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오크들의 영역
길 찾기라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 위치 자체는 이미 알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정말로 여기에도 다음 계층으로 가는 길이 존재한다면 초월종들이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을 테니까. 초월종이 있던 부락 두 곳의 가운데 지점에서 90도로 꺾어서 쭉 가면 된다. 구원은 맵까지 있으니 더 간단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일행은 의욕에 넘쳐 곧장 길을 나섰다.
먼저 두 부락의 가운데 지점으로 가서, 처음 전멸시킨 부락과는 반대쪽 방향으로 향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몇 마리의 오크들과 마주쳤다.
이렇게 소수의 무리와 마주친 건 오크들의 영역에 들어와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놈들은 꽤나 많은 수의 늑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뭐하는 놈들이지?
"크, 크루룩!"
놈들은 일행을 보고 심히 당황한 모양인지, 공격할 생각도 하지 않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뭐하는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공격하고 보는 게 맞겠지?
구원은 곧장 오크에게 달려가 선제공격을 날렸다.
"쿠뤠엑!"
"컹! 컹!"
반격할 생각도 못하고 그대로 얻어맞은 오크였지만, 대신에 늑대들이 구원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자식들. 그런다고 내가 무서워할 것 같아?
미안하지만 위에서 너희 같은 놈들은 수도 없이 사냥해본 몸이다 이거야.
"고자가 되고 싶은 놈부터 먼저 튀어나와봐라."
구원은 한 손을 들어서 손 안의 알을 터뜨리는 시늉을 하며 스산하게 말했다.
늑대개는 아닌 거 같으니 이놈들도 거기에 마석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석이 없다고 쳐도 충분히 위협적인 말이겠지.
말이 안 통하는 늑대들이라고 해도 구원이 풍기는 위험한 분위기를 알아챘는지, 다가오지 못하고 잠깐 주저했다.
콰앙!
그리고 그 사이에 사라와 디아나의 공격이 작렬했다.
훗. 이번엔 성자의 손길조차 사용하지 않고 훌륭히 어그로를 끌었군. 나 이런데 재능 있는 거 아니야?
사실 어그로를 끌 필요가 있었는지도 의문이지만 말이다.
처음 기세와는 다르게 늑대들은 꽤나 수준 낮은 몬스터인지, 사라와 디아나의 공격 한 방에 한 마리씩 쉽게 정리가 됐다.
"크루룩!"
그리고 오크 놈들은 그 모습을 보고 이제야 싸울 생각이 들었는지 달려들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쉽게 녀석들을 정리하고, 구원은 잠깐 생각을 해봤다.
지금까지 초원에서 만난 적이 없던 오크 놈들을 갑자기 만나게 된 이유. 그것도 다른 몬스터와 같이 있는 이유가 뭘까?
"흠. 이곳을 탐험하면 탐험할수록 2계층의 오크와 흡사한 구석이 많구먼."
"어떤 부분이?"
"늑대를 사역하는 부분이 말일세. 2계층에서도 오크들이 늑대를 사역한다네. 종종 타고 다니며 싸우는 놈들마저 있지. 1계층 늑대는 그러기엔 몸집이 작으니 타고 다니기까지는 못하겠지만 말일세."
그런가. 사역인가.
게임에서는 모든 몬스터가 협동해서 플레이어에게 달려드는 건 흔한 일이지만, 여기선 서로 죽고 죽이다 보니 오히려 그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걸까?
구원 일행이 지금까지 정리한 부락까지는 이른바 전선기지 같은 역할이고, 그보다 더 안쪽인 이곳부터는 거주구역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건가.
그렇다며 아까 전 오크들이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듯 만나자마자 달려들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된다. 여기 있는 오크들은 너무 평화에 찌들어 있어서 전투에 익숙지 않은 거다.
만약 앞으로도 계속 이런 오크들밖에 없다면…이거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겠는데?
그렇게 일행은 계속해서 전진해나갔다.
초원에서 가끔 오크들을 마주치는 일도 있었지만, 역시나 구원의 예상대로 그들은 한결같이 전투에 익숙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
그렇게 한참을 걸은 끝에, 드디어 일행은 목표하던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꽤나 거리가 있지만 그럼에도 확실히 보이는 거대한 바위였다.
비석 같은 모양으로 우뚝 서있는 모습이 여기 중요한 곳이라고 이미 알려주고 있는 듯 했다.
아마 아래에는 계층의 주인이 있겠지.
아무래도 오크들이다보니 그 특성상 계층의 주인도 부락 같은 곳에서 부하들 수백을 거느리고 있는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아닌 모양이다.
"일단 목표는 찾은 것 같네. 맘 같아선 바로 가보고 싶긴 한데…역시 내일 하는 게 좋겠지?"
구원은 일행들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셋 다 내색은 안하고 있지만, 피로가 쌓인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오늘 하루 동안 초월종이 있는 부락 하나를 전멸시키고, 이어서 여기까지 온 거다.
구원처럼 무식하게 체력이 있는 게 아닌 이상 지치는 게 당연하다.
"음. 계층의 주인이면 쉽게 도전할 상대가 아니기도 하지. 오늘은 이만 돌아가세."
너무 정신이 팔려서 몰랐지만, 시간도 엄청나게 늦었다.
이거 이대로라면 비밀 기지에 도착하면 새벽이겠는데?
던전 안에서는 낮과 밤의 구분이 없다보니 별 상관없는 얘기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생체리듬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후우, 이보게."
"응?"
"업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아무리 여기 오크들이 전투에 익숙지 않다고는 해도,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를 상황인데.
구원은 어이가 없어서 디아나를 돌아봤지만, 꽤나 여유 있는 말투와는 다르게 그 표정은 정말로 피곤해보였다.
"그 표정은 뭔가? 약속을 잊었는가?"
그러고 보니 그랬지.
구원은 군말 않고 디아나를 업었다.
"그렇게 피곤하면 빨리 얘기 하지 그랬어. 길 찾는 건 내일해도 되는 건데."
"무슨 소린가. 이 몸은 그저 이용할 수 있는 걸 이용하는 것뿐일세."
구원의 말에도, 디아나는 뻔히 보이는 허세를 부릴 뿐이었다.
얜 나이에 안 맞게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까.
구원은 피식 웃으며 디아나를 받친 손으로 그 엉덩이를 가볍게 토닥였다.
힘이 없으니 설교도 못할 거라는 계산도 깔린 행동이었다.
"히잉!"
반응 좋고.
"왜 그러세요?"
"아, 아무것도 아닐세. 그냥 재채기일세. …무슨 짓인가."
디아나는 레이아에게 얼버무리고, 바로 구원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냥. 귀여워서."
"귀, 자네 이 몸이 몇 살이라고…!"
"그래봤자 누나잖아?"
"그, 그건 그러네만…! 자네는 이리 말하면 저리 말하는군!"
아무리 그래도 누나라는 위치를 잃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다.
결국 디아나는 말로 이기기는 포기했는지 실력행사에 나섰다.
말로 못 이긴다고 주먹으로 사람을 치다니. 대마법사님이 할 짓이 아니지 않나.
아무튼 예상대로 평소의 설교 공세는 이어지지 않았다.
얜 역시 놀리는 맛이 있다니까.
구원은 디아나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뒀다.
어차피 데미지도 전혀 없고, 때리다 제풀에 지쳐서 그만 두겠지.
"레이아는 괜찮아?"
"네. 아직 괜찮아요."
레이아는 가슴 앞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크으. 아무리 힘들어도 사랑스러운 모습을 잃지 않는 저 자태를 봐라.
디아나야. 좀 본받아라. 나이만 많이 먹었다고 다가 아니야.
"힘들면 꼭 말해야 돼."
"네. 그땐 부탁드릴게요."
레이아의 따뜻한 미소가 구원의 가슴에 스며들어왔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치유된다.
레이아와 대화를 마치고 고개를 돌리니, 사라와 시선이 마주쳤다.
뭐지?
구원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자, 사라도 덩달아서 계속 지긋이 구원을 바라봤다.
뭐야 이거. 왜 갑자기 아무 전조도 없이 눈싸움이 시작된 거야.
"사, 사라야? 뭐 할 말이라도?"
"아뇨."
그럼 뭔데? 아, 혹시 얘도 피곤한 건가? 낮에 한 번 기절한 여파가 남아있을 지도 모르고.
같이 후위에 있는 직업이라도, 아무래도 몸 쓰는 직업이다 보니 사라가 다른 둘 보다는 체력이 월등하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신경을 덜 썼는데, 오늘은 좀 얘기가 다른 걸지도 모르겠다.
"너도 피곤해? 안고 가줄까?"
"아뇨."
하지만 그것도 아닌 모양인지, 사라는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그것도 아니면 대체 왜 눈싸움을 했던 건데.
"차라리 오늘은 그냥 저기서 잘까?"
돌아가던 길에 전멸시킨 부락이 보여 구원이 중얼거렸다.
"흠. 괜찮을 것 같군."
하지만 디아나가 의외의 말을 했다.
"응? 정말로?"
"음. 어차피 다른 녀석들도 저곳이 전멸했다는 건 모를 테니 말일세."
등잔 밑이 어두울 거라는 얘기인가.
생각해보니 정말로 괜찮은 얘기 같아서 일행은 곧장 발걸음을 그쪽으로 돌렸다.
"진짜로 괜찮네."
확실히 초월종이 있던 곳이라서 그런지, 입구 쪽에 있던 부락보다는 좀 더 정돈된 느낌이 든다.
게다가 한 눈에 봐도 초월종이 지내던 곳이라고 알 수 있는 곳은, 제법 거창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잠은 자기에는 여기가 제일 좋긴 한데…. 역시 다른 곳에서 자는 게 낫겠지?"
"네? 왜요?"
"생각해봐. 만약 다른 오크들이 여기 왔다고 치면, 제일 먼저 어디부터 들르겠어?"
즉, 제일 편해 보이는 이곳이 기습을 받을 확률도 가장 높은 곳이라는 뜻이다.
"아, 그렇군요! 굉장해요!"
"뭘 이정도 가지고…."
"그냥 이 몸들과 붙어 자고 싶은 구실이 필요한 거 아닌가?"
구원과 레이아의 대화에, 등 뒤에 있던 디아나가 불퉁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난 그런 생각은 시도도 못했는데. 혹시 디아나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들로 가득…."
"음. 어디 계속 말해보게나."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확실했다.
이 이상 말하면 생명이 위험할 거야. 한 번 놀리는데 성공했다고 너무 나갔나.
"차있으면 흥분될 것 같다는 변태 같은 발상을 잠깐 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흠. 잘했네. 자네 변태로구먼."
디아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구원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칭찬하는 거냐, 매도하는 거냐. 한 가지만 해라.
"변태라서 뭐가 나빠! 남자는 모두 변태라는 이름의 신사라고!"
그러면 이번엔 아예 정색하고 나가보기로 했다.
"알겠네. 알겠네."
하지만 완전히 할머니 모드로 들어간 디아나는 구원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런데 디아나. 2계층에 있는 오크들 얘기 좀 자세히 해줘. 초월종이 쓰는 거랑 비슷한 기술도 쓴다고?"
늦은 저녁 식사를 하던 도중, 구원은 낮에 디아나가 했던 얘기가 떠올라서 말했다.
아마 여기 있을 계층의 주인도 오크일 테고, 미리 들어두면 좋은 부분도 있겠지.
"음. 2계층부터는 일반 몬스터들도 기술을 사용하고는 한다네. 그들 대부분이 여기 있던 초월종과 비슷한 전투방식을 구사한다네. 그런 놈들이 몰려다니니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지."
계층 하나 건너뛴다고 그렇게 차이가 나는 건가.
다른 파티가 계층의 주인을 물리치더라도, 2계층으로 넘어가는 일 없이 1계층에만 머무르는 모험가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이해가 된다.
계층의 주인도 이기지 못하는 파티라면, 애초에 다음 계층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뜻이겠지.
"주목할 건 2계층의 오크 초월종이라네. 놈들은 주술사로서 여러 가지 주술을 부리지. 주변 오크들의 전의를 고양시키고, 신체능력이나 회복능력을 상승 시키며, 때로는 번개를 내리기도 한다네. 일대일의 전투 보다는 다수의 전투에 특화된 놈들이지."
"아, 응. 어떤 이미지인지 대충 알 것 같아."
잠깐. 2계층의 일반 오크가 여기의 초월종과 비슷하다고 했잖아. 그럼 여기 있는 계층의 주인은 혹시 2계층의 초월종과 비슷한 거 아닐까?
"혹시 그 주술사 공략법 같은 건 없어?"
"가장 좋은 건 주술을 사용하기 전에 해치우는 걸세. 아무래도 주술사다보니 신체능력은 조금 떨어지는 것 같더군. 다만 그만큼 주위를 다른 오크들이 철통같이 방어하니, 압도적인 능력차가 있는 게 아닌 이상 사실 불가능한 방법일세."
"그럼 다른 방법은?"
"흠. 솔직히 잘 모르겠군."
"뭐? 넌 어떻게 했는데?"
"이 몸이 그런 녀석들을 잡는데 고생했을 것 같나?"
듣고 보니 그러네요.
디아나 입장에서는 공략법이고 뭐고 다 때려잡으면 그만이었겠지.
"뭐. 주술사는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만약 만나게 되면 이 몸이 처리하겠네."
"아니, 너 전생했잖아."
"그렇다고 이 몸이 대마법사라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라네."
구원의 태클에도 디아나는 자신만만했다.
이정도로 자신만만하단 건 정말로 뭔가 방법이 있는 모양이다.
============================ 작품 후기 ============================
후원 쿠폰, 원고료 쿠폰 보내주신 분들 너무 감사드립니다.
추천해주신 분들도 정말 감사합니다.
코멘트 써주신 분들도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