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 이세계 최면물-303화 (303/414)
  • "가자."303회

    용사의 절망

    마왕성에 가까워질수록 예상보다 장엄한 성의 크기에 놀라게 된다.

    기반이 된 뼈 무덤은 상상보다 훨씬 컸고, 그것만으로 성도 전체의 크기와 맞먹을 정도였다.

    마왕성은 그 뼈로 된 거대한 성곽 너머, 황량한 땅 중앙에 우두커니 솟아 있었다.

    리사 말대로 마왕성에 가는 유일한 길은 다리를 건너는 것뿐.

    "……."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고삐를 당기고, 멈춰 섰다.

    "……크네요."

    오이아가 중얼거렸다.

    절벽에 놓을 다리니까 크고 튼튼한 건 당연하다.

    새삼스럽게 관심 둘 일도 아니었다.

    적당히 큰 다리였다면 말이지.

    "인간의 힘으로 만든 게 아니군."

    블램이 말했다.

    그 말대로, 인간의 힘으로는 만들 수 없는 건축물이었다.

    리사가 '큰 다리'라고 앞서 말하긴 했지만, 설마 이런 게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우선 폭이 엄청나게 넓었다.

    오는 길에 본 수 천마리 마물 떼도 넉넉하게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길이는 또 어떤가.

    끝이 까마득해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어져 있다.

    말을 타고 수십 분은 가야 될 것 같은 거리였다.

    이 다리는 황무지와 이어져 있고, 실질적인 마왕성의 입구에 다다를 때까지 앞으로 두 시간은 더 가야 할 듯싶었다.

    "마물의 힘으로 만든 것 같지도 않아. 실체 없는 환상 아냐?"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모든 게 환상일지도 모른다고.

    "이 다리가 만들어진 경위는 모른다. 하지만, 아주 먼 옛날부터 있었어."

    리사가 말했다.

    "환상도 아니다.

    이 다리를 건너야 마왕성에 갈 수 있다."

    "……."

    모두 굳게 입을 다물었다.

    다리도 다리지만, 주변 경관도 말이 안 된다.

    마치 지옥의 입구 같다.

    그 넓고 긴 다리가 지나가는 곳 외에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다.

    적절한 지형으로 수비하기 쉬운 구조물을 우리는 '천혜의 요새'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건 자연의 은혜 같은 게 아니다.

    절대적인 힘을 가진 무언가가 의도적으로 개입한 흔적이다.

    생활 기반에 중요한 시설이라곤 코빼기도 찾아볼 수도 없는 황무지 위에 자리한 성.

    그리고 그 성을 감싸는 거대한 용의 뼈.

    산만한 스푼으로 땅을 떠버린 것 같은 끝없는 절벽.

    보면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성의 주인은 누굴까.

    "다리는 포위 당하기 쉬운 곳이다.

    그 말은, 적이 우리를 노린다면 반드시 여기서 칠 거라는 뜻이다.

    긴장 풀지 마라!"

    "예!"

    용사를 선두로 유격대가 달려 나간다.

    촘촘한 간격으로 대열을 유지하고 모든 방향을 주시하면서.

    의외로 조용하다.

    "주변에 마물, 없습니다.

    어떤 반응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지원팀의 경계 담당, 바커스가 말했다.

    "방심하지 마라."

    "예. 계속 탐색하겠습니다."

    오이아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리가 넓으니 좋은 점도 있네요.

    낭떠러지가 보이지 않아서 안정감 있어요."

    "바닥이 평평하고 넓어서, 싸우기도 좋은 듯합니다."

    네리스가 맞장구쳤다.

    "그건 모르지.

    몸을 숨길 곳이 없으니까. 딱 좋은 표적이 될 수도 있다고."

    헤르카가 기다렸다는 듯이 네리스의 말을 힘차게 받아친다.

    그리고는 네리스를 이겼다는 듯이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유치하게…….

    "……그때는 제가 나서서 막으면 될 뿐입니다."

    ……네리스도 지기 싫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헤르카니까.

    나는 흐뭇하게 지켜보며 네리스의 젖가슴을 주물렀다.

    승리자는 젖가슴 만지며 일방적으로 이득을 보는 데칼이다.

    "정지."

    리사가 멈췄다.

    다들 목을 길게 빼고 앞을 내다봤다.

    뭐지?

    "……허수아비?"

    리사는 말끝을 흐렸다.

    다리 중앙에 허수아비가 있었다.

    작물을 못 쓰게 하는 새, 짐승 따위를 막기 위해 짚과 막대기 따위로 만들어서 논밭에 세우는 그 허수아비가 맞다.

    허수아비는 우리의 존재를 알아채고 느긋하게 움직였다.

    "전투 준비!"

    우리는 바짝 긴장했다.

    그러는 게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허수아비의 동작은 느릿느릿했다.

    몸통은 짚더미인가? 막대기 하나 꽂아 놓은 줄 알았는데, 팔이랑 다리가 너무 얇아서 착각했을 뿐.

    제대로 사람처럼 팔, 다리가 나 있는 허수아비였다.

    누군지는 몰라도 마왕성 입구에 움직이는 허수아비를 두자는 생각을 하고, 그걸 실행에 옮겼다면 대단한 놈이다.

    이런 재밌는 짓을 하다니.

    리사는 예상을 넘어선 사태에 초조한 듯했다.

    "정말 이게 다리를 지키는 가디언인가?"

    헝겊으로 감싼 머리 부분에 대충 그려 넣은 이목구비가 어딘지 모르게 기분 나쁘다.

    "바커스! 뭔지 알겠나?"

    "모, 모르겠습니다.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근처에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마력 반응도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답답하네! 직접 확인해보면 되지!"

    헤르카가 광탄을 쐈다.

    그러자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광탄이 허수아비 몸에 닿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굽어서 날아가 버렸다.

    "어…?"

    헤르카를 포함해,

    누구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다.

    허수아비의 부러질 것 같은 얇은 팔 끝에서 붉은빛으로 된 막대가 나타났다.

    "물러서!"

    리사가 바로 뛰쳐나갔다.

    허수아비와 리사가 검을 맞대고 있는 걸 보고 깨달았다.

    허수아비의 움직임을 첫 동작을 알아차린 게 리사 뿐이었다는 것을.

    "도와야 합니다!"

    네리스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파이어 애로우!"

    허수아비는 쏟아지는 불화살을 피하고자 뒤로 물러난다.

    소용없어! <해를 가리는 자>는 이미 발동했다. 파이어 애로우는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갈 거다.

    짚을 통째로 태워주마!

    "맞혔다!"

    손을 꽉 쥐고 기쁨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허수아비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붉은빛 막대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설마 저걸 휘둘러서 막은 건가?

    말도 안 돼!

    "저거, 짚 인형 맞아!?"

    블램, 앙겔이 허수아비를 둘러싼다.

    네리스도 돌격 준비를 마쳤다. 리사에게 도움은 필요 없다.

    그래도 다들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정체를 숨기고 있군. 그 가면을 벗겨주지."

    허수아비의 붉은빛 막대와 대조적으로, 리사의 검날은 하얀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한 명의 사람과 인형이 격돌한다.

    허수아비는 놀랍게도 리사와 대등하게 검을 나누고 있었다.

    검과 막대가 부딪치는 압력만으로 주변에 엄청난 풍압이 일었다.

    흑마가 동요한 나머지 네리스가 제어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아앗!"

    찰나의 순간에 무수한 참격이 오간다.

    공방은 마치 태풍처럼 주변에 있는 걸 휩쓸고 있었다.

    무기와 무기가 부딪치며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려 퍼진다.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다.

    허수아비가 리사와 대등하게 싸우고 있다.

    아니…… 대등한 게 아닌가?

    "큭……!"

    리사가 밀리고 있다.

    그런 싸움에 블램과 앙겔이 끼어들 수 있을 리 없었다.

    검의 폭풍이 모든 걸 집어삼킬 것처럼 넓어진다. 용이 할퀴고 간 것처럼 검이 지나간 자국이 바닥에 선명하게 남고,

    수시로 충격파가 일어나 하늘을 날고 있는 서연과 헤르카에게도 영향을 줄 정도였다.

    "도, 도저히 다가갈 수 없습니다."

    네리스는 흑마를 제어하느라 필사적이었다.

    격이 다른 싸움이다.

    대체 정체가 뭐지? 마신? 아니야……! 신이라면 신격 없이 힘을 발휘할 수 있을 리 없어!

    리사의 검격이 거세진다.

    리사도 힘을 감추고 있었는지 갑자기 허수아비 쪽이 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주 근소한 차이였다.

    허수아비는 검을 양손으로 잡고 자유자재로 다루며 리사와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었다.

    어떻게 된 거야. 도대체!

    무슨 트릭이 있나?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이런 게 가능할 리 없다. 저렇게 보잘것없이 생긴 놈이 리사와 맞먹을 리 없어.

    균형은 갑작스럽게 깨졌다.

    "윽…!"

    리사가 뒤로 물러났다.

    리사는 척 봐도 지친 듯 어깨로 숨을 쉬고 있었다.

    팔을 베인 듯 피가 나고 있었다.

    "요, 용사님!"

    오이아가 바로 뛰어갔다.

    "오지 마! 지금은 전투 중이다!"

    "하지만…!"

    앙겔과 블램이 동시에 지면을 박찼다.

    "리사. 시간을 벌어볼게!"

    "아니. 쓰러뜨리겠다. 블램. 내가 시선을 끌 테니 허점을 노려라!"

    "알았다!"

    리사는 두 사람을 향해 손을 뻗으며 외쳤다.

    "안 돼!"

    허수아비는 가만히 둘을 지켜보다가.

    한 걸음 슬쩍 움직여서 두 사람의 공격을 동시에 피했다.

    처음으로, 형편없이 생긴 짚 인형에게 감탄했다.

    예술 같은 회피였다.

    단 한 번의 동작이 블램과 앙겔을 무력화시켰다.

    허수아비는 막대를 휘둘러 두 사람을 쳐냈다.

    "끄악!"

    블램과 앙겔은 한참 바닥을 나뒹굴고, 더는 일어나지 못했다.

    리사는 그걸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설마……. 설마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게 아닌가?"

    리사의 추측은 우리 모두를 얼어붙게 했다.

    "……너는,

    정말로 단순한 허수아비 인형….

    싸우는 기능 외에는 없는 건가……?"

    "파이어 애로우!"

    나는 허수아비의 시선을 끌며, 외쳤다.

    "서연아!"

    서연이 작두를 들고 낙하한다.

    벼락같은 내려찍기였다. 폭발과 함께 조각난 파편들이 주변으로 흩어진다.

    나는 눈에 힘을 주고 흙먼지 속을 주의 깊게 살폈다.

    "읏, 아…!"

    서연은 목을 잡혀 있었다.

    허수아비는 서연의 허리를 쓱 그어버리고 바닥에 던져버렸다.

    "흐윽…!"

    리사 말이 옳았다.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게 아니다.

    속임수도 없다.

    저건 그냥 강한 거야……!

    갑자기 지면이 흔들렸다.

    아니, 다리가 흔들리고 있는 건가?

    다리 양쪽 끝에 거대한 뼈가 솟아나고 있었다.

    퇴로가 막혔다.

    포위당하기 쉽다는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포위당한 것도 아닌데 위기라는 건 웃지 못할 농담이었다.

    "우리 힘이 역부족이었어……?"

    토니우스가 손을 떨면서 말했다.

    "마왕을…… 마왕을 지키는 가디언이 이 정도로 강하다니…….

    마신보다 훨씬 강하잖아!"

    "동요할 때가 아닙니다!"

    네리스가 외쳤다.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을……."

    갑자기, 절벽 아래에서 맹수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새? 아니……. 저건 대체 뭐지?

    "와이번이다."

    리사가 말했다.

    "와이번?"

    "용의 아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용에 비하면 몸집도 작고 볼품없지만, 놈들은 단순한 와이번이 아니야."

    잘 보면 와이번 위에 스켈레톤이 타고 있었다.

    저마다 뼈로 된 창이나 활을 무장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적의 의도를 깨달았다.

    헤르카는 주위로 몰려드는 와이번을 보며 말했다.

    "네리스. 물어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가서 저지할 수 있어?"

    "……헤르카. 조심하세요."

    "어쩔 수 없네…!"

    헤르카가 날아오르자 와이번 라이더들이 추격한다.

    헤르카는 와이번 라이더들을 꼬리에 달고 속도를 내며 광탄을 뒤로 쏟아냈다.

    보고 있을 틈도 없다.

    하늘을 메운 와이번 라이더들이 우리를 일제히 공격했다.

    창을 던지고, 화살을 쏜다.

    단순한 공격이지만 지금 우리 상황에는 치명적이었다.

    "말을 버리자. 표적이 될 거야!"

    "네. 주군!"

    모두 말에서 내린다.

    "토니우스! 지원팀을 지켜 줘!"

    "알았어. 데칼!"

    "일단 버티는 수밖에 없어.

    창도 화살도 한계가 있을 거야! 머리 위를 조심해!"

    할 수 있는 지시는 했다.

    남은 건, 저 허수아비를 어떻게든 하는 것뿐이다.

    토니우스는 지면에 촉수를 뽑아서 와이번 라이더의 투창에 대항했다.

    지원팀 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리사!"

    "알고 있다……!!"

    리사는 허수아비의 거센 검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더 엄청나다.

    도저히 접근할 수 없다.

    리사의 신들린 검기조차 저 허수아비에게는 닿지 못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 거지?

    보잘것없는 생김새 때문에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게 위협적으로 생겼어도 이상하게 여겼을까?

    더는 겉모습에 휘둘려선 안 된다.

    "리사! 힘을 아끼지 마!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해. 눈앞에 있는 그놈을 마왕으로 보고 싸워!"

    "……!"

    리사의 실루엣에 밝은 빛이 어렸다.

    "알았다!"

    허수아비와 공방을 나누는 사이 리사의 갑옷은 군데군데 깨지고 부숴진 상태였다.

    언뜻 보면 팔에 상처까지 입은 리사가 불리해 보인다.

    하지만 상황은 극적으로 뒤집혔다.

    리사가 허수아비를 밀어붙인다.

    공간 전체에 울려 퍼지는 듯한 매서운 참격이 허수아비의 몸체를 깎아냈다.

    그사이 나는 쉴 새 없이 파이어 애로우를 시전해서 공중에 탄막을 쳤다.

    와이번 라이더들의 화살 공격을 막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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