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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세계 최면물-263화 (263/414)
  • 263화

    ◎기묘한 오나홀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거센 파도에 맞은 듯한 충격이 온몸을 덮쳤다.

    하지만 정작 눈을 뜨고 보니 파도를 일으킨 건 네리스였다.

    물 대신 마물이 물결친다. 한 명의 창기병이 일으킨 파문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여파였다.

    네리스는 깨부수며 나아간다.

    오크들이 아우성치며 반격에 나섰지만, 네리스는 전차처럼 굳건했다.

    "하압!"

    마케르가 봉을 들고 혼자 마물 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위험하다고 말릴 틈도 없이.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마케르를 지켜보았다.

    여기 오크들은 위험해.

    공격성이 스켈레톤 워리어 이상.

    일제히 마케르에게 달라붙어 흉기를 휘두르는 모습은 마치 굶주릴 대로 굶주린 야수 무리 같았다.

    그러나, 마케르는 밀려오는 덩치를 혼자서 시원스럽게 밀어내고,

    봉을 휘두를 때마다 충격파를 일으키며 무장 오크들을 낙엽처럼 날리며 전장을 질주했다.

    "형! 나는 뭐 해!"

    "보이는 대로 죽여!"

    "그렇지!"

    압베트는 해야 할 일을 떠올린 것처럼 흑마에서 떨어져 나와 오크 두 마리를 맨손으로 잡고 뛴다.

    기교와 힘이 넘치는 형의 방식에 비해 압베트는 너무 저돌적이었다.

    똑같은 대머리지만, 딱 봐도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둘 중 같은 편이 될 사람을 고르라고 한다면 마케르를 고르겠지만,

    함께 사지를 돌파해야 한다면 압베트가 듬직하다.

    두 사람이 선봉으로 나서서 싸우는 모습을 보니 자신감이 차 올랐다.

    괜찮겠는데?

    상대가 천 마리든 만 마리든, 잡졸로는 용사 파티를 막을 수 없다.

    마왕을 치기 위해 모였으니까.

    당연한 사실이지만 눈으로 확인하니까 느낌이 새로웠다.

    "주군. 꽉 붙잡으세요."

    "어어……!"

    네리스가 투구를 쓰고 달린다.

    더 빠르게 달릴 수도 있었어?

    흑마는 어스름보다 검은 섬광이 되어 오크들을 무자비하게 꿰뚫고 길을 열었다.

    그 길로 유격대원들이 빠르게 다가온다.

    "길을 여느라 수고 많았다.

    역량 살상은 맡겨라!"

    블램과 앙겔이 호기롭게 나섰다.

    블램은 민첩한 검 놀림으로 적들을 도륙하고,

    앙겔은 착지와 동시에 지면을 박살 내면서 떠오른 수 십 체의 오크들을 주먹으로 패고 때리며 박살 내는 호쾌한 전투로

    마물들을 압도했다.

    "취익! 췩!"

    그때, 오크 무리가 무언가 움직임을 보였다.

    훈련받은 오크라는 걸 증명하듯 검과 방패를 든 놈들이 물량으로 압살하기 위해 밀려오고,

    뒤이어 화살 공격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나는 화살이 머리 위를 덮었을 때 살짝 위기감을 느꼈다.

    정령을 불러 보호막을 펼친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군.

    이 전장에는 헤르카가 있습니다."

    "어……!"

    경악했다.

    화살이 모두 공중에서 멈췄어!

    또 그녀의 독자적인 마법이다. 이런 건 멜브릿에서는 본 적도 없고 경험해본 적도 없다.

    마치 중력, 아니 염력?

    헤르카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위풍당당하게 마물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것이 너희가 치를 값이다."

    화살이 모두 되돌아간다.

    정확하게 활을 쏜 당사자에게.

    수 백 개의 화살이 다시 퍼져나가서 하늘이 개는 걸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크 무리가 순식간에 절반이 됐다.

    "역시 헤르카야! 귀여워! 최고야!"

    "리더! 떠들면서 시선 끌면 안 돼요."

    오이아가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긴장이 확 풀렸다.

    네리스의 뒷자리, 편안할 정도였다.

    "이만하면 됐다! 잔당은 내버려 둬. 뚫고 간다!"

    "예이!"

    한참 봉을 휘두르며 날뛰던 마케르가 홱 뛰어올라 말에 올라탄다.

    "이탈하겠습니다. 주군."

    "그래."

    대규모 오크 부대는 대량학살을 벌이고 떠나가는 우리를 망연자실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압베트가 시원하게 웃었다.

    "하하하! 꼴 좀 봐라!"

    나도 따라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딱히 한 일은 없지만, 마음이 들뜬다.

    "멋있었어. 네리스."

    "칭찬은 아껴두시길.

    이 정도는 후보생에게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요."

    그렇게 쿨한 점이 매력이라니까.

    우리는 쉴 새 없이 내달리면서 이러한 전투를 되풀이했다.

    길을 막는 마물을 일방적으로 도륙, 돌파.

    가끔 순서가 바뀔 때도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네리스가 돌파하고, 헤르카가 공간을 지배한다.

    안쪽으로 나아갈수록 마물은 강해졌고 종류도 많아졌지만, 이 필승 공식은 깨지지 않았다.

    "가고일 무리에 트롤 중장 부대입니다!"

    경계조가 소리친다.

    리사는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그녀를 따라가는 우리 모두 마찬가지였다.

    트롤이라는 괴물은 거대한 녹색 벽이었다. 보기만 해도 징그러운 피부 질감에 큰 덩치 때문에,

    모험가 시절 만났다면 뒤돌아보지도 않고 도망갈 자신이 있었다.

    거기에 하늘을 날아다니는 빔 쏘는 괴물이라니.

    이런 해괴망측한 놈들이랑 싸우면서, 우리가 꽤 깊숙이 들어왔다는 실감을 받았다.

    마물의 정예 부대인가?

    "하앗!"

    멜브릿의 검은 흑광.

    네리스 리케가 만드는 검은 빛이 견고한 성벽처럼 버티는 트롤들을 도미노처럼 쓰러뜨린다.

    헤르카는 공중에서 광탄을 폭격해서 몰살.

    그리고,

    가고일들이 쏘는 빔을 피하면서 여유롭게 웃기까지.

    "원거리 회피 기능은 완벽하거든?"

    마치 신형 전투기와 종이비행기의 싸움을 보는 것 같다.

    헤르카의 검까는 압도적인 기동력으로 가고일들을 유린한다.

    그녀에게 격추된 가고일이 소나기처럼 쏟아져내려 지상은 난장판이 되었다.

    "이런! 하늘에서 돌덩이가 떨어지는구나. 동생아!"

    "이걸 무기로 쓰자고. 형!"

    "더러울 것 같으니 나는 사양하마!"

    가고일 떼와 트롤 무리.

    어렵지 않게 돌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처음보다 시간이 걸린 건 사실이었다.

    리사는 트롤 부대가 충분히 멀어졌을 때 말을 멈췄다.

    "정지.

    말의 체력이 한계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 후 출발한다."

    네리스의 젖가슴과 헤어질 시간이다.

    아쉽군.

    나는 흑마에서 내려 막사 설치를 도왔다.

    작전이 너무 순조로워서 무서울 지경이다. 용사 유격대의 돌파력은 상상 초월이라서,

    분명히 내가 적이었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당황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강한 파티라도 휴식은 필요한 법.

    한계까지 뛴 말들은 불발탄처럼 온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후방지원팀은 즉시 말들의 체온이 떨어지지 않게 땀을 닦아낸다.

    헤르카는 대낮에 설치한 야영지가 들키지 않게 위장 결계 작업.

    나와 네리스는 막사 설치를 돕는다.

    한번 했던 일을 되풀이할 뿐이라서 간단했다.

    "헤르카는 대단한 여자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맞은편에 있던 토니우스가 대뜸 말했다.

    "우리 파티에 대단하지 않은 여자는 없잖아?"

    "하하하! 그건 그렇지.

    밤색 머리의 귀여운 꼬마 아가씨는 특히 대단해.

    헤르카의 마법 실력은 아주 환상적이야. 귀엽기도 하고…….

    결계 작업은 내 일이었는데, 할 일이 없어서 한가할 지경이네."

    인제 와서는 뼈저리게 깨닫는 중이다.

    자주 방어선 유지를 돕던 네리스가 잘 싸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헤르카는 낯선 환경에서 자기 능력을 십분 발휘하며 벌써 파티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리사가 지금까지 검을 한 번도 빼지 않은 것과 무관계하지도 않겠지.

    "나도 한가해.

    잡일만 돕고 있지."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용사님이 널 의지하는 건 옆에서 보기만 해도 알겠던걸."

    "……."

    아, 그랬지.

    나는 용사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너무 과대평가 받고 있을 뿐이야."

    멀리서 오이아가 손을 흔들었다.

    "데~칼!

    용사님이 불러!"

    토니우스는 그것 보라는 듯이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용사님이 과대평가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긴장하지 말고, 네 능력을 보여주라고.

    우리가 올바른 길로 갈 수 있게 이끌어 줘."

    "……."

    올바른 길이라.

    그래…….

    어쨌든 해야 할 일이 있지.

    나는 용사가 기다리는 임시 막사로 이동한다.

    리사는 내 시선을 피했다.

    응?

    ……뭔가 어색한데.

    아, 그때 리사한테 쫓겨난 것처럼 되어서 그렇구나.

    내심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나는 그저 리사를 덮칠까 봐, 서둘러 밖으로 나왔을 뿐인데.

    "작전 얘기를 위해 불렀다.

    ……문제 있나?"

    리사가 이럴 때 서투르다는 걸 느낀다.

    천하의 용사님도 나를 어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이 귀엽게 느껴진다.

    하긴.

    리사는 최면으로 인해 나를 의지하고 있지만,

    나는 좀처럼 속내를 열어 놓지 않는 남자.

    이 관계는 나한테 유리한 쪽으로 기울어 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용사님에게 손을 뻗으려면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했겠지.

    "없어."

    나는 짤막하게 답했다.

    리사는 지도 위에 놓인 표식을 옮기며 말했다.

    "우리는 예정대로 본대를 미끼로 사용해서, 적의 주력 부대가 이탈한 틈을 타

    본진을 기습하는 작전을 실행하고 있다.

    은밀 기동은 성공적이었고 현재는 적 본진에 침투 중이지. 이대로 최단 시간 안에 마왕성까지 쳐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상대도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그래. 첫 전투 이후로 시간이 꽤 흘렀지.

    마왕은 지금쯤 별동대가 움직였다는 걸 알아차렸을 거다."

    이제부터 쉽지 않은 싸움이 기다리고 있을 거란 얘기였다.

    지금까지 기습의 효과를 톡톡히 봤지만, 상대가 목 언저리에 칼날을 들이밀 때까지 숨만 쉬고 있을 리도 없다.

    "문제는, 반마신이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

    나는 이제 목표를 좁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제까지 반마신에 대한 걸 생각하고 있으면 대응이 늦어져."

    "무슨 뜻이야?"

    "이대로 쭉 나아가서 마왕을 칠지,

    반마신을 유인하며 교란 작전을 펼칠지 정해야 해."

    두 가지 다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란 얘기군.

    하나 정해야 한다면 마왕이다.

    서연은 어딨는지 알아낼 수 없으니까.

    내가 시아나 벨라 같은 신들에게 부탁해서 서연의 위치를 알아냈다고 해도, 그녀는 날개를 가지고 있다.

    아예 벨라를 부하처럼 부려서 차원 마법으로 추격전을 벌이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사로잡기는 굉장히 어렵다.

    그쪽에 너무 힘을 쏟았다간 마왕을 잡는다는 목적에서 너무 멀어지기도 하고.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이 넓은 땅에서 마왕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나아갈 수 있는 근거가 뭐야?"

    "이상한 말을 하는군.

    마왕은 마왕성에 있다."

    "가령 마왕이 몸을 숨기면 어떻게 돼?

    상대도 우리의 목적은 뻔히 알 거 아니냐. 만약 함정을 준비하고 숨어버린다면?"

    나는 현대에서 살다 왔기 때문에 마왕이 얼마나 권위 있는 마물의 우두머리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상대가 인간에 가깝다면, 그냥 도망치면 그만이잖아?

    "하나씩 대답하자면…….

    함정은 각오하는 수밖에 없어.

    우리는 적의 본진으로 쳐들어가서 이 전쟁을 최단기간에 끝내려 하고 있다.

    상대가 대비하지 않기를 바라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렇군.

    "나와 함께 하는 이상 모두 죽음을 벗 삼고 있는 것과 같아.

    한심하다고 환멸을 느껴도 좋다."

    "한심하지는 않아.

    지극히 용사다운 전술이라고 생각했어."

    함정은 감수한다.

    현명한 방법은 아니지만, 규격 외의 전투 능력을 갖추고 있는 괴물투성이 유격대에 딱 맞는 방침이다.

    물론 나한테「최면을 건다」는 비장의 수단이 없었다면 침착하게 있을 수 없었겠지만.

    "그럼, 마왕이 몸을 숨겼을 때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직접 가니까 숨을 수 없어."

    "그게 무슨 말이야?"

    "마왕이 나를 알아볼 수밖에 없듯이,

    나 역시 마왕을 알아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서로를 가리키는 나침반이야. 세상 끝에 있어도 찾아갈 수 있다."

    멋진데.

    용사와 마왕은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건가.

    설득력 있다.

    그렇다면 마왕은 어설프게 도망 다니거나 대역을 세우기보다

    확실하게 힘을 보강한 상태에서 용사를 맞서 치려고 할 거다.

    리사가 노리는 건 그거다.

    불리한 상황에서 싸우게 되겠지만 마왕과 싸울 기회 자체가 중요하다.

    그녀는 언제 올지 모를 이때를 위해서 검술을 단련했고, 그 경지는 시아가 극찬할 정도.

    하지만 아직 알 수 없는 건 마왕의 존재다.

    "마왕과 싸운 적 있어? 리사."

    "직접 싸운 적은 없다."

    "……이길 자신 있어?"

    "……."

    리사는 나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용사 앞에서, 그런 걸 묻나?

    대답은 뻔하다."

    "이긴다고?"

    "그래."

    "질 수도 있잖아. 맞지?"

    리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질문은 불쾌하다. 데칼.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대의 힘이 필요해."

    "그럼 솔직하게 말해.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된다고 쳐도, 나는 알아야지."

    "……."

    리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보이지 않는 위협에 대한 후각.

    그걸 믿고 날 여기에 들인 거 아니야?"

    "그대 말이 옳다.

    마왕의 마법은 본 적 있다. 나보다 우위야.

    준비하고 있는 상대와 싸웠을 때 이쪽의 승산은 낮겠지.

    하지만…… 나는 결사의 각오로 여기에 왔어. 데칼. 마왕을 쓰러뜨리고, 그대도 죽게 두지 않을 거다."

    그녀의 결의에 찬 눈동자가.

    내 품에 안겨 허덕이는 모습과 겹치는 바람에,

    나는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발기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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