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5화 (5/1,205)
  • 5====================

    이세계 생활 시작

    퍽!

    "내 이름은 구원. 사람들은 날 붉은 발의 구원이라 부르지."

    구원은 붉다 못해 검붉은 색으로 물든 오른발을 휘둘러 달려오던 토끼 몬스터를 일격에 해치우며 말했다.

    벌써 쓰디쓴 첫 전투를 경험하고 약 세 시간이 경과했다.

    첫 전투 후 혹시나 하는 미약한 기대를 가지고 신발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빼봤지만 역시 신발에 묻은 피와 신발을 따로 인식하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기에, 이젠 아예 정색하고 발 전체에 느껴지는 축축함을 컨셉놀이로 승화시키고 있는 중이다.

    아무래도 이 던전 초입은 소형 동물 몬스터들이 주를 이루는지 세 시간동안 줄곧 팔뚝만한 거대한 쥐나 토끼 같은 몬스터들을 상대했다.

    어차피 스탯 차이로 조금만 주의하면 이런 몬스터들한테 당할 일도 없겠다, 첫 경험의 실패를 교훈삼아 적절한 힘 배분으로 최대한 피가 튀지 않게 잡아왔다.

    언제 실패할지 모르니 어차피 더러워진 오른 발로만 해결한 건 덤이다.

    처음엔 너무 약하게 차서 반격을 당하기도 했고, 반대로 너무 세게 차서 다시 한 번 폭사 쇼를 보기도 했지만, 이젠 제법 익숙해져서 거의 터뜨리지 않고 일격에 잡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리고 죽은 사체들은 전부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있다.

    매뉴얼에는 던전의 몬스터를 잡아 나오는 마석으로 세계가 크게 발전했다느니 어쩌고 하는 구절도 있었느니 이 사체들도 헤집어보면 아마 마석이 나오긴 할 것 같은데, 아무 도구도 없는 현재로선 어찌할 방법이 없다.

    게다가 마석 말고도 뭔가 팔리는 부위가 있긴 할 테니 아예 전부 가져가버리는 게 낫다는 판단이다.

    그레이트 어스의 게임은 공통적으로 인벤토리에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그레이트 어스사의 친절함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레이트 어스의 게임은 하나같이 아이템이 더럽게 많기 때문이다.

    아무리 초기에 나오는 잡몹이라도 발톱 손톱 가죽 고기 등 종류별로 온갖 부위가 전부 아이템으로 드랍 되다보니, 인벤토리에 제한이 있으면 수시로 마을을 왕복해야 돼서 도저히 진행이 안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레이트 어스사의 열렬한 팬을 자처하는 구원도 그 사실은 잘 알고 있고, 때문에 잡은 몬스터 사체는 아예 몽땅 가져가는 방법을 취하는 거다.

    시험 삼아 살아있는 몬스터를 인벤토리에 넣는 것도 시도해봤지만 역시나 그건 불가능했다. 전투에 피가 따르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현실적으로 바뀐 부분이 많아서 가능할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쉽다.

    그렇게 오른발로만 세 시간을 사냥해서인지 어느 샌가 무투가라는 직업과 로우 킥이라는 스킬도 얻은 상태였다.

    시스템 창이 없으니 언제 뭘 얻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게 좀 불편하다.

    로우 킥 1

    액티브 스킬

    소모 : 자원 6

    하단을 향해 강렬한 발차기를 날립니다.

    공격력의 [105%]만큼 피해를 줍니다.

    소모 값이 자원이라고 쓰여 있는 게 조금 불안했지만, 다행히도 직접 써보니 정기가 소모됐다.

    다.

    하지만 로우 킥을 사용하면 어김없이 토끼든 쥐든 너구리든 폭발 쇼가 일어났기 때문에 현재 봉인 중이다.

    어떻게 세 몬스터 다 터지는지 아냐고?

    그래, 한 번에 안 그치고 만나는 놈들마다 일단 다 한 번씩은 시험해 봤다. 뭐 불만 있냐?

    새 스킬을 얻었으면 사용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의 본능이란 거잖아?

    혹시 동물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어차피 폭사를 하던 그냥 곱게 죽던 죽는 건 죽는 거야.

    처음엔 죄책감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어차피 몬스터들 입장에서 구원은 갑자기 튀어나와 때려죽이는 개새끼인데 이제 와서 멘탈이 깎여봤자 본인만 손해라는 생각에 아예 정색하고 가기로 했다.

    이 세상은 적자생존! 약육강식!

    힘이 모든 걸 지배한다!

    미안하지만, 내 혼의 절규는 이러하다. 좀 더 힘을!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대체 어느 정도 잡고 나가야 될까.

    당면의 목표는 일단 하루 묵으며 끼니를 때울 수 있을 만한 여관비와, 술집에서 맥주 한잔정도는 살 수 있을 만한 돈이다.

    지금까지 돈 쓴 일이라고는 모험가 등록 시에 쓴 2실버와, 여관에서 쓴 3실버가 전부다.

    심지어 그 여관은 아마 보통 여관보다 가격이 훨씬 비싼 고급 여관일 테니, 물가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물가를 알아도 애초에 지금까지 잡은 몬스터의 가격이 어떻게 나올지도 알 수 없으니 알아도 무용지물이긴 하지만 말이다.

    현재 인벤토리에 들어있는 사체는 토끼가 13마리, 쥐가 12마리, 너구리가 8마리다.

    겨우 던전 초입, 심지어 고작 3시간 벌은 걸로 만족할 만큼 벌었을 거라곤 도저히 생각하기 힘들지만, 일단 시세라도 알아볼 겸 한번 올라갔다 오는 게 좋을지도.

    맵을 보면서 입구 주위의 맵을 밝혀가듯이 돌아다녔기 때문에 입구도 그리 멀지 않다.

    마침 점심도 먹어야할 시간대니 일단 돌아갈까.

    빙빙 돌아왔던 길을 맵을 보며 최단 루트로 돌파하니 입구까지는 정말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다.

    운 좋게 몬스터랑 마주치지 않기도 해서 순식간에 입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석은 길드에만 판매가 가능했던 것 같은데 어쩌지.

    아냐 마석은 나중에 한 번에 팔기로 하고 일단 재료값부터 알아보자.

    맵을 키고 혹시 도구점이 나오나 확인해봤지만, 여관에서 길드까지 밝혀진 거리 중에 도구점은 없었다. 여관이나 길드는 맵에 아이콘으로 표시되는 걸 보아 상점도 아이콘으로 표시되긴 할 텐데 말이지.

    하지만 맵과는 다르게 길드를 나와서 보니 바로 코앞에 척 봐도 잡화점 같은 가게가 있었다.

    다시 맵을 확인해봤지만 역시 아이콘으로 표시되진 않는다.

    뭐지?

    멍하니 맵을 보며 잡화점에 들어가자 그제야 맵에 잡화점 아이콘이 표시됐다.

    과연, 이런 식인가.

    이것도 나름대로 현실보정이란 놈인가 보다.

    "어서 옵쇼."

    잡화점 주인아저씨가 걸쭉한 목소리로 인사를 해왔다.

    으음…. 이 세계에서 온갖 미녀들로 눈 정화를 하다가 이렇게 그림으로 그린 듯한 아저씨와 얼굴을 마주하니 안구가 썩어가는 느낌이군.

    상인의 탐욕을 온몸으로 구현한 듯한 두툼한 비곗살이 인상적인 아저씨다.

    아무래도 처음 간 가게에 그대로 단골이 되는 차원 이동물 정석의 전개는 기대하기 힘들 것 같다. 얼른 알아볼 것만 알아보고 나가자.

    "으잉?! 자네 그 다리는 뭔가? 괜찮나?"

    "응? 물론이지. 원한다면 날 붉은 발의 구원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참고로 구원은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 상대의 나이와 관계없이 반말에는 반말로 돌려주는 맞춤 대응을 추구한다.

    물론 상대방이 존댓말을 써준다고 해서 구원이 꼭 존댓말로 돌려준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아니…. 사양하겠네."

    아저씨는 왠지 못 볼 걸 본 듯한 표정이었다.

    지금 붉은 발이란 닉네임을 무시하는 거냐? 내가 그 편을 보고 얼마나 많이 울었는데. 하긴 한낱 잡화점이나 하고 있는 어리석은 인간에겐 알 수 없는 세계인가.

    "그보다 토끼와, 거대 쥐, 너구리를 잡아와서 좀 팔고 싶은데, 가격이 어떻게 되지?"

    "토끼와, 거대 쥐, 너구리 말인가? 재료의 상태를 보기 전에는 뭐라 말하기 힘들군. 일단 좀 보세."

    "…여기에서?"

    "음…? 뭐 안 될 거 있나?"

    이 아저씨, 얼굴은 더럽지만 가게는 제법 깔끔하게 정리해 놓고 있는가 싶었는데 가게가 피로 더러워져도 상관없는 모양이다.

    사람은 역시 생긴 대로 노는 법인가.

    "자, 여기."

    일단 인벤토리에서 손에 집히는 대로 하나 집어서 카운터 위에 올려놓는다.

    으윽…. 하필이면 로우 킥으로 잡은 놈이.

    피투성이가 된 토끼의 사체가 카운터 위를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더 꺼내놔야 되나 망설이고 있자니, 잠깐 말이 없던 아저씨가 갑자기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으악! 이게 뭐하는 짓이야!"

    "응? 아저씨가 꺼내보라고 했잖아."

    "세상에 몬스터 사체를 그대로 가져오는 미친놈이 어디 있어! 아니, 대체 뭔 수로 피까지 이렇게 생생하게 보관해서 가져온 거야! 제정신인가?!"

    거참 생긴 대로 입도 더러운 아저씨네. 내 귀를 더럽히는 건 그 더러운 목소리로 충분하다고.

    "소리 좀 지르지 마 아저씨. 고막 떨어지겠어. 그보다 감정가는 얼만데? 더 꺼내서 보여야 돼?"

    "필요 없어! 그보다 이것도 당장 집어넣어! 그리고 얼른 내 가게에서 꺼져! 아아…내 가게가 피투성이로…."

    "감정가만 알려주면 안 그래도 바로 나갈 거야. 그래서 얼만데?"

    "너 같은 미친놈한텐 아무것도 안사! 꺼져!"

    결국 구원은 아무 성과도 없이 쫓기듯이 가게를 나설 수밖에 없었다.

    "누군 이딴 가게 오고 싶은 줄 알아?! 와달라고 사정해도 다신 안 온다! 나중에 후회하지나 말라고!"

    제길. 귀찮지만 다른 가게를 찾아봐야하나.

    아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어차피 이 가게는 다신 올 일이 없을 버리는 패였다. 이 실패를 바탕으로 단골로 다닐 점주나 종업원이 참한 가게를 찾아내서 멋지게 시세를 파악해주지.

    다른 가게를 찾는 건 생각 외로 엄청 쉬웠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는 법. 거대한 도넛모양 건물인 길드의 외벽을 따라 쭉 걷다보니 벌써 몇 군데 잡화점을 지나쳤다.

    왜 안 들어갔냐고?

    하하. 뻔한 질문을 하는군.

    당연히 점주 얼굴이 맘에 안 들었으니 지나쳤지.

    내가 단골이 될 가게의 점주는 미스테리어스한 분위기를 뿜어대는 요염한 미인 누님이라고 이미 정해놨다고.

    그리고 다시 30분이 지났다.

    맵을 보니 그 큰 길드 주위를 벌써 반 바퀴 이상 돌은 상황.

    젠장. 이 세계의 잡화점의 점주는 아저씨 아줌마가 해야 한다고 법으로 정해져 있기라도 한 건가? 어떻게 그 많은 가게 중에 미인 누님이 보는 가게가 하나도 없을 수가 있지?

    이렇게 된 이상 미스테리어스한 분위기를 뿜어대는 요염한 미인 누님은 눈물을 머금고 포기한다. 그냥 미인이면 만족해 줄 테니 아니, 대 출혈 서비스로 그냥 젊은 여자이기만 하면 만족할 테니 제발. 제발 이번에는 부탁한다!

    진심으로 마음을 담아 간절히 바라며 눈앞의 잡화점 창문을 힐끗 들여다봤지만 카운터에 있는 건 풍채 좋은 아저씨였다.

    씨발! 이렇게 간절히 바라는데 신이 있는 세계면 좀 들어줘도 되지 않냐?

    그렇게 지나치려 할 때, 창문에 가려져 있던 카운터 반쪽에 젊은 여성이 서있는 게 시야 한구석에 들어왔다.

    역시 신이 존재하는 세계! 전 믿고 있었습니다.

    세계의 시스템부터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어놓는 여신님인데 당연히 믿고 있었죠.

    "어서 오세요."

    "어서 오세요."

    아빠랑 딸인가?

    잡화점에 들어가자 카운터에 있는 둘이 맞추기라도 한 듯 동시에 인사한다.

    아저씨는 좀 닥치고 있어줬으면 좋겠지만, 아니 가능하면 시야에서 사라져줬으면 완벽했겠지만 참자.

    "어머? 그 다리…괜찮으세요?"

    "물론이죠. 친절한 아가씨.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역시 젊은 여자가 최고야.

    이렇게 친절하다니.

    구원은 되도록 아저씨는 시야에 넣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여자애 정면으로 다가갔다.

    뭐 솔직히 말해 엄청난 미인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다. 150대 정도로 보이는 조그마한 키에 그냥저냥 나름대로 귀여운 얼굴.

    이 세계에서 본 여자들, 특히 길드에 모여 있던 모험가들이 대부분 한 미모 하는 여자들이 많았기 때문인지 눈이 심하게 높아졌단 걸 감안한다면 뭐 괜찮은 수준이라고 봐야겠지.

    옆에 있는 아저씨는 덩치는 산만하고 말 그대로 곰같이 생긴 아저씬데 저 아저씨 밑에서 이런 딸이 나오다니. 유전자란 신비한 거야.

    "무슨 일로 오셨나요?"

    구원이 아가씨 정면에 서자 그 의도를 알아챘는지, 아가씨가 웃는 얼굴로 접대를 해왔다.

    "던전에서 사냥을 해 왔는데, 제가 이제 막 모험가가 된 직후인지라 가게에서 어떤 부위를 파는지 잘 몰라서요. 이 가게는 토끼, 거대 쥐, 너구리의 어떤 부위를 사들이나요?"

    한 번한 실수는 두 번하지 않는다.

    아까의 실수를 토대로 이번엔 사체를 꺼낼 일이 없게 완벽한 질문을 던졌다.

    "으응……. 토끼라면 고기와 가죽, 거대 쥐는 앞니와 수염, 너구리는 발톱이랑 꼬리네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깐 생각에 빠졌다가 대답하는 점원 아가씨.

    그 순진한 동작이 상당히 귀엽다.

    아까 한 평가는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 그냥저냥 귀여운 얼굴에서 제법 귀여운 얼굴로 상향조정이다.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이따가 다시 올게요."

    "네. 또 오세요."

    물건을 사지도 않고 질문만하고 나가는 구원을 웃는 얼굴로 배웅하는 점원 아가씨.

    이정도면 이 내가 단골 가게로 선택하기에 충분한 가게인 것 같군.

    하지만 여기서 중대한 문제가 다시 떠올랐다.

    판매 부위를 알아냈다고 해도 그걸 도축할 도구가 없다.

    젠장. 초기 장비로 나이프 정도는 지급해줘야 되는 거 아니냐?

    없는 건 없는 대로 어쩔 수 없다지만 불평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결국 그 수밖에 없는 건가.

    결국 최후의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는 암담한 현실을 깨닫고 다시 한 번 던전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귀찮긴 해도 마을 안에서 했다간 이상한 오해를 사고 잡혀 들어갈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지.

    던전 안에서 직접 이 두 손으로 몬스터들의 사체를 도.륙.한.다.

    오른발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찝찝한데 양손까지 피로 물들여야 한다니.

    우울하다.

    근데 양손까지 피로 물들면 더 이상 붉은 발의 구원이란 닉네임은 어울리지 않는군.

    다음 닉네임은 뭐라고 지어야하지?

    ============================ 작품 후기 ============================

    오염된왕좌 // 오타 수정했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