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96화 (96/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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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랜 창설

    옷을 고르고 난 후에도 구원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옷과 어울리는 구두까지 고른 후에야, 구원은 가게를 나올 수 있었다.

    그야 나도 이해한다.

    우리가 신고 있었던 신발은 활동성을 중시한 신발이었고, 턱시도나 드레스와 같이 입으면 그대로 패션 테러리스트가 돼버리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치지 않는 건 아니다.

    가게를 나온 구원의 정신은 이미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참고로 옷과 구두의 가격은 나도 모르게 점원에게 되물었을 만큼 비쌌다.

    맞춤옷도 아니고, 그냥 기성복인데도 이정도 가격이라니.

    아무리 우리가 요즘 벌만큼 벌고 있다지만, 돈을 지불할 때는 절로 손이 떨렸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는 거다.

    얼굴은 간신히 쿨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라 역시도 손이 떨리는 걸 난 똑똑히 봤다.

    역시 이게 정상이지? 아무렇지 않게 낸 디아나가 이상한 거지?

    구원은 강한 동질감을 느껴, 사라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가, 갑자기 뭔가요? 그 묘한 미소는."

    "응?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럼, 식사나 하러 가세."

    디아나는 태평하게 말했다.

    "무슨 소리야 지금 시간이…."

    구원은 말하면서 힐끗 시야 구석에 있는 시간을 확인했다.

    1시 13분.

    …우리 분명 아침에 나왔었지? 그것도 꽤나 이른 아침에.

    구원은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무튼 디아나의 안내를 받아 곧장 음식점에 갔다.

    이번에도 역시 상당히 비싸 보이는 가게다.

    "굳이 이런데서 먹을 필요 있나?"

    아무거나 잘 먹는 구원에게 이런 곳에서 식사를 하는 건 오히려 조금 불편했다.

    괜히 식사예절에 신경 써야 할 것 같은 가게잖아.

    "이런 차림으로 평범한 가게에 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디아나는 마치 준비라도 한 듯이 척척 완벽한 변명을 꺼내 놨다.

    하긴 그도 그런가.

    구원은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은 그냥 아무생각 없이 디아나 뒤만 따라다니자.

    가게 안은 화려한 샹들리에로 장식되어 있어, 밖에서 본 것보다 더 호화찬란했다.

    이런 가게는 보통 출입 조건 같은 것도 있지 않나?

    아니, 나도 잘 모르긴 하지만.

    하지만 디아나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들어갔고, 종업원이 마중 나와 그대로 자리를 안내해줬다.

    옷차림이 이러니까 그냥 넘어간 걸까?

    에이, 괜히 그런데 신경 쓰지 말고 밥이나 먹자.

    구원은 테이블에 놓인 메뉴판을 들었다.

    응. 전혀 모르겠다.

    제발 음식 이름은 좀 이름만으로 알 수 있게 직관적인 이름을 붙여줬으면 좋겠다.

    아니면 내가 그냥 이 세계의 음식명에 익숙하지 않은 걸까?

    구원은 힐끗 사라를 쳐다봤다.

    역시 이 가게가 이상한 거였어.

    사라의 얼굴은 쿨한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미묘하게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훗. 하지만 나에겐 이 역경을 헤쳐 나갈 방법이 있지.

    잘 봐라 사라야. 이게 바로 삶의 지혜란 거다.

    "이 가게는 처음이라 뭘 잘하는지 모르겠네. 디아나, 뭐 추천하는 거라도 있어?"

    "음? 그러고 보니 자네는 여기 음식 이름은 잘 모르겠군. 걱정 말게. 이 몸이 알아서 주문해 주겠네."

    한 방에 들통 났다.

    역시 삶의 지혜도 할머니 상대론 통하지 않는 건가.

    그나마 다른 세계 출신이란 점 때문에 쪽팔릴 일은 아니란 게 다행이다.

    아무튼 그렇게 궁지에서 벗어난 구원은,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자, 보여줘라 사라. 넌 이 곤경을 어떻게 헤쳐 나갈 거냐!

    "사라양. 자네는 정했나?"

    "네?! 네, 네. 우선 이거랑…아니, 이거요."

    사라는 메뉴판 한곳을 가리키더니, 디아나가 깜짝 놀라는 얼굴을 하자 곧장 손가락 다른 곳을 집으며 말했다.

    "자네는 의외로 특이한 음식을 좋아하는구먼."

    장담하는데, 디아나도 분명 알고 놀리는 거다.

    요즘은 처음 만났을 때랑 다르게 둘이서 쿵짝이 잘 맞는데, 왜 갑자기 또 이런 장난을 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네?! 아니, 그게, 그…."

    구원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크큭. 역시 인간은 재밌어.

    특히 평소 쿨한 얼굴의 사라라 더더욱 그렇다.

    그래도 슬슬 불쌍해보이는데 이쯤에서 도와줄까. 난 착하니까.

    "그러지 말고 사라도 나랑 같은 걸로 먹자. 어차피 관청까지 가는 것도 꽤나 걸릴 텐데, 같은 걸 먹으면 그동안 할 얘기도 생기고 좋잖아."

    뭐, 솔직히 말해서 난 밥 먹고 난 후에 음식의 감평 같은 걸로 떠드는 타입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 그럴까요?"

    사라는 목소리에선 숨길 수 없는 안도감이 드러났다.

    "흐음. 그럼 이 몸과 같은 걸 시키도록 하겠네."

    디아나는 테이블에 놓인 종을 흔들어 종업원을 부르고, 주문을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나왔는데, 구원은 또 하나의 난관에 부딪혔다.

    …왠지 나이프랑 포크 종류가 엄청나게 많은데.

    "혹시 여기 식사예절 같은 거에 엄격한 가게야?"

    어차피 디아나에게 허세는 안 통한다. 구원은 대놓고 물어봤다.

    "이 몸이 그런 곳에 자네를 데려왔겠나. 그런데 신경 쓰지 말고 편히 먹게나."

    디아나도 저렇게 말하고 있으니,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할까.

    구원은 그냥 아무 나이프나 하나 집어서 스테이크처럼 보이는 고기를 썰었다.

    구원에게 한 말과 달리, 디아나는 식사예절을 다 지키면서 먹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은 평소 털털한 디아나와 갭이 있어서, 구원은 저도 모르게 계속 눈이 갔다.

    우아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이런 걸 보면 역시 원래 디아나는 사는 세계가 다른 사람이란 걸 느끼게 된다.

    운 좋게 지금은 함께 다니고 있지만 말이다.

    문득 디아나가 명성이란 게 여러모로 필요할 거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확실히. 계속 디아나의 옆에 서기 위해서는, 적어도 명성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기는 하다.

    물론 지고의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디아나의 명성에는 평생에 걸쳐도 따라가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왜 그러나? 입맛에 안 맞나?"

    디아나가 구원의 시선을 눈치 채고 말했다.

    "아니. 이거 맛있네."

    구원은 그렇게 얼버무렸다.

    계속 디아나의 옆에 서기 위해서라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왠지 사라를 한 번 의식한 이후로, 나답지 않게 계속해서 그런 쪽으로 생각이 간단 말이야.

    이게 다 너 때문이다.

    구원은 괜히 사라에게 원망하는 눈초리를 보냈다.

    정작 그 사라는, 디아나를 필사적으로 곁눈질하면서 최대한 예절에 맞게 식사를 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고 있었다.

    저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원망할 생각도 안 든다.

    구원은 그냥 생각을 비우고 밥이나 먹기로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드디어 관청으로 향하기로 했다.

    관청은 여기에서 상당히 떨어져있는 모양으로, 구원을 둘째 치고 사라나 디아나의 드레스 차림으로 거기까지 걸어가기는 힘든 모양이었다.

    특히 사라는 구두의 감촉에 익숙하지 않은지, 내색은 안했지만 상당히 걷기 불편해보였다.

    그래서 이번엔 마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오늘은 참 다양한 경험을 하는 날이군.

    지금 일행이 있는 곳은 귀족들이 사는 거리와 비교적 가까운 상업지구인데, 덕분에 간간이 마차가 지나다녀 쉽게 잡을 수 있었다.

    마차를 잡자마자 먼저 올라탄 구원은 사라와 디아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럼 올라타시죠. 레이디."

    음. 한 번 영화 같은 데서 본 대로 해봤는데, 내가 한 짓이지만 느끼하다. 이건 글렀군.

    "흠. 자네도 의외로 매너를 전혀 모르는 건 아니로군."

    하지만 디아나에게는 의외로 호평이었다.

    이 느끼한 짓이 진짜로 매너라고?

    내가 앞으로 마왕을 때려잡고 명성이 아무리 높아져도 귀족 놀이는 못할 것 같다.

    디아나는 구원의 손을 잡고 우아하게 마차로 올라탔다.

    "그럼 사라도."

    "네."

    사라 역시도 가볍게 올라탔다.

    구두에 익숙지 않아서 중간에 살짝 발일 헛디뎠지만, 사라는 특유의 신체능력을 바탕으로 가뿐하게 다시 균형을 잡았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넘어지는 걸 내가 받쳐주고, 서로 호감도가 올라가는 장면이 이어져야 맞는 거 아니냐?

    신체능력으로 호감도 상승 이벤트를 건너뛰어 버리다니.

    진짜 얘가 나한테 호감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판단이 안 된다.

    아무튼 그렇게 기나긴 여정을 마치고 구원은 드디어 관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길었다…. 클랜 등록 한 번 하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기껏해야 동사무소 같은 곳을 생각하고 왔는데, 관청 건물은 엄청나게 휘황찬란했다.

    심지어 입구에는 갑옷을 입은 병사 둘이 지키고 있기까지 했다.

    이런 모습을 보니 지금까지 한 고생이 그래도 헛수고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이런 차림새가 아니었으면 입구에서부터 쫓겨났을 지도 모르겠는데.

    "잠깐 멈추시오."

    일행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앞에 있던 경비병이 곧바로 제지를 했다.

    뭐야. 설마 이런 차림까지 했는데도 프리패스가 아닌 거야?

    "뭔가?"

    "못 보던 얼굴인데. 그…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오?"

    경비병은 왠지 주저하는 말투로 말했다.

    하긴, 지금의 사라와 디아나를 보고 저런 말을 꺼내기란 쉽지 않겠지.

    둘 다 안 그래도 눈이 부실 미녀인데, 잘 꾸며놓자 아예 후광이 보일 정도였다.

    살짝 어색한 사라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누가 봐도 귀족 영애로 보일 모습이다.

    "디아나일세."

    "혹시 신분을 증명할만한 것이 있소?"

    "그런 건 없네."

    "그렇다면 여길 통과할 수 없소."

    이거 왠지 많이 들어본 대화패턴인데.

    그럼 이 다음은…구원은 다음 전개에 두근두근하면서 지켜봤다.

    "이 몸은 다이애나 텔루나일세. 그럼 됐나?"

    "으헉! 시,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경비병의 목이 날아가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디아나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을 말한 순간, 경비병 둘의 몸이 경직되나 싶더니 동시에 경례를 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지고의 마법사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시끄럽네. 조용히 좀 말하게나."

    "네! 죄송합니다!"

    경비병은 디아나의 말에도 전혀 굴하지 않았다.

    이놈들 겁도 없네. 지고의 대마법사님 상대로.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디아나는 질린 표정을 지었지만, 더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과연. 내가 말을 잘 안 들어도 묘하게 익숙한 태도라고 생각했는데, 디아나한텐 그게 일상이었나.

    "으윽. 그럼 들어가도 되겠는가?"

    "물론입니다! 어서 들어가시죠!"

    "천천히 들어갈 거다. 명령하지 마라."

    구원은 경비원들의 모습이 재밌어서, 반사적으로 끼어들었다.

    경비원은 잠깐 이건 또 뭐야라는 표정으로 구원을 바라봤지만, 곧 뭔가를 깨달은 표정으로 다시 디아나를 바라봤다.

    "실례했습니다! 결코 명령하는 의미로 말한 것이!"

    "자네까지 귀찮게 만들지 말게."

    디아나는 평소처럼 구원의 꿀밤을 한 대 때리려고 손을 들려는 것 같았지만, 곧 겨드랑이를 가리며 포기했다.

    훗. 그 차림으로 내 머리를 공격하긴 힘들겠지.

    구두로 까치발을 들기도 힘들 뿐 아니라, 어깨가 드러난 의상이라 손을 올리면 겨드랑이까지 그대로 드러나니 말이다.

    "그런데. 다이애나 텔루나?"

    "음. 이 몸의 풀 네임일세."

    "나도 그럼 이제 다이애나, 아니 텔루나님이라고 불러야 되나? 쟤들 반응 보니까 장난 아니네."

    "그냥 디아나라고 부르게나. 이 몸도 그게 편하네."

    "그래? 그럼 그러지 뭐."

    사실 구원도 그냥 해본 말이다.

    텔루나님이라고 부르도록 시켜도 귀찮아서 그럴 생각은 없다.

    "자네도 참…단순해서 좋구먼."

    "응? 내가 그렇게 좋아?"

    "칭찬 아닐세!"

    결국 디아나는 구원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건물 안은 겉모습과 마찬가지로 호화찬란했다.

    관청이 아니라, 마치 귀족이 사는 저택 같은 곳이다.

    몇 없지만 우리와 같이 손님 같아 보이는 사람들도 전부 화려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여기 그냥 관청이 아니라 귀족 전용 관청이거나 뭐 그런데 아냐?

    잠깐만. 귀족 저택…종업원…그렇다면!

    구원은 재빨리 접수처로 보이는 곳을 주시했다.

    "어서 오게. 무슨 일로 왔는가?"

    하지만 구원의 기대는 순식간에 박살났다.

    젠장. 이런 데에선 메이드가 튀어나오는 게 정석이잖아.

    뭘 모르는 군. 뭘 몰라도 너무 몰라!

    접수처에 앉아있는 건 그냥 아줌마였다.

    아줌마의 심드렁한 말에 디아나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구원도 사라도 이런 일에는 문외한이니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사라는 지금 평정을 가장하고 있는 것만으로 한계인 것처럼 보였다.

    평소보다 얼굴이 더 굳어져있고, 움직임도 왠지 딱딱하다.

    "클랜 등록을 하려고 왔네."

    디아나의 말에 접수처 아줌마의 눈썹이 불쾌하다는 듯이 살짝 꿈틀댔다.

    반말이 맘에 안 드는 걸까?

    하긴 이 아줌마도 딱 보니 귀족 같아 보이긴 한다.

    "클랜은 자격이 없으면 등록할 수 없네. 자네들은…."

    "다이애나 텔루나일세."

    "그게 뭔…으헉! 텔루나님! 모, 몰라뵈서 죄송합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코튼 자작가의 당주를 맡고 있는 몸으로 30년 전 아리웬 백작가의 파티에서…."

    그때까지 의자에 누운 듯이 기대서 귀찮다는 표정을 하던 아줌마가, 순식간에 자세를 바로잡고 뭔가 필사적으로 외쳐댔다.

    "아아. 됐으니까 얼른 서류나 꺼내게."

    "네, 네! 죄송합니다!"

    아줌마는 거의 바닥에 엎드릴 기세로 사과를 하며 황급히 서류를 꺼냈다.

    귀족마저도 이런 태도인가. 얘 진짜 장난 아니네.

    지금까지 내가 얘 놀려먹은 게 들통 나면, 나 혹시 사형당하는 거 아니야?

    ============================ 작품 후기 ============================

    후원 쿠폰, 원고료 쿠폰 보내주신 분들 너무 감사드립니다.

    추천해주신 분들도 정말 감사합니다.

    아토므스크 // 일단 아직까지 탈의실에서 할 만큼 관계가 진전되지 않았고, 구원도 멘탈이 깨져서 탈의실에 므흣함을 느낄 여유가 없었습니다.

    centinel // 그렇군요. 잠꼬대는 말만 해당하는 거였다니. 지금까지 행동도 잠꼬대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코멘트 써주신 분들도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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