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 이세계 최면물-253화 (253/414)
  • 253화

    "헤르카라면……. 그 헤르카 필리오테?"

    용사 파티의 일원들이 술렁인다.

    "왕국 제일의 마법사라는."

    "아직 어린애 같은데."

    "겉모습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지."

    헤르카는 가슴을 쭉 펴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 헤르카 필리오테야.

    잘 부탁해요. 선배님들."

    "귀여워~!"

    여자들이 소리치며 떠든다.

    여자들이라고 해도 내가 모르는 여자는 둘밖에 없었지만.

    그 둘은 평범한 용모였다. 다들 생각보다 연령대가 낮다. 후보생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

    "제 소개는 따로 필요 없겠죠.

    후보생 때부터 자주 이곳에 들러 도왔으니."

    "네리스는 여전하네."

    남자들은 네리스에게 주목한다.

    네리스가 예전에도 전선에 나와 마물과 싸우고 있다는 건 얼핏 들어 알고 있다.

    헤르카와 나는 처음이지만, 네리스는 이 공기가 익숙한 것 같다.

    두 사람 다음에 내가 주목 받았다.

    "누구였지?"

    "데칼…이라고 들었는데."

    "어디 가문?"

    리사는 이쪽을 보고 차분하게 말했다.

    "데칼.

    모두에게 널 소개해 줘."

    "가문은 없습니다. 이름은 데칼.

    모험가 생활 했었고, 멜브릿에서는 용 급, 학생회 소속 특별조사원이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다들 웃기 시작했다.

    음……?

    뭐가 잘못됐나?

    머리숱이 심히 없는─이라기보단 털이 없는─ 남자가 큭큭 웃으며 날 보았다.

    "소개한다는 건 그런 게 아니야. 데칼.

    여기에 후보생 시절, 용 급이 아니었던 녀석 따위 없다고.

    다이아몬드급 모험가도 셋이나 있지."

    다이아몬드급. 여기에?

    내 모험가 경력은 말하나 마나였네.

    여성 한 명이 거든다.

    "우리가 알 수 있게 말해줘.

    헤르카 필리오테야 최전선에 있어도 알 수 있는 유명인에, 네리스의 실력은 잘 알려져 있지만.

    너에 대해 아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특기는 불 마법 및 바람의 정령술입니다."

    "불……."

    ……다들 표정이 안 좋았다.

    "으음……."

    "불 마법이라……."

    반응이 왜 이래?

    내가 뭐 잘못했나?

    "네리스. 뭐 문제 있어?"

    나는 네리스에게 소곤거리며 물었다.

    "불 마법사는 괴팍해서 맞춰주기 힘들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자칫하면 아군까지 태워버린다는 인상도 있죠."

    "……."

    아바도 그런 얘기 했던 것 같다.

    불 마법을 다루는 형이 있으니까 정확히 인식을 꿰고 있었군.

    사람을 태운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같은 편을 다치게 한 적은 없다.

    유니크 스킬까지 손에 넣었으니 마법 제어에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당장 신뢰할 수 있는 불 마법사인지 의심받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데칼의 마법 실력까지는 모르지만,

    그는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야."

    리사의 말 한마디로, 분위기가 변했다.

    다들 나한테 호의적인 눈빛을 보내고 있다.

    용사가 하는 말은 역시 무게가 다른데. 그녀가 날 의지한다는데, 누가 날 의심하겠어?

    최면은 역시 최고야.

    "블램은 아직인가?"

    "네. 아직이에요."

    "그럼 너희들 소개도 해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할 수 있게."

    "안녕!"

    사자 갈기처럼 풍성한 머리카락을 한 여성이 밝은 얼굴로 인사한다.

    "날 포함해서 이쪽에 있는 네 명은 후방지원팀 CA2.

    각자 치료, 조사, 경계의 스페셜리스트야. 나는 팀 리더 오이아. 메딕 오이아 및 기타 등등이라고 기억해 줘."

    "기타 등등이라니……."

    여자 두 명은 메딕이었군.

    유심히 보니 복장에서 알 수 있었다.

    옷에 달린 무수한 주머니와 작은 가방들, 포션이 주렁주렁 걸린 허리띠.

    허벅지 부근에는 짧은 칼을 수납하는 주머니도 보였다.

    "앙겔이다."

    오이아 맞은편에 있는 체격 좋은 남자가 말을 꺼냈다.

    그는 군인처럼 짧게 깎은 머리에 과묵한 인상으로, 실제 이 장소에서 말을 꺼내는 건 처음이었다.

    "그게 다예요? 좀 더 친절하게 설명해줘야죠. 앙겔 씨."

    오이아가 핀잔을 주자, 앙겔은 한숨을 쉬고 말을 덧붙였다.

    "모험가다."

    "그는 블램 씨와 마찬가지로 다이아몬드급 모험가.

    데이툰의 전차라고 불릴 정도로 온몸이 무기인 사람이에요!"

    보다 못한 오이아가 설명을 막 덧붙이자, 앙겔은 질색하며 말했다.

    "그런 얘기는 하지 않아도 된다."

    "자랑할 수 있는 건 해야죠."

    블램 선배도 다이아몬드 등급이었단 얘긴가?

    아무렇지 않게 스쳐 지나간 사람이 이스티와 같은 등급의 모험가였다니.

    전선에서 마왕군과 싸우고 있는 만큼 실력은 이스티 이상일지도 모른다.

    이거 참.

    날 모험가라고 소개했던 게 부끄러운걸.

    앙겔 옆에 있던 빼빼 마른 남성이 입을 열었다.

    "난 토니우스라고 해.

    소환술을 다루지. 원래 이 팀은 아니었는데……. 그 설명은 용사님이 해주실 거야."

    신경질적인 겉모습이랑 달리 온화하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난 마케르. 얘는 압베트. 내 동생이야."

    마케르. 압베트.

    두 사람은 쌍둥이 형제였다.

    머리까지 빡빡이 깎아 놓아서, 구분하기 어려울 듯싶었다.

    "아, 참고로 다이아몬드 등급은 형 쪽이야.

    나는 모험가였던 적 없어."

    ……동생 쪽이 압베트였지?

    압베트는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은 구분하기 어려워도,

    나중에는 한 번에 구분할 수 있게 될 거야."

    뭔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구분할 수 있을 때까지 괴롭혀 주겠다는 뜻인가?

    물론, 그런 뉘앙스는 아니었다.

    예상은 했지만, 남자가 많군.

    네리스와 헤르카가 없었더라면 메딕을 빼고 직접 전투에 나서는 여성은 벨리사 뿐.

    파티의 홍일점이다.

    이세계는 마법이 있어서 오히려 여자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건만.

    기대가 빗나가서 아쉽다.

    아니, 어쩌면 이쪽이 나을지도 모른다.

    어중간한 여자들은 있어 봐야 벨리사와 비교돼서 빛바랠 뿐.

    실제로 오이아와 메딕 한 명은 그렇게 됐다.

    네리스와 헤르카는 자기 매력을 확고하게 굳히고 있지만,

    유격대에 그런 여자들이 널려 있는 상황도 이상하지.

    "리사. 나 왔어."

    그때, 나처럼 용사를 친근하게 부르며 누군가가 방에 들어온다.

    장발 머리의 젊은 남성 블램이었다.

    다이아몬드 등급이라는…….

    "블램.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없으면 얘기를 시작할 수 없잖아."

    "볼일이 좀 길어져서."

    흐음.

    두 사람은 꽤 친근해 보였다.

    "서로 소개할 시간도 필요하겠지.

    우리는 이미 인사를 나누었어. 그렇지 않나. 데칼?"

    블램이 나와 눈을 마주친다.

    "그랬지."

    리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전부 모였군.

    여기 모인 사람들은 내가 직접 선별했다.

    이번 작전을 위해 너희들의 목숨을 걸어주길 바란다."

    "작전 내용은?"

    블램이 되묻는다.

    리사는 테이블에 있는 지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왕 토벌."

    토니우스는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이 인원으로 가능한 겁니까?

    마왕을 친다면 데려오고 싶은 사람이 서너 명 생각나는데요."

    "방어선 유지도 중요한 임무야.

    우리가 마왕을 친다고 해도 방어선이 무너지거나 멜브릿이 공격당한다면, 모든 게 의미 없어져."

    "하지만 승산이 있기에 이 작전을 세웠겠지? 리사."

    또 리사라고 하네.

    리사는 블룸인가 볼룸이랑 무슨 사이야?

    단순히 동료겠지. 당연히 그렇겠지.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쓴다.

    지금은 중요한 얘기 중이니까.

    나는 잠자코 듣기로 했다.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판단하는 데 있어서, 현재 상황을 파악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으니까.

    "음.

    너희도 알다시피, 마왕군의 방비가 허술해졌어.

    놈들은 멜브릿에 위장 강습을 강행.

    대규모 의식 마법에, 붉은 영혼석을 흡수한 종말 선구자까지 이용했지."

    "멜브릿에?"

    "그런 일이……!"

    "자세히는 몰랐는데. 종말 선구자까지 갔었다고요? 난리가 났겠는데."

    다들 술렁인다.

    서연이한테 두부처럼 토막 난 그것들이 그렇게 강했나 보다.

    "사망자가 꽤 나왔겠는걸."

    블램이 중얼거렸다.

    "아니. 그렇지도 않아.

    그 얘기는 데칼이 자세히 해 줄 거야."

    엥?

    리사가 갑자기 나한테 발언권을 던졌다.

    "데칼은 학생회 특별 조사원으로,

    마왕군의 습격 조짐을 미리 알아차리고 대응한 사람이야.

    내가 그에게 기대하고 있는 역할은 바로 그런 거야.

    우리에게 없는 통찰력. 현명한 판단력……."

    ……으. 으아아.

    리사가 칭찬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의지 해주는 건 기쁜데, 이런 상황에서는 좀……. 역효과 아닐까……?

    현역 다이아몬드급 모험가들까지 눈을 빛내며 날 보고 있잖아.

    "세상에!

    용사 파티에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가 들어오다니.

    몇 년 만의 일인가요?"

    오이아가 소리치며 기뻐한다.

    "형님. 머리가 좋으면 뭐가 좋은 겁니까?

    주먹이 세야 하는 거 아닌가요?"

    형 마케르가 동생 압베트를 한심하다는 듯이 봤다.

    "네가 우리 파티 평균 지능을 낮추고 있다는 건 알겠다."

    블램이 눈을 크게 뜨고 놀란 듯 말했다.

    "네리스에게 듣기는 했지만,

    리사가 이렇게 다른 사람을 칭찬하다니 좀처럼 없는 일인데.

    기대하게 만드는군. 데칼."

    부담스러워!

    내 평가가 구름 위까지 치솟기 전에 이 분위기를 어떻게든 해야겠어.

    "난 우연히 알아차렸을 뿐이야.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던 건 헤르카의 빠른 대응 덕분이지."

    "웅?"

    헤르카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누구보다 먼저 나한테 찾아와서, 사태를 수습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한 것도 데칼이었는데?"

    "……."

    그건 학생회장 명령으로…….

    으악. 시아의 판단까지 내 공이 됐잖아?

    네리스. 도와줘!

    "용사님이 올 때까지 반마신을 막으며 시간을 번 것도 주군입니다."

    오이아가 깜짝 놀란 듯 말했다.

    "잠깐. 지금 뭐라고 했어? 주군?!"

    마케르와 압베트도 놀란 눈으로 반응한다.

    "네리스, 그 남자를 섬기고 있는 거야?"

    "네리스 데려가려고 돈을 억만금 쌓아준 귀족들은 다 어쩌고?"

    네리스는 담담한 얼굴로 선언했다.

    "네. 저는 주군의 보……. 어흠. 기사입니다."

    …….

    방금 제대로 말했으면 난리 났겠지.

    아무래도 지금 상황은 내 손을 떠난 것 같다.

    나는 그냥 즐기기로 했다.

    마케르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알고 보니 이름 모를 신인이 제일 대단한데.

    실력도 있고 인망도 좋고. ……네리스가 기사로 섬겨준다니. 굉장하잖아."

    "……."

    그건…… 동감이다.

    이제는 당연한 일이 됐지만, 네리스 리케가 기사로서 날 섬긴다는 사실은 굉장한 일이다.

    보통 남자는, 그녀만으로 뼛속 깊이 만족하고도 남으리라.

    하지만 나는 더 굉장한 일을 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

    리사를 빤히 본다.

    "……?"

    예쁜 용사의 몸을 타락시키기 위해.

    그래…….

    세계를 구한다는 사명을 짊어진 용사를, 나는 정액받이로 만들려 하고 있다.

    시아가 만들어준 특상의 공물.

    리사는 아무것도 모른 채, 최면에 걸려 나한테 의지하고 있다.

    그것은 물리적으로 묶인 손발을 푸는 것보다 훨씬 벗어나기 어려운.

    마음을 묶는 덫이다.

    "데칼. 얘기를 이어서 해주겠어?"

    "음. 마왕군의 습격은 성공적으로 저지했지만,

    그때 태어난 반마신…… 박서연이란 존재가 마왕을 잡기 전,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거야."

    "박서연?"

    지금껏 무뚝뚝하게 입을 다물고 있던 앙겔이 말했다.

    다른 일에는 아무 반응 없다가, 서연의 이름만을 다시 확인한다.

    그것이 마치,

    「적의 이름」을 기계처럼 재확인하는 것 같아서 소름이 끼쳤다.

    여기서 제일 무서운 사람일지도 모르겠는걸.

    "박서연은 원래 인간이었지만,

    붉은 영혼석을 다량 흡수하고 마물화했어."

    토니우스가 흥미로운 듯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반마신…….

    마물화해서 이성을 잃지 않고 온전히 힘의 증폭에 성공했다는 건가?

    그런 게 실제로 가능하다니. 놀라운걸."

    노아한테 얻어맞고 쓰러져 바닥을 기던 서연이 생각났다.

    그래. 아무나 할 수 있는 각성은 아니겠지.

    나를 향한 비정상적인 집착이 그녀를 광기로 물들였다.

    "지금은 어디에 있지?"

    앙겔이 묻는다.

    "몰라.

    하지만 가까운 시기에 나타날 거야."

    "어떻게 확신하지?"

    "서연의 목적은 나니까.

    내가 있는 곳에 나타날 거야. 그리고 날 최우선으로 노리겠지."

    "……."

    모두들 침묵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 순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으리라.

    붉은 영혼석을 흡수하고 마물이 돼버린 여자가 노리는 남자.

    오이아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사연이 있어 보이네요.

    용사님은 이 일에 동의하신 건가요?

    그 반마신을 맞서 치는 일에."

    "동의했어. 내가 데칼을 돕기로 했다.

    반마신은 그에게 맡길 거야."

    가만히 듣고 있던 블램이 날 보며 말했다.

    "자네.

    연인과 동반 자살, 같은 걸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우린 그런 걸 돕기 위해 있는 게 아냐."

    "걱정하지 마. 그런 게 아니니까."

    "어떻게 걱정을 안 하지?"

    앙겔이 매서운 말투로 끼어들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맹세해라.

    상황이 네가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을 때,

    우리가 그 여자, 박서연을 죽여도 좋다고."

    "……."

    역시, 선배님은 가차가 없군.

    앙겔의 일침은 지당하다.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도 그녀를 살리기 위해 고집을 부릴 생각은 없다.

    "죽여도 좋아.

    먼저 나한테 맡겨준다면. 그걸로 불만 없어."

    "……음."

    앙겔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다물었다.

    뭔가 시원한 사람이네.

    "다들 개요는 이해했으리라 믿는다."

    리사가 지도에 있는 표시용 말에 손을 댔다.

    "이번 작전의 목표는 크게 두 가지.

    하나는 반마신을 유도해서 처리하는 것. 그다음에 마왕을 토벌하는 것."

    지도 위의 말에 집중한다.

    그건 우리 현재 위치보다 조금 더 북서쪽으로 나아간 곳에 위치한, 마물이 있는 장소와 인접한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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