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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랜 창설
"얼른 식사부터 하세. 오늘은 하루 종일 바쁠 걸세."
디아나는 왠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왜? 바쁠 생각하면 들떠?
"근데 할 일이라곤 클랜 등록밖에 없잖아. 그렇게 절차가 복잡해?"
그냥 서류만 양식에 맞춰서 제출하면 끝이라는 이미지가 있는데 말이야. 너무 현대적인 생각인가?
게다가 그마저도 바로 될 거란 생각은 안 든다.
일처리가 빠르면 공무원이 아니지. 여기 공무원이라고 다르겠어?
"무슨 소리인가. 할 일이 태산이지 않은가. 길드와 정보공개 관련으로 협상도 해야 하고 말일세."
아, 그런가. 그것도 있었지.
아무래도 그게 얘기가 길어지겠지? 아마 길드 측에서도 되도록 자기들한테 유리한 협상을 하려고 할 테니.
솔직히 말하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거나 할 자신은 전혀 없다. 내가 그런 자리에 나가본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이 부분은 디아나의 연륜을 믿어야지.
"그럼 전 신전으로 돌아가 있을게요."
식사를 마치고, 레이아는 먼저 일어서며 말했다.
레이아는 신전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던 게 처음이라는 모양이다.
얼른 얼굴을 비추고 싶겠지.
원래대로라면 구원도 따라가야 하겠지만, 오늘을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응. 대사제…님한테는 말 좀 잘 해줘. 어쩌면 오늘은 못갈 수도 있으니까."
대사제와의 약속도 있고, 마나풀 때문에라도 신전에도 가기는 가야한다.
그래도 디아나가 바쁘다고 했으니까 오늘은 못 가겠지.
정말로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도 오랜만에 공부란 걸 할 생각이 들었었는데 말이야. 아쉽기 그지 없다.
"후훗. 네. 걱정 마세요. 나중에 봐요."
레이아는 왠지 쿡쿡 웃으며 대답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이쪽을 바라보며 손을 살랑살랑 흔드는 레이아의 모습에, 구원도 흐뭇한 미소를 띄우며 손을 마주 흔들어줬다.
크으. 치유된다.
"뭐하나. 다 먹었으면 자네도 얼른 준비하게."
디아나가 구원의 옆구리를 콕 찌르며 말했다.
으윽. 기습 공격은 그만 둬라.
아무리 네 직접공격이 데미지가 없어도 갑자기 옆구리를 찔리면 움찔한단 말이다.
"그럼. 이 몸들도 가보겠네."
디아나는 사라를 바라보며 시원한 미소를 띄우고 말했다.
"네. 어서 가죠."
마찬가지로 사라도 시원한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둘이 말이 안 맞물리고 있지 않냐?
"음? 이 자는 클랜장으로 등록해야 할 테니 같이 가야겠지만, 자네까지 따라올 필요는 없다네. 그냥 오늘은 푹 쉬면서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을 즐기게나."
"아뇨. 놀고 있어봐야 심심하기만 한걸요. 클랜 등록 같은 걸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저도 따라갈게요."
"하, 하지만 클랜 등록은 더 재미가 없을 걸세."
디아나는 왠지 필사적으로 말했다.
잘하고 있어! 구원도 마음속으로 디아나를 살짝 응원했다.
아무리 이런저런 이유로 다시 고백해볼 용기는 없다지만, 그렇다고 사라가 신경이 안 쓰이는 건 아니다.
여전히 어제 구원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신경 쓰인다.
일단 조금이라도 얼굴 안 마주치고 있으면 좀 나아질 것 같은데, 이래서야 계속 신경 쓰이게 되잖아.
"그럼 그때 가서 돌아오죠 뭐."
하지만 사라는 가볍게 맞받아쳤다.
"으으으음."
디아나도 그 말에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결국 클랜 등록은 사라와 디아나, 구원이 함께 가기로 했다.
"자. 그럼 일단 골라 보세나."
하지만 디아나가 일행을 안내한 곳은 관청이 아니었다.
"디아나, 여긴…?"
"보면 모르나? 옷가게일세."
아니, 나도 눈이 있으니까 그 정도는 보면 알아.
내가 묻는 건 대체 여기 뭘 하러 왔냐는 거다.
저번 휴일에 갔던 옷가게와는 차원이 다른, 엄청난 크기의 옷가게였다.
게다가 꽤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이, 이런 데에 문외한이 구원이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가게다.
"말하지 않았나. 클랜이 되면 정식으로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된다고. 나라에서 그런 클랜을 아무나 등록시켜주겠나? 적어도 자네가 입고 있는 그 구질구질한 천 옷을 입고가면 상대도 안 해줄 걸세. 이김에 정장 한 벌이라도 맞추게나."
참고로 구원의 옷은 여전히 거리에서 가장 싼 값에 살 수 있는 천 옷이다.
어차피 패션의 완성은 얼굴! 내 얼굴이면 아무거나 입어도 패션이 되는 법이지! 라는 자신감의 발로다.
…실은 그냥 옷 같은 거 고르기 귀찮은 거지만.
반면 사라나 디아나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꽤나 멋을 내고 있다.
역시 여자란 생물은 세계에 상관없이 꾸미기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정장이라….
판타지 세계관의 정장하면, 안 좋은 예감밖에 안 든다.
설마 약속된 전개대로 쫄쫄이를 입게 되는 건 아니겠지?
"그럼 이번엔 이걸 입어보게."
다행이 구원의 예감은 멋지게 빗나갔다.
이 세계의 정장은 구원의 눈에 보기에도 꽤나 잘 빠진 턱시도와 같은 모양이었다.
군데군데 금빛 자수 같은, 원래 세계의 관점으로 보기엔 꽤나 촌스러워 보이는 디자인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마치 게임 캐릭터의 코스프레용 옷 같았지만, 보기에 따라선 이 정도는 패션의 일부로 좋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예상했던 쫄쫄이가 아닌 것만으로도 천만 다행이지.
역시나 멋진 세계야. 내가 수도시설이 첨단시설일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으응…. 그건 조금 너무 화려해 보이지 않나요? 구원. 이번엔 이걸 입어보세요."
문제는 옷의 디자인이 아니라, 사라와 디아나의 열정이었다.
사라와 디아나는 구원의 눈으로 보기에는 대체 어디가 다른 건지 전혀 구분이 안 되는 옷을 계속해서 건내왔다.
그 열정에 밀려, 구원은 마치 옷 갈아입히기 인형처럼 계속해서 옷을 갈아입는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조금 두근두근했다.
여자애들이 날 위해서 옷을 골라주는 건 전혀 나쁜 기분이 들지 않고, 오히려 기분 좋다.
특히 사라는 어제 그런 일도 있어서, 이렇게 정열적으로 구원에게 어울리는 옷을 골라주는 건 구원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얘가 정말로 나한테 호감이 있는 거 아닐까?
그렇잖아? 아니면 이렇게 열심히 옷을 골라주는 게 말이 돼?
하지만 갈아입은 옷이 열 벌이 되고, 스무 벌이 되고, 서른 벌이 넘어가자, 구원의 그런 두근두근한 마음도 점차 사그라졌다.
"저…그냥 대충 고르면 안 될까?"
"무슨 소리인가! 이 몸의 사전에 대충이란 말은 없다네!"
"그래요. 이왕 고르는 거니까 제대로 된 걸 골라야죠."
도중에 구원도 미약한 저항을 해봤지만,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역시나. 나한테 가진 호감이 문제가 아니라, 얘들은 그냥 쇼핑 그 자체를 즐기는 거야.
"하지만 바쁠 거라면서?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어도 괜찮아?"
"괜찮네. 처음부터 이럴 시간도 계산해서 바쁠 거라고 한 거니 말일세."
뭣이 어쩌고 어째?! 그럼 난 아침 먹을 때부터 이미 함정에 빠진 거였다는 말이야?
디아나…무서운 아이…!
"불평할 시간이 있으면 여기 이 옷으로 얼른 갈아입어 보세요."
"얼른 하게나. 아직 입어볼 옷이 많다네."
결국 구원은 사라와 디아나가 만족할 때까지, 기계처럼 옷을 갈아입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이게 가장 나은 것 같군."
"그러네요. 역시 구원은 이런 게 어울리네요. 그럼 이걸로 할까요?"
"음. 그러세. 자네, 뭐하나. 정신 차리게."
"으, 응? 뭐라고? 아, 다 끝났어?"
정줄을 놓고 있던 구원은, 그 한마디에 제정신을 찾았다.
드디어 끝난 건가! 난 이제 해방이야!
구원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전 세계에서, 여자와 쇼핑을 갈 때마다 남자들은 지루해 죽으려고 한다는 짤방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래도 니들은 같이 다닐 여자라도 있잖아! 죽창에 찔려 죽을 새끼들!
하지만 이제 구원도 그들의 기분에 절실히 공감한다.
확실히 이건 힘들어. 너무 힘든 싸움이었어. 하지만 난 이겨냈다!
"그럼 갈까?"
구원은 둘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계산을 마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구원의 행동에 제동을 거는 목소리가 있었다.
"무슨 소리에요. 이제 겨우 구원이 입을 옷 하나만 고른 거잖아요. 이제 저희가 입을 옷도 골라야죠."
뭐…라고…?
결정타를 먹이는 그 한 마디에, 구원은 더 이상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
"구원, 이건 어때요?"
"하하. 예쁘네."
"이건요?"
"응. 그것도 예쁘네."
"아까부터 계속 똑같은 대답만 하네요. 저희도 골라줄 때 열심히 했으니까, 구원도 좀 제대로 봐줘요."
"사라양이 말하는 대로일세. 자네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닌가? 이건 어떤가?"
"응. 그것도 예…."
"자네. 이 몸들의 말을 제대로 듣고는 있는가?"
하지만 사라와 디아나는 구원이 정줄을 놓는 것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다양한 감상을 요구했다.
제길.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내가 옷마다 다른 감상평을 내놓을 정도로 옷을 잘 알았으면 평소에 제일 싼 천 옷만 입고 다녔겠어?
"너희 얼굴을 생각해봐라. 뭘 입어도 예쁜데 나보고 뭘 어쩌라고. 탓하려면 뭘 입어도 예쁜 너희 자신을 탓해라."
애초에 너흰 레이아랑 다르게 본인들이 예쁘다는 거 잘 알고 있잖아.
스스로가 뭘 입어도 예쁘다는 자각은 있는 애들 아니었냐?
그냥 대충 골라. 어차피 뭘 입어도 예뻐.
"그, 그런가요."
하지만 구원의 말에, 의외로 사라와 디아나는 얼굴을 붉혔다.
어라? 평소에는 자기 외모에 자신감 넘치는 애들이 왜 이래?
이 정도 말에 부끄러워할 애들이 아니잖아.
혹시 정말로 나한테 호감이….
"흐, 흠. 자네는 이런 곳에서까지 못하는 말이 없군."
디아나의 말에, 구원은 문득 주위를 둘러봤다.
가게 안에 있는 손님들 대부분이 이쪽을 주목하고 있었다.
특히 가게의 손님 대부분이 여성이라서, 시선이 더욱 따갑게 느껴졌다.
…뭐야 이거.
왠지 엄청나게 주목받고 있는데. 설마 아까 내 한마디 때문에?
다들 얼마나 예쁜지 확인하려고 쳐다보는 거야?
과연 아무리 자기 외모에 자신감이 있어도, 이건 좀 부끄러워질 만하다.
"조, 좋아. 그럼 이건 어때? 맘에 드는 옷을 둘씩 짝지어서 비교해보는 거야. 토너먼트 방식으로 말이야. 그렇게 해서 제일 마지막에 남는 걸 고르자."
위기에 몰리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젠장. 진작 이런 생각이 떠올랐으면 지금까지 이 고생 안 해도 됐을 텐데.
"그러네요. 그럼 그렇게 해요."
"어쩔 수 없구먼."
어라? 반응이 왜이래?
엄청나게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는데, 왠지 사라와 디아나의 반응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내 말대로 하면 여기서 빨리 벗어날 수…서, 설마!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쇼핑을 즐기고 싶은 건가!
너희 눈에는 저 시선들이 안보이니?
저기 여성분은 질투가 하늘을 찔러 시선만으로 너희를 죽일 수 있을 정도인데 말이야.
그런데도 쇼핑을 더 하고 싶어?
무섭다. 여자란 무서워!
구원은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제가 둘씩 보여줄 테니까 구원이 그 중에서 더 나은 걸 골라줘요."
"뭐? 그냥 네가 정하는 게 낫지 않아? 나 패션센스 꽝인데."
"그야 평소 차림을 보면 알아요."
그러신가요…. 아니 그야 합당한 판단이지만.
근데 너 그거 아냐? 사람은 의외로 사소한 거에 상처 받는다?
"그래도 어차피 후보는 제가 고른 거니까 상관없어요. 남성의 의견도 필요하고요."
"음. 그럼 이 몸도 그렇게 정하도록 할까."
결국 사라와 디아나의 옷은 구원이 고르게 되었다.
그렇게 사라는 평소의 쿨한 이미지를 돋보이게 해주는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드레스가, 디아나는 귀여운 용모를 더욱 빛나게 해주는 프릴이 많이 달린 귀여운 드레스가 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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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 쿠폰, 원고료 쿠폰 보내주신 분들 너무 감사드립니다.
추천해주신 분들도 정말 감사합니다.
코멘트 써주신 분들도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