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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84화 (8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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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크들의 영역

    이정도로 많은 수를 한꺼번에 상대하니, 마석을 캐내는 것도 일이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한데 뭉쳐 다니며 앞뒤로 널브러져있는 시체들에서 마석을 전부 캐내고 나니, 이미 시간이 상당히 지나있었다.

    "더 공격해오지 않네요."

    "그러게."

    사실 이렇게 기습을 할 정도면 준비도 꽤나 했을 거고, 주둔지에 남아있을 놈들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을 거다.

    작전이 실패하는 걸 분명 봤을 텐데도 아무 반응 없이 이렇게 조용한 건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잠깐만요."

    사라는 순식간에 근처에 있던 나무 위로 올라가서 주둔지 쪽을 살펴봤다.

    이제는 몸놀림도 장난 아니네.

    혹시 저번에 말했던 것처럼 정말로 단검만 들고도 싸울 수 있는 수준 아닐까?

    "이상하네요. 오크들의 기척이 전혀 없어요."

    "뭐? 그럴 리가?"

    구원은 바로 나무 위로 올라가려다가, 자신이 저기 올라가봤자 저기까지 보일 리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한 번 가보자."

    사라의 말이 사실이라면, 접근해도 문제는 없을 거다.

    함정일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지만, 방금 전 그렇게 심혈을 기울인 작전이 깨지고 나서 바로 다음 작전을 연계해 나갈 여력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그래도 일단은 주위를 경계하면서 일행은 천천히 주둔지 쪽으로 접근했다.

    "진짜 아무도 없네."

    "흠. 어쩌면 방금 전이 놈들의 총력이었을지도 모르겠군."

    "여기 있던 놈들이 전부 튀어나온 거였단 말이야?"

    "음."

    생각해보니, 아무리 놈들의 수가 많다고 해도 그렇게 쉬지 않고 사냥을 했던 거다.

    아까의 작전을 절박해진 놈들의 최후의 발악이었다는 건가.

    "하지만 놈들이 이렇게 많이 모여 있는데 초월종도 없었잖아?"

    "흠. 어쩌면 여기 녀석들도 2계층 녀석들과 같은 걸지도 모르겠군."

    "2계층 녀석들?"

    "음. 2계층에도 오크는 나온다네. 다만 여기 오크들보다 덩치가 훨씬 크고, 힘도 훨씬 강하지. 지능도 더 발달해있고 말일세. 여기 오크들과는 생김새 말고는 그다지 공통점이 없는 놈들인데, 사는 방식은 비슷한 모양이군. 저번에 몬스터들의 부락을 칠 때는 모험가들이 다수 모여 공격한다는 말을 했던 건 기억하나?"

    "아, 응. 고블린 애들 공격할 때 그런 말을 했었지."

    "2계층의 오크 마을도 모험가들이 모여 공격한 적이 있네. 부락을 전멸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게 오크들의 영역 전부는 아니었지. 알고 보니 터무니없이 넓은 영역에 무수히 많은 부락들이 모여 있는 거였다네. 모험가들이 점령에 성공한 건 그 중 고작 한 곳이었을 뿐이고. 곧 다른 부락에서 오크들이 몰려나와 모험가들도 다시 물러날 수밖에 없었지."

    "여기도 그럴 수 있다는 말이야?"

    "음. 사실 개체의 특성만이 아니라 지리적 특성도 꽤나 달라서 여기는 2계층과 다를 줄 알았네만 말일세."

    "그렇단 말이지…. 그럼 일단 좀 돌아다녀볼까?"

    일행은 오크의 부락을 구석구석 둘러봤지만, 움집만이 덩그러니 놓여있고 오크의 기척은 전혀 없었다.

    넓이는 마을이라고 불러도 될 수준이다.

    일행이 잡은 오크 수만 해도 백 단위니, 딱 그 정도가 모여살고 있는 마을이란 느낌이다.

    다만, 마을을 통과하고 나서도 광활한 초원이 쭉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저기에도 오크들의 부락 같은 곳이 보이네요. 그리고 저기에도, 저기에도."

    구원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사라가 지평선 너머 여러 곳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디아나에게 설명은 들었지만, 이렇게 눈으로 직접 보니 오크들의 영역이란 게 얼마나 터무니없이 넓은 건지 확실히 실감이 됐다.

    설마 이 넓은 곳이 전부 오크들의 영역이라고?

    아무래도 디아나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은 모양이다.

    "그럼 여기에도 곧 다른 부락 놈들이 쳐들어오는 걸까?"

    "흠. 글쎄 어떨지. 아까도 말했지만 2계층의 녀석들과 여기 녀석들은 지능에도 꽤나 차이가 있다네. 2계층 녀석들은 애초에 화살 공격으로 유인되어 각개격파로 마을이 전멸하거나 하지 않지. 이곳 녀석들이 2계층 녀석들과 같이 마을간 소통이 원활할 거라고 보기는 힘들군."

    아무래도 디아나는 다른 녀석들이 쳐들어올 가능성은 낮게 보고 있는 모양이다.

    그럼 저기 있는 다른 마을에 가서 아까 같은 방법으로 계속 사냥을 해도 되는 걸까?

    일단은 텅 빈 오크 부락에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다른 곳과는 달리 오크들의 영역은 탁 트인 초원이다 보니, 시야 확보는 용이하다.

    일행이 위험해질 정도로 오크들이 몰려오면 금방 눈치 챌 수 있겠지.

    그래도 나름 문명생활을 하는 놈들이라고 투박하지만 의자처럼 나무 밑동이 놓여있는 곳도 찾을 수 있어서, 평소보다도 더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이거 괜찮네. 아예 인벤토리에 식탁이랑 의자도 넣고 다닐까.

    이러다가 나중에는 아예 인벤토리에 살림을 차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구원씨 피곤하실 텐데 이번엔 굽지 마시고 많이 드세요. 고기는 제가 구울게요."

    천사님이 구원을 바라보고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지. 그 고운 손에 화상이라도 입으면 어쩌려고.

    "아, 아뇨! 제가 구울게요! 전 익숙하기도 하고요."

    사라도 레이아의 그런 제안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나 보다.

    당황한 말투로 재빨리 그렇게 말했다.

    "아니야. 그냥 내가 할게."

    "아뇨. 제가 하죠. 구원은 조금 쉬고 계세요."

    "괜찮겠어?"

    고운 손이 다칠까 걱정되는 건 레이아뿐이 아니다.

    하긴 익숙하다고 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사라는 활 쏠 때 끼는 가죽장갑도 있으니 괜찮겠지만.

    "그럼요. 보고 계세요."

    사라는 엄청난 속도로 손을 휙휙 움직이며 재주 좋게 고기를 구웠다.

    "자, 자요! 어때요? 괜찮죠?"

    그러더니 적당히 익은 고기를 하나 집어, 구원의 입가에 내밀며 말했다.

    "으, 응. 맛있네."

    구원은 떨떠름하게 말했다.

    설마 사라가 이런 짓을 할 줄이야.

    분위기는 꽤 달랐지만, 행동자체는 닭살 커플들의 전유물 아앙과 다를 게 없다.

    사라도 그걸 아는 지, 꽤나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크흑. 설마 살다보니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아까 열심히 싸우길 잘했다.

    "사라야!"

    "꺄악! 뭐, 뭐에요! 이제 안 줄 거예요! 스스로 집어먹으세요!"

    구원이 감격에 겨워 달려들자, 사라가 기겁을 하며 몸을 피하고 말했다.

    쳇. 호감도가 좀 올랐어도 아직 껴안게 해줄 정도까진 아닌가.

    "뭐하는 겐가! 식사할 때만이라도 좀 소란피우지 말게!"

    "후훗."

    던전과는 어울리지 않는 소란스러운 식사를 마친 일행은, 아까 사라가 가리킨 곳 중 한 곳을 향해 이동을 시작했다.

    꽤나 느긋하게 식사를 했는데도 다른 놈들이 몰려오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아무래도 아까 그곳이 전멸했다는 건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니 말이다.

    그래서 일행은 다른 부락도 공격해보기로 했다.

    아까 전의 싸움으로 더욱더 자신감을 얻어서, 솔직히 이제는 1계층에서 두려울 게 없었다.

    사실 레벨만 놓고 봐도 자신감을 가지기엔 충분하다.

    안 그래도 여러 가지 이유로 같은 레벨의 다른 모험가들보다 강한 일행이, 레이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곳을 돌아다니기 위한 적정 레벨에 도달했으니 말이다.

    그 자신감은 목적지에 도착해 오크무리와 한 번 더 싸우고 나서도 이어졌다.

    또 다른 오크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사라가 공격을 하자, 역시나 적당한 수의 오크들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일행은 손쉽게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변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어머?"

    다시 오크들을 유인하기 위해 활을 들었던 사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화살이 막혔어요."

    "뭐?"

    딱히 스킬을 써서 날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라의 화살을 일반 오크가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아, 그래도 유인은 되네요. 아니, 잠깐만요. 너무 많은데요?"

    "쿠뤄러러!"

    응. 아무리 그래도 저 정도면 나도 보여.

    저거 부락에 있는 놈들 전체가 전부 다 튀어나온 거 아냐?

    아무리 적게 잡아도 200마리는 되어보인다.

    아까 전 마을은 전멸 위기가 돼서야 전원이 나섰는데, 성질머리 급한 놈들일세.

    "한 번 싸워볼래?"

    "자신 있으면 앞으로 가게나."

    "구원씨…."

    디아나는 황당하다는 듯이 구원을 쳐다봤고, 레이아는 구원의 손을 붙잡아 가슴으로 꽉 끌어안으며 안타까운 눈초리로 구원을 쳐다보며 도리질 쳤다.

    크흑. 농담할 때 안할 때 못 가려서 죄송합니다.

    디아나의 반응은 그렇다 쳐도, 천사님까지 이런 반응을 보이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다들 튀자!"

    그렇게 말하면서 구원은 일단 디아나를 뒤에 업었다.

    "흠흠.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아는구먼."

    디아나는 뒤에서 구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 흡족한 미소를 띄우고 있겠지.

    근데 그냥 너 편하라고 업은 거 아니거든?

    "도망가면서 뒤에다 계속 마법이나 써줘. 한 번 숫자를 줄일 수 있을 때까지 줄여보자. 사라도 틈틈이 공격해주고."

    "네!"

    사라의 몸놀림이라면 도망가면서도 가끔 뒤돌아서 화살 쏘는 정도는 가능하겠지.

    "레이아도 뛰다가 힘들면 꼭 말해."

    "네."

    일행은 전멸한 오크 부락으로 도망치며 계속해서 공격을 가했다.

    디아나의 마법이 강력하기는 하지만, 디아나의 마력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 텅 빈 오크 부락에 도착하자, 디아나는 마력을 전부 소진해 구원의 등 뒤에 축 늘어졌고 사라 역시도 들고 있던 화살이 바닥나버렸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아직도 오크들은 셀 수도 없이 많이 있었다.

    게다가 놈들은 포기를 모르고 계속 달려오는 중이었다.

    대체 언제까지 쫓아올 셈이야?

    그나마 일행의 발이 더 빨라서, 공격을 하며 도망갔는데도 거리가 좁혀지지는 않고 있었다.

    좋아. 이렇게 된 이상. 최후의 수단이다.

    "디아나. 힘들겠지만 혹시 작은 화염 마법이라도 쓸 수 있어?"

    "아주 작은 거라면 한 번 쓸 수 있네."

    "그거면 충분해. 저 움집에 한 방 날려줘."

    "음."

    디아나가 최후의 힘을 짜내 마법을 쏘자, 움집에 불이 붙었다.

    "좋아! 사라는 좀 더 견제하고 있어줘!"

    구원은 인벤토리에서 화살통을 더 꺼내 사라에게 건네고, 불타는 움집에 다가갔다.

    적의 발을 묶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화공이지.

    예전에 읽었던 삼국지에서 동탁 아저씨가 그랬어.

    구원은 곧장 움집을 옮겨 다니며 불을 붙이고 다녔다.

    설마 이런다고 던전 전체가 불타거나 하진 않겠지?

    그래. 쟤들도 머리가 있는데 알아서 끄겠지.

    그렇게 구원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부락에 불을 붙이고 있자, 사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구원! 이제 정말 위험해요!"

    "좋아! 이쪽도 이쯤이면 된 것 같아! 도망가자!"

    구원은 디아나를 다시 등에 업고, 이번엔 레이아까지 안은 다음에 바로 줄행랑을 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구원의 작전은 성공이었다.

    과연 놈들도 동족의 부락이 불타고 있는데 구원을 쫓아올 경황은 없는 모양이다.

    "낙야…아니, 부락이 불타고 있다."

    오크들의 영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구원은 뒷짐을 지고 불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왜 허탈하게 말하는 겐가?"

    "아, 아무것도 아냐."

    디아나의 물음에 구원은 황급히 얼버무렸다.

    내 딴에는 작게 말한다고 말한 건데 들린 모양이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가요?"

    "응? 뭐가?"

    "뭐가라니. 사냥 말이에요. 오늘은 이대로 끝내기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잖아요."

    "응? 당연히 쟤들을 다시 공격해야지."

    "네, 네? 저길 또 간다고요?"

    그럼 이대로 끝날 줄 알았어? 당연한 얘기잖아. 얜 왜 당황하는 거지?

    "응. 지금 불 끄느라 정신없을 테니까 오히려 기회야. 디아나 마력만 회복되면 바로 공격하자."

    "자네도 참…사람이 못됐구먼."

    디아나도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반대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럼 이 몸에게 어제 캔 마나풀이나…."

    "네?!"

    "아, 아닐세. 이 몸은 명상을 좀 하겠네."

    레이아의 울먹이는 눈초리에 디아나는 바로 말을 바꿨다.

    오오. 저 디아나가 한 수 접었어.

    역시 천사님은 눈길은 디아나라도 이길 수 없는 건가.

    그렇게 일행은 디아나의 마나가 전부 회복될 때까지 주변을 경계하며 시간을 보냈다.

    ============================ 작품 후기 ============================

    후원 쿠폰, 원고료 쿠폰 보내주신 분들 너무 감사드립니다.

    추천해주신 분들도 정말 감사합니다.

    저번 화를 보고 라인하르트를 떠올리신 당신! 당신도 저와 같이 훌륭한 고급 시계의 노예입니다!

    …안 들킬 줄 알았는데, 알아보시네요.

    라인 할배 재밌습니다. 다들 짱짱센 라인 할배 하세요.

    참고로 전 돌진하고 망치질만 합니다. 방패? 그게 뭔가요?

    루블리츠 // 확실히 그러네요. 그래도 차례차례 전개될 이벤트들은 생각해놓고 있습니다. 앞으로 전개에 더 신경써서 쭉쭉 나가겠습니다.

    하류니안 // 24화에서 철제 건틀릿과 부츠를 사는 장면이 있죠. 그게 방어구겸 무기입니다.

    레비나리진 // 던전 계층은 그리 많지 않을 예정입니다. 1계층은 곧 클리어 할 것 같네요.

    그 외에 코멘트 써주신 분들도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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