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칼. 너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중요한 이야기다."307회
용사의 절망
"뭔데?"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네게 고맙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네가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야."
"정액받이로 만들어서 원망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
"알았어. 장난 안 칠게."
사람이 뒤통수로도 욕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리사는 깊이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여신님의 대리인이었다.
몇십 년이 흘렀는지, 몇백 년이 흘렀는지 나도 잘 몰라.
환생할 때마다 기억은 희미해지거든."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이 아니었구나.
망각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쩌면 시아의 배려일지도 모른다.
리사는 매번 삶을 부여받을 때마다 사람들을 이끌고 싸웠다.
그 책임과 봉사, 헌신에서 한 번도 도망친 적이 없다.
시아의 말처럼 리사는 무척 강인한 영혼의 소유자다.
하지만 어둠에 삼켜질 것 같은 위태로운 길이라서 그런지.
성검을 얻었어도 리사는 어딘가 가련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나는 여신님의 뜻을 따르는 용사다.
내가 삶을 부여받기 전에 여신님이 말씀하셨지.
선과 악을 동시에 뿌려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고, 사람들이 오랫동안 평화롭게 지낼 수 있게 하겠다고.
그 파수꾼 역할을 내게 맡긴다고 하셨다."
시아에게 들었던 그대로다.
한마디로 리사는 용사라는 무거운 책임만을 짊어진 채, 기약 없이 싸우는 계약에 동의한 셈이다.
이건 마왕도 마찬가지일까?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시아는 말했다. 마왕은 필연적인 존재라고.
자신은 그 필연적인 자리에 선별한 영혼을 채워 넣었을 뿐이라고.
그러니 마왕은 인간이다. 최면에 걸린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여정의 끝을 리사와 함께 보내기로 한 거다.
네리스, 헤르카, 서연이를 떼어 놓고.
우리 둘만 이 결전의 성에 왔다.
"길고 쓸쓸한 시간이었겠네."
"길기는 했지만, 쓸쓸하지는 않았다.
마왕과 나는 서로 운명처럼 묶여 있는 관계지.
그쪽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마왕이란 목적이 있었기에 자신을 끊임없이 연마할 수 있었다."
…….
리사에게 마왕은 뭘까.
언젠가 싸울 적. 싸워 이겨야만 하는 적.
하지만, 내 생각에…….
기약 없이 균형의 수호자로 싸운 건 마왕도 같지 않나?
긴 시간 끝에 나는 이 세계에 찾아왔다. 시아는 준비했던 계획을 움직였고, 리사는 마침내 마왕과 결별할 시간을 맞이했다.
리사가 어떤 마음인지는 모르지만…….
"마왕이 밉지는 않았지?"
"솔직히 말하면.
동료를 잃었을 때는 모두 마왕 탓이라며 책망하고 베개를 눈물로 적셨던 적도 있다.
하지만 증오가 풍화되고, 내가 죽인 마물의 시체가 산처럼 쌓이게 됐을 때는 점점 무감각해졌지."
"……."
"데칼."
리사는 여전히 날 보지 않고 말했다.
"마왕과 결판은 내 삶의 목적이다."
"방해하지 말라는 말이 하고 싶었던 거야?"
일 대 일로 붙고 싶다! 뭐 그런 건가?
"지금부터 내가 할 이야기는 어쩌면 네게, 그리고 시아님께 큰 결례를 범하는 일일 수도 있다."
"……."
그때 나는 리사가 무슨 얘기를 꺼낼지 직감했다.
이 세계의 진실, 나의 진정한 속마음…….
머릿속에서 끼워 맞췄구나.
"그래도 들어 줘.
아마도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얘기다."
"그래. 해봐."
끝없이 이어진 복도를 걸으며, 리사의 말이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리사는 각오한 듯 숨을 크게 들이쉬고, 말했다.
"나는 여신님의 뜻이 옳다고 믿었다.
내가 원래 살던 세계는 사람과 사람이 싸우던 세계였어.
차라리 마왕이라고 하는 알기 쉬운 적이 있는 편이 평화로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용사인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만……."
"……."
그렇지.
용사는 악을 부정하는 존재.
마왕을 긍정해서는 안 되니까. 리사가 오래 품은 마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얘기겠지.
"가장 높은 곳에서 세상을 굽어살피는.
여신님의 뜻이니까. 그대로 믿고 안심해버린 거야.
이대로 있으면 세상은 가장 평화로운 상태로 유지될 거라고.
많은 사람이 행복해질 거라고. 나는 그걸 위해 꼭 필요한 존재라고……."
"……."
"그런데 최근에 시아 님의 목적이 내 생각과 아주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답이다.
시아는 선한 의지만으로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니다.
내 취향에 맞는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서 갖다 바칠 정도로 맹목적인 부분도 있다.
그걸 위해 용사나 마왕이 될 영혼의 운명을 희롱하기도 했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분명히 악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선한 신, 악한 신 따위 없지만.
리사는 믿고 싶었겠지.
"오해 하지 마라.
시아 님이 날 속였다는 게 아니다. 단지, 그분의 진정한 의도를……. 나는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야."
"오해하지 않았어.
시아도 그랬으니까. 네가 균형의 수호자가 되는 일에 동의했다고.
단지, 시아가 왜 이런 일을 하는지 의문을 품었다는 거 아니야?"
"불경한가?"
"딱히. 다리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한때 신이었다는 거지?"
"그래. 별로 떠받들어 줬으면 하는 건 아니야.
나는 신일 때도 그런 거에는 관심 없었거든."
무수한 미녀들 품에 파묻히는 거라면 모를까.
……한 번 해봤으니 만족한다.
"그런 건 원해서 받는 게 아니다.
데칼, 너도 마왕을 쓰러뜨리고 돌아가면 영웅이 될 거야."
글쎄.
너와 내가 그리는 엔딩은 좀 다른 것 같은데 말이지.
"어쩄든…….
지금부터 할 얘기는 좀 더 불경하다.
나는 말이지. 다리 위에서 시아 님께 괘씸한 생각을 했다."
"……?"
"왜 진작 도와주지 않으셨는지."
리사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나는…… 허무함마저 느꼈다.
데칼. 빛의 여신님을 시종으로 취급하고, 너는 원하는 걸 간단히 얻어냈어.
그게 나한테 큰 박탈감을 주었다. 성검을 받아도…… 기쁘지 않았어."
내가…… 원인이군.
"대답해 줘. 데칼.
너는…… 혹시나 너는……. 놀고 있는 기분으로 내 옆에 있는 건 아니지?"
리사가 뒤돌아봤다.
우리는 처음으로 멈춰 섰다.
리사의 눈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발기한다…….
"이번 여정에서, 너는 언제든지 시아 님을 부를 수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그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거야."
정확하다.
실제로 나는 마신들이 처음 기습했을 때 여신을 부르려고 했었다.
리사가 신속하게 정리하지 않았다면.
나한테는 언제든 '여신님 도와줘요'하면 도움받을 수 있는 특권이 있었고.
그것은.
이 작전에 목숨을 건 유격대원들에게 모욕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리사는 다리 위에서 물었겠지.
단둘이 마왕성에 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냐고.
적당히 스릴을 즐기면서 줄타기하고 있다는 걸, 리사는 내다본 것이다.
여기서 사실대로 말하면 리사는 나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지.
"나는…… 검을 뽑을 때마다 죽을 각오를 한다.
아무리 강해져도 두려움은 없어지지 않아.
우리들이 해온 싸움은 거짓되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마왕과 싸우기 전에 이걸 확인하고 싶었어."
"……내가 놀고 있다면.
왜 그러겠어?"
"내 몸이…… 목적이니까."
예리하군.
하지만 정답 처리를 해줄 수는 없겠어.
나는 최면술사. 사람의 마음을 조종한다.
내가 보고 싶었던 건 바로 이런…….
리사의 톡톡 튀는 반응들.
고민하는 표정, 기뻐하는 표정, 진지한 표정…….
모두 내 마음속 컬렉션에 저장하고 싶었던 거다.
"데칼 너는,
언제나 한걸음 뒤에서 우리를 관찰하는 듯했다…….
나는 노련한 경험에서 나온 여유라고 생각했지만, 시아 님이 나타났을 때,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놀랍군.
아주 정확한 추론이다.
나는 심지어 서연 일로 의견이 맞지 않을 때 최면을 썼다.
모두 내 마음대로 행한 일이다.
안전한 곳에서 최면으로 섹스하는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지.
특히 지금은 아침부터 쭉 참아서 불알이 뻐근할 지경이다.
리사는 아주 영리하고 선하다.
조교 하지 않았더라면 진작 참수당했을지도 모르겠는걸.
"……리사."
"……."
"솔직하게 말해줘. 데칼.
너는 대체 무엇을 위해서 우리 곁에 있는 거지?
그대는……."
리사는 호흡을 가다듬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
"당신은…… 어떤 신입니까…?"
"……."
훌륭하다.
손뼉을 치며 웃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른다.
밤 연극의 하이라이트는 지금부터일지도 모르겠다.
서로 잔뜩 질싸섹스 하면서 친밀해진 덕분에…….
리사의 약한 부분이 아주 잘 보였다.
나는 뻔뻔한 얼굴로 화난 체 했다.
"내가…… 장난치는 것처럼 보였어?"
"……."
"블램을 구할 때도 장난으로 보였어?"
이 정도면 남우주연상도 노려봄 직한데?
"아니야. 그때는, 오히려 내가 죽은 후에는 너한테 모든 걸 맡겨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의혹은 시아가 날 도와준 순간부터 시작됐어. 맞지?"
"그래."
"내가 신이었다는 건 중요한 게 아니야.
그건 나와 시아의 접점이다. 시아는 지금도 마신과 싸우고 있어.
시아가 날 도와준 이유는 마신이 이 여정을 망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야."
"……."
거짓말은 없다.
하지만 교묘하게 남을 속이는 말이라는 점에서, 훨씬 더 악랄하다.
리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내 잘못이야. 시아에게 속사정이 있다는 말해주지 않아서."
"……아니, 넘겨짚은 내 잘못이다."
"내가 그렇게 여유로워 보였어?"
"마치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보고 있을 때가 많다고 느꼈다."
리사는 꾸미지 않고 솔직히 자기 심정을 털어놓으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나는 너랑 같은 사람이야.
무서울 땐 무섭고, 싸우는 것도 싫어.
그래서 언제나 용감하게 싸우는 네가 멋있어 보였어."
리사의 표정이 죄책감으로 물들었다.
"포악한 오물 같은 건 아직도 떠올릴 때마다 소름이 끼쳐."
"그건…… 나도 그래.
익숙해지지 않는 놈들이다."
리사는 고개를 들고, 살짝 미소 지었다.
안심한 것 같다.
"나 두고 가지 마.
네가 안 지켜주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니까."
"별난 녀석……."
"진짜로. 악몽갈퀴한테 둘러싸이면 비명 지르면서 살려달라고 할 자신 있어."
"……의심해서 미안하다. 데칼.
마왕을 처리하겠노라고 우리와 함께한 그 마음을…….
다시는 의심하지 않겠어."
"알았으면 됐어."
나는 리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으읏…."
대장의 권위에 도전한다고 발끈해도 안 이상한데.
지금이라면 뭘 해도 용서해줄 것 같다.
"돌아가면 또 섹스하자. 알았지?"
"그런 약속은 할 수 없다."
"상대가 마왕인데? 나 죽을지도 모르는데?"
"관계없다.
그리고 말했을 텐데. 그대의 목숨은 내가 맡겠노라고."
리사는 은은한 빛무리를 휘감은 블레스를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이제야…….
이 선물을 온전히 쓸 수 있겠어.
마음에 있던 구름이 걷혔다. 빛의 여신님께서 하사한 이 축복으로, 모든 싸움을 끝내겠다."
"그게 바로 용사지. 도와줄게."
"어떤 사투라도 해내겠어.
가자…!"
기운을 되찾은 리사는, 갑자기 복도를 뛰어가기 시작했다.
"같이 가!"
나는 바람의 정령까지 사용하며 따라갔다.
우리는 아무도 없는 어두컴컴한 성 내부를 돌고 돌아, 연회장처럼 보이는 큰 홀에 도착했다.
연회장이라고 해도 예전에 그렇게 쓰였을 뿐이지, 지금은 그저 휑하고 어두운 빈방일 뿐이다.
하지만 그 어두운 빈방에는 한 사람의 인영이 있었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여자.
소리도 빛도 없는 연회장에서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이 자가, 마왕?
"아. 왔나."
예쁜 목소리다.
나는 두근두근 기대하는 마음으로 마왕이 돌아보기를 기다렸다.
제길. 후드 밑이 잘 안 보인다.
머리카락이 길다는 건 알겠다. 그리고 에페처럼 뿔이 있다.
핸들 있는 마왕이라니, 좋잖아!
흥분을 억누른다.
"데칼. 물러서."
리사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블레스를 들고 섰다.
"마왕!
크라멜 가문의 벨리사 크라멜이 너를 베러 왔다.
얌전히 목을 내놓아라!"
블레스가 빛을 내뿜는다.
선언과 함께 내뿜어진 용사의 투기가 대기를 떨리게 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연회장이 진동한다.
"……그런다고 목을 내줄 것 같은가."
마왕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네가 마왕인 게 틀림없다면 무기를 들고 서라!"
"성질이 급한 용사님이군."
마왕은 움직이지 않는다.
여신의 축복까지 받고 성검을 든 리사를 앞에 두고 저렇게 태연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