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 이세계 최면물-334화 (334/414)
  • 여신 공략!

    "응? 나?

    나는 아직 할 수 있는데. 팔다리도 멀쩡하잖아."

    ……틸리아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다.

    "나도 멀쩡해. 데칼.

    언니랑 같이 할 수 있어."

    "고집부리지 마.

    뱅가드 가문이 하루아침에 망하면 내 책임이라고."

    디아나는 여기까지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 발을 동동 구른다.

    어쩔 수 없네.

    "이기고 돌아가는 녀석들이 성질을 내면 어째?

    분명히 도움 됐어. 반드시 승전보를 알리러 갈게.

    체력 다 쓴 녀석들은 빠지는 게 맞아."

    "오빠! 꼭 이겨야 해."

    카렌이 나한테 안겼다.

    카렌의 몸이 뜨끈뜨끈하다.

    엄청나게 열심히 싸웠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카렌은 노란 리본이 떨어진 것도 모르고 싸웠는지 붉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날 보며 배

    시시 웃었다.

    내가 본 카렌 중 제일 예뻤다.

    "새 친구 데리고 갈게."

    곧 보지 요정 겸 젖탱이 요정 에페가 슬쩍 나타났다.

    "현우 님.

    그럼 바로……."

    "부탁해."

    용사 후보생 멤버들이 퇴장했다.

    "데칼! 죽으면…… 죽으면 용서 안 해!"

    디아나는 끝까지 팔짱 끼고 못마땅한 듯 있다가 소리쳤다.

    정말 당찬 귀족 아가씨다.

    우리가 준비한 전력도 줄었고, 상대가 준비한 전력은…… 뭐, 줄었기를 빈다.

    네리스는 말에서 내리고 본격적으로 싸울 준비를 했다.

    당연하지만,

    헤르카와 네리스는 용사 후보생이 아니다.

    당당히 용사에게 선별된 용사 파티의 일원으로 이 자리에 있다.

    실제로 험난한 원정을 겪어낸 두 사람의 기량은 이제 후보생 수준이 아니었다.

    "네리스. 더 강해졌네."

    "그런 일들을 겪었으니까요."

    생각해 보면 네리스와 많은 일을 겪었다.

    짧은 기간에 많은 강적을 만났고.

    원정할 때는 함께 꼭 붙어서 다니기도 했지.

    "……."

    하늘이 더 어두워졌다.

    그러자 시아는 손에서 빛무리를 만들어 하늘에 올려보냈다.

    그 빛무리는 태양처럼 어둠을 물리치고 용의 호수를 밝게 비추었다.

    밝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불안이 씻은 듯 없어지고, 안심하게 된다.

    모두의 시선이 균열로 향했다.

    세 균열은 하나로 뭉쳐 거대한 공간의 틈새가 되었고, 그 안에서 검은 팔이 나왔다.

    거인의 팔이다.

    새까맣고 형태를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는.

    "거신이네요."

    시아가 중얼거렸다.

    "거신?"

    "<프레미아의 실패작들>중 하나에요.

    그중에서는 가장 약하지만, 인간을 괴물로 개조하는 중에 반발 작용으로 실패한…… 불쌍

    한 실험체들이에요."

    "……."

    '불쌍한 실험체'라고 했지만.

    검은 거인을 가엾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균열에서 기어 나와 마침내 몸을 일으킨 거신은 키가 십 미터는 넘었다.

    그 크기만으로 이미 압도적이다.

    무서운 건 그게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둘, 셋, 지금도 계속 손을 뻗으며 나오고 있다.

    몇 마리, 아니 몇 명이나 있는 거지?

    나는 바짝 긴장하며 <별 떨구기>를 준비했다.

    파이어 볼을 쓸 때와 요령은 비슷하다.

    내가 직접 쏘냐 하늘에서 떨어지냐의 차이뿐.

    하지만 과연 치명타를 줄 수 있을까.

    특별한 스킬이나 기술은 없어 보이지만, 놈들은 거대하다는 것만으로 이미 상당히 무서운

    존재였다.

    리사가 검을 반쯤 뽑자 네리스가 나섰다.

    "용사님. 맡겨주시길."

    "혼자서 감당하기는 어려울 거야."

    "혼자가 아닙니다."

    그때였다.

    뒤에서 차례대로 반가운 얼굴들이 나타났다.

    마케르 형제와 블램, 앙겔, 토니우스까지.

    용사 파티가 집결했다.

    "데칼! 오랜만이야!"

    오이아가 밝은 얼굴로 다가와 인사한다.

    "오이아는 왜 따라왔어?"

    나는 보자마자 말했다.

    "뭐어? 메딕을 무시하는 거야. 지금?"

    …….

    내 옆에 있는 게 빛의 여신이라는 걸 알면 놀라서 자빠지겠지?

    "다치면 보살펴줄게. 데칼."

    귀여워서 웃고 말았다.

    내가 최면으로 건드리지도 않은 후방 지원팀의 여성 메딕 중 한 명.

    사자갈기 같은 복슬복슬한 머리카락에 주근깨가 인상적인, 밝은 여성.

    그녀 특유의 하이 톤을 듣고 있으니 다시 마왕 잡으러 뛰어가던 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차할 땐 부탁할게. 지금은 물러서 있어."

    "응!"

    저 거신들을 눈앞에 두고 겁을 안 먹다니.

    담력도 상당히 늘었는걸.

    하긴, 우리는 거대한 용도 봤지.

    거대한 그림자 따위, 용사와 함께 있는데 겁낼 놈은 우리 파티에 없다.

    리사가 이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데칼. 뭘 하고 있나?

    그대도 와야지. 내 파티의 일원인데."

    리사 뿐만 아니라 용사 파티의 모두가 날 보고 있었다.

    "주군의 몸은 제가 지켜내겠습니다. 뒤에 계시길."

    "데칼은 내가 지킬 거니까.

    네리스는 적을 쓰러뜨리는 데나 집중해!"

    헤르카가 어느덧 공중 위를 빙글빙글 돌며 말했다.

    "데칼.

    우리 모두 너와 다시 함께 싸울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달려왔다."

    블램이 말했다.

    "빨리하지."

    앙겔은 손이 근질근질한 듯, 손바닥을 주먹으로 팡팡 두드렸다.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르겠지만, 촉수로 발을 묶어 볼게."

    "좋아. 가자!"

    다들 내 신호에 맞춰서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포진을 전개한다.

    거신이 움직인다.

    마케르와 압베트 형제가 제일 먼저 뛰쳐나갔다.

    "하압!"

    마케르가 장대높이뛰기를 하는 것처럼 봉으로 지면을 짚고 박차올라 거인의 가슴에 강렬한

    찌르기를 밀어 넣었다.

    대기가 진동한다.

    잠시 잊었던 용사 파티의 실력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은 마왕성에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던 수천, 수만의 마물과 싸운 경험이 있는 자들.

    거신을 상대로 주눅 들기는 커녕 다들 여러 차례 싸워본 것처럼 능수능란하게 움직였다.

    "앙겔! 다리부터다!"

    "흡!"

    블램과 앙겔이 뛰쳐나간다.

    거신이 손을 휘둘러 바닥을 내려찍자 바윗돌이 놀란 것처럼 기립하며 주변으로 파편이 튀

    었다.

    마케르는 봉으로 파편을 쳐내고, 압베트는 <혈마법>으로 만든 피 방패로 블램과 앙겔을 보

    호했다.

    그걸 보고 시아가 빛의 마법을 사용했다.

    "능력 강화를 줄게요."

    먼저 나간 네 명의 몸에 밝은 빛이 깃들었다.

    블램과 앙겔은 신들린 듯 움직이며 거신들의 손을 피하고 다리를 베어 넘기거나 타격하여

    거신 하나를 재빠르게 쓰러뜨렸다.

    "헤르카!"

    나는 헤르카를 부르며 바로 마법을 준비했다.

    <별 떨구기>를 시전한다.

    영창 없이 오버 차징으로 거신이 일어나기 전에 즉시…!

    새까만 하늘을 가르고 떨어진 유성이 시아가 빛을 펼쳐 놓은 구역으로 내려오자 붉게 작열

    하며 거신의 몸체 위로 떨어졌다.

    그 작은 유성의 뒤를 잇듯이, 헤르카가 소환한 빛의 창이 마신의 몸에 떨어지며 지면을 진

    동시켰다.

    "꺄!

    데칼과 호흡 맞췄다! 이거야말로 제일 친한 친구라는 증거 아니야?!"

    "잘하는데?"

    거신 둘이 측면으로 다가온다.

    그때 돌풍과 함께 맹렬하게 날아든 화살비가 거신의 몸을 뒤덮었다.

    다들 경악했다.

    뒤를 돌아보니 이스티가 활을 겨냥한 채 거신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조용히 화가 난 이스티였다.

    "……달링한테 멋진 모습 보여줄 거야."

    마신을 상대로 망신당했다고 여기는 것일까? 우리 여자친구의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

    화가난 듯 보이는 건 한 명 더 있었다.

    노아는 라이플로 다른 한쪽의 거신에게 마탄을 쏟아붓다가, 거신이 손을 휘두르자 곡예처

    럼 팔에 올라타더니

    어깨까지 뛰어가며 거신의 몸에 마탄을 때려 박았다.

    거신들이 하나둘 쓰러지고 있다.

    다이아몬드급 모험가와 용사 파티의 협력이 엄청난 상승효과를 만들고 있다.

    쓰러진 거신들은 돌연히 나타난 검은 늪에 집어 삼켜졌다.

    시체가 거슬리지 않으니 좋지만, 저 늪은 뭐지?

    기세 좋게 거신들을 쓰러뜨리며 시작한 건 좋았지만, 거신들은 몸이 크기 때문에 움직임 하

    나하나가 위력적이라서 조마조마한 줄타기를 하는 것에는 변함없었다.

    용사 파티는 우직하게 마케르의 혈마법을 믿고 거신과 맞서 싸운다.

    시아의 능력 강화도 용사 파티를 신들린 듯 싸우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한계는 갑자기 찾아왔다.

    온몸이 물고기처럼 비늘이 돋아 번들거리는 인어 마신이 나타난 순간.

    리사를 제외한 용사 파티는 압박감으로 굳어버렸다.

    이 신격은…….

    예상을 넘어섰다.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비늘 외에는 사람처럼 팔다리가 늘씬한 남성체였기 때문에

    정확히는 어인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 듯했다.

    머리는 심해 생물처럼 찌그러졌고, 눈은 냉동된 물고기처럼 생기가 없어서 정말 가슴속 깊

    이 섬뜩했다.

    쓸데없이 주절거리지 않아도 놈이 정말로 강한 마신이라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벨라가 말했다.

    "누군지 알아. 여러 번 싸운 적 있는 5급 마신이야.

    이름은 모르고…… 우리는 창잡이 어인이라고 불러."

    "<창잡이 어인>?"

    어인이라니, 생각하는 건 다 비슷하구나.

    하지만 창 같은 건 들고 있지 않은데.

    "저도 들은 적 있어요.

    상급, 이라기엔 좀 모호하지만…… 확실히 격이 다른 마신 중 하나입니다.

    이 세계에 유인된 거물이에요."

    마신은 5급만 되도 거물 소리 듣는 거야?

    ……경쟁률이 다른가?

    조화계 여신은 세계를 구제한다는 비교적 사명감을 띄어야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지만,

    저 새끼들은 나처럼 꼴리는 대로 세상을 들쑤시고 다니는 존재잖아?

    그런 놈 중에 상위 랭크에 오를 정도면 어지간히 강하지 않으면 어렵겠지.

    "리사한테 맡기고 물러나자."

    블램이 성난 어깨를 과시하며 말했다.

    "데칼. 우리는 아직 건재하다!"

    블램만 그러는 게 아니라 다들 싸우고 싶은 듯하다.

    네리스와 헤르카도 집중하며 상대를 보고 있었다.

    어인 마신…….

    놈은 얼마나 강할까.

    "시아. 보호 마법 준비해 줘.

    상황 보고 바로 퇴각시킬게."

    "네."

    무모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용사 파티가 모두 모였을 때…….

    과연 벨라와 싸웠다는 마신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기는 했다.

    용감한 게 아니다.

    흥분해서 겁이 날아가 버렸다.

    무모한 겁쟁이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겠지.

    그러나 가슴은 뜨거워도 머리는 차갑다.

    해보자.

    든든한 지킴이가 있는 동안에.

    "준비해!

    어인 마신을 처리한다."

    어인 마신의 물고기 눈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면서 굴러가는 듯했다.

    우리의 투기가 닿은 듯 어인 마신이 뼈로 된 날개를 펼치고 급강하했다.

    "제가 막겠습니다!"

    마케르가 뛰어나가서 봉으로 맞선다.

    어인 마신은 놀랍게도 그냥, 주먹을 휘둘러 마케르를 날려버렸다.

    "커억…!"

    엄청나게 묵직한 일격이었다.

    성인 남자의 몸이 수십 미터를 날아가서 뒹굴 정도로.

    "형!"

    압베트가 마케르의 뒤를 따라 어인 마신에게 달려든다.

    "불의 종언!"

    "적의 그림자를 따라가라!"

    나와 헤르카는 즉시 공격 마법을 뿌렸다.

    헤르카는 지면에서 치솟는 빛의 가시를, 나는 어인 마신의 가슴팍을 정확히 불의 종언으로

    꿰뚫었다.

    그러나 마법은 효과를 보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마신이 삼지창을 꺼내 들었다.

    얇고, 길기만 한.

    손쉽게 부러뜨릴 수 있는 것 같은 창이 허공에서 쑥 나와 어인 마신의 손에 잡혔다.

    위험하다…!

    "압베트! 뒤로 물러나!"

    "크으윽!"

    압베트는 어인 마신을 넘어뜨리기라도 할 생각이었는지 몸으로 힘차게 밀어댔지만,

    놈은 거대한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신이 창을 휘두르고, 그 여파에 모든 것이 쓸려나갔다.

    [빛의 가호가 당신의 몸을 지킵니다]

    뭐?

    설마 지금 걸로 베인 거야?

    시아 없었으면 죽었다고!?

    몸이 붕 떠서 날아가면서도 태세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신들을 제외하고 모두 함께 뒤로 날아갔다.

    그 뒤는 바로 낭떠러지였다.

    "시, 시아!"

    나는 기겁해서 소리쳤다.

    그런데 우리는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고, 마치 하늘을 밟고 있는 것처럼 착지했다.

    뭐, 뭐야.

    아무것도 없는데 발이 닿아.

    "떨어지지 않아요. 아저씨."

    시아가 말했다.

    지평선 끝까지 빛나는 타일이 빈틈 없이 깔려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이곳은 시아가 마련한 공중의 전장.

    어디까지고 펼쳐진 하늘의 결투장이었다.

    다들 그 먼 거리를 튕겨 날아왔는데도 상처 하나 없다.

    시아가 보살펴준 덕이다.

    그 말은, 아직 신들에게 이건 위기조차 아니고 몸풀기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아, 나도 신이었지?

    "힘을 아낄 상대가 아닌 듯하군."

    리사가 말했다.

    "전원. 일어날 수 있겠나?"

    "예…!!"

    블램과 앙겔이 힘차게 대답했다.

    "내가 놈이 무기를 휘두르지 못하게 막겠다.

    그 틈에 쳐라."

    리사는 짤막하게 작전을 전달하고, 성검 블레스를 빼 들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