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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7화 (7/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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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계 생활 시작

    돌이켜보면 그레이트 어스사의 게임은 기본적으로 전부 파티 플레이를 전제로 하는 게임들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같이 지낸 소꿉친구라든가, 기사학교를 같이 다닌 동기생이라든가 모든 게임들이 스토리상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가며 처음부터 무조건 한 명 이상의 동료가 동행했었다.

    만약 이 섹스 앳 더 던전도 마찬가지라면?

    스토리상 시작부터 누군가를 동료로 맞이하여 던전 초입부터 둘 이상이 뭉쳐서 도전하도록 설계된 난이도라면?

    생각해보면 아무리 민첩에 보너스 스탯을 안 찍었다고 해도 성자라는 사기 클래스를 가지고 12레벨까지 찍은 내가 던전의 최약체 중 하나일 토끼의 공격을 제법 빠르다고 느낀 시점에서 뭔가 이상함을 깨달아야했다.

    그러고 보니 1레벨에 모험가 등록을 하러 간 날 보던 안내원 누님과 앨리시아의 눈빛도 묘했지.

    어차피 기본 스토리는 모험가가 되어 던전을 클리어하는 거니 당연히 처음부터 모험가가 되려고 했는데, 어쩌면 정상적으로 게임을 시작하면 처음부터 모험가가 되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혹시 처음부터 동료가 붙어있는 건 물론이고 그 동료와 섹스를 해서 조금이라도 레벨을 올리고 모험가 등록을 하는 스토리가 아니었을까?

    지금에 와서야 상상할 수밖에 없는 가정속의 얘기지만 왠지 그런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고작 던전 입구에서 무쌍 좀 했다고 기고만장해있었다니.

    첫날은 대충 초입에서 분위기만 파악하고 길드에 있는 모험가들을 어깨너머로 배우며 이곳의 생리를 깨우쳐야했다.

    인정한다. 조금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내가 이렇게 반성하고 있다고 해서 니들이 존나 강하다든가 내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건 결코 아니야.

    이곳이 아무리 현실이라 고해도 이 몸은 게임의 아바타째로 날아온 몸이다.

    제대하고 게임에 빠져 늘어져있던 현실의 몸이면 모를까, 게임 좀 한다는 내가 이런 훌륭한 몸으로 고작 개새끼들이 머릿수 좀 모여 있다고 질 순 없지.

    구원은 먼저 남은 보너스 스탯을 근력 내구 민첩에 몽땅 때려 박았다.

    이름 : 구원

    종족 : 인간 24

    직업 : 성자 12 / 모험가 1 / 무투가 1

    레벨 : 12

    생명력 : 2500/2500

    정기 : 1200/1200

    근력 : 40

    내구 : 41

    민첩 : 41

    체력 : 23

    지력 : 21

    정신 : 22

    매력 : 61

    보너스 스탯 : 0

    상태 : 보통

    방금 전 전투에서 늑대개의 생명력은 구원이 두세 방 때려야 처리 가능한 수준이었다.

    세 방으로 잡은 놈도 두 대째에 이미 빈사상태였단 걸 감안해보면, 이제는 확실하게 전부 두 방으로 처리 가능할거다.

    적의 공격을 한 대도 맞아본 적이 없어서 그 공격력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다는 게 유일한 불안요소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지.

    최대한 안 맞도록 노력해볼까.

    한두 방 정도는 맞아도 내구를 이렇게나 올려놨는데 설마 죽기야 하겠어?

    늑대개들은 이미 구원이 독안에 든 쥐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사방에서 둘러싼 채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마치 ‘다구리 치는 법 엄마한테 배운 거다 새끼야!’라고 말하는 듯한 위풍당당한 태도였다.

    늑대 흉내나 내는 짝퉁 개새끼들 주제에.

    어찌됐든 이렇게 사방이 둘러싸인 상태는 여러모로 불리하다 일단 벽을 등지고 서자.

    "간다!!"

    캐갱!

    소리 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갈 것처럼 제스처를 취해 혼동시키고 바로 뒤로 돌진해 방심하고 있던 늑대개를 걷어찬 후 돌파해 벽을 등질 수 있었다.

    이로써 적어도 등 뒤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걱정할 필요는 없어졌다.

    그대신이랄까 방심하고 있던 놈들이 이쪽을 경계하게된 것 같지만 이정도면 뭐 합리적인 교환이지.

    그렇게 잠깐의 대치 후 늑대개 세 마리가 동시에 달려들어 왔다.

    멍청한 놈들. 니들 오기 전에 이미 두 마리 처리한건 못 봤냐?

    덤빌 거면 더 여럿이서 덤볐어야지.

    좌우에서 달려드는 두 마리는 각각 주먹 한 방씩 꽂아주고 정면에서 달려드는 놈은 발로 처리한다.

    양팔과 다리 하나를 뻗은 기묘하고 불안정한 자세가 됐지만, 일반인을 아득히 상회하는 신체능력이 이런 자세에도 안정감을 준다.

    이어서 쓰러진 놈들에게 각각 로우 킥을 한 방씩 선물.

    역시 예상대로 세 놈 모두 두 방으로 처리됐다.

    남은 적은 아홉 마리.

    놈들이 아까처럼 아군을 더 부르기 전에 처리해야한다는 부담감이 있지만, 이정도면 생각보다는 가볍게 처리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구원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놈들도 위기감을 느꼈는지 이번엔 전원이 달려들 자세를 취했다.

    그래봤자 벽면을 등진 날 상대로 한꺼번에 달려들 수 있는 숫자는 고작해야 대여섯 마리가 한계겠지. 대가리가 나쁜 짐승 놈들이라 거기까진 생각이 못 미치나보군?

    역시나 이번에 달려드는 놈들은 다섯 마리였다.

    아까처럼 전원에게 각각 한방씩 날리는 건 힘들다.

    그렇다면 내 쪽에서 먼저 움직인다!

    늑대개들이 완전히 다가오기 전에 가장 왼쪽에서 오고 있는 놈한테 달려들어 먼저 빠르게 처리한다.

    일단 한 대를 날려 기선을 제압하고 양손으로 꼬리를 잡아들어 나머지 놈들이 이쪽을 향해 뛰어오른 순간 풀스윙!

    봤냐? 이게 바로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님의 지혜란 거다.

    멍청하게 전부 똑같은 높이로 뛰어오르니 그렇게 당하지.

    라고 구원이 생각한 순간. 구원의 머리 높이까지 날아오른 늑대개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양손은 관성의 법칙에 따라 아직 오른쪽으로 휘둘러지고 있는 상황.

    놈은 마치 구원을 비웃기라도 하듯 입 꼬리를 슬쩍 올리더니 큰 입을 쫙 연다.

    이 새끼가!

    구원은 재빨리 고개를 꺾어 다가오는 이빨을 피하고, 허리를 비틀어 강하게 어깨빵을 날렸다.

    "훗, 고작 미물 주제에 제법 머리를 쓰으악! 씨발!"

    오른 다리에 느껴지는 격통에 내려다보니 어느새 다가온 한 마리가 이빨을 박아 넣고 있었다.

    "아프잖아 이 개새끼야!"

    반사적으로 물린 다리를 흔들었지만 놈은 떨어져 나갈 생각을 안 하고, 그사이에 풀스윙을 맞았던 놈들도 다시 일어나 달려들어왔다.

    당황해서 마구잡이로 휘두른 주먹이 그 중 한 마리의 다리를 강타했지만 아까 했던 예상과는 다르게 죽지 않고 다시 덤벼든다.

    뭐야, 두 방이면 되는 거 아니었어?!

    그때부터는 참으로 처절한 개싸움이었다.

    개새끼들이랑 싸웠다고 개싸움이 아니라 개같이 싸워서 개싸움이다.

    오른 다리에 달라붙은 놈은 아무리 차고 때려도 떨어져나갈 생각을 안 하지, 고통으로 패닉 상태가 되어 머리는 제대로 안돌아가지, 나머지 개새끼들은 상하좌우 전 방위에서 마구잡이로 달려들지.

    서로 치고 박고 물고 물리고 잡아 뜯고 난리도 아니었다.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중간에 한 놈이 동료를 더 부르려고 자세를 취했을 때는 답지않게 정말로 가슴이 철렁했다.

    다행이 울음소리를 내기 전에 주위에서 물어뜯는 놈들도 전부 무시하고 그 새끼만 복날 개 패듯 잡아 패서 최악의 사태는 회피할 수 있었다.

    오른 다리에 매달린 개새끼는 끝까지 안 떨어져서 잘리는 줄 알았다.

    내가 붉은발을 좋아하긴 하지만 장애까지 따라하고 싶진 않아.

    결국 폼 안 나는 개싸움 끝에 우월한 스탯빨로 전부 처리하긴 했지만 그 대가는 참혹했다.

    여기저기 물어뜯겨 만신창이가 된 몸과 피투성이에 걸레쪼가리가 된 트레이닝복과 운동화.

    몸의 상처는 이럴 때를 위해 고이 남겨둔 최하급 포션이라도 마셔두면 되겠지만, 이제 운동화와 트레이닝복은 포기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지. 값비싼 수업료라고 생각하자.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적이잖아?

    일단 혹시 모르니 얼른 포션부터 하나 마셔야지.

    지금까지 신경 못쓰고 있던 시야 한구석의 생명력 게이지를 슬쩍 보니 붉은색의 게이지는 넉넉하게 절반 이상 남아있었다.

    ……그, 그래! 뭐, 싸우기 전에 내구도 왕창 찍었고? 내 방어력이 좀 괜찮긴 하지!

    애초에 고통 제한도 없이 그렇게 물어 뜯겨 본 것도 처음이었고. 딱히 내 엄살이 심한 게 아니야.

    오히려 나 정도면 훌륭하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맞서서 결국 모든 적을 처리했잖아?

    대견하다고 스스로 칭찬해주고 싶은 기분이야!

    …일단 여기 더 있는 건 위험할 것 같으니 얼른 마석을 캐고 자리를 뜨자.

    구원은 마석을 캐며 머릿속으로 방금 전 전투를 정리해나갔다.

    먼저 스탯 창을 보면 한숨만 나온다.

    구원이 지금까지 보너스 스탯을 일부러 안 찍고 있었던 건 이유가 있다.

    일단 행동으로 스탯이 오르는 시스템이 있는 게임은 모두 그렇지만 스탯이 낮을 때나 효과를 보지 스탯이 일정 이상 되면 더 이상 효과를 보기 힘들다. 후반에 갈수록 보너스 스탯의 중요성은 높아지는 거다.

    그리고 구원은 이왕이면 균형 잡힌 스탯을 선호한다. 지금이야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서 몸으로 때워야한다지만 나중에 마법사같은 직업을 얻어서 그쪽 루트로 나갈 수도 있는 거고, 그게 아니더라도 직업을 제한 없이 얻을 수 있는 특성상 모든 스탯을 고르게 올리고 모든 직업을 마스터하는 먼치킨 플레이도 가능할거다.

    물론 게임은 시간 배율이 존재하고 그걸 이용해 게임 시간으로 몇 백 년이고 플레이 가능해서 혼자 무쌍 찍는 게 가능한 거고 현재 구원은 거기까진 불가능할 테지만, 일단 올라운더를 목표로 할 생각이었는데 그게 초장부터 좌절됐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분명 두 방을 맞고도 버티는 놈이 있었다. 확실히 그건 내 판단착오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이 세계가 현실이란 걸 머리론 알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게임하듯이 생각해서 일어난 착오다.

    게임에서 공격이란 결국 명중 판정만 받으면 되는 거다.

    공격이 깊게 들어가던 얕게 들어가든 어떤 부위를 때리든 명중 판정만 받으면 결과는 같다.

    레이드용 거대 몬스터 같이 특수한 경우는 부위별로 데미지 차가 존재하는 경우도 있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특수한 경우에 불과하다.

    만약 게임에서 급소를 맞았다고 한방에 죽는다면, 플레이어도 데미지 1 밖에 안다는 공격을 무시했다가 심장에 찔려서 급사하고, 어떠한 강적도 급소 한방에 처리할 수 있는 밸런스 개판의 게임이 되어버리니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이 세계는 게임이 아니다.

    아무리 공격이 성공해도 제대로 맞은 게 아니라면 의미가 없고, 아무리 약한 공격이라도 급소에 맞으면 일격에 죽을 수도 있다.

    그 점은 분명히 해뒀어야 했는데.

    머리론 아무리 현실이라고 알고 있어도, 시야 한구석에 생명력과 정기 게이지나 맵 화면 같은 게 떠다니고 있다 보니 도저히 게임 감각을 버리기 힘들다.

    이것만은 시간이 흘러 적응되길 기다릴 수밖에 없는 건가.

    아무튼 지쳤다.

    마석을 다 회수해서 늑대개들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찢긴 옷이 되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생각보다 많진 않지만 내가 흘린 피도 묻어 꽤나 더럽다.

    오늘은 이만 돌아갈까.

    시야 한구석에 있는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저녁시간이었다.

    하긴 이 층으로 내려오는데 꽤나 시간이 걸렸지.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도 고프고, 이정도면 적어도 여관비정도는 나오겠지.

    돌아가자.

    돌아가는 길은 최단루트로 빠르게 통과해서 금방이었다.

    귀찮게 빙빙 돌면서 맵을 완성시켜둔 보람이 있다.

    일단 길드에서 마석부터 팔아야지.

    하지만 매뉴얼과 공식 홈페이지에는 길드에 팔라고만 나와 있었지, 길드의 어디에서 팔아야 되는지는 안 나와 있었다. 길드가 좀 넓은 것도 아니고.

    미궁 입구를 둘러싼 형태로 만들어진 길드 건물은 혼자 상점가 수준은 넓이를 자랑했다. 구조가 복잡하지 않고 그냥 도너츠 모양이라 건물 안에서 길 잃을 걱정은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인 수준이다.

    궁금한 게 있으면 일단 안내원이지.

    구원은 아침에 모험가 등록을 해줬던 안내원 누님을 찾아갔다.

    이 넓은 길드에 안내원이 한둘도 아니고 왜 또 그 누님이냐고?

    대충 둘러봐도 그 누님보다 예쁜 안내원이 안보였거든.

    길드의 간판인 만큼 다들 나름 예쁘장하게 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그 누님의 미모가 너무 압도적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인 크기의 가슴에 자로 잰 듯 단정하면서도 어른스러운 분위기. 게다가 그림으로 그린 듯한 금발벽안이다.

    이렇게 내 취향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인텔리계열 미인 누님을 놔두고 다른 안내원을 찾아간다니 있을 수 없지.

    "어서 오…꺅! 괜찮으세요?"

    응? 아아…. 나 지금 걸레짝이었지.

    오면서 생명력이 전부 회복된 덕분에 몸은 멀쩡해져서 잠깐 잊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역시 미인이구나. 놀라는 모습도 아름다우시다.

    "아, 네. 덕분에 괜찮습니다."

    하루에 상대하는 모험가가 한둘도 아닐 테고 기억할지나 모르겠지만, 아마 아침에 한 또라이 짓으로 첫인상은 최악일 테지. 그래서 이번엔 최대한 상식적인 답변을 했는데 어째선지 안내원 누님의 표정이 흐려졌다.

    미인은 이런 표정도 그림이 되는구나.

    "설마 던전에 다녀오신 건가요?"

    "네."

    "1레벨이시잖아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니,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제가 제대로 안내해드렸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제대로 기억하시는 모양이다. 게다가 아마 내가 이런 꼴인 게 본인 탓이라고 생각하고 엄청나게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다.

    덕분에 괜찮다는 말도 비꼬는 걸로 알아들은 건가. 그냥 아무생각 없이 인사치레로 한 말인데 말이지.

    물론 어쭙잖게 생긴 놈이었으면 일 똑바로 안하냐고 개진상을 부렸을 테지만 이런 미인이 이런 표정을 짓고 있으니 맘이 약해진다.

    하지만 이거, 잘 생각해보니 기회 아니야?

    상대의 약한 점을 파고들어 공략하는 건 기본 중에 기본.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그렇게 죄송하시다면 언제 식사라도 한 끼…"

    "아뇨. 그렇게까지 미안하진 않네요."

    말을 끝맺기도 전에 거절당했다.

    표정은 엄청나게 미안한 표정인데 이런 건 칼 같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기본적인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시겠어요?"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해서 구원은 뒤늦게나마 모험가에 대해 기본적인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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