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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세계 최면물-284화 (284/414)

"좋은 것?"284회

"너라면 이해하겠지. 이름 없는 신이여.

파괴의 여신은 금제를 깨려 하고 있다! 우리 마신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 정도로 너는, 파괴의 여신에게 큰 치욕을 안겨주었다."

"금제를?"

"어떤 마신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여신의 금제.

나는 과거, 제르미나를 협박해서 자신에게 금제를 걸도록 만들었다.

금제의 내용은 앞으로 나와 시아에게 간섭하지 않는 것.

하지만 제르미나는 금제의 허점을 이용해서 즉시 내 뒤통수를 쳤고,

나는 그렇게 죽었다.

이제는 마신과 손잡고 금제를 풀 생각이라고 한다.

놀란 건 처음뿐이었다.

그 간사한 년이라면 하고도 남는다.

겉으로는 공명정대한 척하기를 좋아하지만, 돌아서면 바로 뒤에서 칼을 꽂는 여신이니까.

예쁘기는 기가 막히게 예뻐서, 치욕을 주는 보람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금제를 풀면 제르미나가 뭘 할지 너무 뻔하게 예상된다.

지금까지 건드릴 수 없었던 나와 시아를 죽이러 오겠지.

상대가 움직이고 있다면 이쪽도 서두를 뿐이다.

"잘 알았어."

"자. 얘기는 끝이다! 나를 죽여봐라!"

리사는 두 걸음 앞으로 가서, 검을 바로 쥐었다.

"크라멜 가, 벨리사 크라멜.

고통 없이 보내줄 것을 약속한다."

"후후후, 하하하! 새파랗게 어린 년이 고통을 논하느냐!

어디 그 검을 나한테 박아 봐라!"

가르키소스의 기백에 살갗이 떨리는 것 같았다.

도끼 마신은 미쳐 날뛰는 흉포한 그림자가 되어 리사에게 쇄도한다.

"……<억새>"

리사가 처음으로 스킬을 사용했다.

리사의 참격에서 뻗어 나간 무형의 에너지가 보이지 않는 파도처럼 공간을 떨리게 하고,

그 끝에 닿은 가르키소스는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리사는 가르키소스의 최후를 마지막까지 지켜보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끝났다.

긴장이 풀리자 어지러움이 닥쳤다.

리사는 깔끔하게 납검하고 이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작전은 성공했다.

움직일 수 있는 자는 도와라. 지금부터 반마신을 옮긴다."

귀환이다.

집이 십 분 거리에 있다는 건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리사에 비해 별로 한 것도 없는데, 피로가 몰려와서 물병에 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숨 돌린 후.

나는 마케르 형제를 도와 서연이를 리사의 말 위에 짐더미처럼 얹었다.

돌아가는 길은 천천히, 오이아의 말과 나란히 걸었다.

그녀의 뒤에는 다친 네리스가 있었다.

"오이아. 네리스는 좀 어때?"

"쉬면 나을 거야.

다행히 급소는 피했어. 보기보다 튼튼한 갑옷이네."

성추행도 못 막는 변태 갑옷이라고 놀렸는데, 반성해야겠다.

네리스의 목숨을 제대로 지켜주었다.

안심했더니 잔소리가 목까지 치고 올라왔다.

"네리스."

"……네. 주군."

"다시는 그러지 마."

나한테는 빛의 가호가 있다.

이 가호가 꺼진다고 해도, 여차하면 여신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네리스가 목숨을 걸고 날 지킬 필요는 없었다.

그래…….

그런 걸 계산하고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누구도 다치지 않을 수 있었으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주군, 저는."

"알아. 기사의 책무를 다했다는 거잖아?"

"아닙니다."

어?

"그럼 뭔데?"

네리스는 오이아의 등에 힘없이 몸을 맡긴 채,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데칼을 좋아하니까, 지킨 겁니다."

지금,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나?

네리스가 날 지킬 때도 주군이 아니라 '데칼'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나는 흠칫하고 오이아를 봤다.

오이아는 빨개진 얼굴로 소리 내는 걸 견디고 있었다.

놀리기 3초 전 같은 표정이다.

"꺄악! 에이미, 에이미. 지금 들었어?"

"주군과 기사, 금단의 사랑!"

예상은 적중했다.

머릿속이 동화 나라인 두 여자 덕분에 몸에서 열이 후끈 올라왔다.

꽤 쑥스럽다.

"……저는 부상자이므로 얌전히 휴식하겠습니다."

아. 네리스!

부상을 핑계로 눈을 감았어!

"용사님! 용사님.

사랑하는 남자친구가 빼앗겨 버려요!"

"떠들지 마라.

마을에 마물이 숨어있을지도 몰라."

"힝."

리사는 분홍빛 분위기를 단숨에 일축해버렸지만,

에이미와 오이아는 작은 목소리로 쑥덕거리며 웃음꽃을 피웠다.

……네리스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후회할 거면 하지 말지 그랬냐.

그래도 내가 흘리듯 한 말을 기억하고 마음 써 주었다는 것은 솔직히 기뻤다.

"리사.

아까 못 보던 스킬을 쓰던데. 그건 뭐였어?"

"……응? 아, <억새> 말인가?"

리사가 보이지 않는 참격을 날려서 공간을 가르는 건 몇 번이나 봤지만,

억새는 마치 부채꼴로 참격의 파동을 일으켜 밀어버리는 느낌?

무시무시하기도 하고 신기한 스킬이었다.

<육섬팔뢰>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 스킬에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가는 길에 들어도 좋을 것 같았다.

"나도 흥미 있다.

새로운 검 기술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몰라."

블램이 말했다.

"음…….

그 스킬에 재밌는 이야깃거리는 없다. 그래도 듣고 싶나?"

"듣고 싶어.

역시, 뼈를 깎는 노력으로 배운 거야?"

"그냥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보고 만든 스킬이다."

…….

괜히 물어봤다.

소소하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기대했는데, 무슨 위인전이냐?

"기가 죽는군……."

블램의 어깨가 추욱 쳐졌다.

리사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

"먼저 기본기를 충실하게 다져라.

그러면 스킬은 대충 조합해서 만들 수 있게 돼."

정론이다. 아주 옳은 말이다.

그 충실한 기본기라는 게,

공간을 가르는 참격을 기본 공격으로 할 수 있는 수준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면 말이지.

시아는 대체 뭘 키운 거야?

마왕과 함께, 제르미나 전(戰) 비장의 카드라고는 하나,

리사는 인간의 몸으로 내려온 검의 여신 같았다.

검의 여신…….

신도 한때는 인간이라는 걸 생각하면, 나중에 신이 되어 불로불사를 얻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어쩌면 나는, 앞으로 검의 여신이 될 여자의 인간 시절 모습을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사님!"

브루노와 바커스가 이쪽을 발견하고 뛰어왔다.

"작전 성공하셨군요!"

"믿고 있었습니다!"

"장소는 마련했나?"

"예!"

"헤르카. 이 말뚝은 언제까지 남지?"

헤르카가 의식 마법으로 꽂아버린 빛의 말뚝.

목표가 달성된 지금도 서연의 허벅지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내가 제단을 철거하기 전까지."

"당분간 얌전히 있겠군."

토니우스는 그걸 듣고 더듬더듬 말했다.

"헤르카 양.

이건 용 사냥꾼의 마법이지요?

이런 대단한 고대 마법을 쓸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내 도움은 필요 없었던 거 아닙니까?"

"응? 아냐. 도움 됐어.

이 마법, 별로 쓰고 싶지도 않았어.

우는 아이 달래듯 불안정 변칙을 억눌러야 하지,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날아다니는 표적에 말뚝을 유도해야 한다고.

천재 대마법사인 내가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었지."

…….

생각해 보니, 마을에서 사출한 말뚝을 서연의 허벅지에 꽂다니…….

아무리 말뚝의 효과가 지대하다고 해도, 그런 실행법을 머리에 떠올리나?

이미 비범한 걸 넘어섰다.

"그렇게 말해주시니 고맙습니다……."

토니우스의 어깨도 축 처진다.

하하. 오늘 상식을 벗어난 천재들 때문에 범인 여럿 우는군.

나는 헤르카를 보고 말했다.

"헤르카.

네 덕에 작전이 성공했어. 기쁘지 않아?

좀 더 방방 뛸 줄 알았는데."

"……."

헤르카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조용히 말했다.

"……네리스가 다쳤으니까."

그렇구나.

헤르카도 계속 마음 쓰고 있었나 보다.

신경 안 쓰는 척하지만, 누구보다 의식하고 있었겠지.

멜브릿 때부터 경쟁한 사이니까.

"네리스는 좋아질 거야."

"흉터 남으면 어떡해? 지금도 가슴이 너무 커서 받아주는 사람 없을 텐데!

네리스, 혼기를 놓치고 노처녀가 되어버려."

"……."

뿌득.

네리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흉터 안 남을 거야. 걱정하지 마."

"……데칼. 피부 재생술이 특기였어?"

"아니. 하지만, 끝내주는 인맥을 가지고 있지."

"아."

"그리고, 네리스는 누구한테도 시집 안 보내."

"잘됐네! 네리스."

네리스는 일부러 고개를 돌리고, 계속 자는 척했다.

나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네리스를 인계받았다.

오이아는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정말로 괜찮겠어?

응급처치는 끝났지만, 안정을 취해야 하는데……."

"금방이야. 갔다 올게."

팔색 조개 성으로.

"아, 가는 김에 저녁에 먹을 도시락도 부탁해볼게."

"다녀오세요!!"

오이아가 90도로 머리를 숙였다.

…….

"괜찮지. 리사?"

"음.

조금 느긋하게 있어도 되겠지. 나도 체력을 소모해서 휴식이 필요해.

이제 모든 건 데칼, 네게 달렸다."

그랬지.

포획했으니, 남은 건 설득뿐.

설득이라는 이름의 섹스.

격렬한 보지 팡팡. 서연을 백화(白化)시키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허리를 흔드는 일만 남았다.

…….

남들에게 말할 수 있도록 필터링을 거치면,

요컨대 서연이를 제정신으로 되돌려야 한다.

기존에 걸었던 암시를 덧써서.

"그래.

잠이라도 좀 자고 있어. 리사.

네리스와 서연이는 나한테 맡기고."

"휴식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다.

푹 자도록 하겠어."

나는 대왕 팔색 조개를 꺼냈다.

그리고, 네리스와 함께 이동한다.

팔색 조개 성 1층 홀.

"아무도 없네요."

"부를 거야."

"네? 부른다니, 누구를……."

"우리 팔색 조개 성 최고의 의료진."

"주군. 설마……!"

"여신들, 모여!!"

벨라와 시아, 에페가 거의 동시에 홀에 모습을 나타냈다.

세 명의 여신이 강림!!

네리스는 황송한 나머지 그대로 굳어버렸다.

"뭐야. 주인님.

한바탕하고 왔어?"

"네리스가 좀 다쳤어. 도와줄 수 있는 여신 선착순 한 명."

"아저씨, 저요!"

시아가 손을 번쩍 든다.

"좋아. 빛의 여신님 당첨.

나와서 치료해줘."

"……."

시아가 다가오자 네리스는 어쩔 줄 모르며 당황했다.

"죄, 죄송합니다. 시아 님."

"왜 죄송해요?

우리는 같은 식구인데. 붕대 좀 풀게요."

"……네."

시아는 조심스럽게 네리스의 환부에 감긴 붕대를 풀었다.

으악. 보기에도 너무 아파 보였다.

건드려서 상처가 벌어졌는지 피가 질질 흐른다.

네리스는 창백한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치료할게요."

시아의 가늘고 예쁜 손에 은은한 빛이 깃들었다.

그 손으로 상처 부위를 감싸자…….

상처가 없어졌다.

"……어디 갔어?"

"나았어요!"

시아가 방긋 미소지었다.

"아니, 나은 게 아니라 특수 분장 떼어낸 수준이었는데?"

"으흠. 유능한 빛의 여신님이라고 우러러봐도 좋습니다."

시아는 가슴을 쭉 펴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네리스. 괜찮아?"

"……네.

좀 전까지 아팠던 게 거짓말 같습니다."

"기적이다!"

벨라는 한쪽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과장은.

성에 신이 셋이나 있는데, 기적 하나나 둘쯤 일으킬 수 있는 게 당연하지."

"너는 시아처럼 치료할 수 있어?"

"……못 해. 누구 때문에 별빛 조개 잃어버린 탓이야."

"아니, 아이템 없으면 힐도 못 해? 템빨 여신이었네."

"큿……!!"

벨라는 분한 듯 나를 노려본다.

아주 한 대 치겠는데?

"벨라. 스쾃 백 회. 실시."

"아니, 나 책 읽는 중이었는뎃……. 읏…… 흐윽……!!"

벨라는 예전에 가르쳐준 대로 겨드랑이를 까고, 열심히 엉덩이를 상하로 움직였다.

"별빛 조개…….

……으으, 도움이 안 되서 죄송해요. 현우님."

우리 보지 요정, 에페가 죄책감을 느낀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나는 에페를 보며 턱을 매만졌다.

"에페가 도움 안 되는 건 하루 이틀 일도 아니지."

"……."

"여신으로서 할 줄 아는 게 뭐야?"

구박하면서 에페의 뿔을 잡고 볼을 꼬집는다.

"아, 후읏……. 앙……."

"괴롭힘당하면서 느끼기?"

"……네……."

나는 뻔뻔하게 에페의 연갈색 젖탱이를 주물러대며 시아를 봤다.

"치료해줘서 고마워. 시아."

"우리 사랑하는 아저씨가 가는 길에,

즐거운 일만 가득하길 바라요."

아아. 정화된다.

빛의 여신님…….

"흐읏……. 14회……. 15회……."

"횟수 누가 말하래? 반항하는 거야? 200회 추가."

"……."

나는 에페의 연갈색 젖탱이를 꽈악 쥐어짜면서 말했다.

"에페. 꼴리게 하는 것 말고는 도움이 안 되는 네게 지령을 주마."

"아흐윽……. 네…."

"엘린에게 저녁에 도시락 필요할 것 같다고 전해 줘."

"알겠습니다. 현우 님……. 응……."

"가라. 보지 요정."

에페는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아저씨.

위험한 일은 없었나요?"

시아, 예리한데.

"마신이랑 만났어.

이름이, 모르키소스였나. 나머지 둘은……. 오, 오플, 요플래?"

"오플래시오, 플라나케스, 가르키소스입니다."

네리스가 또박또박 말하는 걸 보고 경악했다.

"아니, 어떻게 기억하냐. 그걸?"

"……마신의 정보를 잊을 수 있는 순수한 뇌가 부럽습니다. 주군."

"네리스, 우수한 학생이었지?"

"네. 나름대로."

시아는 마신의 이름을 곱씹으면서 골똘히 생각 중이었다.

"하급 마신들.

소속이 없고 전투에 잔뼈가 굵은 자들이네요.

왜 그들이 아저씨를?"

나는 시아에게 포획 작전 중 있었던 일을 상세히 얘기했다.

"……'금제를 깨려고 마신과 손잡았다'

이게 사실이라면, 엄청난 스캔들이에요."

"1급 신이 움직일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나도 물어보고 괜한 소리였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1급 신이 어디로 튈지 예상할 수 있을 리 없지.

만날 수 있을지부터 불분명하다.

"아저씨. 마왕을 잡는 모험은 잘 되어가고 있나요?"

"응."

시아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다행이에요. 아저씨가 즐거운 것 같아서.

제르미나가 마신을 부린다는 걸 알았으니, 저도 대책을 마련해 볼게요."

"그래. 이쪽은 걱정하지 마.

날 지켜주는 사람들이 워낙 유능하니까."

"기운 나도록, 축복 걸어드릴게요."

"오."

[여신의 축복이 몸을 감쌉니다]

[피로가 완전히 해소됩니다]

[온몸에서 힘이 솟습니다]

[능력치+10]

[능력치+5]

[능력치+5]

시아가 나와 네리스에게 버프를 주었다.

몸에서 힘이 넘쳤다.

"반나절은 지치지 않을 거예요."

"고마워. 그럼, 가볼게."

"네! 아저씨."

시아는 발돋움해서 내 양 볼에 뽀뽀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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