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 공략!
마신들이 술렁이며 옆으로 비켜선다.
시꺼먼 공간의 틈새 속에서 제르미나만이 홀로 하얗게 빛나며 이질적인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북극에 사는 여우와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생기 있는 하얀 머리카락, 여성스럽고 긴 속눈썹.
갸름한 턱선과 뽀얀 피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미인의 조건을 한데 모아 다 가진 듯한 천성적인 조화로움.
그러나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 여자의 본성은 눈에 있으니.
내가 이름을 부르자 제르미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듯이 눈을 뜨는 제르미나.
피조물을 위압하는 붉은 눈이 시간을 멈춘 듯했다.
아무도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지금은 지난 일이지만, 나는…….
저 여자에게 대든 적도 있고.
수다스럽게 얘기를 나눈 적도 있으며.
한 방 먹여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내가 지금 그럴 수 있을까?
이 여자는 권능을 발휘하지 않아도 모든 이를 두려움에 떨게 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것은 생물의 본능이다.
저 여자는…… '모든 생물을 파괴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두려운 게 당연한 거다.
천적 앞에서 벌벌 떠는 작은 동물처럼.
"꺼져라."
제르미나의 손에서 붉은 극광이 뿜어져 나왔다.
비슷한 마법을 몇 번이나 본 적 있다.
하지만 헤르카의 빛 마법이 빛의 권능에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제르미나의 권능 역시 마찬
가지였다.
격의 차이는 엄청났다.
제르미나는 마신들이 피할 틈도 주지 않고 벌레 잡듯이 소멸시켰다.
"……."
리사는 검 손잡이를 꽉 쥐었다.
"파괴의 여신.
저런 것을, 이길 수 있는 건가……?"
리사가 목표를 앞에 두고 이런 말을 하는 건 좀처럼 없는 일이다.
그러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냥 '죽어라' 하면 다 죽여버릴 수 있는 적 앞에서,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머리가 굳어서 돌아가지 않았다.
분명히 무언가…….
간단하고 명확한 목표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오랜만이구나."
제르미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 시종."
"저는 당신의 시종이 아니에요."
"자식이 부모를 인정하지 않아도 부모는 부모.
너는 내 총애를 받고 빛의 여신이 되었지. 괘씸하지만 아끼는 마음도 있었다."
"부모라니, 착각이 심하네요.
그보다, 괜찮은가요?"
시아는 마신들이 먼지처럼 사라지는 걸 보고도 주눅 들지 않고 미소 지었다.
"여긴 당신 묫자린데.
제가 파 놓은 구멍에 기어 온 걸 후회하지 않길 바라요."
"후회? 내가 후회하는 건 단 하나뿐이다."
제르미나가 이쪽으로 손을 뻗자 반투명한 금색의 사슬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뱀처럼
제르미나의 팔을 휘감았다.
그건 시아의 마법이 아니었다.
제르미나가 스스로 건 금제.
"내 힘으로 나를 묶은 것.
그것만 아니었어도 너희는 한 줌 먼지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아느냐?"
나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심호흡했다.
제르미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수록 점점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다.
파괴의 여신이라는 위치에서 모든 걸 내려다보는 오만한 여신.
파괴의 권능은 무서운 힘이지만,
정작 그걸 다루는 제르미나라는 여신에게는 파고들 틈이 꽤 있었다.
그래.
제르미나에게 이 재회는 몹시 굴욕이다.
원래 그녀와 우리는 전혀 대등한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직접 행차하려고 많은 수고를 들였다.
영광으로 알아라."
"지금부터 화가 치밀어오를 때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잘 생각해둬요. 제르미나."
지면이 하얗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처럼 일렁이지만 뜨겁지는 않았다.
시아와 제르미나는 찬란한 광휘 속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곧 지면에서 무수한 사슬이 뻗어 나와서 제르미나의 몸을 휘감았다.
"내 곁을 떠나서 공부를 게을리했구나.
이러한 것은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범용한 수단이다."
제르미나는 몸에 얽힌 사슬을 파괴의 권능으로 깨버렸다.
<제천의 마신>을 절망하게 했던 사슬을 저렇게 간단히 깨다니…!
"금제 때문에 파괴의 권능을 쓰지 못할 줄 알았는데요."
제르미나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이게 권능이라고?
이건 이 몸이 원래 가지고 있는 힘. 권능과 아무 상관도 없다."
"확인해줘서 고마워요."
사슬이 다시 지면에서 치솟는다.
제르미나는 눈길 한 번 주는 것만으로 빛의 사슬을 모조리 깨버렸다.
"하찮은 존재가 아무리 잔꾀를 발휘해도 진정한 신에게는 미치지 못한다.
너는 신들의 싸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시아는 입 다문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과 신의 우열은 신격으로 나뉘는 법.
마치 인간을 상대하듯이 팔, 다리를 묶어 자유를 제한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라는 천박
한 발상이 네 한계다."
빛의 사슬이 다시 하늘에 떠 있는 제르미나를 향해 쇄도한다.
"소용없다."
놀랍게도 이번 사슬은 제르미나의 사지를 단단히 묶어버렸다.
"…!"
제르미나는 동요한 듯 눈썹을 찡그렸다.
"소용없는 거 아니었나요?"
"또 잔꾀로구나. 이 산 전체는 네년의 말뚝이었던 거야."
시아는 싱긋 미소 지었다.
"그것 봐요.
화가 치밀어오를 때 어떤 얼굴을 할지 생각해 두라고 했죠?"
제르미나의 분노를 대변하듯 사슬이 터져버렸다.
파편으로 흩어진 빛의 조각들이 빗발친다.
그러나 다음 사슬은 금이 가는 정도로 버텼다.
그 말은 사슬이 깨질 때마다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화나지만 날면서 도망 다니지는 못하겠죠?
<파괴의 여신> 자존심이 그건 허락하지 않던가요?"
"기분 좋으냐?
내 몸에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하는 하찮은 권능으로 뭘 할 수 있지?"
시아는 눈을 감고 집중했다.
땅에서 끝없이 뻗어 나오는 사슬이 제르미나의 몸을 겹겹이 둘러쌌다.
제르미나는 마침내 몸을 크게 움직여 사슬을 모조리 떨쳐냈다.
하지만 빛은 깨지지도 부서지지도 않는다.
사슬은 제르미나의 사지를 묶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천박한 발상이 아니에요.
신이 아무리 잘났어도 인간의 몸을 빌려 현계 한 이상 세상의 법칙에 거스르지 못하니까.
이것이 제가 드리는 답입니다."
"그래 봐야 잠시뿐인 유예.
제아무리 공들인 의식 마법일지라도 신을 묶지는 못한다!"
모든 게 시아한테 달려 있다.
제르미나를 봉쇄하지 못하면 강림 계획은 실행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는다.
내 시종이 하는 일을 지켜볼 뿐.
"헤르카! 지금 하면 돼요!"
제르미나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높이 날아오른 헤르카가 제르미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천재 소녀, 헤르카 필리오테!
신을 가두는 역할을 맡았다!"
헤르카는 당차게 선언했다.
"나를 가둔다고? 마법 따위로?"
"마법은 안 되겠지.
하지만 여신님의 권능이라면 가능해. 당신을 가둘 감옥 만드는 것쯤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넓게 펼쳐져 있던 하늘의 결투장이 회수되기 시작했다.
빛으로 이루어진 얇은 판이 춤추듯 날아오른다.
"말하자면 이것은.
천재 대마법사★ 헤르카 필리오테와 빛의 여신님이 합작한 최강의 속박 마법!
<신을 가두는 빛의 감옥>임을 알라!"
헤르카는 시아가 만든 빛의 조각을 질서정연하게 조립하여
하나의 거대한 질량을 가진 망치로 만들었다.
그 위용에 다들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망치…!"
"머리 하얀 여신님. 딱 대!
말뚝질 간닷!"
헤르카는 그대로 제르미나에게 망치를 내던졌다.
알면서도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부피가 저렇게 큰데도 빨려 들어가듯이 제르미나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꿍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제르미나가 떨어져서 바닥에 무릎 꿇었다.
"헤르카 필리오테, 여신을…… 무릎 꿇렸다!"
"크으윽……!"
제르미나를 바닥에 엎드리게 하고 끝이 아니었다.
빛은 조각이 되어 흩어지더니 제르미나를 중심으로 정육면체의 감옥을 만들었다.
그때 시아의 진정한 의도가 드러났다.
사슬이 제르미나를 가둔 감옥을 휘감아서 바닥에 단단히 고정했다.
"권능을 쓸 수 없다면 아무리 신격이 높아도
저와 헤르카가 만든 감옥에서 벗어나기는 어렵겠죠."
"다시 말하지만, 잠시간 유예가 주어질 뿐이다……!
여기서 나가면 네년을 갈가리 찢어주겠다!"
인간, 그것도 여자애한테 굴욕을 당한 제르미나의 말투는 상당히 격앙돼 있었다.
"헤르카와 제 할 일은 끝났어요."
시아가 나를 돌아봤다.
"아저씨. 시작해 주세요!"
나는 이어달리기의 다음 주자가 된 것처럼
온몸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앞으로 걸어가자 벨라가 내 위로 날아온다.
"데칼. 시작할게."
"평소처럼 주인님이라고 해."
"깐깐하기는. 그래. 주인님! 지금부터 당신의 충실한 노예가,
저보다 훨씬 서열이 높은 여신님의 의식 세계를 열려고 하는데 그래도 되겠어요?"
"하하하."
나는 껄껄 웃었다.
긴장감, 두려움, 그런 건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벨라의 엉뚱한 말이 나에게 어떤 사실을 떠오르게 했다.
격이 제일 낮은 하급 신이 고귀한 여신을 시종, 노예로 만들어 여신 중의 여신을 덮치려고
벼르는 이 상황.
웃지 않고 배기는가?
최면이 만들어내는 즐거운 변주가 나를 흥겹게 한다.
그것이 죽음의 두려움조차 넘어서게 했다.
"제르미나. 아까부터 대체 누구랑 얘기하고 있는 거야?"
나는 오만불손하게 웃으며 지껄였다.
"운명의 상대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애먼 내 시종한테 화풀이하지 말라고."
"무릎을 꿇고 예의를 갖춰라."
"죄수처럼 감옥에 갇힌 신세로 그런 말이 나와?"
"날벌레의 날갯짓 소리에 대답하는 자가 있느냐?"
"전처럼 제르미나 님이라고 해줄까."
제르미나는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마음속에 경의를 담아서 말해라.
네 놈은 나에게 건방지게 지껄일 최소한의 자격조차 갖추고 있지 않다.
하지만 날벌레라고 해도 내 이름을 부르며 우스꽝스러운 춤을 춘다면, 귀를 기울여주지 못
할 것도 없지."
"나한테 한 방 먹고 화나서 죽이려 들었던 주제에.
사실은 굉장히 날 신경 쓰고 있지? 짝사랑하는 여자애처럼."
"……."
제르미나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네가 그 예쁜 얼굴로 어떻게 허덕일지 몹시 기대돼.
격이 낮은 신한테 안기는 건 무슨 기분일지, 너도 궁금하겠지?"
"닥쳐라!"
"읏!?"
제르미나가 발산하는 노기가 벨라와 시아를 위축되게 만들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중력장을 일으키는 것처럼 몸을 짓누르는 위압감.
리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뻣뻣이 들고 제르미나를 보았다.
심리적 압박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그렇다.
나는 분체를 흡수해서 강림했다.
정신적으로 각성했다고 해도 좋다.
제르미나는 멈칫하더니 날 보며 말했다.
"너는…… 누구냐?"
"날벌레 날갯짓 소리에 흥미가 생겼나 보지?"
"물음에 답해라."
"너나 나나 자기밖에 모르는 제멋대로인 신이지.
그러나 지금껏 네가 잘난 파괴의 여신이라는 이유로 아무도 널 벌한 적이 없다면.
지금부터 내가 벌을 주겠다."
벨라의 차원 마법이 공간을 침식한다.
주변 경관을 지워가듯이 세상은 검은색 한 가지 빛깔만으로 칠해졌다.
사슬에 묶인 제르미나의 좌우로 지옥의 문처럼 새빨갛게 타오르는 공간의 틈새가 열렸다.
"열었어……!"
벨라는 정신 집중이 힘겨운 듯 급박하게 외쳤다.
"시간이 없어. 생각보다 반발이 거세. 4분…… 3분 미만…!"
그러자.
지금까지 모습도 기척도 드러내지 않았던 <허수아비 마왕>이 리사와 함께 내 옆을 가로질
러 걸어 나왔다.
"용사여. 일할 시간이다.
3분이 너무 짧아서 못 하겠다고는 하지 마라."
"아리엘. 누가 먼저 끝내는지 내기할까?
이긴 쪽은…… 오늘 밤 데칼의 침실에서."
"나는 이미 그와 약속했다."
"언제…! 비겁하게!"
"후후. 마왕에게 비겁하다니, 듣기 좋은 찬사일 뿐이다."
"먼저 간다!"
리사는 바로 제르미나의 의식세계에 뛰어들었다.
"인간? 얼마나 대단한 신을 데려오나 했더니.
마지막에 기대는 게 고작 인간이라니, 후후후, 아하하!"
제르미나는 지금 상황이 퍽 유쾌한 듯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서 나도 같이 웃어 주었다.
"죽으러 가는 꼴이 무척 유쾌하구나!
내 영계로 발을 디디고 살아나간 인간은 없으니.
자살이라도 하여 흥을 돋울 셈이냐? 큭큭큭……!"
"두 눈 뜨고 잘 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작품후기]
서연이의 활약은 다음 화에..!
거의 160화만에 등장한 제르미나의 운명은?
대이최 최종 결전 종반에 들어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