, 음. 훤칠하니 보기 좋구먼. 그런데 대체 어쩌다 그런 꼴까지 된 건가?"

    디아나도 조금 너무했다는 생각은 들었는지, 구원에게서 눈을 피하며 말을 돌렸다.

    "그야 저 한가운데 파고들어서 싸우다 보면 이렇게 되지. 초월종은 아예 한 방에 쓰러지지도 않더라."

    "그렇구먼."

    구원이 대답하며 다가가자, 디아나는 미묘하게 몸을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야. 그렇게 하고도 아직 뭐 묻어있을 것 같냐?"

    "그, 그런 거 아닐세."

    "그럼 방금 뒷걸음 친 건 뭔데?"

    "이, 이 몸이 말인가? 그럴 리가?"

    디아나는 과장스럽게 팔을 붕붕 흔들며 대답한 후, 주저주저하며 구원에게 다가왔다.

    그래도 구원이 아무 말 없이 빤히 쳐다보고 있자, 안절부절못하며 허둥대더니 결심한 표정을 지은 후 눈을 꼭 감고 구원에게 안겨왔다.

    "에잇! 어, 어떤가."

    "흠. 뭐 인정해주지."

    구원은 그 귀여운 모습에 입가가 씰룩이려고 하는 걸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왜 돌아온 건가요? 설마 어디 다치기라도 했나요?"

    "네에?! 구원씨 다치셨어요?!"

    사라와 레이아도 하던 일을 멈추고 구원에게 다가왔다.

    얘들도 설마 내가 완전히 깨끗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온 건 아니겠지?

    아직도 디아나가 찰싹 붙어있는데, 평소라면 은근히 질투하는 모습을 보여줄 사라가 아무 말이 없으니 더더욱 수상했다.

    아니야. 동료를 의심하지 말자. 아니겠지. 사라는 둘째 치고 우리 천사님이 그럴 리가 없어.

    "아니. 그냥 마나가 떨어져서 좀 쉬러 왔어."

    "그, 그렇군요. 다행이에요. 정말, 놀래지 마세요."

    레이아가 손끝으로 구원의 가슴을 가볍게 토닥였다.

    구원은 레이아의 손끝이 닿은 부분부터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은 감각을 맛봤다.

    크흑. 레이아 누님. 누님이 그렇게 걱정해 주시는데 이 구원이 어떻게 다치겠습니까.

    "그래도 어때? 나 싸우는 거 봤지? 굉장하지 않았어?"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엄청난 공훈을 세웠다고 생각한다. 이 전투의 mvp를 뽑는다면 틀림없이 나라고 생각될 만큼.

    "네. 저한테도 보일 정도로 구원씨가 간 쪽은 진형이 붕괴되는 게 보였어요."

    레이아가 만면의 미소를 띠며 말했다.

    레이아한테도 보일 정도였다면 다른 모험가들의 뇌리에도 내 모습이 확실히 각인됐겠군.

    그럼 정기가 회복되는 대로 다시 가서 전부 휩쓸고 다니면서 철저하게 진형을 붕괴시켜볼까.

    "그, 그러게요."

    하지만 사라는 약간 석연찮은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뭔가 문제라도 있었어?"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그…아무것도 아니에요."

    사라는 애매모호하게 말을 아꼈다.

    대체 왜 그러지?

    "흠. 됐네."

    그때까지 구원에게 찰싹 붙어있던 디아나가 몸을 떨어뜨리며 말했다.

    "응? 뭐가?"

    "마나 말일세. 자네가 부족하다고 하지 않았나."

    디아나의 말을 듣고 시야 구석을 확인해보니, 어느 샌가 정기가 가득 차있었다.

    "오오. 이런 마법도 있었어?"

    "마법사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마나 전달일세."

    이러면 쉬지 않고 계속해서 싸울 수 있잖아.

    나 이러다가 진짜 전설이 되는 거 아냐?

    혜성같이 나타난 2계층의 오크 슬레이어. 홀로 수백 마리의 오크군과 맞서다. 같은 느낌으로.

    "그럼 어디 다시 한 번 가볼까!"

    "음. 가서 제대로 명성을 떨치고 오게나."

    디아나는 구원의 등을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구원은 그대로 기세 좋게 달려 나가려다가 멈칫했다.

    아참. 그 전에 물어볼 게 있지.

    "그런데 마석은 어떻게 하면 좋아? 캐서 올 수는 없잖아."

    "보통 이럴 때는 전투가 마무리 된 후, 전투에 참여한 모든 모험가들이 마구잡이로 캐는 게 불문율이라네. 어차피 누가 뭘 잡았는지 확인할 방법도 없으니 말일세."

    과연. 그냥 빨리 캐가는 놈이 임자라는 건가.

    그럼 일단 마석은 신경 쓰지 않고 전투에만 집중하면 되겠군.

    "사라. 다른 초월종은 또 어디에 있어?"

    "네? 그…저기에요."

    사라는 주저하는 느낌으로 한 쪽을 가리켰다.

    좋아. 저기란 말이지.

    이번에도 초월종을 쓰러뜨리고 와주지.

    "앗! 자, 잠깐만요."

    하지만 사라가 그런 구원을 막아섰다.

    "왜 그래?"

    아까부터 반응이 미묘하네.

    "아, 아뇨. 그…조심해서 다녀오라고요."

    사라는 부끄러운지 구원의 눈을 마주보지 못하고 그렇게 말했다.

    뭐야. 그런 거였어? 하여간 얘도 귀엽다니까.

    "걱정 마. 이번에도 아까처럼 파바박 정리하고 올게."

    "네…아, 아까처럼 말이죠…."

    구원은 사라를 향해 이빨을 빛내며 상큼하게 미소지어준 후, 곧장 사라가 가리켰던 방향으로 돌진했다.

    "으, 으헛!"

    구원이 다가가자, 근처에서 전투를 벌이던 모험가들이 움찔대며 거리를 벌렸다.

    뭐야. 벌써부터 내가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두려워하는 모험가가 생긴 건가. 하긴 오크 상대로 너무 철저하게 무쌍을 찍기는 했지.

    걱정 마세요 아가씨들. 전 몬스터한테만 잔혹하지 같은 인간, 특히 당신들 같은 미인에게는 따뜻한 남자입니다.

    구원은 모험가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상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고 나서 구원은 곧장 성역 선포를 사용했다.

    성역의 범위 안에 모험가들이 있기는 했지만, 오크들 어그로만 끌어서 금방 해치우고 떠날거니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을 거다. 그 짧은 순간동안 쾌감을 줄 수 있을 만큼 위력 있는 스킬도 아니고.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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