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81화 (81/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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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크들의 영역

    사라는 일행을 이끌고 일단 길을 조금 뒤로 돌아왔다.

    확실히 이 거리에서도 오크의 주둔지가 보이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오크가 점으로 보일 만큼 멀리 떨어진 곳이다.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어떻게 유인을 하겠다는 거지?

    사라를 바라보자, 이미 화살을 활시위에 걸어 겨누고 있는 상태였다.

    설마 이 거리에서 쏘겠다고? 제대로 보이기는 하고?

    놀라는 구원에게 여봐라는 듯이 사라는 곧장 화살을 쏘아 보냈다.

    우와…응. 명중한 건지 빗나간 건지도 모르겠다.

    사라는 곧바로 다시 활을 겨눴다.

    "빗나갔어?"

    "아뇨. 명중은 했는데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르는 눈치에요. 제대로 알려줘야죠."

    사라의 눈에는 제대로 보이고 있는 건 물론, 화살을 맞힐 수 까지 있을 거리인 모양이다.

    이렇게 하면 확실히 디아나의 마법보다 사라가 공격해서 유인하는 게 더 효율이 좋겠네.

    거리가 충분히 떨어져 있으니 몇 마리가 튀어나오는지 보고 대응하기도 쉬울 거고.

    고블린들을 상대로 할 때에는 화살이 아까운 것도 있어서 디아나가 유인을 했지만, 이제는 화살을 아낄 만큼 빈곤한 생활도 아니다.

    물론 다시 회수할 수 있는 건 회수해서 쓰지만, 회수하지 못해도 그만이다.

    여분은 구원의 인벤토리에 충분히 있고 말이다.

    참고로 파티원들의 물건은 전부 보관하기 편하다는 이유만으로 구원이 맡고 있다.

    레이아도 처음에는 미안해했지만, 구원이 인벤토리를 사용하는데 전혀 제한이 없고 딱히 힘이 드는 것도 아니라고 알려주자 이제는 거리낌 없이 물건들을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다들 던전 안에서 갈아입을 옷마저도 가방에 넣어서 맡기고 있다.

    던전에서 매일매일 옷까지 갈아입다니. 사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덕분에 구원도 귀찮지만 어쩔 수 없이 갈아입고는 있는 상황이다.

    다들 갈아입는데 혼자만 안 갈아입고 있으면 냄새날 거 아니야.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 정이 쉽게 떨어질 수 있다고 들었거든.

    그리고 이건 다른 얘기인데, 왜 굳이 옷을 그냥 맡기지 않고 가방에 넣어서 맡기는 걸까?

    구원이 인벤토리에 넣기 쉬우라고? 아니, 그건 아닐 거다.

    옷 말고 다른 것들도 이미 왕창 맡고 있는 상황인데, 옷만 따로 이렇게 건네줄 이유가 없지.

    구원은 그 이유를 속옷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아침에 옷을 갈아입을 때가 되면 비밀기지 밖으로 쫓겨나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분명 속옷도 갈아입고 있을 거다. 그럼 그 갈아입을 속옷이 어디 있겠어?

    한마디로 이런 말이다. 구원은 지금 당장이라도 우리 미인 파티원들의 막 갈아입은 속옷을 꺼낼 수 있는 상황인 거다.

    갈아입은 지 한참 되지 않았냐고? 인벤토리는 항상 집어넣은 상태를 그대로 완벽하게 보존해준다.

    즉 갈아입자마자 건네받은 가방을 바로 넣었으니, 인벤토리에 있는 건 갈아입은 지 얼마 안 된 속옷이라는 얘기가 된다.

    여성의 속옷에 집착하는 변태신사들이라면 피눈물을 흘리며 부러워할 상황이다.

    물론 꺼내는 순간 목숨은 장담할 수 없을 테니 구원이 그런 짓을 할 일은 없을 테지만 말이다.

    "이제 몰려오네요. 다들 준비하세요."

    구원이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화살을 몇 발 더 날리던 사라가 그렇게 말했다.

    구원이 살짝 앞으로 나서며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실히 좀 다가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놈들도 일단 화살 세례가 퍼부어지니 나오기는 했지만, 어리둥절한 모양이다.

    주변을 휙휙 두리번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긴 그렇게 멀리서 화살을 맞은 경험이 있을 리가 없지. 특히나 이런 던전에서 살고 있는 놈들이라면 더욱더.

    두리번거리는 놈들에게 사라가 화살을 한방 더 날리자, 놈들이 그제야 달려오기 시작했다.

    다만 거리가 거리다 보니 오크들 발걸음으로 여기까지 도착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걸렸다.

    "이거 어쩌죠? 도착하기 전에 다 잡아버리겠어요."

    사라도 조금 당황스러운 모양이다.

    구원과 사라, 그리고 특히 레이아의 직업 레벨 상승을 위한 사냥인데 이래서야 그냥 사냥을 위한 사냥이 되어버린다.

    "우선 다 잡아봐. 쟤들 숫자가 적은 것도 아니고, 머리가 있으면 알아서 더 몰려나오겠지."

    구원은 인벤토리에서 화살통의 숫자를 확인하며 말했다.

    일단 보기에는 넉넉해 보이는데…설마 부족해지지는 않겠지?

    처음 몰려나오던 녀석들을 처리하고 다시 사라가 주둔지 쪽을 공격하자, 다행이도 이번에는 상당한 숫자가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인해전술로 밀어붙인 놈들은 결국 사라의 끊임없는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일행의 앞까지 꽤나 많은 숫자가 도달할 수 있었다.

    캬. 이래야 오크지. 인정한다. 니들은 록타르 오가르다.

    승리가 아니면 죽음뿐이라 정말 다 죽게 될 테지만.

    구원은 얼른 성자의 손길을 발동하고 놈들의 한가운데로 달려들며 한 대씩 툭툭 쳤다.

    다 합해서 열한 마리. 빠진 놈은 없지?

    구원도 이정도 숫자의 오크를 상대해보기는 처음이다.

    이정도 숫자면 레이아의 레벨 업을 생각해서 굳이 많이 다치려고 의식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싸워도 되겠지.

    구원은 손으로 치고 발로 차면서 오크들 한가운데에서 난동을 피웠다.

    역시 숫자가 숫자다 보니 평소와 비교해서 꽤나 다치기는 했지만, 사라의 공격까지 더해져서 전부 다 잡아낼 수 있었다.

    이정도면 가뿐하네.

    "구원씨 괜찮으세요?"

    하지만 레이아는 그게 아닌 모양이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구원에게 황급히 달려왔다.

    평소와는 다르게 다급함이 엿보여서 구원이 더 당황할 정도였다.

    "괘, 괜찮아. 하나도 안 다쳤어."

    얼마나 당황했는지, 말해놓고 아차 싶은 말까지 내뱉어버렸다.

    물론 이런 말을 했다고 레이아가 치료를 안 해줄 리도 없지만 말이다.

    "다치지 않았기는요. 이렇게 상처가 빤히 보이는데. 왜 그렇게 무리해서 파고들어간 거예요?"

    레이아의 걱정스런 마음에 구원은 괜히 죄송한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아니, 그냥 쟤들이 때려봐야 별로 아프지도 않고, 좀 다치는 편이 레이아가 레벨 업 하기도 쉬울 거고…."

    "제 레벨 업 보다는 스스로의 몸을 더 돌보셔야죠! 또 그런 식으로 싸우면 누나한테 혼날 거예요!"

    레이아가 일부러 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구원을 쳐다봤다.

    하지만 화 한 번 내본 적 없는 사람이 억지로 화내는 표정을 지어봤자 엄해 보이기는커녕 귀여워보였다.

    심지어 손으로는 열심히 구원의 상처를 보살피고 있으니 더욱더.

    "네. 죄송합니다."

    물론 그 표정으로 심장에 직격탄을 맞은 구원은 얼른 사과했지만 말이다.

    이 누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을 너무 잘 알고 계신다.

    물론 의식해서 그렇게 하는 건 아닌 것 같지만.

    "다 됐어요?"

    "잠깐만요. 자, 구원씨. 팔 벌리고 가만히 계세요."

    "전 먼저 시작하고 있을게요."

    사라는 한시라도 지체하고 싶지 않은지, 바로 주둔지 쪽에 화살을 날려댔다.

    기분 탓인지 이번에는 아까보다도 화살에 실린 힘이 꽤나 강한 것 같다.

    사라가 공격을 시작해도 레이아는 평소보다도 더 꼼꼼하게 상처를 돌봤고, 구원의 몸 주위를 돌면서 이리저리 전부 확인까지 한 다음에야 드디어 만족한 모양이었다.

    "자, 다 됐어요. 이번엔 무리하면 안돼요."

    "응. 누나. 조심할게."

    "누, 누나…. 정말, 장난치지 말고요."

    구원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레이아는 가볍게 구원의 가슴팍을 치며 부끄러워했다.

    아까 스스로 누나라고 말한 주제에 이제 와서 부끄러워하기는.

    물론 이런 모습이 더더욱 사랑스럽지만.

    "걱정 말게나. 또 그러는 것 같으면 이번엔 이 몸도 나서겠네."

    디아나도 엄한 표정을 짓고 눈을 불태우며 말했다.

    역시 디아나가 보기에도 아까 모습은 조금 위험해보였던 걸까?

    역시 아까같이 싸우는 건 자중해야겠다.

    그래서 이번엔 전술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몬스터들의 한가운데서 싸우는 건 안 된다고 해도, 구원이 오크들 전원의 어그로를 끌고 있어야하는 건 변함이 없다. 그래서 구원은 일행들과 조금 거리를 더 벌리고 앞으로 멀찍이 나가서 오크들을 맞이하기로 했다.

    공간이 넓다보니 가만히 멈춰 서서 싸우면 둘러싸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아예 먼저 앞으로 나가 백스텝을 밟으면서 싸우려는 계획이다.

    "구원!"

    그렇게 앞에 나서서 몸을 풀고 있자, 뒤에서 사라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행과 거리가 꽤나 떨어졌다보니, 이렇게 외치지 않으면 대화도 불가능한 게 조금 불편하네.

    "조심해요!"

    뭐야, 설마 나 혼자 떨어져있다고 걱정해주는 거야?

    쟤도 평소에 쿨한 척 하는 것 치고는 은근 귀여운 짓을 한다니까.

    구원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척 들어서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고 다시 정면을 바라보려고 했다.

    "바보! 그런 뜻이!"

    뭐? 바보? 지금 바보라고 했어?

    그래. 인정한다. 내가 가끔가다가 좀 바보 같은 짓을 하기도 해.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날 바보라고 부르는 것만은 참을 수 없다!

    쿠르륵! 쿠륵!

    어라? 이건 내가 분노하는 소리가 아닌데?

    소리나는 곳, 즉 오크 주둔지 쪽을 바라보고 나서야 구원은 사라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저, 저게 대체 몇 마리야? 열 마리는 확실히 넘고, 스무 마리? 아니, 더 많나?

    힘으로 안 되면 쪽수로 밀어붙이라는 고금동서를 가리지 않고 전해 내려오는 불변의 진리를 몸소 실현하듯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오크 놈들이 구원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잠깐! 타임! 멈춰봐!"

    물론 구원의 그런 외침에도 오크들의 돌진은 멈추지 않았다.

    에잇! 모르겠다! 설마 내 내구에 죽기야 하겠어?

    구원은 성자의 손길을 발동시키고 놈들의 돌진을 맞이했다.

    솔직히 말해서 너무 스스로를 과신했다.

    아무리 별거 아닌 놈들이라도 스무 마리 이상을 동시에 상대하게 되자, 구원도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정신이 없어졌다.

    "야! 잠깐만! 진짜로 멈춰봐! 나 뼈 맞았어!"

    구원이 그렇게 고군분투하고 있자, 뒤에서 갑자기 화끈한 기운이 느껴졌다.

    콰앙!

    그리고는 강렬한 폭발음과 함께 구원에게 달려들던 오크의 1/3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역시 위기 때 믿을 수 있는 건 디아나님이지! 과연 대마법사님! 사랑합니다!

    그에 반해….

    "니들은 감히 사람이 뼈를 맞았다는데도 인정머리 없이 공격을 계속했겠다? 죽음으로 사죄해라!"

    구원은 아까까지와는 정반대되는 태도로 오크 무리에게 용맹하게 달려들었다.

    "흠. 괜찮나."

    전투를 마치고 구원이 다가오자, 레이아보다도 한 발 빠른 타이밍에 디아나가 나서서 구원을 맞이했다.

    콧대를 빳빳하게 세우고 가슴을 쭉 편 모습이 상당히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인정한다. 이번 전투는 정말 디아나 덕분에 살았다.

    "응. 고마워. 다 네 덕분이야."

    "그렇게밖에 표현을 못하나?"

    응? 표현을 달리 하라고?

    "디아나님이 최고입니다. 역시 대마법사님. 만만세입니다."

    "그런 거 말고 말일세. 예, 예를 들어 이 몸을 누나라고…아,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다 말해놓고 뭘 아니야.

    심지어 이쪽을 힐끔힐끔 보면서 기대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게 앙증맞다.

    설마 아까 레이아한테 장난 쳤던 게 부러웠던 건가.

    남자들이 여자한테 오빠라고 불리는 것에 로망을 느끼는 것처럼, 여자들도 누나라는 말에 로망을 가지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네 나이면 누나라기보다는 오히려 할머니 아냐?"

    구원은 살짝 농담 삼아서 그런 말을 던져봤다.

    "하, 할머…!"

    "미안!"

    그리고는 곧장 바닥에 다이빙하듯이 무릎을 꿇었다.

    왜냐면 디아나의 표정이 지금껏 본적 없는, 정말로 충격 받은 표정이었거든.

    "진짜 미안해, 누나! 그냥 농담 삼아 한 말이었어! 잘못했어! 한 번만 봐줘!"

    "…안 봐줄 걸세."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던가?

    디아나는 그 말이 딱 어울리는 스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로 전혀 그렇게 생각 안 해! 누나같이 예쁜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보겠어! 실제 나이 알려줘도 절대 할머니로 못 볼걸? 이렇게 깜찍하고 예쁜데! 한 번만 봐줘, 누나!"

    "안 봐줄 걸세! 거기 무릎 꿇…그대로 듣게!"

    구원의 필사적인 애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디아나는 완전히 눈이 돌아가서 여기가 어딘지도 잊고, 구원에게 설교도 아니고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비난이라고 해봤자 욕설을 내뱉는 건 아니고, 믿을 수 없다는 둥, 자네는 정신머리부터 틀려먹었다는 둥, 대체 상식이란 게 있냐는 둥 그런 소리였지만 말이다.

    아무튼 디아나의 눈꼬리에 살짝 눈물까지 고여 있는 게 정말로 충격을 받은 것 같아서, 구원은 그저 계속 애교를 부리며 두 손이 닳도록 비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여자는 나이 얘기에 민감한 법이구나.

    설마 이렇게까지 충격 받을 줄이야.

    앞으로 디아나 앞에서는 절대 나이 얘기를 꺼내지 않도록 조심하자.

    구원은 그렇게 또 하나 인생을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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