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 이세계 최면물-300화 (300/414)
  • 모두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300회

    용사의 절망

    "가능해.

    오히려 그러려고 지금까지 기다린 거 아냐?"

    "그래. 우리는 앉아서 시간을 번 셈이다.

    반마신을 이쪽 편에 들이는 일에 성공했으니 나머지는 일사천리.

    우리는 지금까지 쉬면서 온존한 체력으로, 적진을 단숨에 돌파하면 된다."

    "말은 쉽지만……."

    브루노가 말끝을 흐렸다.

    리사의 강함을 고려해도 대담한 계획이다.

    주저하는 사람이 나와도 이상할 게 없었다.

    "저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경계 담당인 바커스는 생각이 다른 듯했다.

    바커스는 담담하게 말했다.

    "마왕군의 움직임이 활발합니다.

    이제부터 들키지 않고 나아가는 건 불가능하겠죠.

    상대는 우리의 정확한 위치는 몰라도, 어느 정도 거리에 있는지 가늠해서 대비하고 있을 게 분명하고요.

    이쪽은 수가 적어서 애초에 할 수 있는 게 적습니다."

    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해."

    "상대의 예상을 웃도는 화력과 속도로 돌파할 수만 있다면,

    방비가 단단해지기 전에 뚫어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박서연의 협력을 얻어냈을 때 이야기지만."

    앙겔이 끼어들었다.

    그는 날 보며 말했다.

    "얼마나 단단한 고삐를 채웠는지 내 눈으로 보고 싶다. 데칼.

    가능하겠지?"

    모두의 이목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나는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보러."

    서연이 모두와 공존할 수 있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순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맞닥뜨려 보기 전까지 알 수 없는 것도 있다.

    다소 거친 채찍질이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배에 힘을 넣고 앞장서서 걸었다.

    서연이 감금된 창고까지.

    언뜻 보면 낡은 저택과 별 차이도 없는 허름한 건물.

    토니우스는 보자마자 탄성을 질렀다.

    "촘촘한 결계다…….

    헤르카 양이 이걸?"

    "어렵게 잡았는데 탈출하면 안 되니까.

    제한된 공간을 단단히 붙들어 놓는 원리로 봉인했어. 그래서, 풀어주면 다시는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없어.

    말뚝도 없어졌을 테니……."

    "문을 여는 순간,

    서연이는 자유의 몸이 된다는 거지?"

    "응."

    다들 긴장한 듯했다.

    나는 문으로 걸어가는 리사를 따라가서 붙잡았다.

    "데칼?"

    "내가 직접 열겠어."

    "결과에 책임지겠다는 뜻인가.

    좋은 자세다."

    아니…….

    그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문을 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만은 내가 해야 한다.

    꺼려지는 건 사실이다.

    현대의 서연이는 이제 없다.

    문 너머에 있는 건 내가 알면서도 모르는 또 다른 서연이.

    아무도 보지 못한 광기의 바닷속에 잠들어 있다가 마침내 깨어난 새로운 자아라고 해도 좋다.

    나는 문을 열어서, 광기의 반마신을 풀어 놓았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언뜻 봤을 때는.

    속으로 시간을 센다.

    왜 모습을 안 드러내지?

    "오빠."

    뒤에서 서연이 목소리가 들렸다.

    뒤에서!?

    백 허그를 당한 나는 소름이 돋아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언제 나온 거야?

    "아하하! 놀라기는. 사랑하는 오빠, 오라버니, 현우 씨♥

    기다리고 있었어. 오빠도 나 보고 싶었지? 말 안 해도 알아. 오빠의 심장 소리가 그렇게 말하는걸."

    서연은 내 목에 작두를 들이밀며 깔깔 웃었다.

    누가 봐도 인질극처럼 보였다.

    헤르카가 날 가리키며 소리쳤다.

    "아!!

    데칼이 인질로 잡혔어!"

    나는 본능적으로 리사를 쳐다봤다.

    리사는 팔짱 낀 채 날 보고 있었다.

    "리, 리사…!"

    "긴장하지 마. 현우 오빠.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살짝 장난치는 거니까."

    "작두날이 목에 닿고 있는데!?"

    "앗. 몸부림치면 안 돼.

    실수로 손 꺾어버릴지도 몰라."

    그때, 네리스의 흑마가 포효했다.

    네리스를 태운 흑마는 지면을 박차고 매섭게 달려들었다.

    서연은 나보다 몸집도 작으면서 춤추듯 자연스럽게 내 몸을 끌어당긴다.

    숙련된 투우사처럼 흑마의 돌진을 피하지만, 네리스는 예상했다는 듯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흡!"

    네리스가 창을 내지른다.

    서연은 작두로 창을 받아냈지만, 놀란 표정이었다.

    굉장한 기세의 찌르기였다.

    아주 정밀하게 서연의 팔을 노린.

    "제가 성장하지 않고 예전과 같을 줄 알았습니까?

    전처럼 쉽게 내주지는 않습니다."

    "그 가슴으로 성장할 일이 더 남았다니, 기분 나빠요."

    "하찮은 도발이군요.

    이번에는 경고로 그쳤지만, 다음에는 막을 수 없게 찌를 겁니다."

    "……."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상황.

    뜻밖에 먼저 백기를 든 건 서연이었다.

    "장난이에요.

    제가 오빠를 다치게 할 리 없잖아요?"

    서연은 작두를 땅에 꽂았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네리스가 달려왔다.

    "네리스뿐이야!"

    나는 네리스를 꼬옥 안고 매달렸다.

    "……다들 봅니다."

    아차. 서연은?

    서연은 의외로 다른 사람을 보고 있었다.

    벨리사 크라멜.

    왕국 최강의 용사. 서연의 사정 관리 계획을 어그러뜨린 장본인이기도 했다.

    모두 서연에게 주목했다.

    나도 서연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

    "확실하게 못 박아둘게요.

    좀 전에 보여드렸다시피 저는 여러분 편이 아니에요.

    절대적으로, 영구적으로, 항구적으로 오빠 편.

    마음 같아선 이대로 오빠를 데려가고 싶지만, 오빠가 바라지 않으니까 하지 않았을 뿐. 사이좋게 지낼 생각은 전혀 없어요."

    리사는 팔을 풀고 말했다.

    "잘됐군.

    이쪽도 너를 동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대로 날개를 펼쳤으면 내가 널 벴을 거다."

    잘난 척도, 허세도 아니다.

    리사가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는 부자연스러운 인질극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날아서 도망치려고 했다면 언제든 검을 뽑을 준비가 돼 있었던 거다.

    서연은 앞으로 걸어 나가서, 리사와 대치했다.

    "해보겠다면 말리지 않겠다."

    말려야 하나?

    서연은 검은 눈으로 리사를 뚫어지게 보다가 말했다.

    "혹시…… 오빠의 현 여자친구?"

    리사가 동요했다.

    투구를 쓰고 있지만,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리사의 동요는 겉으로 드러났다.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요?"

    "아니…."

    서연은 리사를 무시하고 계속 말했다.

    "저한테는 남들 눈에 안 보이는 촉각이 있거든요.

    누가 가장 많이 현우 오빠의 사랑을 받았는지 느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숨겨도 소용없어요. 좀 전까지도 오빠의 사랑, 듬뿍 받았죠?"

    "……."

    그게 뭐야. 초능력이냐?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는 거랑 관계있을지도.

    "그렇다면 어쩔 테지?"

    리사는 솔직히 인정했다.

    "네 말대로, 내가 데칼의 연인이다.

    하지만 지금 그 얘기는 상관없다. 내가 데칼과 어떤 사이라도, 너와는 관계없어."

    "관계있어요. 현우 오빠를 가장 사랑하는 건 나. 사랑받는 것도 나. 현우 오빠가 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려면,

    현 여자친구의 존재는 걸림돌이에요."

    "알기 쉽군. 그래서 날 제거할 셈인가?"

    "아뇨."

    서연은 생글생글 웃었다.

    리사의 어깨에서 힘이 쭉 빠진 듯 보였다.

    "……그럼 뭐지?"

    "보아하니 제 도움이 필요하신 것 같은데.

    도와주는 대가로 오빠와 단둘이 오붓하게 있는 걸 허락해 주세요! 현 여자친구님."

    "……뭐?"

    "정말 가슴 아픈 부탁이라는 건 알지만,

    우리가 오빠를 사랑하는 크기를 비교해본다면 너무나 당연한 요구겠죠.

    어차피 현우 오빠는 곧 제게 사정 관리를 부탁하며, 당신을 차버리겠지만……. 으응. 그전까지는, 그래도 같은 남자를 사랑한 사이로서

    저도 예의를 지킬게요."

    "대체 무슨 소리냐.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라."

    리사는 진심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요컨대,

    현우 오빠가 저랑 바람피울 수 있게 허락해 주면, 도와준다는 거예요."

    "……."

    나는 둘 사이에 비집고 들어갔다.

    지켜보려고 했지만, 서연이 더 말하게 뒀다간 무슨 논란이 될 발언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오빠! 오빠도 기쁘지?

    지금 허락받아낼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다들 놀라잖아.

    순서대로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

    "순서대로?"

    서연은 대원들 쪽으로 몸을 돌리고, 예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현우 오빠의 전 여자친구.

    그리고 미래의 하나뿐인 부인, 박서연입니다. 잘 부탁해요."

    "……."

    앙겔이 말했다.

    "……고삐가 너무 단단해서 미친 거 아니냐?"

    "이게 그나마 정상이라고 생각해 줘."

    "오빠도 참. 부끄럽게……."

    ……대체 왜 부끄러워하는 거야?

    "평소보다 긴장해서 오빠 생각을 3초씩이나 못한 나쁜 서연이를 배려해주다니.

    현우 오빠 너무 자상해……♥"

    "……'미래의 하나뿐인 부인'은 뭐야.

    내 주변 여자들을 하나씩 제거할 생각은 아니겠지?"

    "……."

    서연은 미소 짓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순한 맛이 됐어도 서연은 서연이.

    자연스럽게 섞일지도 모른다고 기대한 내가 바보였다.

    하지만, 그래도…….

    행복해 보인다.

    내 곁에서.

    나는 서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연은 내 품에 와락 안겨서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비볐다.

    "오빠 냄새……. 좋아…. 오빠……. 다시는 떨어지지 말자. 우리."

    "……."

    나는 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리사를 바라봤다.

    리사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괜찮은 건가. 데칼."

    "……원하는 대로 해주면 문제없을 거야."

    "애초에 그대는,

    나 이외의 여자에게 한눈팔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는 한가?"

    "그래 줬으면 좋겠어?"

    "그냥 궁금했을 뿐이다.

    서연. 들어라. 한 번만 말하겠다."

    서연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허락해주는 거예요?"

    "허락하겠다. 데칼의 현 여자친구로서.

    박서연과 데칼의 관계에 일절 간섭하지 않겠다. ……이러면 되는 거지?"

    "벨리사! 고마워요."

    서연이 내 품에서 나와 리사의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기쁜가?"

    "기뻐요! 오빠 곁에 있을 수 있어서, 웃음이 멈추지 않아요. 에헤헤."

    리사는 투구를 벗었다.

    리사……?

    "안심해라.

    네가 사랑하는 오빠는 아무도 빼앗지 않아.

    하지만 우리가 실패하면 빼앗길 거다."

    "……."

    "데칼을 지키기 위해. 모두를 지키기 위해.

    동료가 되어준다면 든든할 거다."

    "동료? 아까는……."

    "그래. 아까까지는 네가 우리의 목적에 도움이 될 수는 있어도 뜻을 함께하지는 못 할 거라고 생각했지.

    지금은 다르다. 잃는 게 두려운 사람은 용기를 낼 수 있어."

    나는 말 없이 감탄했다.

    서연이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는 건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다른 사람에게 그녀는 다루기 힘든,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 같은 것.

    멀리하려고 했으면 했지 가까이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좀처럼 없다.

    하지만 리사는 자기가 생각해낸 작전처럼 용감하게 정면으로 돌파했다.

    서연의 마음에 발을 내디뎠다.

    아주 용감하고 멋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오빠 말고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요.

    그래도 상관없어요?"

    "너는 한 번 마왕의 편린에 오염되었지만,

    인간성을 되찾고 돌아왔다. 네가 사랑하는 오빠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힘을 빌려줘."

    "좋아요."

    서연은 리사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용사와 반마신의 동맹이 결성되는 순간이었다.

    "오빠가 당신한테 빠져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아요."

    "그, 그러니까……. 그 얘기는 관계없다."

    투구가 없어서, 리사가 수줍어하는 얼굴이 다 보였다.

    "마왕성까지 길을 뚫어줄게요.

    뒤돌아보지 말고 달려요."

    "알았다."

    리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대원들을 돌아봤다.

    "모두 준비됐나.

    결전이다."

    "옛!"

    대원들의 기운찬 대답과 함께.

    우리는 말을 타고 이름 없는 마을을 나섰다.

    헤르카와 서연이 나란히 하늘을 날고 있다.

    과장 좀 보태서 아군 전투기가 제공권을 잡고 있는 걸 보는 기분이다.

    그런 걸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이런 든든한 기분 아닐까?

    나는 네리스가 모는 흑마에 타고 선두를 달리는 리사의 뒤를 따른다.

    "네리스. 아까 도와줘서 고마워."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다치지 않게 조심해야 해."

    "힘을 아끼면 마왕을 쓰러뜨릴 수 없어요."

    나는 뒤에서 네리스를 꼭 안았다.

    "마왕은 내가 쓰러뜨린다."

    "……!"

    "너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네, 주군.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전쟁의 종막.

    이 작전의 성패로 인간과 마물, 둘 중 하나는 세계의 끄트머리로 밀려나겠지.

    하지만 내 상대는 괴물이 아니다.

    괴물을 쓰러뜨리는 건 용사.

    내가 상대하는 건 지금쯤 성에서 예쁜 자태를 뽐내고 있을 마왕뿐.

    제르미나가 시아의 계획을 어디까지 알아차렸는지는 모른다.

    확실한 건 내가 마왕을 손에 넣었을 때 제르미나를 신의 옥좌에서 떨어뜨릴 힘을 갖추게 된다는 거다.

    이게 두 번째다.

    최면으로 여자를, 여신을 긁어모아 여신 중의 여신 제르미나에게 송곳니를 드러내는 것은.

    전에는 내가 졌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말을 타고 거침없이 평야를 내달리는 리사의 등을 보고 있으면,

    이번에는 상대가 누구라도 질 것 같지 않았다.

    [작품후기]

    대이최가 300회를 맞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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