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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86화 (86/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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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크들의 영역

    구원은 잠깐 테스트를 해봤다.

    일단 천장을 바라보고 정자세로 누워서 옆으로 살짝 굴러봤다. 사라의 옆얼굴이 보였다.

    이번엔 반대로 굴러봤다. 아직도 얼굴을 붉히고 있는 디아나와 눈이 마주쳤다.

    "뭐, 뭔가."

    아직도 태도가 딱딱하네. 안 잡아먹는다니까.

    게다가 아직도 가방을 끌어안아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다.

    "아니, 아무것도. 근데 가방은 계속 그러고 있게? 줘봐. 다시 넣어두게."

    "이, 이걸 뺏어서 어쩌려는 겐가!"

    "하긴 뭘 해…."

    본인이 그렇게 엄하게 혼냈으면서 내가 다시 그런 짓을 벌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뭐, 평소에 말을 좀 많이 안 들어먹은 건 인정하지만.

    "으, 으음…."

    디아나는 주저하면서도 가방을 내밀었다.

    구원은 가방을 받아 인벤토리에 넣고, 다시 천장을 바라보고 누웠다.

    좋아. 완벽해. 자면서 팔을 위로 쭉 뻗는 해괴한 짓을 하지 않는 한, 레이아의 몸에 닿을 일은 없다.

    그런 자세를 전혀 안 할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옆에 있는 것보단 안전하겠지.

    구원은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구원은 숙면을 취하고 산뜻하게 잠에서 깼다.

    게다가 손에서도 역시나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구원은 눈을 뜨지 않고도 그것이 무슨 느낌인지 알아챘다.

    아무래도 요즘 여자들이랑 자는 게 많아지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자면서 이런 걸 만지는 습관이라도 생긴 모양이다.

    몽실몽실하고 부드럽지만, 손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레이아와 비교해보면 있다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앙증맞은 사이즈다.

    구원은 눈을 뜨지 않은 채로 손 안에 들어온 부드러운 물체를 몇 번 더 주물럭거리며 감촉을 즐기고 미소 지었다.

    좋아. 내 예상대로 일이 흘러갔군.

    "…좋나?"

    하지만 그 산뜻한 기분을 방해하는 스산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구원이 황급히 눈을 뜨자, 퀭한 눈의 디아나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응? 이 몸이 묻고 있지 않나. 대답해보게. 좋나?"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우선 당황하지 말자. 침착하자.

    구원은 디아나의 가슴을 몇 번 더 쪼물딱 거렸다.

    좋아. 침착해지는 기분이다.

    침착해져서 생각해보니, 그냥 사과하면 용서해 줄 것 같다.

    애초에 저 관대하신 디아나님이고, 내가 고의로 이런 것도 아니잖아?

    "미안. 잠꼬대하다가 엉겁결에 손이 그리로 갔나보네."

    "지금 만지고 있는 것도 잠꼬대인가?"

    하지만 디아나의 목소리는 여전히 스산했다.

    구원은 그제야 사태를 파악했다. 망했다.

    "으헉! 미안! 요, 용서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럴 것 같나?"

    "아, 아뇨."

    구원의 대답과 동시에 디아나의 표정이 무표정에서 급변했다. 심지어 이마에는 혈관이 빠직하고 섰다.

    우와 저게 진짜 가능하구나. 나 태어나서 처음 봤어.

    "이 몸이 밤새 얼마나…!"

    디아나는 말하면서 목소리에 점차 열기를 띄어가더니, 차마 말을 다 끝맺지 못하고 씩씩댔다.

    설마 밤새 주물렀던 거냐. 그냥 치우지 그랬어.

    물론 밤새 한 숨도 못잔 것 같은 디아나의 퀭한 눈을 보고 그런 말을 할 용기는 없었다.

    구원은 디아나가 말하기 전에 바로 이불 위에 무릎을 꿇었다.

    "거기에 똑바로 앉…그대로 듣게!"

    결국 오늘은 아침부터 디아나의 설교로 하루를 시작해야했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일단 손 안에 가슴이 들어와 있으면 만지는 건 남자의 본능이야.

    그리고 그렇게 감촉을 만끽했는데 이정도 설교로 끝나면 이득이지. 난 만족했다!

    얼굴은 최대한 디아나의 설교를 경청하는 표정을 지은 채로, 구원은 손익을 따져보고 흡족해했다.

    "정말 괜찮겠어? 그냥 오늘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구원은 등 뒤에 디아나를 업고 그렇게 말했다.

    "괜찮네. 연구에 한창일 때는 며칠 밤을 세는 게 일상일 때도 있었지. 이 정도로는 끄떡없네."

    그게 언제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연세가…. 같은 말을 하면 진짜로 목숨을 장담할 수 없겠지?

    구원은 반사적으로 농담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아무튼 디아나가 이렇게까지 괜찮다고 하는데 괜찮겠지. 자기 상태도 파악 못할 풋내기도 아니고.

    구원은 바로 오크들의 영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머? 오크들이 보이네요?"

    저 멀리 오크들의 영역 입구가 보이기 시작한 시점에, 불타버린 부락을 바라보며 사라가 말했다.

    하긴 어제 그렇게 소란을 피웠으니. 다른 건 몰라도 불길만큼은 다른 부락에서도 충분히 보였을 거다.

    그럼 다른 부락 녀석들이 다시 숫자를 채운 건가? 아니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조사 중?

    확실한 건, 사냥하러 굳이 또 멀리 있는 부락까지 찾아갈 필요가 없어졌다는 거다.

    "멀리까지 갈 필요 없어 졌으니 잘됐네. 그럼 오늘은 여기서 사냥하자."

    사실 넓은 초원보다는 길이 좁은 여기가 사냥하기 편하기도 하다.

    첫 번째 전투는 순조로웠다.

    그리고 다음 전투를 위해 사라가 화살을 날렸을 때, 이변이 발생했다.

    "쿠뤄러러!"

    이변이라고 할까, 어제도 봤던 장면이다.

    어제처럼 부락 전체라고 하기에는 그 수가 조금 적지만, 그래도 충분할 만큼 많은 수이긴 하다.

    게다가 제일 앞장서서 돌진해오는 놈은 누가 봐도 초월종이다.

    설마 초월종이 직접 와서 조사 중이었던 건가.

    하지만 오늘은 어제와 상황이 다르다.

    구원은 어제처럼 도망가기 보다는 버티고 서는 걸 택했다.

    여긴 넓은 초원이 아니다. 저렇게 많은 수가 몰려나와봤자, 결국 이 길을 한 번에 지나갈 수 있는 수는 한정되어있다.

    그걸 잘 이용해서 싸운다면, 저 정도 숫자를 상대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이대로 싸울게!"

    "네? 하지만!"

    "괜찮아!"

    천사님이 안절부절못해하며 당황했지만, 구원은 등 뒤를 향해 엄지를 척 세워 괜찮다는 사인을 하고 주먹을 다잡았다.

    어제도 써먹었던 사라의 마나화살과 구원의 성자의 손길 콤보를 이용해 일단 가장 앞에서 달려오던 초월종에게 스턴을 걸고, 곧장 뒤이어 따라오는 놈들에게도 주먹을 날려 어그로를 끌었다.

    구원 혼자서 틀어막기에는 살짝 넓은 길이긴 하지만, 이정도면 충분히 상대할만한 것 같다.

    마음 편히 먹고 하자.

    혹시 뒤로 흘리는 놈들이 있더라도, 사라와 디아나가 처리해줄 거다.

    굳이 말로하지 않아도, 역시나 사라와 디아나는 구원이 뒤로 흘리는 놈들부터 우선적으로 처리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구원이 초월종을 상대하는 시간은 자연히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제는 순식간에 처리해서 몰랐지만, 이거 의외로 상대하기 까다롭다.

    공격에서 단순히 힘 이상의 기술이 느껴진다. 무기를 다루는 기술이라고 할까?

    지금까지 무기를 든 상대를 상대한 건 고블린과 오크밖에 없었다.

    하지만 걔들은 손에 무기를 들고 있다 뿐이지, 그저 마구잡이로 휘두르기만 해서 상대하기 까다롭지 않았다.

    하지만 이 초월종은 마치 검술, 아니 도술인가? 어쨌든 무술이라도 배운 것처럼 박도를 휘둘러댔다. 아무리 몬스터의 레벨이 높아져도 공격자체는 일정한 패턴이 반복되는 게임과는 전혀 다르다.

    이거 스텟은 몰라도 전투력 자체는 웨어 울프 초월종보다도 더 강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래서 뒤로 흘리는 오크들의 수가 늘어났고, 사라와 디아나는 그 놈들을 처리하느라 초월종을 공격할 여유가 없었다.

    "쿠뤄러러러!"

    결국 오크들의 수가 처음의 절반 이하로 줄어들 때 까지도, 초월종과의 결판은 안 났다.

    그리고 초월종도 싸움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불리한 건 자신들이란 것을 눈치 챈 모양이다.

    괴상한 소리를 내며 한손으로 휘두르던 박도를 양손으로 쥐고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공격을 해왔다.

    이게 얘 스킬인가? 확실히 위력적으로 보이기는 하네.

    굳이 저런 걸 상대해줄 필요는 없다.

    구원은 스킬 시전 시간이 끝날 때까지 거리를 벌리기 위해 백스텝을 밟았다.

    그러자 놈은 박도를 치켜들고 그대로 위에서 아래로 내리 그었다.

    쟤 뭐하냐? 급해지니까 자기 무기 길이도 까먹었나.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크헉!"

    초월종이 휘두른 무기 끝에서 초승달 형의 기파가 방출되어 구원의 몸에 1자로 상처를 남겼다.

    구원의 방어력이 1계층을 다니기에는 무식한 수준이어서, 다행이 초월종의 스킬을 정통으로 맞은 것치고 심각한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다만 가죽 갑옷이 갈라지고 그 사이로 피가 촤악 튀어서, 멀리서 보기에는 엄청나게 큰 상처를 입은 것처럼 보인 모양이다.

    "구원씨!"

    뒤에서 레이아의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외치며 힐을 사용해줬다.

    힐 한 번에 상처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움직여도 될 정도로는 막아졌다.

    "이, 이제 원거리 힐을 쓸 신성력이…!"

    아무래도 신성력을 전부 쓴 모양이다.

    괜찮아요. 이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러니까 울지 마세요.

    구원은 손짓으로 레이아에게 괜찮다는 제스처를 보내고, 바로 초월종을 바라봤다.

    이 새끼가 감히 우리 천사님을 울렸겠다!

    스스로 방심해서 얻어맞은 것도 있지만, 스스로 천사님을 울리는 데 일조했다고 인정하기 싫은 구원은 모든 분노를 초월종으로 돌렸다.

    구원이 바로 튀어나가기 위해 자세를 잡았지만, 그보다 먼저 초월종에게 날아가는 게 있었다.

    바로 사라의 화살이었다.

    콰앙!

    놀라지 마라. 저게 화살이 낸 소리다.

    이전에 오크를 꿰뚫었을 때보다 확연히 마나가 많이 담긴, 이제는 거의 마나 덩어리로만 보이는 화살이 그대로 초월종에 부딪혀서 폭발했다.

    초월종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배에 뚫린 커다란 구멍을 바라보고, 그대로 몸이 허물어졌다.

    훗, 놀랐냐? 응…실은 나도 놀랐어. 아무리 내가 미리 데미지를 좀 입혀놨다고는 하지만, 설마 이 정도 위력일 줄이야.

    그사이에 레벨 업을 대체 얼마나 한 거야?

    아무리 돌격밖에 모르는 오크 놈들이라도, 이 위력엔 놀란 모양이다.

    "쿠뤠에엑!"

    남은 놈들은 생긴 것에 걸맞은 돼지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사라야! 잘…사라야?!"

    구원이 사라를 뒤돌아보며 칭찬해주려고 했을 때, 사라의 몸이 허물어졌다.

    "괜찮네. 그저 일시적으로 온몸의 마나를 모두 소진해서 탈진한 것뿐이네."

    구원이 황급히 달려가자, 먼저 사라의 상태를 살펴보던 디아나가 말했다.

    "구원씨는 괜찮으세요?"

    디아나와 같이 사라를 살펴본 레이아는, 사라의 안전이 확인되자 바로 구원에게 눈을 돌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했다.

    으윽. 마음이 아프다. 어서 달래줘야지.

    "걱정 마. 덕분에 말끔히 나았어."

    "하지만 겨우 제 힐 한번으로 나을 상처가…!"

    "아냐. 피부가 베어서 피만 좀 많이 튄 거지 별로 큰 상처 아니었어. 벗어서 보여줄까?"

    "네."

    농담으로 말한 거였는데, 레이아는 완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어…저, 정말로?"

    "네. 어서요."

    "으, 응. 그럼 벗는다?"

    "네."

    아무래도 진심인 모양이다.

    구원은 어쩔 수 없이 가죽 갑옷의 상의를 벗었다.

    밖에서 이러니까 괜히 창피하네. 이런 걸로 흥분하는 디아나의 성벽은 이해를 못하겠어.

    "역시 아직 다 안 나았잖아요."

    "아니, 그래도 이정도면 움직이기에는…."

    "밑에도 벗으세요."

    "미, 밑에는 정말로 그냥 아랫배만 살짝 긁힌…."

    "벗으세요."

    "네."

    결국 하의까지 벗는 꼴이 돼버렸다.

    구원은 결코 디아나 같이 변태 같은 성벽은 없지만, 천사 같은 레이아 누님이 팬티 바로 앞에 얼굴을 가져가 꼼꼼히 아랫배를 살피자 살짝 밑에서 반응이 왔다.

    이대로 커지면 바로 레이아의 입에 물건이…안 돼. 이 이상 생각하지 말자.

    괜히 지난밤의 행위가 떠올라 더더욱 리얼하게 상상이 돼버렸다.

    지금은 안 된다. 참아라, 아들아. 지금은 절대 안 돼.

    "정말, 조심하셔야죠. 이게 뭐에요."

    레이아가 살짝 토라진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응. 그런 얼굴조차 아름다우시다. 하지만 레이아도 큰 상처는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다행이야. 얼른 갑옷부터 입어야지.

    "누우세요. 치료해드릴게요."

    하지만 번뇌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이, 이대로?"

    "네."

    젠장. 과연 레이아가 어루만지는 데 참을 수 있을까.

    그렇다고 말을 안 들을 수도 없다. 구원은 할 수 없이 바닥에 누웠다.

    "미안하네."

    레이아가 구원의 상처를 쓰다듬는 모습을 오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단 디아나가 불쑥 사과를 해왔다.

    "응? 뭐가?"

    "초월종의 전투 방식이 2계층의 녀석과 비슷했다네. 비슷한 스킬을 쓸 거라고 이 몸이 얘기를 해줬어야 했는데…."

    "그게 왜 미안할 일이야? 어차피 전투 중에는 알려주기도 힘들었을 텐데."

    초월종이 제대로 싸우는 걸 본 건 디아나도 오늘이 처음이겠지.

    정규 루트 쪽에서 오크 초월종을 봤다는 얘기는 없었고, 어제는 제대로 싸우기도 전에 처리했으니 말이다.

    "아닐세. 적어도 기술을 쓸 때 피하라고 외치기라도 했다면…. 이 몸이 잠시 집중을 못했네. 미안하네."

    하지만 디아나는 생각보다 더 죄책감을 느끼는지, 계속해서 사과를 해왔다.

    "아냐. 내가 방심한 게 잘못이지."

    "하지만…."

    "그럼 이건 어때? 애초에 디아나의 집중력이 떨어진 건 잠을 못자서 그렇잖아? 그건 나 때문이고. 그러니까 서로 비긴 걸로 하자."

    디아나가 계속 사과하려고 하자, 구원은 그렇게 제안했다.

    솔직히 그냥 내가 방심한 게 잘못인데 엉뚱한 이유로 계속 사과 받는 건 불편하다.

    오히려 내가 사과를 해도 모자를 정도인데.

    "자네…. 알겠네. 이 몸도 어제 일은 완전히 용서하겠네."

    디아나도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응? 설마 완전히 용서 안한 거였어?"

    "당연하지 않은가? 너무 시간을 지체할 수 없으니 그 정도로 끝낸 거였네."

    …얘 생각보다 가슴에 담아두고 있는 타입이구나.

    앞으로는 적당히 봐가면서 농담해야지.

    곧 죽어도 아예 안한다고는 안하는 구원이었다.

    반응이 좀 재밌어야 말이지. 그걸 어떻게 아예 안 해.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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