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회
나도 모르게 부르르, 몸이 떨렸다.
용사의 투기가 공간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잠시나마 그녀를 의심한 걸 반성하게 될 정도로 압도적인 무력이었다.
"네리스. 일어나면 안 돼…!"
뒤돌아보니 네리스가 휘청거리며 일어나고 있었다.
"네리스!"
나는 바로 네리스를 부축했다.
"물러나서 태세를 정비…해야 합니다.
말 정도는 탈 수 있습니다."
오이아가 네리스를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안 돼!
겨우 봉합했는데 움직이면 터질 거야. 돌이킬 수 없게 돼!"
"용사님이 기껏 벌어준 시간을 저 때문에 낭비할 수는……."
"네리스. 진정해!"
나는 네리스를 안았다.
불의 가호가 있는 나라도 사람의 체온은 정상적으로 느낄 수 있다.
네리스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주군. 저는……."
"가만히 있어.
아직 리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잖아."
네리스가 내 품에서 안정을 되찾고 숨을 고른다.
알고 있다.
박서연이 날아오른 이상, 포획 작전은 실패.
리사가 다친 대원을 놓고 갈 리도 없으니 여기서 결판이 날 때까지 싸우는 수밖에 없다.
네리스는 다쳐서 사경을 헤매는 중에도 대원들의 발목을 잡기 싫어서 온힘을 다해 일어난 거다.
리사가 나한테 그랬듯, 이제는 내가 네리스를 안심 시켜 줄 차례였다.
나는 네리스의 손을 잡고 등을 쓸어줬다.
"리사. 포획 작전은 실패했다.
지시를 내려 줘."
"……."
리사는 바람에 흩날리는 보랏빛 머리카락을 스스로 묶어서 포니테일로 정리한다.
적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빈틈을 내보일 뿐만 아니라,
싸울 준비를 하는 여유로움.
모두가 넋을 잃은 채 리사를 보고 있다.
"네리스의 판단은 전술적으로 옳다.
포획 작전은 실패. 날아다니는 반마신을 떨어뜨릴 방법은 없으니, 우리의 전략적 패배라고 할 수 있지."
"……."
"하지만 우리가 아쉬운 마음에, 눈앞에 있는 마신의 수급을 딴다면 실패를 만회할 성과가 된다."
리사는 말했다.
마신을 죽여버리겠다고.
가르키소스가 광소를 터뜨렸다.
"저 덜떨어진 여자를 취하지 못한 아쉬움을,
내 수급으로 달래겠다? 주제를 알 거라. 나는 500년간 죽음의 땅에서 군림한 악몽의 군주, 가르키소스!"
도끼 마신의 마력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악몽의 권능으로 너희를 멸하겠다!"
권능……!
"리사. 조심해!
권능은 마법이 아니야.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어!"
"……."
리사가 검을 바로 쥐었다.
가르키소스를 중심으로 까만 암흑이 펼쳐졌다.
빛 한점 들지 않는 검은 구체가 거대한 방이 되어 리사를 집어삼켰다.
"리사!"
"범위 밖으로 이탈한다!"
블램이 나를 붙잡았다.
네리스는 오이아와 에이미가 부축하고, 나는 거의 끌려가다시피 하며 외쳤다.
"기다려!
아직 리사가 저기에 있잖아!"
"알고 있다!
우선 저 정체 모를 것에서 멀어져야 해.
박서연도 잊지 마라. 널 노리고 온다. 자네까지 다치면 리사를 볼 낯이……!"
서연이 먹이를 낚아채는 매처럼 급강하했다.
블램은 나를 밀치고 대신 서연에게 붙잡혀 하늘 높이 올라갔다가 떨어졌다.
"블램!"
"크악!"
블램은 추락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외쳤다.
"벗어나. 빨리…!"
"타라! 데칼!"
젠장!
나는 앙겔의 말에 올라탔다.
구체는 주변 일대를 집어삼키고 확산을 멈췄지만, 박서연은 건재하다.
"오빠……! 오빠……!!"
서연이 눈을 부릅뜨고 나한테 날아온다.
으악. 암만 예뻐도 저러면 무서워!
"데칼한테 손대지 마!"
헤르카가 광탄을 쏟아붓는다.
서연은 궤도를 바꾸면서 높이 날아올랐다.
"나도 지원할게! 마을까지 후퇴하자. 차폐물이 많아서 쉽게 날아다닐 수 없을 거야!"
토니우스가 말을 타고 따라붙으며 말했다.
헤르카는 작두를 휘두르며 따라붙는 서연을 떨쳐내기 위해 속도를 냈다.
"아, 정말. 숨 쉴 시간도 안 주는 게 어딨어……!
한쪽밖에 없는 날개로 추진력도 없이 날아다니다니, 완전 사기 아냐!"
숨 쉴 시간도 없다면서 재잘재잘 떠드는 게 헤르카답다.
그때, 검은 구체에 쩍하고 금이 갔다.
리사다!
"기다려. 앙겔!
리사가 나왔어!"
"뭐?"
모두 말머리를 돌리고 주목한다.
박서연과 헤르카마저 공중에서 멈춘 채 구체를 바라봤다.
구체가 깨지고 나타난 건 의연하게 서 있는 리사.
그리고 팔 한쪽이 날아간 도끼 마신, 가르키소스였다.
30초 정도 지났나?
설마 그사이에 결판을 낸 거야?
리사는 마신에게 등을 돌리고 이쪽으로 뛰었다.
"토니우스. 촉수를 꺼내라!"
"예, 옛!"
토니우스가 촉수를 소환하자마자, 리사는 촉수를 밟고 도약했다.
서연은 아차 싶었는지 서둘러 날아오르려고 했지만,
"어딜!"
헤르카가 광탄을 쏟아부어 서연의 머리 위에 탄막을 쳤다.
그래도 서연과 리사에게는 거리가 꽤 있었는데,
리사의 참격은 공간을 가르고 한참 멀리 떨어져 있던 서연을 베어 넘겼다.
"닿았다."
피가 튀었다.
이번에도 리사가 노린 건 날개였다.
서연은 피투성이가 된 날개를 힘겹게 움직여 고도를 높인다.
리사는 착지한 다음 헤르카를 보고 외쳤다.
"대마법사!
그 정도면 떨어뜨릴 수 있겠지?"
"으엑, 나더러 하라고?!"
나는 함께 소리쳤다.
"헤르카! 멋진 모습 보여 줘!"
"후후후……."
헤르카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내 소중한 벗이 천재 소녀★를 의지한다면 어쩔 수 없지.
멋지게 떨어뜨려 줄 테니까. 받을 준비나 해!"
검까의 기동성이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헤르카는 아낌없이 마력을 소진하며 서연을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서연은 수세에 몰려 두리번거리며 광탄을 막기에 급급했다.
"잘한다. 헤르카!"
나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상대가 서연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저 녀석, 내가 다른 여자 응원하면 빡쳐서 돌아버리는 거 아냐?
"……우후. 우후후."
서연이 음침하게 웃는다.
"오빠. 오빠의 아끼는 장난감들이 저를 방해해요. 어쩌면 좋죠? 아아. 어쩌지?
저에게도 이 장난감을 아끼라고 한다면 몹시 어려울 거예요. 전 부수어버리고, 새로운 장난감을 찾아줄게요.
아니, 아냐……. 내가 오빠의 장난감이 되어줄게요. 우후후. 우리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거야."
……저렇게 긴말을 숨도 쉬지 않고 또박또박 말하는 것도 재주다.
"허세는!"
"헤르카! 조심해!"
"아하하하!"
서연이 헤르카의 광탄을 온몸으로 맞으면서 돌격했다.
"응악!? 히에엑! 데칼! 이 여자 뭐야! 살려주세욧! 천재 소녀 죽는다!"
서연의 작두가 종이 한 장 차이로 헤르카의 머리를 빗겨나간다.
조마조마한 광경이었다.
"이리 와~!
오빠가 아끼는 장난감이니까. 상냥하게 내장을 끄집어내 줄게♥"
"시러어어!!"
"……안 도와줘도 될까?"
리사는 오이아의 말에 타고 있는 네리스의 부상을 살피며 말했다.
"헤르카는 뭐라고 했지?"
"음…… 천재 소녀 죽는다!"
"그거 말고. '멋지게 떨어뜨려 줄 테니까. 받을 준비 하라'고 하지 않았나."
"……그랬지."
"헤르카가 아무런 근거 없이 그런 말을 했을 리 없다.
헤르카를 믿어라. 데칼."
"……."
이렇게 된 이상.
헤르카가 신이 나서 한 말이 아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헤르카와 서연이 싸우는 영역에는 아무도 끼어들 수 없다.
너무 높고 빠르기 때문이다.
"용사님! 가르키소스가 움직였습니다."
마케르가 소리쳤다.
"네리스가 다치지 않게 잘 보호해라.
너희는 내가 지키겠다."
리사는 검을 쥐고 묵묵히 말했다.
멋있어…….
반하겠다. 정말로.
"죽이겠다. 죽이겠다.
이 몸이 멸할지라도! 이 굴욕을 갚지 않고 어떻게 견딜쏘냐!"
가르키소스가 뛰기 시작한다.
바로 그때였다.
"악!"
헤르카가 추락해서 바닥에 꽂혔다.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헤르카가 떨어진 자리가 바로 마신 옆이었기 때문이다.
추락한 충격으로 움직이지도 못할 텐데.
아니, 저런 식으로 떨어졌는데 괜찮은 거야? 아파트 십 층 높이에서 머리부터 떨어진 것 같은데…!
가르키소스가 멈칫하며
피어오른 흙먼지 속으로 모습을 감춘다.
"리사! 구하러 가야 해!"
"좀 전까지 한 말은 잊어라.
전투원! 앙겔과 토니우스는 남고 나머지는 전부 헤르카를 구출하러 간다!"
"예!"
그때,
우리를 막아서는 것처럼 서연이 스스로 내려왔다.
붉은빛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압베트! 내 피를 써라!"
"예! 형님!"
마케르가 팔을 그어 피를 낸다.
압베트는 합장해서 마법을 시전.
피로 된 벽이 우리 모두를 지켜냈다.
압베트가 마법이 특기였다는 것도 놀랍지만, 날 지켜주기도 했던 서연이 마신 편에 서서 다시 이쪽을 공격했다.
그럼 다시 적인가?
원래부터 적이긴 했는데. 아, 시발 복잡해!
헤르카를 구하러 가야 하는데, 알 게 뭐야!
내 쪼그만 친구를 죽게 둘 순 없어!
"불의 종언!"
나는 서연의 날개에 불의 종언을 쐈다.
서연은 큰 공격을 한 직후라서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바로 그때, 흙먼지 속에서 마신이 튀어나와 도끼를 던졌다.
날 노리고 던진 도끼가 아니다.
도끼는 열선을 막아 서연의 몸을 지켰다.
아주 잠시뿐이었지만, 서연이 공격 범위에서 이탈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을 벌어다 주었다.
리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반마신과 마신이 협력하고 있군. 데칼. 어떻게 생각하지?"
"널 견제하기 위해서인 것 같아."
가르키소스는 부메랑처럼 돌아온 도끼를 잡고 자조적으로 웃었다.
표정도 없는 해골 바가지주제에 감정 표현이 참 풍부하다.
"설마 이런 꼴이 되어,
반마신과 협력하게 될 줄이야. 뼈가 되어 천년이라는 시간을 떠돌았지만, 별일을 다 겪는군."
서연은 붉은 눈으로 우리를 내려다보며 가르키소스에게 말했다.
"칭얼대지 마세요.
이쪽도 좋아서 도와준 게 아니니까요.
내가 사랑하는 오빠를 손에 넣을 때까지, 싸우다 죽어주세요."
"그 사랑하는 오빠란 놈이 널 죽이려 했다.
빚은 갚았으니 지시하지 마라."
"어머나? 눈알이 썩어서 안 보이시나 보죠.
방금 그건 우리 둘만의 격렬한 애정 표현이었어요."
……서연아.
죽이려고 한 것도 아니지만 애정 표현도 아니란다.
세상에 어느 미친놈이 애정 표현으로 레이저를 쏘냐?
"오빠. 서연이가 오빠의 사랑을 돌려주러 갈게요.
조금 아픈 스킨십일지도 모르지만, 참아주세요."
싫어!!
리사가 날 등지고 섰다.
"내 뒤에서 나오지 마라. 데칼."
"고마워. 리사."
"……."
서연의 눈빛이 차가워진다.
"방해돼. 죽어버려."
"온다! 산개 준비! 속전속결로 끝낸다!"
"옛!"
마케르 형제와 블램이 뛰쳐나갈 준비를 한 그때였다.
"헤르카가, 없어……?"
쓰러져 있어야 할 그녀가 없었다.
"!"
서연이 뒤돌아본 순간. 체크메이트였다.
어디선가 날아온, 빛으로 된 눈부신 말뚝이 서연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보기에도 아파 보이지만, 피는 튀지 않았다.
마치 육신이 아니라 영적인 무언가를 노리는 마법처럼.
"아아악……!!"
서연이 돌풍을 일으키며 절규했다.
심상치 않은 고통인 것 같았다.
말뚝 끝에는 긴 사슬이 달려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사슬이 어디로 향하는지 눈으로 쫓는다.
마을.
말뚝은 놀랍게도 이름 없는 마을에서 사출된 것 같았다.
헤르카는 서연보다 더 높은 곳에서 그녀를 유유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받을 준비 됐어?"
설마, 당한 척 연기한 건가?
적이 마무리 일격에 관심이 없을 거라는 걸 알고……!
놀라운 응용력이다.
저 말뚝 마법을 성공시키기 위해, 헤르카는
가르키소스가 감정적이라서 리사를 의식하리라는 것까지 계산에 넣고 연기를 했다.
서연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죽은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헤르카가 준비한 의식 마법은 터프한 서연이를 완전히 침묵시켰다.
"필리오테 가문의 천재 소녀, 헤르카 필리오테, 신을 두 번 무릎 꿇렸노랏!"
"잘했어! 헤르카!"
리사는 웃으며 말했다.
"받을 필요도 없었군."
"이 마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실전된 용 사냥꾼들의 마법!
내가 개량해서……."
헤르카가 공중에서 주절주절 떠드는 사이,
가르키소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우리를 보았다.
"……인간 여자.
지금, 왜 나를 공격하지 않았지?
네 실력이라면 이 거리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을 텐데."
"네가 우리 꼬마 아가씨를 공격하지 않았으니까."
리사다운 명쾌한 대답이었다.
"후."
가르키소스는 어깨가 떨릴 정도로 크게 웃었다.
"좋다. 그러한 불필요함을 감수하는 것도 인간.
한때는 군림하던 자로서, 그 명예로운 행동의 보상으로 좋은 걸 알려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