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 이세계 최면물-304화 (304/414)

"네리스! 서연이를 부탁해!"304회

용사의 절망

"예!"

마케르와 압베트는 쓰러진 블램과 앙겔을 들쳐 안고 창과 화살을 쳐내고 있었다.

젠장. 생각보다 버겁네.

평범한 창, 화살이 아닌 것 같은데?

악몽갈퀴가 입던 뼈 갑주처럼, 이것도 모조리 용 뼈라든가. 그런 건 아니겠지?

아무래도 맞는 것 같다.

평범한 화살이었으면 파이어 애로우가 태워버리고도 남았을 거다.

내 마법을 상쇄할 정도의 화살 공격이면 어디에 맞아도 치명상이다. 사람 몸이 그런 걸 버틸 리 없다.

하지만 성장한 나라면 이 정도쯤은 막아낼 수 있다.

문제는 다른 쪽에서 터졌다.

헤르카가 척 보기에도 위험하다. 검을 든 와이번 라이더들이 헤르카를 몰아넣고 사냥 중이었다.

헤르카는 포획 작전 때도 상당히 무리했기 때문에 남은 힘이 없다.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헤르카를 보고 있으면 목이 바짝 타들었다.

이쪽에서는 손을 쓸 수 없다.

그때. 든든한 아군이 하늘로 복귀했다.

"서연아!"

"오빠. 다 죽여도 되지?"

"죽여!"

검을 든 와이번 라이더들이 일제히 서연에게 달라붙는다.

서연은 작두를 휘둘러 와이번의 피로 폭죽을 터뜨렸다.

새빨간 빗속에서 서연이 날개를 펼친다.

날개를 중심으로 뻗어나간 붉은빛이 하늘에 새장을 만들고, 무수히 퍼져 있는 와이번 라이더들을 모조리 격추했다.

좋았어!

이 정도면 공중전은 승부가 났다고 봐도…….

"윽!?"

서연이 갑자기 땅으로 내려온다.

"어디 다쳤어?!"

나는 서연을 부축하며 물었다.

서연은 땀을 흘리며 날개를 집어넣었다.

눈에 띄는 상처는 없다. 허수아비한테 베였던 곳은 이미 회복한 후였기 때문이다.

"날 수 없어…."

"뭐?"

서연에 이어 헤르카도 떨어진다.

검까가 작동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공간 도약으로 날아가서 헤르카를 받아냈다.

"헤르카!"

"으, 윽…!"

헤르카는 자기 몸도 안 돌보고 떨어진 검까를 보며 소리쳤다.

"안 돼! 내 친구가!"

"네 몸부터 걱정해. 다친 곳 없어?"

"흐앙. 데칼. 그럴 리 없는데, 갑자기 작동이 안 돼서……."

서연이랑 같다.

왜 갑자기 날 수 없게 된 거지? 와이번들은 멀쩡한데.

그때, 작은 하피가 하늘에서 자태를 드러냈다.

블러드 하피에 비하면 몹시 작다. 인간 여성과 비슷한 크기?

조류의 발에, 날개와 융합된 팔을 가지고 있는 여성형 하피였다.

보자마자 느꼈다.

마신이다.

블램을 말에서 떨어뜨린 장본인이기도 했다.

승기를 확실히 굳히기 위해서 직접 개입한 것처럼 보였다.

"검까는 괜찮을 거야.

이건 아마도 마신의 권능이다.

저 녀석이 허락해야만 하늘에 떠오를 수 있는 거야."

"어머나."

하피가 큰 엉덩이 위에 손을 얹고 미소 지었다.

"예리하네요.

그 제르미나가 경계할만한 신이에요.

이름 모를, 멋진 남신님."

"내 이름은 데칼이다.

제르미나한테 못 들었나?"

"들은 것도 같지만, 잊어버렸어요.

우리는 재밌게 놀 수 있을 것 같아서 왔을 뿐이거든요."

우리?

뒤를 보니, 거무죽죽한 피부를 한 늘씬한 거인이 거적떼기 하나 걸치고 맨손으로 서 있는 게 보였다.

망할. 차원 마법인가.

신이라고 여기저기서 갑자기 난입하기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조금만 더 하면 우리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리사도 확실한 우세한 상황이었는데, 마신들의 등장으로 이쪽을 신경 쓰느라 허수아비를 끝장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 제 권능을 알아맞히신 기념으로 자세히 알려드릴게요.

저는 프레미아 님께 <제천의 권능>을 하사받은 마신.

제 허락 없이 하늘을 달릴 수 있는 존재는 없답니다."

"떠드는 김에 친구 권능도 좀 가르쳐 줄래?"

무서워 죽겠는데. 저 거인.

"그는 권능이 없어요. 안타깝게도.

하지만 엄청나게 강하답니다."

하아.

제르미나 이 년은, 적당히 하는 걸 모르나?

어지간히 나와 마왕을 만나게 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이 짧은 기간에 제르미나가 소개해준 마신 수가 내가 지금껏 만난 조화계 여신 수를 넘었다고.

거기다, 이놈들은 척 봐도 사람이 아니다.

프레미아의 은혜를 받고 다시 태어난 게 분명하기 때문에 최면은 먹히지 않는다.

내 능력은 같은 니뮤엘파 신들에게만 잘 먹히는, 참 웃기는 상성을 가지고 있다.

정작 마신이랑 싸울 때는 별 도움이 안 된다.

우리 유격대는 궁지에 몰린 게 확실하다.

하지만 나는 비교적 안전하기에, 머리가 잘 돌아갔다.

중요한 건 하나뿐이다.

리사가 저 막강한 허수아비를 쓰러뜨리고 나면, 상황이 뒤집힌다는 거.

마신들이 아무리 귀찮은 권능을 가지고 있어도 리사를 쓰러뜨릴 수는 없다.

그러면……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다.

"지상에 있는 놈부터 쓰러뜨린다!"

"어머나. 좋은 판단이에요."

하피가 비아냥거리며 머리 위를 날아다니다가,

갑자기 날아온 광탄 세례를 맞고 휘청거렸다.

"윽…!"

헤르카는 울먹이는 눈으로 씩씩거리고 있었다.

"내 친구 돌려내! 이 새대가리야!"

"머, 머리 쪽은 사람이거든요! 새 부분은 다리에요. 다리! 눈이 있으면 똑바로 봐요!"

"너는 반드시 내가 쓰러뜨린다. 이 천재 대마법사, 헤르카 필리오테의 이름을 걸고!"

헤르카의 마력 반응이 팽창한다.

나는 새 마신이 수작질하기 전에 재빨리 <별 떨구기>를 시전했다.

즉시 시전했지만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는 동안 거인의 발을 붙잡아 줄 사람이 필요하다.

"네리스!"

"예!"

"적당히 거리 유지해!"

네리스가 창을 허리에 끼고 뛰쳐 든다.

거인은 네리스가 오는 걸 잠시 지켜보다가 손을 휘둘렀다.

빠르다!

저게 신장이 4m를 넘어가는 거체로 할 수 있는 움직임이냐? 사기 치고 있어!

"흡!"

네리스는 고개를 숙이면서 미끄러지듯 파고들더니, 창을 휘둘러 거인의 배를 강타했다.

거인이 주춤한 사이 서연이 작두로 거인의 다리를 베어버렸다.

"아하핫!"

좋아. 잘한다!

다리 한쪽 못 쓰게 잘라서 쓰러뜨리면 더 좋았을 텐데.

몸이 단단한지 상처가 나는 정도에 그쳤지만, 서연의 공격은 효과적이었다.

다들 잘 싸운다. 이 정도라면, 할 수 있어!

"물러나!"

나는 네리스와 서연에게 신호를 주었다.

두 사람이 물러나자마자, 화염의 별이 거인의 머리통에 꽂혔다.

엄청나게 통쾌한 광경이었다.

거인의 몸이 엄청난 기세로 불타오른다.

해야 할 일은 하나뿐.

"불의 종언!"

나는 철저한 확인사살을 위해 마법을 난사했다.

"파이어 애로우! 파이어 볼!"

불타오르는 거인의 몸에 연속으로 마법을 때려 박는다.

파이어 애로우를 꽂아 넣으면서 한 번 더 <별 떨구기>를 시전.

머리 위에 또 꽂아버리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새까맣게 타버린 거인 마신이 뒤로 쓰러졌다.

"좋았어!"

예상외로 싱거운 적이다.

강해 보이는 놈은 약하고, 약해 보이는 놈은 강하고. 뭐 그런 건가?

"주군!"

죽은 줄로만 알았던 거인이 벌떡 일어나서 나한테 달려들었다.

"흐읍!"

네리스는 창을 휘둘러 거인을 밀쳐낸다.

그래도 거인의 기세는 죽지 않았다.

새까맣게 불탄 채로 하얀 이를 드러내며 돌격하는 마신의 기세에 놀라서 굳어버렸다.

"오빠 몸에 손대지 마!"

서연이 작두를 들고, 기어코 거인 마신의 다리를 잘라버렸다.

거인은 한쪽 다리만 남아도 쓰러지지 않고 계속 다가온다.

"압베트, 지금이다!"

"하압!"

압베트가 그대로 몸을 날려 거인의 한쪽 다리를 발차기로 부숴버렸다.

'부숴버렸다'는 표현 그대로, 다리 속 뼈가 으드득 아작나는 소리가 노골적으로 울려 퍼졌다.

치명적인 일격이다.

마케르는 봉을 휘둘러 거인을 쓰러뜨리고, 높이 도약해서 체중을 실은 찌르기로 거인의 가슴 정중앙을 정확히 꿰뚫었다.

"심장을 으깼다. 이제는 일어날 수 없을 거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거인 마신은 다시 눈을 떴다.

"뭣!?"

마케르는 거인에게 발목을 잡혀서,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혔다.

"커억!"

"형!"

거인은 일어나지도 않고 앞차기로 압베트를 수십 미터 밖으로 날려버렸다.

……이 녀석. 안 죽잖아.

"권능 없다더니 순 거짓말이었군……."

"모르는 편이 행복할걸요?"

"내려와!"

하피는 여유롭게 헤르카의 광탄 포화를 따돌리면서 우리를 비웃고 있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구나.

이건…….

"<불사의 권능> 같은 건가……."

단순하지만, 까다롭다.

잘리거나 부서진 다리도 원상복귀.

새까맣게 불탔던 피부도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다.

체력까지 보강되는지 근육이 힘있게 부풀어 오르는 걸 보면 징그러울 정도다.

거인 마신이 나를 보며 부르짖었다.

네리스와 서연이 무기를 들고 동시에 앞으로 나간다.

마치 나를 지키는 것처럼.

"생각이 일치했군요. 반마신."

"방해하지 마요. 오빠를 지키는 건 나니까."

"같은 목적을 위해 협력하는 게 효율적입니다.

저 또한, 주군을 지켜내고 싶습니다."

"……뭘 해줄까요?"

"제가 미끼 역할을 할 테니, 놈의 목을 떨어뜨리십시오."

"좋아요."

"아니. 둘 다 물러나."

나는 하늘을 보며 말했다.

"주군?"

"응?"

"우리끼리 할 만큼 했어."

하늘에서 떨어진 빛의 말뚝이 거인 마신을 꿰뚫어 죄인처럼 무릎 꿇게 했다.

그렇게 날뛰던 놈이 힘을 잃고 축 쳐졌다.

"헤르카의 빛 마법……?"

네리스는 말끝을 흐렸다.

"아니야."

헤르카는, 이 정도의 빛 마법은 다루지 못한다.

이건 하늘의 심판. 빛의 권능이다.

시아가 차원 마법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아저씨! 저 왔어요."

"시아……."

빛의 여신이 강림했다.

눈부신 하얀 날개를 펼친 시아는, 성스러운 녹색 눈으로 날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온다.

"왜 그렇게 놀랐어요?

마신 대책 짜 온다고 알려줬는데."

"깜빡했어."

내가 유격대에 녹아들기는 했구나 싶었다.

모두와 함께 위기를 헤쳐나가는 게 당연해졌다.

솔직히 좀 재밌기도 했었고.

여신님들이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새 잊어버린 거다.

물론,

좀 전까지는 시아나 벨라를 부를 수 없었다.

두 여신은 거사를 치를 때까지 신격을 드러내지 않는 방침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르미나가 마신을 보내며 추잡한 짓거리를 한순간.

이 전제는 뒤집힌다.

마신이 신격을 드러내며 지랄하고 있는데,

이쪽이 나서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전에는 리사가 깔끔하게 정리했지만, 때마침 지금은 리사가 고전하고 있는 보기 드문 상황.

시아가 '짠' 하고 나타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뭐야. 뭐야. 저게 뭐야!

3급 신이 여기 있다는 말은 못 들었어!"

하피는 귀가 먹을 정도로 소리를 지르며 동요했다.

적, 아군 할 것 없이 모두 시아를 영접하느라 정신없었다.

빛나는 날개를 펼친 녹색 눈의 아름다운 여신.

티끌 하나 허락하지 않는 단정한 모습으로, 우아한 기품을 뽐내고 있다.

다시 반할 것 같다.

"이, 일레시아 님."

"여신님!"

토니우스를 포함한 후방지원팀이 넙죽 엎드렸다.

상처 입은 마케르마저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들지 못했다.

긴박한 상황은 문제가 아니다.

유격대는 용사를 따른다.

그리고 그 용사는, 모든 왕국 국민들은 빛의 여신 일레시아를 숭배한다.

빛의 여신이 강림한 사실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시아의 손짓, 호흡, 작은 눈길마저도 모두 벌벌 떨며 지켜보고 있었다.

시아는 검의 태풍이 몰아치고 있는 허수아비와 리사의 격전지를 바라보았다.

아.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지!

"시아. 리사를 도와줘!"

"제 도움은 필요 없어요. 곧 끝날 거예요."

검의 태풍이 멎었다.

마지막에 서 있는 건 리사였다.

"데칼, 상황은…!!"

리사는 이쪽을 돌아보고, 강림한 시아와 눈을 마주치더니

다급하게 투구를 벗고 무릎을 꿇었다.

"빛의 여신, 일레시아님을 뵙습니다."

"평소처럼 해도 돼요."

"여신의 대리인으로서 한심한 모습을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리사의 태도가 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학생회장 시아와 빛의 여신으로서 강림한 시아가 얼마나 다른지.

나는 혼자 붕 떠 있는 기분이었다.

왠지 나도 무릎 꿇어야 할 것 같아서.

서연이가 꼿꼿이 서 있으니 괜찮겠지.

네리스는 물론 머리를 숙이고 있다.

"한심하지 않아요.

여기 있는 분들 다, 자신에게 주어진 힘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그 모습을 비웃는 신은 없어요."

"……."

리사는 더욱더 고개를 숙였다.

"제가 용납할 수 없는 건, 낄 곳 안 낄 곳 구분 못 하는 불청객들.

신이라고 칭하기도 아까운 되다 만 것들뿐."

시아의 목소리는 무척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고요한 분노가 들끓고 있는 듯했다.

"아저씨. 조금만 기다려요."

시아가 날개를 펼친다.

"응?"

하지만 시아는 곧, 날아오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아, 아하……. 아하하하…!"

하피 마신은 정신이 나간 것처럼 웃었다.

유쾌해서 웃는 게 아니다.

겁에 질려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깨우기 위해, 창백한 얼굴로 만들어낸 웃음이었다.

"<제천의 권능> 앞에서는 아무도 날지 못해!

그 어떤 신도 날 잡지 못해!"

새 마신이 충격파를 남기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시아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늘의 빛에 닿지 않고 날아다니는 새는 없어요."

"꺄아아악!"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