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 이세계 최면물-302화 (302/414)
  • 그 작업은 손가락을 까딱 움직이는 것처럼 빠르게 이루어졌다.302회

    용사의 절망

    블램 곁으로 도약한 순간.

    헤르카의 광탄이 내 주변으로 빗발치며 포악한 오물들을 싹 밀어버렸다.

    한순간, 블램과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안전해졌다.

    "데칼……! 너까지…. 왜 나를 버리고 가지 않은 거냐!"

    "죽고 싶으면 딴 데 가서 죽어.

    나 때문에 죽으면 꿈자리가 사납단 말이야."

    "뭐?"

    "간다. 몸 웅크려."

    마침, 내 정령이 좋아하는 탁 트인 공간이다.

    나는 바람을 일으켜 뚜껑을 덮듯이 나와 블램을 감싸는 보호막을 쳤다.

    "데칼! 놈들은 이 정도로는 막을 수 없어. 뚫고 들어올 거다!"

    블램 말대로 포악한 오물들은 몸통 박치기로 바람 보호막을 깨부수는 중이었다.

    리사가 올 때까지 도저히 버틸 수 없다.

    하지만…….

    "상관없어.

    저것들 막으려고 친 보호막이 아니니까."

    "뭐……?"

    "몸 웅크리라고 했지?"

    포악한 오물들의 몸에 갑자기 불이 붙기 시작했다.

    <별 떨구기>의 효과다.

    적을 불사르는 화염의 별이 하늘을 가르며 떨어진다.

    "크악!"

    블램은 몸을 웅크린 채 비명을 질렀다.

    별이 추락한 여파로 지면이 흔들렸다.

    유니크 스킬, <별 떨구기>

    서연의 힘에는 반도 미치지 못했지만, 목적은 달성했다.

    주위가 활활 불타고 있다.

    오물은 접근하지 못하는 신성한 불의 장벽.

    아무리 재생하는 마물이라 해도 산채로 불탈 수는 없겠지.

    바람 보호막은 열기로부터 블램을 지키기 위해 친 거다.

    본래, <별 떨구기>는 즉시 시전할 수 있는 마법이 아니다.

    사용해본 적은 없지만 엄청난 양의 마력을 신중하게 흘려 넣으면서 준비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해를 가리는 자>는 마법을 즉시 시전하게 돕는다.

    빗나가지 않게 유도한다.

    마법의 위력을 폭발적으로 향상하는 <마법 응축>까지…….

    유니크 스킬 <삼중 영창>이 있기에 가능한 연계였다.

    "일어나."

    나는 블램에게 손을 내밀었다.

    "왜 날 구했지?

    유격대는 목숨 건 자들만 있는 곳이다.

    작전을 위해서 죽는다면 두렵지 않아. 그런데 어째서……."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죽게 두면 기분 더러울 것 같아서 온 거야."

    "그런 이유로……?"

    "나한테는 충분한 이유야."

    블램이 내 손을 잡았다.

    "리사와 밤새 사랑 나눈 거 즐겁게 과시했는데,

    네가 충격받아서 죽어 버리면 찝찝하잖아?"

    괜히 심술이 나서 한마디 더 얹는다.

    블램은 내 손이 아플 정도로 꽉 잡았다.

    "역시…… 자랑하러 온 거였나. 네 녀석!"

    "짝사랑하던 여자를 빼앗긴 기분이 어때?"

    "빌어먹을!"

    나는 마물에게 둘러싸여서 이러고 있는 게 웃겨서 폭소하고 말았다.

    "제기랄. 망할. 으아아!"

    "살고 싶어졌지?"

    "돌아가면…… 한 대 때려주마!"

    "그럼 일어나."

    블램이 일어나서 검을 잡았다.

    두 눈빛에 살겠다는 의지가 활활 불타오르는 게 보기 좋았다.

    좋아. 이제 불도 꺼졌고.

    포악한 오물들이 어마어마하게 몰려오는데, 유격대는 아직 좀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이제 걱정 없다.

    수십 마리의 포악한 오물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뛰쳐 오른 순간.

    리사의 검이 공간을 갈랐다.

    포악한 오물들이 불꽃놀이처럼 터지는 걸 보고 손뼉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예술이야. 예술.

    말에서 내린 리사가 이쪽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블램.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모두 끝난 뒤에 하겠다.

    우선 살아남는 데 집중해라."

    "알겠습니다."

    "데칼."

    리사가 날 불렀다.

    투구에 덮여 있어서 리사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아쉽군.

    "빠르게 움직여줘서 고맙다."

    "도움이 됐어?"

    "그래. 하지만 좀 더 도와주면 좋겠군.

    이놈들은 전멸할 때까지 우리를 놓아주지 않을 거다."

    이미 벌어진 일.

    최대한 빨리 정리하는 수밖에.

    "유격대 전원!

    전투태세로 임하라. 목표는 적의 섬멸이다!"

    토니우스의 촉수가 바닥에서 솟아 나왔다.

    촉수는 지원팀을 지키며 오물들을 힘껏 쳐냈다.

    앙겔과 마케르 형제가 말에서 뛰어내리며 전장에 합류한다.

    그러자 유격대가 확 우세해지는 게 눈에 보였다.

    애초에 이길 수 없어서 뿌리치려고 했던 게 아니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흐름이다.

    섬멸전이 시작되자 단연 눈에 띄는 건 네리스였다.

    네리스는 흑마를 타고 날뛰며 포악한 오물을 학살했다.

    아무도 네리스 이상의 전과를 세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우후후. 아하하!"

    아, 깜빡했다.

    우리 파티에는 측정할 수 없는 전투력을 가진 사람이 둘 있다는 걸.

    서연은 낮게 날면서 작두로 마물을 갈아버리고 있었다.

    갈아버린다는 표현은 아주 적절하다.

    작두에 걸린 마물은 풍선 터지는 것처럼 분쇄됐다.

    가녀린 팔에서 저런 힘이 나온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다른 한 명은 리사였다.

    힘을 아끼려고 했는지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검을 빼지 않았던 리사도,

    지금은 다소 격앙된 것처럼 보일 정도로 거침없었다.

    신들린 듯한 움직임이다.

    눈으로 쫓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면서,

    참격 한 번에 수십 마리를 썰어버리는 걸 보고 있으니 오금이 저렸다.

    모두 분투한 결과.

    포악한 오물을 전멸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기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다들 지친 게 보였다.

    리사가 블램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블램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슨 짓이지?"

    "죄송합니다. 용사님.

    제 부주의로……."

    "그걸 말하는 게 아니다!"

    리사는 엄청나게 화가 나 있었다.

    투구 안이 울릴 정도로 소리치는 건 처음 본다.

    리사의 노성을 들은 블램은 땅에 꺼질 것처럼 몸을 움츠렸다.

    "왜 체념했지?

    너라면 알고 있었을 텐데. 내가 너를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유격대 전체를 위험하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헛소리!

    평소의 블램이었다면. 내가 잘 아는 너였다면, 너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쩌면 빨리 합류해서 같이 나갈 수 있었을지도 몰라.

    내가 용서할 수 없는 건…… 네가 목숨을 놓으려 했다는 사실이다."

    "……."

    듣고 보니 리사 말이 맞는 것 같다.

    블램은 동료들과 떨어진 순간, 자기 목숨을 쉽게 내던졌다.

    어쩌면 상실감이 너무 커서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결과에 몸을 던졌던 걸지도 모른다.

    리사는 그걸 알아채고, 블램을 엄하게 꾸짖고 있었다.

    "블램. 나한테는 네가 필요하다.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위기에서 목숨을 던지는 걸 허락한 적은 없어!"

    "죄송…합니다."

    "데칼한테 감사해라.

    네 생명의 은인이다. 다음에 또 부질없이 죽으려 한다면, 내가 네 목을 쳐버릴 거다."

    "……예!"

    리사는 몸을 홱 돌리고 말에 탔다.

    블램은 날 보며 면목 없는 듯 말했다.

    "미안하다. 데칼."

    "됐어. 너도 나 도와줬잖아.

    끝까지 살아남아서 나와 리사가 알콩달콩 지내는 걸 보고 부들부들 해줘."

    "……큭. 얄미운 놈."

    "리사가 안 물어봤으니 내가 대신 물어볼게.

    마음 정리는 됐어?"

    "그래. 끝났다."

    블램은 시원스럽게 말했다.

    "너는 리사에게 어울리는 남자다.

    겨우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는 팔짱 낀 채 히죽거렸다.

    "자네의 용기에 경의를……. 후우…….

    역시 관두겠다. 자네 낯짝을 보고 있으니, 은인이라는 걸 잊고 때려버릴 듯하다."

    "맞아줘?"

    "모든 게 끝나면."

    블램과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오빠!"

    서연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여자가 날아서 내 품에 들어오는 건 신선한 경험이었다.

    "현우 오빠. 많이 죽였어. 오빠를 위해서 많이 많이 죽였어. 작두로 치고, 으깨고, 갈랐어!

    얼른. 얼른 상 주세요…♥"

    "우리 서연이. 잘했다."

    나는 서연을 꼭 안아주었다.

    서연은 입을 살짝 벌리고 소리 없는 탄성을 지르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안아준 거지, 약을 놓은 게 아닌데?

    "오빠……. 아아…. 오빠를 더 사랑하게 되어버려…."

    "흠…."

    나는 서연을 꼭 안고 귀에 속삭였다.

    "사랑해. 서연아."

    "아, 아아……."

    서연은 내 품에서 절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야한 신음을 흘렸다.

    몸을 꼼지락거리며 내 품에 더 들어오려고 하는 게 사랑스럽다.

    의외로 다루기 쉬운데?

    사랑한다는 말에 약한 점이 이스티랑 비슷한 것 같기도.

    "오빠. 또 없애버리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

    이런 건 전혀 다르지만.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서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시 네리스의 말에 올라타서, 이동할 준비를 한다.

    "데칼."

    리사가 말을 몰아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왜? 키스하고 싶어졌어?"

    "아니다. 진지하게 들어라.

    좀 전에 헤르카에게 신경 쓰이는 보고를 받았다."

    신경 쓰이는 보고?

    "우리에게 원거리 공격을 한 마물.

    어느새 없어졌다. 추격하려고 해도 이미 흔적을 지우고 이탈한 뒤였다고 하더군."

    "정찰인가?"

    등줄기가 오싹했다.

    우리가 싸우는 걸 염탐하고 있었다는 소리잖아.

    "내 생각도 같다.

    이제 기습의 효과도 기대할 수 없겠지. 적의 함정에 뛰어드는 꼴이 될 거다."

    "그렇다고 멈출 생각도 없잖아?"

    "그래. 내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지휘권은 네가 맡아라. 데칼."

    리사의 발언에 다들 숨죽였다.

    "나한테 그런 중책은……."

    "블램을 구하려고 바로 움직인 건 너와 나뿐이었어.

    다른 대원들도 네 지시라면 들을 거다."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제멋대로 저질렀을 뿐이지만, 좋은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우습군.

    착한 척 정도로 만족하던 내가

    진짜 몸을 던져 남을 구하기도 하다니.

    "날 언제부터 믿기로 한 거야?"

    "사람에 대한 평가는 변하기 마련이다.

    아침에 했던 말은 잊어라."

    "내 본성을 너도 알 텐데."

    "그러면 그 본성에 묻지. 좀 전에 그것도 가식이었나?"

    "나한테 어울리는 짓은 아니었지.

    최근 사귀는 사람에게 영향받은 걸 거야."

    "……!"

    리사가 고삐를 꽉 쥐었다.

    "내가 요즘 마음 주는 여자가,

    성품이 고결하고 아주 참하거든. 사랑하면 닮는다는 말도 있잖아?"

    "……가자."

    보고 싶었는데.

    리사가 어떤 표정 짓고 있는지.

    저 투구가 원망스러웠다.

    "못 들었나? 여기서 멈춰 있을 시간 없다. 서둘러!"

    유격대가 다시 움직인다.

    "응? 대열이 변하지 않았나?"

    리사는 선두에 있다.

    이건 종종 그랬으니 이상할 게 없지만, 마케르 형제와 블램, 앙겔이 네리스의 흑마를 지키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야 변합니다.

    용사님이 용사 후보에게 자기가 죽은 후를 맡겼다는 건, 무슨 뜻이겠습니까?"

    "……."

    설마…….

    내가 차기 용사?

    팔에 닭살이 돋았다.

    "시아 님이 옳았다는 걸 다시 느낍니다."

    네리스가 중얼거렸다.

    살짝 엿본 네리스의 표정은, 무척 편안해 보였다.

    괜히 반발심으로 네리스의 젖가슴을 뒤에서 콱 움켜잡았다.

    "읏."

    네리스의 밑가슴을 조물조물 만진다.

    화창한 대낮에 이러면, 네리스 성격에 한마디 하겠지?

    "……."

    네리스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뗐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에서 힘을 뺐다.

    응? 대놓고 젖가슴 만져도 돼?

    "네리스?"

    네리스가 시치미 뚝 떼고 있어서,

    나는 양손에 힘을 넣어서 젖가슴을 쥐어짜듯 움켜쥐었다.

    네리스가 특히 좋아하는 젖탱이 쥐어짜기다.

    "읏…."

    네리스는 몸에 힘을 뺀 채 가만히 있었다.

    "싸우기 전까지만, 입니다."

    나는 네리스의 몸에 달라붙어서 젖가슴을 마구 주물렀다.

    서연이 시선이 좀 따갑긴 했지만, 얼마 안 되는 짧은 시간동안 네리스의 젖가슴을 즐기고 싶은 욕구가 더 컸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까까지 그렇게 득달처럼 달려들던 마물 떼가 한 시간 가까이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네리스가 젖탱이로 절정할 때까지 주물럭주물럭하다가.

    마침내 이상하게 생각돼서 말을 꺼냈다.

    "너무 순조로운데?"

    "……잡병은 물리기로 한 건가.

    어쩌면 초대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

    "초대?"

    가소로운 짓 하기는.

    마왕이란 녀석들은 왜 다 방심을 하는 걸까?

    그러다 용사 칼에 맞고 황천행이지.

    "저 언덕만 넘으면 마왕성이 보일 거다."

    작은 구릉을 넘어 멀찍이 내려다본다.

    진짜로 황량한 땅 한가운데 고성이 있었다.

    무시무시하게 큰 뼈가 울타리처럼 솟아 있다.

    아니…….

    그 뼈의 크기는 성벽에 비견될 만했다.

    어쩌면 성 자체가 뼈 위에 지어진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저렇게 큰 뼈를 가진 생물은 하나밖에 모른다.

    드래곤.

    시아의 의식 세계에서 잠깐 보았던, 환상 속 존재.

    그것은 이 세계에 엄연히 실체로 존재하고,

    지금은 거대한 유해가 되어 땅에 잠들어 있다.

    "입구에 큰 다리가 놓여 있는 걸 확인해라.

    마왕성은 저 다리를 통해서 건너갈 수밖에 없다. 나머지 길은 모조리 낭떠러지야."

    "잘 아네. 리사."

    "근처까지 와본 적 있으니까."

    어쩌다 성 근처에 갔는지.

    궁금했지만,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리사에게는 리사 나름대로 묵은 기억이 있겠지.

    중요한 건 지금부터다.

    "정면 돌파한다.

    마왕의 목을 치면 우리의 승리다."

    리사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모두, 함께 해줘."

    "싫어요."

    서연이가 끼어든다.

    웬일로 분위기 파악하나 했다.

    "위험하면 오빠만 데리고 둘만의 보금자리로 도망칠 거예요."

    리사는 피식 웃었다.

    "그것도 좋겠군.

    우리가 실패하면 차라리 숨어 지내는 게 나은 세상이 될 테니까."

    "애초에 당신을 이길 사람이 어딨어요?"

    "……."

    리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말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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