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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세계 최면물-301화 (301/414)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301회

용사의 절망

"전방에 마물 다수!"

바커스가 소리쳤다.

나는 눈에 힘을 주고 앞을 봤다.

저놈들은 뭐지? 오크치고는 덩치가 크다. 우둘투둘한 잿빛 피부에 둥근 실루엣.

자기들끼리 뭉쳐있지도 않고 일정 간격으로 거리를 벌린 채 우리가 오는 걸 가만히 보고 있었다.

마치 감시탑처럼.

"전령이다. 이대로 돌파한다!"

리사가 속도를 냈다.

네리스의 흑마가 힘차게 지면을 박차며 따라붙는다.

"충격에 대비해라!"

리사의 경고가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다.

전령이라 불린 돼지들이 멱 따는 소리로 울부짖기 전까지는.

으윽! 고막이 찢어질 것 같다. 어떻게 돼 먹은 성량이야? 수십 킬로미터 밖에서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네리스는 리사와 나란히 달려서 전령이 서 있는 라인을 넘어간다.

대원들이 차례대로 뒤따랐다.

곧, 소리를 들은 마물의 군세가 몰려오겠지.

그 정도는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다들 뻔히 알고 있겠지만, 다시 말한다!"

리사가 외쳤다.

"이건 시간과의 승부다.

적의 물량에 붙들리면 끝이라고 생각해라!"

"예!"

십 분 정도 달렸을까.

마왕군의 제1진이 맞은편에 나타났다.

지평선을 새로 쓰는 마물의 군세. 족히 수천은 돼 보였다.

직접 보기 전까지 '수천'은 작은 숫자라고 생각했다.

인류의 전쟁사에는 심심찮게 수만, 수십 만의 병사가 싸운 역사를 다루기 때문이다.

이쪽은 일기당천의 영웅이 있으니 두려울 게 없다고 생각했다.

말 그대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주군. 꽉 붙잡으세요."

네리스가 속도를 냈다.

"설마 부딪칠 생각이야?"

"창기병의 역할은 정해져 있습니다.

적진을 유린하고 길을 여는 것입니다!"

아무리 네리스라도 저 두터운 살의 벽을 뚫어내기란 어려울 것 같았다.

시시각각 마물 무리와 가까워진다.

뼈 갑주와 무기로 무장한 악몽갈퀴들이 호시탐탐 우리를 죽일 기회를 엿보고 있다.

그 검은 파도에 부딪힌다.

나는 위압감에 온몸이 짓눌려 납작해질 것 같았다.

숨 쉬는 것조차 잊고 네리스의 몸에 매달려 있다는 것도 거의 다 왔을 때 알았다.

심호흡하자.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을 뿐이야.

겁먹을 필요 없어.

허세로 어깨를 쭉 펴고 앞을 바라보자, 시야가 확 넓어졌다.

네리스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든든했다.

"갑니다!"

"나도 지원할게!"

네리스와 악몽갈퀴 무리가 부딪치는 순간 파이어 볼로 지원한다.

나는 손을 들고 목표를 겨냥했다.

바로 그때였다.

쉬익하고 그림자 하나가 우리 위를 지나갔다.

"서연아…!"

빠르다! 뭐가 저렇게 빠르지?

전속력으로 달리는 흑마를 대수롭지 않게 추월하다니.

헤르카가 보호 마법을 쓰며 피하는 게 고작이라고 했던 이유를 간신히 알았다.

서연은 여유롭게 날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비행하고 있었다.

어느새 가장 앞으로 치고 나와서 비상하더니, 서연의 손에 붉은빛이 점멸하며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

네리스는 다급하게 말의 속도를 늦췄다.

"뭔가 옵니다!"

바람의 정령이 동요하고 있다.

그걸 보고 대기의 흐름이 변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서연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마력 반응이 느껴진다.

주위로 확산하는 붉은빛의 결정체가 곧 터질 것처럼 빠르게 점멸하다가, 서연의 손에 집결했다.

그 빛은 창의 형상을 이루었다.

닮았어…….

제르미나의 권능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저 창은 위협적이었다.

서연이 붉은 하늘 밑에 군림하는 사신처럼 보였다.

"흐읍!"

서연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팔을 뒤로 당겼다.

온 힘을 다해서 던질 생각이다. 의도는 뻔히 드러났지만 마물들은 서연을 막을 수 없었다.

천벌을 내리는 신처럼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서연이 창을 내던지는 순간 붉은빛이 팽창했다.

그것은 마치 혜성처럼 바닥에 내리꽂혔다.

온몸이 흔들린다. 엄청난 폭발이었다.

몸을 가눌 틈도 없이 폭발로 인해 해일처럼 솟아오른 흙이 우리를 뒤덮었다.

"네리스!"

나는 우리 몸을 바람의 정령으로 지켰다.

네리스는 몸을 웅크리고 내 품에 들어왔다.

"감사합니다."

"으앗!"

갑자기 흑마가 몸을 들어서 떨어질 뻔했다.

네리스는 하체 힘으로 버티면서 내가 떨어지지 않게 붙잡아 주었다.

"괜찮으십니까?"

"뭐, 뭐야."

"말들이 놀랐습니다.

정말 무시무시한 마법입니다. 저런 건 여태 본 적이 없어요."

뒤를 돌아보니 다른 대원들도 발광하는 말을 달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당장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적들이 다 죽었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악몽갈퀴들은 겁에 질려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었다.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던 마물 무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야말로 남김없이.

눈앞에는 움푹 패서 바닥이 안 보이는 창의 낙하점과 재라도 깔린 것처럼 까맣게 그을린 땅만 보였다.

서연은 그걸 보며 퍽 유쾌한 듯이 깔깔 웃었다.

"우후후. 아하하하!"

"……."

잘했다며 들떠야 할 상황인데.

서연을 빼고 모두 심각한 표정이었다.

좀 전까지 살아서 우글거리던 것들이 한순간에 재가 되는 모습은…… 생각보다 그렇게 유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엾게 여길 이유는 더욱더 없다.

"서연아! 잘했어!"

"정말?! 현우 오빠. 나 잘했어?"

서연이는 아이처럼 들뜨며 내 주변을 막 날아다녔다.

"그래도 다른 사람이 휘말리지 않게 조심해야 해!"

"응~! 몇 명이든. 몇 마리든 죽여줄게. 오빠!"

괜찮겠지……?

어쨌든 우리 앞길을 막는 게 사라지긴 했다.

네리스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흑마의 목을 쓰다듬으며 달래주고 있었다.

"진정해. 괜찮아."

"……."

네리스의 뒤태를 보고 있으니, 나는 반대로 진정할 수 없게 되었다.

"출발할 수 있습니다."

리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머리를 틀었다.

"계속 간다!"

네리스가 말을 달리게 했다.

나는 떨어지지 않게 네리스의 뒤에 꼭 붙었다.

"두 번째, 옵니다!"

바커스가 소리쳤을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의아했다.

하지만 무언가가 '보인다'고 느꼈을 때, 그것들은 이미 주변을 새까맣게 메우면서 몰려오고 있었다.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랐다.

'포악한 오물'이다.

덩치는 사람보다 조금 큰 정도.

끔찍하고 징그럽기로는 바퀴벌레보다 더하다.

네 발 달린 연체 생물이 떼를 지어 바닥을 미끄러지는 광경은 차마 보기 힘들었다.

포악한 오물은 민첩하고, 목숨 아까운 줄 모른다.

마왕이 우리를 붙들기 위해 고른 첨병이라면 탁월한 선택이었다.

놈들의 목적은 달라붙어서 산을 뿜는 것.

단순하고 저돌적인 만큼 숫자가 많을수록 성가신 적이었다.

"모여라! 흩어지면 고립된다!"

리사의 지시로 대열 간격이 단숨에 좁아진다.

지원팀이 우리 뒤를 바짝 따르고, 블램과 앙겔이 양옆으로 빠졌다.

"블램, 앙겔!

지원팀을 지켜라. 이대로 돌파한다!"

"예!"

블램이 검을 바로 쥐고, 눈앞까지 뛰어오른 포악한 오물을 단칼에 베어 넘겼다.

그래도 놈들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포악한 오물들은 우리를 말에서 떨구기 위해 온몸을 던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대열에서 벗어나지 않고 한 몸처럼 받아치고 있어서 우리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다들 좋은 실력인데?

나도 솜씨 좀 발휘해 볼까!

"파이어 애로우!"

나는 유니크 스킬 <해를 가리는 자>로 오버 차징한 파이어 애로우를 무수히 생성하고,

손가락을 딱 튕겼다.

물론 최면은 아니다.

수십 발 장전한 파이어 애로우를 일제히 풀어 놓았을 뿐이다.

붉은 궤적이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뛰어오르는 마물들을 격추한다.

죽이지는 못해도 따라오지 못하게 떨구는 정도라면 간단했다.

"고, 고마워! 데칼!"

오이아의 얼굴이 새파랬다.

여유가 없어서 몰랐는데, 지원팀은 극도로 겁에 질린 상태였다.

산을 뿜는 마물이 지금이라도 덮칠 것처럼 뛰어오르기 때문에 다들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그런 와중에도 자유자재로 무기를 휘두르며 신이 난 듯 싸우고 있는 건 마케르 형제뿐이었다.

"형님! 그쪽으로 한 마리 갑니다!"

"알았다!"

마케르와 압베트는 몸을 던지는 마물을 수월하게 떨쳐낼 뿐 아니라,

넓은 시야로 다른 대원을 지원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마케르 형제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숨이 턱 막혔다.

수가 너무 많아.

어떻게 뿌리쳐도 꾸역꾸역 밀려온다.

어쨌든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파이어 애로우!"

"그대로 쭉 가!"

그때, 헤르카의 목소리와 함께 광탄이 빗발쳤다.

광탄 세례로 무수히 따라붙었던 포악한 오물들이 대거 이탈했다.

"헤르카!"

"잊은 거 아니지?

빛 마법을 잘 다루는 천재 소녀가 함께한다는 사실!"

"잘한다!"

이계 생물체는 빛 마법에 약하다.

헤르카의 광탄에 몸을 뚫린 오물들은 즉시 힘을 잃었다.

서연은 우리가 물량 공세에 휘말리지 않도록 바깥쪽부터 깎아내듯이 적광탄을 쏟아부으며 마물의 수를 줄여나갔다.

환상적인 공중 지원이었다.

"슬슬 꿰뚫겠습니다!"

기세를 탄 네리스의 흑마가 선두로 나아가, 전차처럼 포악한 오물들을 밀어버리며 길을 뚫었다.

그러자 뒤따르는 말들도 승부욕을 자극받은 듯, 유격대의 진격 속도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잘한다. 우리 조개 성 식구들!

쉽게 뿌리칠 수 있겠어!

"원거리 공격이다. 조심해!"

리사가 외쳤다.

원거리 공격? 어디서?

"블램. 네리스! 몸을 지켜라!"

네리스는 당황하지 않고 창을 휘둘러, 비수를 쳐냈다.

뭐였지? 새 깃털처럼 보였는데.

"꺄아악!"

뒤에서 오이아의 비명이 들렸다.

"오이아!?"

나는 네리스를 대신해서 뒤를 돌아봤다.

오이아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외쳤다.

"브, 블램 씨가……!"

"뭐?"

블램이 그걸 못 막았다고?

"큭!!"

블램이 낙마한 충격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이,

포악한 오물들이 몰려들었다.

블램은 검을 휘두르며 마물들을 쳐내고 있었지만, 수가 너무 많아서 곧 뒤덮여 죽게 될 것 같았다.

네리스가 고삐를 당긴다.

그때 리사가 매섭게 외쳤다.

"늦추지 마!"

"하지만……!"

"내가 간다! 블램을 데리고 따라갈 테니 너희는 먼저 가!"

리사가 대열에서 벗어났다.

혼자 싸우고 있던 블램이 외쳤다.

"리사, 그냥 가!"

"블램!?"

"작전이 우선이다!

여기서 발목 잡히면 끝이야. 적의 지원이 계속해서 몰려올 거라고!"

블램은 낙오한 자신을 버리라고 말하는 중이었다.

지금 말머리를 돌리면 꼼짝없이 싸우는 수밖에 없다.

작전의 성패가 리사의 결단에 달려 있었다.

작전을 우선시한다면 서연이랑 헤르카가 열어준 길을 내달리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블램은 죽는다.

블램을 구하러 간다면 유격대 전체가 위험해질 가능성이 컸다.

운명이 갈리는 찰나의 순간.

극도의 긴장으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때, 묘하게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서 블램으로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왜 못 막았지?

리사가 미리 경고까지 해줬잖아?

네리스도 막아낸 걸 블램이 막아내지 못 할 리가 없다.

한눈을 팔았거나 딴생각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면.

나는 거기서 오늘 아침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도 남자가 신경 쓰는 일이라면 하나뿐이다.

여자.

블램이 왜 뻔한 공격을 맞고 낙마했는가?

의문에 대한 답을 떠올린 순간.

내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네리스! 유격대를 이끌고 돌아와! 먼저 가 있을게."

"주군!?"

나는 정령의 도움을 받아 흑마 위에 똑바로 섰다.

리사는 이미 말머리를 돌리고 블램을 구하러 가는 중이었다.

리사라면 그럴 줄 알았어.

"여기서 죽게 둘 생각은 없다. 블램!"

"리사……! 날 놓고 가라니까!"

재밌게도 리사와 나는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블램을 구한다.

내가 리사를 대신해서 모두에게 지시를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서연아!"

"듣고 있어. 오빠!"

"목표 변경이다! 이 마물들 섬멸해.

잘 해내면 꼬옥 안아줄게!"

"……."

서연이 작두를 꺼냈다.

그녀의 하나뿐인 날개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온다.

서연은 직접 내려가서 포악한 오물을 도륙 내기 시작했다.

나는 블램 곁으로 갈 준비를 했다.

이스티의 유니크 스킬, <공간 도약>이라면.

순식간에 다다를 수 있다……!

팔색 조개 성에서 카렌과 연습했던 때를 떠올린다.

도약 지점과 착지 지점을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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