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 이세계 최면물-305화 (305/414)

하피는 하늘에서 나타난 빛의 쇠사슬에 묶여 내 앞으로 끌려왔다.305회

용사의 절망

몸이 떨리는 광경이었다.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던 타깃을 잡아서 끌고 오다니.

하늘을 가르는 빛의 사슬이 새 마신을 죄인처럼 무릎 꿇렸을 때, 나는 마음속 깊이 경탄했다.

나도 한때는 신이었고, 눈앞에 엎드린 새 마신도 신이지만…….

같은 신이라도 격이 다르다는 게 무엇인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시아는 얼마나 강한 거지?

마신이 이 세계에 침투한 탓에 '약간' 신격을 발휘한 게 이 정도라면.

이건 마법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최근 헤르카의 빛 마법을 많이 봐 왔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마법사가 다루는 빛 속성 마법이란, 이 '빛의 권능'에 조금이라도 다다르기 위한 인간의 발버둥임을.

"제르미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어요."

시아가 말했다.

"더는 일을 조용히 진행할 생각이 없어진 거예요.

과격한 방법을 택하기로 한 거죠."

"과격한 방법이 이거야?

마신들의 도움을 받는 것?"

"조금 달라요.

아저씨도 알다시피, 손을 잡는다고 해도 제르미나는 남에게 머리를 숙일 여신이 아니에요.

정말 남의 손을 빌려서 해결하려고 했다면, 좀 더 제대로 된 마신의 힘을 빌렸을 거예요."

그렇다.

지금까지 만난 마신들.

나 혼자서는 이길 수 없지만, 유격대가 힘을 합치면─정확히는 리사 혼자서도─ 정리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제르미나의 목적이 금제로 보호받는 나와 시아를 죽이는 거라면, 한참 부족하다.

"그러면, 이 마신들은 일방적으로 이용당했다는 뜻인가?"

"네. 제르미나는 다시 한번 신들의 전쟁을 내려는 것 같아요."

"세계가 찢겨 나갔다는. 그?"

"아저씨, 알고 있었어요?"

"팔색 조개 성이 그 세계 위에 지어진 거잖아.

어렴풋이 예상했었어."

"아저씨가 죽은 후에 여신들 사이에서 반발이 있었거든요.

제르미나는 그때, 사태를 진압하느라 꽤 고생했어요."

"푸하하. 진짜?"

그거참 잘됐다.

하긴, 명분도 없이 날 암살했으니

신들 세계에 반발이 나도 이상하지 않다.

난 무수한 여신들을 같은 편……이 아니라, 내 여자로 둔 적 있었으니까.

1급 신은 모르겠지만 그 밑으로는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은 다들 어디서 뭐 하나 몰라.

"요컨대 제르미나는 마신들이 이 세계에 관심을 두도록 부추기고 뒤에서 관망하고 있단 소리지?"

자기 혼자 안전한 곳에서.

하지만, 제르미나가 겁쟁이라서 그런 건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 건 금제 때문에 나를 손수 처리하러 올 수 없기 때문이겠지.

내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상당히 거슬리는 것 같다.

"네. 이 정도의 권능 행사라면 문제없지만,

제가 더 높은 신격을 발휘하면 상급 마신의 관심을 끌 거예요.

그게 제르미나가 바라는 바겠죠."

"이해했어."

조화계의 시스템을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마신이 속된 말로 깽판을 놓으면, 니뮤엘의 뜻을 따르는 신들이 수습하러 온다.

세계에는 '신의 대리인'이 넘쳐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세계는 황폐화하겠지.

그러나 1급 신들이 나설 이유는 없다.

원래부터 그렇게 지내왔기 때문이다.

전쟁 좀 해도 진정한 의미에서 신들은 달라지는 게 없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 인간들만 죽어 나갈 뿐.

제르미나는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들어 나와 시아를 위험하게 하려 하고 있다.

잘은 모르지만, 마신 쪽에도 위협적인 존재가 반드시 있을 거다.

시아가 언급했던 '프레미아의 괴물들'이라는 존재도 신경 쓰이고.

최면이 먹히지 않는 절대적 존재와는 가급적 맞닥뜨려선 안 된다.

"결국 마신들이 문제네.

마신 대책을 짜왔다고 했지? 설마 유격대에 들어오려고?"

엎드려 있던 대원들이 꿀꺽 군침을 삼켰다.

시아는 재밌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

"저는 아저씨의 시종이에요. 아저씨를 뒷바라지하는 게 제게 가장 보람 있는 일이지만……."

시아가 멀찍이 솟아 있는 마왕성을 보았다.

"이제 끝이 보여요.

용사와 마왕은 아저씨를 기다리고 있어요."

수수께끼 같은 말이지만,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았다.

"아저씨다운 끝맺음을 기대할게요."

"그래."

시아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눈처럼 새하얀 검이 나타났다.

……아름다운 검이다.

보석이 박힌 장식용 검에 대고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지만, 속뜻은 다르다.

이 검은 오직 투철하게 싸움에 필요한 요소만 갖췄다.

밋밋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엄청난 일품이라는 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은은한 빛무리를 머금고 있는 찬란한 검.

너무 예리한 나머지 공기까지 긴장시키고 있는 것 같다.

시아는 그 검을 한 손에 쥐고, 죄인처럼 엎드린 두 마신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어떻게 할까요?"

"큰 놈은 죽이고, 작은놈은 살려줘."

시아는 거구의 마신을 참수했다.

그저 날만 대고 살짝 눌렀을 뿐인데 목이 두부 자르듯 떨어졌다.

빛의 검에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았고, 단면은 하얗게 불타고 있었다.

……굉장한 검이다.

하피 마신은 눈을 부릅떴다.

"살아나지 않아! 어째서?"

그러고 보니 <불사의 권능>이 무효가 된 것처럼 보였다.

시아는 날 돌아보며 말했다.

"아저씨. 이 검은 제가 빛의 권능으로 오랫동안 벼린 성검이에요.

이번에 서둘러서 완성할 수 있었어요."

"성검……."

"웬만한 마신은 상대가 안 될 거예요."

검의 주인은 리사겠지.

신이 만든 검이다. '성검'이라 불릴 자격은 충분했다.

역시 용사는 성검이지.

"마신의 권능을 없앤 거야?"

"없앤다기보단 벨 수 있어요.

이 검은 섭리를 거부하는 검이니까요.

부디 용사에게 전해주세요. 아저씨를 지켜낼 수 있도록."

"그래. 알았어."

리사는 고개를 들었다.

"저 따위에게 어울리는 하사품이 아닙니다.

좀 더…… 걸맞은 자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내가 쓰겠다고 하면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할 사람은 있어 보이지만."

"나!"

헤르카는 손을 번쩍 들었다.

"성검은 당연히 용사가 써야지.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 아냐?"

"리사. 받아."

"……."

나는 무릎 꿇은 리사에게 다가가서 검을 건넸다.

리사의 눈빛이 흔들린다.

검이 주인을 알아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얼른 받아.

내가 너였으면 잘 때도 껴안고 잤겠다. 뭘 망설여?"

"나는……."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듯하다.

좀 전에 고전한 일 때문에?

아니, 그런 이유는 아닌 것 같다.

"벨리사. 받아주세요.

이 검은…… 벨리사가 쓰는 모습을 상상하며 만들었으니까요."

"은혜로운 말씀, 감사합니다.

부족한 몸이지만…… 크라멜 가의 벨리사 크라멜.

이 검을 받아, 여신님의 뜻을 펴는 데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시아는 가볍게 손뼉을 쳤다.

리사가 조심스럽게 빛의 검을 받아들었다.

호랑이에 날개 달았다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시아. 다친 대원들을 치료해줘."

"네. 아저씨."

[여신의 축복이 몸을 감쌉니다]

[피로가 완전히 해소됩니다]

[온몸에서 힘이 솟습니다]

[능력치+10]

[능력치+5]

[능력치+5]

발목이 부러졌던 마케르는 두 발로 서서 폴짝폴짝 뛰었다.

"아프지 않아. 나았어.

신의 기적이다…!"

중경상을 입었던 대원들이 회복하고,

덤으로 피로 해소까지.

숙면하고 일어난 것처럼, 몸에서 힘이 솟는다.

"잘했어."

나는 시아를 꼭 안고 입맞춤했다.

시아는 기꺼이 입을 열고 나와 혀를 섞었다.

"츕…. 쯉…."

아차.

나는 황급히 입을 뗐다.

이미 늦었다. 다들 뚫어지게 우리를 보고 있었다.

조개 성인 줄 알고 자연스럽게 키스했는데…….

"……?"

시아는 상황을 파악한 듯,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해명할 일이 생겼네요. 아저씨."

"그러게 말이야…."

자연스럽게 넘어갔지만,

내 정체에 대한 의혹이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단서가 너무 많이 뿌려졌다.

……이제 밝힐 때가 되었나 보다.

"나머지는 돌아가면 또 해줄게."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릴게요."

"아, 성검에 이름은 있어?"

"이름은 없어요."

그건 아까운데.

"전설로 남을 검인데 이름은 있어야지."

"하얀 까마귀!"

헤르카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그건 좀……."

까마귀를 얼마나 좋아하는 거야.

"'빛의 이름으로' 같은 건 어떻습니까?"

네리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

말없이 서연에게 눈을 돌린다.

"응? 나도?

어……. '죽음, 그리고 공포'?"

"잘 알았다.

너희들의 이름 짓기 실력."

하나 같이 정상이 없군.

이럴 때는 검을 쓰는 장본인의 의견을 듣는 게 제일이다.

"리사. 어때? 생각난 거 있어?"

"……블레스."

축복이라는 뜻이다.

딱 그대로네. 리사가 시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리사는 시아를 공경하며 두려워하고 있다.

시아는 리사를 아끼고 돌봐주며 뜻을 함께한다.

비록 그 저의에는, 나에게 리사를 바친다고 하는 진짜 목적이 따로 있다고 해도…….

그래도 시아의 마음 씀씀이는 기본적으로 좋은 편이다.

사람에게 돼먹지 못한 짓을 일삼는 신들─대표적으로 나─을 생각하면, 인간에게는 정말 은혜로운 신이지.

"성검 블레스. 좋아."

어느새 정신을 차린 블램이 중얼거렸다.

"……마왕을 쓰러뜨릴 용사의 검인가."

"잊을 수 없겠군."

앙겔도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인다.

허수아비한테 나가떨어졌던 2인방이다.

"괜찮아?"

블램은 몸을 풀며 자기가 얼마나 건강한지 과시했다.

"그래. 상대가 좀 나빴다.

다음 적은 깔끔하게 처리하도록 하지."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내 말에, 헤르카가 키득키득 웃었다.

다들 그 모습을 보고 따라서 웃는다.

서연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쩌다 내가 불신의 상징이 된 거지?

대답해줘. 앙겔…!"

"달라붙지 마라. 추함이 옮는다."

"크윽…!

다음 적은 어디냐. 이 불명예, 반드시 씻고 말리라!"

리사는 블레스를 빈 칼집에 납검하고 말했다.

"그 허수아비는…… 잊지 못할 상대였다.

과거 어느 때도 그런 적과 싸운 적은 없었어.

이 앞에는 그보다 더 강한 적이 기다리고 있겠지."

"……."

모두 입을 다물었다.

한바탕 유쾌하게 웃고 난 후라서 그런지 현실이 더욱더 무겁게 느껴진다.

아무리 날고 기는 용사 후보를 모아 만든 유격대라도,

적당히 치열한 싸움 끝에 목표한 바를 이루어내는 건 이상적인 상황이다.

허무하게 전멸하거나 생각했던 것보다 손쉽게 목적을 이룰 수도 있다.

다들 알고 있었을 거다.

하지만 사람은 편한 쪽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모르는 벽이 있다.

'리사가 너무 강해서 믿음직하다'는 사실보다…….

'실은 마왕이 훨씬 강할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미래가.

우리 눈앞에 놓여 있다.

리사는 제일 먼저 망설임을 떨쳐내고 말했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 없다.

나와 그대들은 빛의 여신님이 축복한 용사들이다."

"그래요!"

오이아가 소리쳐서 호응했다.

"빛의 여신님이 우리와 함께하고 있어요!"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리사가 아주 좋은 부분을 상기시켰다.

숭배하는 여신님이 직접 내려와서 말도 걸어주고 축복도 내려줬잖아.

오히려 겁에 질려서 떨어야 하는 건 마왕 쪽이다.

리사는 어떻게 하면 대원들의 사기를 북돋울 수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우리에게 패배는 없다!

약속된 승리를 주우러 가자."

시아는 그런 리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낭떠러지에서 또 엄청난 포효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귀를 막고 몸을 웅크렸다.

이번에는 얼마나 날아오려고 저러는 거지?

"서연아! 날 수 있겠어?"

서연은 대답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랐다.

"다시 와이번들이 오면……."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낭떠러지에서 올라온 건 와이번이 아니었다.

산만한 용이었다.

"꺄아아아!"

오이아의 비명에 귀가 먹먹하다.

거룡의 풍채는 정말 대단했다.

날갯짓만 하고 있을 뿐인데 태풍 속에 들어온 것 같다.

곳곳에서 용오름이 일어나 모든 것이 바람의 장벽에 휩싸이고 하늘마저 갇힌다.

"와아. 용이네요.

오랜만에 봤어요. 예전에는 이 땅에 많이 살았는데……."

우리 중 시아와 리사만이 평상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떻게 돼 먹은 심장이야?

"아저씨.

저는 불청객들 데리고 가볼게요."

"온 김에 저것도 처리해주면 안 돼?"

"음~. 안 돼요."

거절당했어!?

"나 두고 가지 마!"

"아저씨도 참. 두고 가는 거 아니에요.

벨리사를 봐요. 도움이 필요해 보이나요?"

"……."

나는 그 말을 듣고 리사를 보았다.

리사는 돌풍 속에 의연하게 서 있었다.

기품 있는 보랏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와중에도, 리사의 눈은 똑바로 거룡을 향하고 있다.

그녀는 한 번 검집에 넣었던 성검 블레스를 빼 들었다.

해가 가려져 잿빛으로 물든 바람의 세계에 유일하게 빛나는 찬란한 검.

모두의 시선이 그 빛을 향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처리하고 오겠다."

"리사?!"

나는 리사의 돌발행동에 놀라서 기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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