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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세계 최면물-306화 (306/414)
  • 리사가 다리에서 뛰어내렸다.306회

    용사의 절망

    거룡은 하늘을 날고 있는데, 어째서 절벽 밑으로 떨어진 거지?

    애초에 이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무사할 수 없을 텐데!

    "……저, 저걸 봐!!"

    마케르가 거룡의 꼬리를 가리켰다.

    나는 경악했다.

    리사는 절벽 위에 놓인 다리에서 떨어져,

    거룡의 꼬리부터 시작해서 몸통까지 치고 올라오는 중이었다.

    암벽 등반하듯이 매달린 것도 아니고, 수직으로 뛰어서 올라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먼저 거룡의 몸을 토막 내는 참격이 보이고 그 후에 리사의 모습을 잠깐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굉장합니다……!"

    드물게 네리스가 흥분하여 소리쳤다.

    나도 주먹을 꽉 쥐고 보았다.

    거대한 용을 베어 넘기는 빛의 참격!

    거룡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다리 위로 브레스를 쐈다.

    "온다!!"

    뭘 하라고 전달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나는 바람의 보호막을 펼치고 내 마력을 주입한 보호막도 팽창시켜서 이중 보호막을 만들었다.

    헤르카도 즉시 보호 결계를 펼쳐 뼈대를 만든다.

    이어서 마케르 형제의 혈마법으로 만든 거대한 피 방패가 브레스를 받아낼 준비를 마쳤다.

    용이 뿜어낸 화염 폭풍이 모든 걸 집어삼켰다.

    다리 전체를 불태우는 엄청난 화염이었다.

    내 불 마법은 우습게 보일 정도로.

    역시 용은 용.

    불의 여신이 생각나는, 엄청난 브레스였다.

    하지만 유격대 전체의 힘을 모아, 우리가 서 있는 곳만은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었다.

    "……."

    시아는 그 광경을 끝까지 지켜보고 말했다.

    "아저씨. 불청객을 데리고 가볼게요."

    "시아. 고마워!"

    시아가 차원 마법으로 되돌아간다.

    직후 거룡이 절명하면서 울부짖는 소리가 대지를 떨리게 했다.

    나는 귀를 막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거룡의 가슴팍에서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피가 비처럼 쏟아진다.

    리사는 용의 피를 뒤집어쓰고도 여전히 늠름하고 아름다웠다.

    "와!!"

    헤르카가 소리를 지르며 환호한다.

    "용사가 용을 쓰러뜨렸다! 나, 헤르카 필리오테가 그 증인이다!"

    신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장면에 다들 흥분한 것 같았다.

    거룡이 절벽으로 떨어진다.

    리사는 다리 위에 사뿐히 착지했다.

    "후우……!"

    리사가 용을 쓰러뜨리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숨을 가다듬고 성검을 집어넣는 것이었다.

    잘난 척 좀 해도 될 텐데!

    "리사!!"

    나는 달려가서 리사를 안았다.

    "앗…!? 데칼. 무슨……."

    유격대 전원이 뛰어와서 함께 기쁨을 나누었다.

    오이아는 아예 울기 직전이었다.

    "다 봤어요! 용사님!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셨어요! 으아앙. 너무 대단했어요!"

    "이제 산 하나를 넘었을 뿐이다."

    "대단한 업적입니다."

    네리스까지 추켜세우자, 리사는 어쩔 줄 몰랐다.

    "다들 너무 흥분했어.

    진정해라."

    "용사라 불리기에 적합한 용맹한 모습이었다!"

    앙겔까지 거들며, 우리는 쉴 새 없이 리사의 위업을 칭찬했다.

    이제 슬슬 다리를 건너도 되겠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불이 안 꺼집니다."

    브루노가 현 상황의 가장 큰 문제를 깨달았다.

    "……."

    "……."

    좀 전과는 반대로 조용해졌다.

    "기다리면 꺼지지 않을까?"

    희망 섞인 추측을 해 본다.

    "용의 불꽃입니다. 쉽게 꺼지지 않을 겁니다."

    "……."

    내 얄팍한 희망은 네리스의 지적에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아직 마왕성이 있는 땅까지는 저렇게 많이 남았는데.

    성검을 든 최강의 용사가 다리에 불이 붙어서 마왕성까지 갈 수 없다니, 이 희극 같은 비극은 대체 뭘까.

    "난처하군……."

    리사의 한마디가 상황을 대변했다.

    수수께끼의 강적도 쓰러뜨리고, 마신의 난입도 버티고, 거대한 용까지 쓰러뜨렸는데.

    이런 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게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쓰러지기 전에 엿 먹으라고 한 일이라면 대성공했다고 찾아가서 칭찬해주고 싶다.

    이제 어쩌지?

    내 시선은, 자연스레 헤르카와 서연을 향했다.

    "헤르카. 검까 수리할 수 있겠어?"

    "무슨 말 하려는지 알겠는데. 여기서는 못 해.

    우리 검까는 예민한 아이야."

    "……."

    저 철판이 어디가 예민하다는 거야?

    "거기에, 한계까지 경량화하는 바람에 나 말고 누군가를 태울 순 없어."

    나는 서연을 바라봤다.

    "서연아. 나 사랑하지?"

    "응! 현우 오빠. 사랑해."

    "나도 사랑해."

    "아, 아아……."

    서연이는 절정을 견디는 것처럼 흥분을 억누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오빠……!

    드디어 내 마음을 알아줬구나. 같이 도망가자. 내가 평생 오빠를 길러줄게!"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보기로 하고.

    사랑하는 날 위해, 대원들을 저쪽으로 옮겨줄 수 있겠니?"

    나는 까마득한 다리 끝을 가리키며 말했다.

    "날아서."

    "……."

    서연이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날 쫓아다닐 땐 무모한 짓도 서슴지 않더니.

    순해지는 바람에 변별력이 좋아졌군.

    정말로 서연이가 날아서 우리를 다 옮겨주길 바라고 꺼낸 말은 아니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보였다.

    이럴 때 차원 마법을 쓸 수 있으면 편할 텐데.

    시아를 다시 부를까?

    아니…….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한때 이스티가 노아에 의해 시험대에 올랐던 것처럼.

    리사의 조교도 완성 단계로 가려면 벽을 넘어야 한다.

    "리사. 이대로 불이 꺼질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어."

    "알고 있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용이 뿜는 불꽃은 철도 물처럼 녹인다. 몇 걸음 떼지도 못하고 몸이 녹아내릴 거다."

    "나한테 생각이 있어. 모두 들어 줘."

    나는 대원들을 집합시켰다.

    "대책이 있나?"

    "대책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지만……."

    응? 분위기가 좀 이상한데.

    다들 날 묘한 눈빛으로 보고 있다.

    "왜들 그래?"

    블램이 대표로 나섰다.

    "데칼, 너는……. 아니, 당신은 어떤 존재입니까?"

    "……."

    밝혀야 할 때가 왔다.

    아니라고 해도 안 믿겠지.

    하피 마신이 나를 신으로 칭하기도 했고. 빛의 여신과 대등하게 이야기하는 나를 평범한 인간으로 생각해줄 리 없다.

    알려져서 안 될 건 없다.

    어차피 이 여정은 곧 끝이 나니까.

    나는 조개 성으로 갈 테고, 여기 있는 대원들과는 헤어지겠지.

    "한때는 나도 신이었어.

    시아처럼 대단한 신은 아니었지.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어."

    "세계가 마신의 위협에 노출된 겁니까?

    당신은 그걸 위해 싸우고 있고……."

    나는 실소했다.

    내가 그런 이유로 싸울 수 있는 멋있는 사람이었다면…….

    그날 숲에서 고개를 떨군 채 누군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시아를 만날 수 있었을까?

    이 추잡한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예……?"

    나는 대책 없는 놈이라.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놓은 게 없다.

    그래서 내가 잘하는 것을 하기로 했다.

    "내가 시아와 했던 얘기는 잊어.

    너희들 눈앞에 있는 건 한때 신이었지만 인간이 된,

    모험가 겸 용사 후보, 유격대원이며…… 너희와 목적을 함께하고 있는 동료다."

    "……."

    블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러면…… 더는 묻지 않겠다.

    저 불의 장벽을 넘어갈 대책은 뭐지?"

    "앞서 말했지만, 대책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냐.

    마왕성에는 나와 리사만 간다."

    블램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그건 무슨 뜻이지? 우리가 짐이 된다는 의미인가?

    지나갈 방법이 있다면……!"

    "나는 서연이한테 옮겨달라고 부탁할 거야."

    블램은 겨우 무슨 뜻인지 깨달은 듯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아무리 서연이라도 사람 한 명 끌어안고 저 먼 거리를 왕복으로 오가는 건 부담이 커.

    시간도 걸리겠지. 지나갈 수 있는 인원을 한 명 골라야 한다면 그건 리사야."

    "……."

    "서연아. 어때.

    한 명 정도는 들고 옮길 수 있지?"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 정도라면.

    거기에, 나는 날개가 있으니 오빠와 함께 갈 수 있어. 현우 오빠 곁에 있을래."

    "그건 안 돼.

    우리가 떠난 뒤에도 유격대는 당분간 이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을 거야.

    절벽에서 또 와이번 라이더들이 나타난다면, 서연이 네가 지켜줬으면 해."

    토니우스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데칼.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그런데…… '한 명 정도'라고 했잖아? 데칼은 둘이서 간다고 했고."

    "나는 뛰어서 건널 거야."

    "그, 그게 가능해?"

    "가능해."

    짤막하게 답한다.

    이유를 캐묻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은 내가 산을 가를 수 있다고 말해도 다들 그러려니 할 거다.

    "리사. 결정해 줘."

    "이게 최선인가?"

    "비가 내리지 않는 이상은."

    "……내가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다."

    리사가 나를 쏘아봤다.

    "<네가 생각한 방법 중에 최선이냐>고 묻는 중이다."

    "……."

    몇 명이나 눈치챘을까?

    네리스와 헤르카는 진작 알았고, 알면서 모르는 척 중이다.

    내가 여신에게 부탁하면 간단히 모두 함께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리사도 정황상 그런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다른 방법은 없다. 리사와 단둘이 마왕성에 가야 한다>고 진언했다.

    리사는 그게 참인지 거짓인지 묻고 있다.

    예리하다.

    용사 아니랄까 봐.

    숨어 있는 내 악의를 기가 막히게 알아맞혔다.

    그러나, 동요하지 않는다.

    여자한테 의심받는 건 한두 번 겪은 일도 아니라서, 즐기는 경지에 올랐다.

    "그래."

    "믿겠다.

    대원들은 들어라. 불이 꺼지는 즉시 흔적을 지우고 나를 기다리거나,

    틈을 봐서 마왕성에 진입해라. 현장 지휘는 블램이 맡는다."

    "예!

    반드시 따라가겠습니다."

    "어차피 한 발 늦게 온다면 서두를 필요 없다.

    신중하게 움직여라."

    나는 리사가 대원들과 얘기하는 사이, 서연에게 다가갔다.

    "서연아. 리사를 반대편까지 옮겨 줘."

    "……흐응. 내가 용사를? 손이 미끄러져 버릴 것 같은데."

    서연이 무언가 바라는 것처럼 꼼지락거린다.

    나는 바로 서연을 껴안았다.

    "아……."

    "손이 미끄러우면 안 되지."

    서연의 귀가 빨개졌다.

    "이제 안 미끄러워……. 응."

    "반대편까지 안전하게 옮겨 줘. 부탁해."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되었다.

    "주군. 몸조심하시길.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무리하지 마."

    "데칼이야말로, 나랑 앞으로 더 친해져야 하니까. 죽으면 안 돼……."

    네리스와 헤르카가 날 걱정하는 모습을 보니,

    멜브릿에서 보낸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느꼈다.

    "갔다 올게."

    서연이 리사를 안고 날아올랐다.

    "데칼.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

    "그래."

    멀어지는 둘을 눈으로 배웅하면서 불 속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데,

    리사가 투구를 끼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깜빡했나?

    리사답지 않다.

    거룡 때는 급박해서 그랬다고 쳐도.

    이제부터 마왕과 붙으러 가는데 장비를 소홀히 할 리사가 아니다.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마왕을 쓰러뜨린다는 목적을 앞에 두고.

    리사는 무엇에 정신이 팔린 거지?

    뭐, 지금부터 알아보면 될 일이다.

    일부러 단둘이 있을 시간을 만들었으니까.

    나는 바람의 정령을 타고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예정대로 다리 끝에서 리사와 만나고, 서연이랑은 헤어진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야겠군."

    "그래. 어차피 몸을 숨길 곳도 없으니. 당당하게 걸어가자."

    "……."

    리사는 말없이 앞장서서 걸었다.

    다리에서 온갖 방해를 당했기 때문에 뭐가 나와도 놀라지 않을 자신 있었지만,

    우리는 마왕성에 다다를 때까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다.

    어느덧 해가 고성 뒤로 저물고 있었다.

    "어디, 숨어들 곳이 있나 찾아볼까?"

    "정면으로 간다."

    "그럴 줄 알았어."

    리사가 블레스를 뽑았다.

    두꺼운 성문이 쩍하고 갈라지더니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안은…… 어둡다. 복도에 일정 간격으로 촛불 빛이 켜져 있기는 하지만, 광활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넓은 성 내부를 비추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빛이었다.

    "이상한데."

    "그래.

    나는 한참 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마왕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자기 집 문턱에서 싸우고 있으면 신경 쓰여서라도 나와 보고 싶을 텐데."

    "……."

    오랫동안 방치된 폐가를 보는 듯하다.

    처음에는 호기롭게 소리라도 지르며 뛰쳐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었는데.

    삭막한 성 내부를 보니 그런 기분도 어딘가로 가버린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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