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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4화 (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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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 시작?

    아니, 모험가 등록비도 2실버인데 고작 여관에서 잠깐 있었다가 나온 게 3실버라니 말이 돼?

    차라리 한나절을 있거나 했으면 이해라도 해 줄 수 있어.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찍 싸서 고작해야 한 시간도 채 안 있었다고!

    근데 뭐? 3실버? 내 전 재산을 달라고?

    안줘! 아니, 못줘!

    라고 게임이었으면 진상을 떨었을 텐데.

    지금 이 상황이 확실히 게임 속이라고 확신이 없는 이상, 어떻게 부메랑이 되어 날아올지 모르는 또라이 짓을 섣부르게 할 순 없다.

    점원 아가씨가 제법 예쁘게 생긴 아가씨였단 점도 영향이 없었다곤 말할 수 없지.

    구원은 힘없이 전 재산을 상납하고 여관을 나섰다.

    뭘까, 이 시원섭섭한 기분.

    태어나서 처음 무일푼이 돼보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전신을 감싼다.

    이게 바로 무소유란 걸까?

    세상이란 이렇게 부질없는 곳이구나.

    처음엔 제가 여관에 끌어들여 놓고 돈도 안내고 가버린 앨리시아에 대한 분노도 끓어올랐지만 이젠 아무래도 좋아졌다.

    묘하게 산뜻해진 머리로 생각해보니 여관비가 더럽게 비쌌던 것도 납득이 간다.

    중세시대 서양을 떠올리게 하는 건물들이 늘어선 곳에서 샤워기까지 있는 현대식 욕실이 방마다 달려있는 여관이라니. 그야 비싸겠지.

    할 땐 별로 신경 쓰지 못했는데 침대시트도 묘하게 부드러웠고.

    그래 바가지를 뒤집어쓴 게 아니야.

    정당한 대가를 치른 것뿐이지.

    그나저나 이제부터 어쩌지.

    술집에서 아무나 붙잡고 술 한 잔 사면서 정보 수집을 한다는 내 계획은 초장부터 이미 박살이 났고. 할 수 있는 게 없다.

    게임의 정석대로 던전에 들어가서 몬스터라도 잡아야 되나?

    하다못해 무기라도 하나 있었으면, 아니 레벨이 2레벨만 되도 시도해볼 텐데.

    만약 1레벨에 던전에 들어갔다가 어그로라도 잘못 끌어서 죽기라도 하면 누구한테 하소연도 못한다.

    구원은 아무 생각 없이 스탯 창을 띄웠다.

    이름 : 구원

    종족 : 인간 24

    직업 : 성자 12 / 모험가 1

    레벨 : 12

    생명력 : 2400/2400

    정기 : 1200/1200

    근력 : 22

    내구 : 22

    민첩 : 22

    체력 : 22

    지력 : 21

    정신 : 22

    매력 : 61

    보너스 스탯 : 55

    상태 : 보통

    ……어라? 뭐야 이거?

    아 그렇구나! 앨리시아랑 한판 한 거!

    시스템 창같은 것도 없고 딱히 알림도 없어서 눈치 못 채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 한판으로 폭업을 한 모양이다.

    앨리시아 걘 대체 레벨이 몇이길래 고작 한판 했다고 이렇게 폭업을 시켜주지?

    자랑은 아니지만 아까 전의 섹스로 앨리시아가 느낀 만족도가 크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오르가즘을 느끼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건 아마 오로지 연장이 좋아서 간신히 가볍게 느끼게 해준 정도일 테지.

    실제로 테크닉이고 뭐고 그냥 온몸에 힘 꽉 주고 가만히 버티고 있는 게 전부였으니.

    그런데도 이렇게 레벨이 올랐다는 건 걔 생각보다 엄청나게 고렙인 거 아니야?

    설마 난 주제도 모르고 고렙 전사님께 좆물이나 더 처먹고 오라는 개소리를 한 건가?

    아니, 아닐 거야. 그냥 내가 너무 쪼렙이라 많이 오른 거겠지. 그래. 그럴 거야.

    그래도 다음에 앨리시아양과 만나게 되면 좀 더 공손하게 대하자.

    이건 결코 쫄은 게 아냐!

    다만 사람으로서 폭렙을 시켜준 은혜를 입었으니 도리를 다 할뿐이지.

    근데 좆물이나 더 처먹고 오라고 한건 사과해야겠지?

    여하튼 덕분에 앞으로의 계획은 일단 가닥이 잡혔다.

    이른바 돈이 없으면 벌면 되지!

    레벨 업으로 보너스 스탯도 쌓였고 성자라는 사기 직업의 레벨도 덩달아 올라서 스탯이 엄청나게 올랐다.

    이정도면 적어도 던전 초입에서 죽을 일은 절대 없지 않을까?

    참고로 이 게임은 스탯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이 총 세 가지 있다.

    먼저 레벨 업을 해서 보너스 스탯으로 올리는 방법.

    이건 어떤 게임이던 기본 중에 기본이니 입 아프게 더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다음으론 해당 스탯에 관련된 행동을 꾸준히 하는 것.

    하지만 이렇게 올릴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다.

    운동 좀 해봤으면 알겠지만 무게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한 단계 올리기도 힘들어 지는 법이지. 그거랑 비슷한 맥락의 시스템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직업 레벨을 올려 스탯을 올리는 방법이 있다.

    이 세계는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직업을 얻을 수 있고, 그 직업의 숙련도를 쌓는 걸로 직업 레벨을 올릴 수 있다. 그렇게 직업 레벨이 오르면 적어도 한 개 이상의 관련 스탯이 일정 확률로 오른다.

    참고로 성자는 모든 스탯이 무조건 오른다. 괜히 주인공 전용 직업이 아니라고.

    심지어 직업 숙련도를 쌓는 것도 섹스를 하면 되는 거라서 섹스로 레벨과 직업 레벨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직업이 있을 수 없다.

    이렇게만 듣고 보면 굳이 레벨 올릴 거 없이 직업을 마구잡이로 얻은 후 직업 레벨만 올려서 스탯을 올리면 강해질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또 그렇지 않다.

    왜냐면 바로 직업 레벨의 제한선이 일반 레벨이거든.

    레벨이 2인 사람이 있다면 아무리 직업 숙련도를 쌓아봤자 직업 레벨을 2 이상은 올릴 수 없다.

    게다가 레벨은 스탯 상으로는 나타나지 않지만 모든 요소에 보정을 주는 효과가 있다.

    예를 들어 힘이 30인 20레벨 전사가 힘이 10인 90레벨 마법사와 힘 싸움을 하면 90레벨 마법사가 이긴다.

    한마디로 레벨이 깡패란 말이다

    어떻게든 섹스를 시키고야 말겠다는 그레이트 어스사의 집요함이 엿보이지 않는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참신한 아이디어가 빛나는 멋진 회사다.

    그렇다고 일반 게임처럼 전투로도 경험치가 오르지 않는 건 아니다.

    섹스보다 압도적으로 효율이 떨어질 뿐이지 전투로도 레벨을 올릴 수는 있다.

    발매 전에 올라온 공식 블로그의 기사를 참고하자면 늙어 죽을 때까지 이 게임만 플레이하다가 엔딩도 못보고 죽을 거면 한번 해보란다.

    그럴 거면 그냥 섹스로만 레벨 업 할 수 있게 하지 굳이 왜 전투로 경험치를 주게 만들었냐고?

    섹스로만 레벨 업이 가능하면 높은 수준의 히로인 npc중에 처녀는 한명도 없는 게 돼버리잖아! 라고 한다.

    캬! 다시 생각해 봐도 참 멋진 회사가 아닐 수 없다.

    장담하는데 그레이트 어스의 개발자들은 밥 먹고 성인 게임 생각만 하는 게 틀림없다.

    아니, 밥 먹는 도중에도 자나 깨나 24시간 뇌가 성인 게임에만 절여져 있는 게 틀림없다.

    게임 속에 갇힌 건지 차원 이동을 한 건지 알 수 없는 이 상황에서도 도저히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가 없는 회사다.

    딴생각에 빠져있는 사이에 어느 샌가 다시 모험가 길드에 도착했다.

    모험가 길드의 건물은 가운데가 뻥 뚫린 원형, 즉 도너츠 모양으로 생겼는데 그 뻥 뚫린 곳에 바로 던전의 입구가 있다.

    언제 흉악한 몬스터가 던전 입구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니 모험가가 가장 많이 모이는 길드가 최종 방벽이 되어 언제 일어날지 모를 재앙으로부터 이 도시를 지킨다! 라는 컨셉으로 세워진 거라고 매뉴얼에 쓰여 있었다.

    아니 그럴 거면 애초에 던전 입구를 둘러싸고 도시를 만들지 말라고. 적어도 던전에서 좀 떨어진 곳에 만들었으면 됐잖아.

    모험가 입장에서야 편하고 좋긴 하다만 여기 주민들은 괜찮은 거냐.

    던전 입구에는 엄청난 수의 모험가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모험가하면 왠지 되는대로 살고 거칠며 부지런하기 보단 게으른 이미지가 있는데 오전부터 이런 상황인 걸 보면 아무래도 그 선입견은 보기 좋게 빗나간 모양이다.

    상당한 고렙으로 추정되는 앨리시아도 이른 아침부터 던전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의외로 모험가란 놈들은 부지런한 걸지도.

    들어가기 전에 일단 보너스 스탯을 조금 분배해 둘까?

    입구 근처만 돌아다닐 예정이니 별일이야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 근력만 좀 찍어두자.

    출근시간 지하철을 떠오르게 만드는 던전 입구를 지나쳐 겨우 던전에 들어가니 눈앞에 거대한 빛의 기둥이 보였다. 던전의 어딘가와 연결되어 있는 텔레포트다.

    초보에 불과한 구원과는 아직 인연이 없는 곳이니 무시하고 걷다보니 여러 갈래로 나눠진 길을 그냥 되는대로 걷다보니 어느 샌가 주위에 사람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1층조차도 그 끝이 파악 안됐을 정도로 광대한 던전이다. 아무리 모험가가 많다고 해도 이정도면 던전 내에서 동업자를 만날 일은 웬만해선 잘 없지도.

    심지어 방심하고 있다간 지나온 길도 잃어버리고 영영 미아가 될 정도로 길이 복잡하다. 나무들이 우거진 숲 같은 지형이라 길잡이가 될 만한 표식도 안보이고.

    잘도 이런 곳을 헤매지도 않고 돌아다니네.

    뭔가 노하우라도 있는 걸까?

    만약 지나간 길은 자동으로 등록되어 완성되는 맵 기능이 없었다면 난 진작 미아가 됐을 자신이 있다.

    생각해보니 모험가 등록할 때 레벨이니 직업이니 안내원 누님이 떠들기도 했었고, 앨리시아도 비슷한 발언을 했었으니 이 세계는 게임 시스템이 상식인 세계란 말이 된다.

    혹시 맵이나 인벤토리 같은 게임 시스템도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일반적으로 쓰는 평범한 기능인 걸까.

    보통 게임 세계로 날아간 소설들을 보면 이런 기능은 주인공만 쓰던데 말이지.

    바스락

    전방에서 구원의 발소리와는 명백하게 다른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전투인가.

    구원은 묘한 긴장감을 느끼며 어설프게나마 권투 자세를 잡았다.

    현재 스탯이 고작 던전 1층에서 위협을 느낄만한 스탯은 결코 아니란 건 알고 있지만 아무래도 이게 게임이 아닌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의식 한편을 차지하고 있어서인지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차라리 나이프 같은 기본적인 무기라도 있었다면 이 긴장이 좀 덜했을지도 모르겠는데.

    어설픈 권투의 가드자세를 취하며 살금살금 전방을 향해 걸어간 구원에 눈에 보인 건 평화롭게 풀을 뜯어먹고 있는 토끼였다.

    뭐야 이게.

    구원은 한껏 긴장하고 있던 자신이 바보 같아져서 가드를 풀고 토끼를 향해 다가갔다.

    던전물이면 보통 초반 몬스터는 고블린이 정석 아니야?

    아무리 몬스터라지만 이족 보행하는, 사람과 비슷한 생물체를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고 있었는데 설마 초반 몬스터가 토끼라니.

    앨리시아여. 모험가는 아무나 들이댈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직업이 아닌 거 아니었냐?

    긴장을 풀고 다가가니 곧 토끼도 눈치 챘는지 동그란 눈동자를 크게 뜨고 이쪽을 바라봤다.

    그 녀석 귀엽게 생겼네.

    하지만 약육강식의 세계란 냉혹한 법.

    1미터쯤까지 다가가자 그때까지 가만히 이쪽을 바라만 보고 있던 토끼가 갑자기 구원의 눈높이까지 뛰어올라 뒤돌아 차기를 시도했다.

    "으악! 시발!"

    부웅!

    내 민첩이 기본 수치였으면 절대 못 피했다.

    뭐야 저 소리. 저게 고작 토끼가 뒤돌아 차기 한다고 낼 수 있는 소리야?

    아니, 애초에 토끼가 뒤돌아 차기를 한다는 거 자체가 이상하긴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생긴 건 저래도 던전의 몬스터란 건가.

    구원은 방심했던 마음을 다잡고 다시 자세를 취했다.

    다음에 공격해 올 때 카운터를 날린다.

    방금 공격으로 스탯 상의 우위는 확실히 체감했다.

    제대로만 들어간다면 아마 카운터 한방으로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구원이 자세를 잡고 다음 공격을 기다리고 있자, 이쪽을 멀뚱히 바라보던 토끼는 갑자기 뒤를 돌아 쏜살같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 이게 아닌데? 야! 거기서!"

    첫 사냥감을 놓친다는 생각에 조급해서 구원은 자신의 스탯을 살려 전속력으로 달려가 사커킥을 시도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잡긴 잡았다.

    압도적인 스탯 차 때문에 구원은 도망가는 토끼를 순식간에 따라잡을 수 있었고, 조급한 마음에 힘 조절 안하고 날린 사커킥은 무너진 자세가 오히려 발끝에 모든 힘이 집중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 결과 기분 나쁜 소리와 감촉과 함께 끽해야 30센치 정도 크기로 보였던 토끼는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산산이 분해되어 구원의 오른 발과 다리를 붉게 물들였다.

    "큭. 도망쳐. 내 오른발에 깃든 적혈룡이 깨어나려 하고 있어."

    패닉상태가 되어 본인도 뭔 소린지 알 수 없는 개소리를 일단 내뱉어 봤지만, 그렇다고 현 상황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구원은 사냥에는 성공했지만, 아무런 전리품도 얻지 못했다.

    덤으로 지금까지 닭목 비트는 것조차 구경 못해본 순수한 서울 청년 구원은 토끼의 살점 튀는 폭발 쇼로 마음에 심각한 데미지를 입었다.

    피에 절어 무지막지하게 찝찝한 오른발과 함께.

    변명을 하자면 조급한 마음에 힘 조절을 못한 건 맞다. 다만 힘 조절을 해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냥 갈긴 것이기도 하다.

    가상현실의 특징상 피를 흘리는 모습이 정말로 리얼하고 끔찍하게 다가올 수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그레이트 어스의 게임에선 피 대신 붉은빛 이펙트만 나타나고, 죽으면 빛과 함께 소멸한다.

    이렇게나 게임과 똑같은 세계잖아? 당연히 이런 묘사는 게임이랑 똑같을 줄 알았지.

    이 상황이 차원 이동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주시하고 있었으면서 머리 한구석으로는 아직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걸까.

    하지만 덕분에 확실해졌다.

    아무래도 강제종료는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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