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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세계 최면물-208화 (208/414)
  • 대충 이세계 최면물 20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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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칼."

    그때 네리스가 말을 타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흑마의 박력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진정해. 적이 아냐."

    네리스는 고삐를 당겨 콧김을 쉭쉭 거리는 흑마를 붙들고, 사뿐히 내려왔다.

    그녀는 멜브릿 제복 위에 탁한 빛깔을 뿜어내는 검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허벅지, 젖가슴, 얼굴.

    갑옷이 마땅히 지켜야 할 부분을 거의 드러내고 있는 경갑인데도 불구하고, 그 갑옷에서 불가사의한 힘을 느꼈다.

    네리스의 몸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 같았다.

    네리스는 나에게 가까이 걸어왔다.

    "가디언은 처리했습니다.

    강당 안에 제단이 있습니까?"

    "헤르카 말로는, 그런 것 같아. 꽤 위험한 상태라고 해."

    "당연합니다. 의식 마법 제단은 적 입장에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이니까요."

    그랬어?

    나는 몰랐는데.

    멍청한 얼굴로 서 있었더니, 네리스는 한숨을 쉬었다.

    "크게 다친 데는 없어 보여서 다행입니다."

    내 걱정을…… 해줬어?

    네리스가?

    "어쨌든."

    네리스는 부자연스럽게 말을 돌리며 헤르카를 보았다.

    "헤르카. 아직 한 달은 더 근신해야 하는데, 햇빛을 볼 수 있게 되어 좋겠군요?"

    "고작 벽 하나 무너뜨렸다고 한 달을 갇혀있는 게 어딨어!"

    "집행관이 사흘 머물라고 했을 때 말을 잘 들었어야죠. 탈옥을 시도하니까 그렇게 되는 겁니다."

    "흥! 나 같은 유능한 인재가 사고 좀 쳤다고 가둬 놓는. 이런 뒤떨어진 관습이 문제라는 거 모르겠어?"

    그때 노아가 다가오며 말했다.

    "뒤떨어진 관습의 집행자라 미안하군요."

    "아, 아하하. 철벽 선배님? 선배님 들으라고 한 얘기는 아니에요!"

    헤르카는 내 뒤로 숨었다.

    "왜 그래?

    전에는 잘 맞서 싸우더니."

    "지. 지금 선배님은 진심이잖아. 진심 모드잖아. 건드리면 맞아 죽어."

    "……."

    진심 모드라니…….

    노아는 평소와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

    눈가리개를 한 수녀. 여전히 수녀복 밑의 잘 빠진 몸매를 과시하며, 나를 유혹하고 있다.

    "데칼 님."

    "응?"

    "제가…… 헤르카 님과 싸웠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고 계셨습니까?"

    히이익!!

    진심 모드 맞잖아!

    나는 헤르카의 손을 잡고 같이 떨었다.

    "무서워. 노아!"

    "……아니. 의아해서 물어본 것뿐입니다. 혹시 훔쳐볼 수단……."

    으아악. 내 범행 사실이 꼼짝없이 온 세상에 밝혀진다.

    모든 걸 받아들이고 체념한 순간. 이스티가 끼어들었다.

    "달링!"

    나는 뛰어드는 이스티를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이스 타이밍. 이스티!

    "다친 데 없어?

    이 팔……. 누가 그랬어?"

    "아. 이거? 이건 별거 아냐. 고양이가 긁었어."

    "……."

    좀 떨어진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스티아가 면목 없는 듯 고개를 돌렸다.

    카렌, 디아나까지 왔네.

    "뭐야. 이 정도면 그냥 들어가도 되겠는데?"

    누가 우리를 막겠어?

    네리스가 나를 보았다.

    "데칼.

    시아 님이 없는 지금, 특별 조사원인 당신의 현장 판단이 중요해요.

    그 판단은, 전술적으로 충분히 고심하고 내린 결정이 틀림없습니까?"

    "아니. 그냥 이 정도면 간부고 뭐고 다 잡을 수 있는 거 아냐?"

    최면도 있고.

    마물은 최면에 걸리지 않지만, 모인 면면을 보니 걱정하는 게 이상하다.

    이스티 선에서 다 정리되는 거 아냐? 우리 이스티.

    나는 고양이 간지럽히듯 이스티의 턱을 손으로 살살 긁었다.

    "우웅. 믿어줘서 고마워. 달링.

    기대에 응하고 싶어."

    이스티는 애정표현을 숨기지 않고 내게 착 달라붙었다.

    "헤르카 생각은 어때?

    아까 내게 했던 말을 모두에게 해줘."

    헤르카는 문이 굳게 닫힌 강당을 보지도 않고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저 안에는 마왕군의 유격용 마물이 떼로 있어.

    공간 이동 마법은 해제했지만, 부화에 필요한 에너지는 처음 십 분에 다 모았을 거야.

    잘 만들어진 의식 마법이라는 뜻이지. 분하지만, 이 정도로 능숙한 흑마술은 나도 처음 봤어."

    에카테리나의 마법이 그렇게 대단하구나.

    또 끌어안고 질싸하고 싶다. 듬뿍.

    에카테, 이미 임신했을까?

    나는 수업에 집중 못 하는 아이처럼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며 들었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마물의 수는 계속 늘어나.

    그 종자들은 그런 식이야.

    한 시간도 안 돼서 후보생들 수보다 많아질 거야."

    "질문해도 될까요?"

    디아나가 손을 들었다.

    "응. 해도 좋아."

    "영광입니다. 헤르카 님.

    제 질문은 다른 게 아니라, 유격용 마물은…… 정확히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 그렇네. 생각해보니 해당하는 마물이 꽤 많구나.

    이래서 학명이 있는 거야. 학명은……."

    "간단하게 해."

    네리스가 말을 끊었다.

    "……으음. 하아. 최전선에서 부르는 명칭으로도 상관없어?"

    헤르카가 맥빠진 듯 되물었다.

    "오히려 너를 포함해 몇몇 연구자들만 알고 있는 이름이, 이 자리에서는 혼란만 부를 뿐이야.

    이름에는 본 그대로, 특징이 묻어나지. 적이 어떤 존재인지 아는 데는 그게 가장 적합해."

    "적이 준비해온 종자는「종말의 선구자」

    가장 포악하고 잔인한 마왕군의 첨병이야."

    "……."

    "……."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 이름은 너무 뚜렷할 정도로 적의 강함을 연상하게 했다.

    헤르카는 이어서 말했다.

    "줄여서 종선이."

    "……푸핫!"

    나는 웃고 말았다.

    "왜 웃어? 내 센스가 웃겨?"

    "어. 웃겨. 하하학."

    아. 젠장.

    검까부터 들었어야 이게 웃긴 건데.

    나만 알고 있으니 아쉽네. 하하하.

    뜻하지 않게 내 웃음이, 심각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린 것 같았다.

    "전략적 판단은 모르겠다.

    내가 그런 거 하려고 해봐야 시간만 걸릴 뿐이고.

    어쨌든 나는 여기 모인 너희를 믿어. 들어가서 끝내자. 그리고 돌아가서 밥 먹자."

    "음…."

    뭐라고 할 줄 알았더니,

    네리스의 표정은 제법 경건했다.

    "제가 선봉으로 가겠습니다. 돌격은 언제나 기병의 일이니까요. 모두 물러서시길."

    우리가 전부 옆으로 비켜서자, 네리스가 사뿐히 흑마 위로 올라타서 고삐를 잡았다.

    네리스의 손에서 검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 불꽃은 두꺼운 창이 되어 네리스의 손에 잡혔다.

    헤르카는 내 소매를 꾹꾹 잡아당겼다.

    "응? 안아달라고?"

    "위험하니까 더 물러나라고. 자꾸 저질 성희롱할래?! 하늘 같은 선배님한테!"

    "오구오구. 우리 선배님. 화났어요?"

    "으그긋!"

    화를 못 이겨 빈약한 피지컬로 달려드는 헤르카를 가볍게 저지하면서, 뒤로 물러난다.

    네리스의 흑마가 포효했다.

    굉장하다……. 소리가 아니라 공간 그 자체에 호소하고 있는 것처럼, 삼라만상이 떨리는 듯이 보였다.

    "꿰뚫는다……!!"

    기세 좋게 몸을 일으키며 포효하던 흑마가 말발굽으로 지면을 박차고 강당 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애초에 벽 따위는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것처럼 맹렬하게.

    네리스의 창은 그런 흑마의 기세조차 가려버릴 정도의 마력 폭풍을 일으키며 울부짖었다.

    네리스의 이명.

    멜브릿의 흑광이라는 말이 어디서 유래 되었는지, 나는 다시금 깨달았다.

    그녀는 하나의 검은 빛줄기가 되어 강당 문에 꽂혔다.

    강당 문에는 알 수 없는 보호 마법이 걸려 있었다.

    그 불가사의한 힘은 충돌한 순간 지면이 패여 나갈 정도의 압박을 받으면서도 네리스를 밀어 내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네리스의 돌파력은 그 마법을 가뿐히 웃돌았다.

    쾅!!

    보호 마법이 어쨌냐는 듯이, 네리스는 아예 건물 벽을 날려버렸다.

    잔해가 와르르 무너지면서 흙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 흙먼지가 걷히는 것보다 빠르게 바람을 타고 역겨울 정도로 짙은 피 냄새가 났다.

    네리스가 종선이까지 갈아버린 건가?

    이러니까 꼭 사람 이름 같네.

    나는 바람의 정령을 불러 흙먼지를 걷어냈다.

    카렌도 나를 따라서 바람을 일으켰다.

    먼지가 걷힌 곳.

    네리스는 흑마 위에 위풍당당하게 올라탄 상태로, 피범벅이 되어 나자빠진 마물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리스! 잘했어!"

    내가 소리를 높이며 칭찬하자, 네리스는 이쪽으로 말머리를 돌리고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한 게 아닙니다."

    "뭐?"

    "돌파는 제가 했지만……."

    네리스가 말끝을 흐렸다.

    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뛰어갔다.

    목숨은 소중하기 때문에 네리스가 모는 흑마 궁둥이에 찰싹 붙어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살폈다.

    모두 죽어 있었다.

    죽어 있는 게 사람은 아니고 마물이었지만,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그 정도로 살해 방식이 잔인했다. 대부분 원래 형태가 어땠는지 유추하기 힘들 정도로 갈려서 살점이 되어 있었다.

    그 핏덩이들이 바닥을 카펫처럼 장식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얼마나 끔찍한 참상이 벌어졌는지 벽도 새까맣게 피로 물들어 네리스가 무너뜨린 곳을 경계로 안쪽은 햇빛이 들어오지 못하는 상태였다.

    피가 창을 전부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움직였다.

    키 4m를 훌쩍 넘는, 보랏빛 피부를 한 악마.

    내 팔뚝만 한 뿔을 머리에 6개나 달고 있는 흉악하게 생긴 놈이었다.

    속된 말로 존나 세 보였다.

    네리스가 숨을 삼켰다.

    "마왕군 유격대장……. 코렌드…."

    "그게 뭐야. 강해?"

    이스티도 긴장한 것 같았다.

    "달링. 내 뒤로 와.

    코렌드는 마왕의 오른팔이야. 단순한 전투력만으로는, 손에 꼽을 정도야."

    으아악.

    그런 거물이 여기 왜!

    나는 바로 이스티 뒤에 숨었다. 꼴사나워도 어쩔 수 없다.

    저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근육 좀 봐. 나 같은 건 그냥 팔에 스치기만 해도 죽겠는데?

    저런 게 피바다 위에 서 있으니 모두 겁에 질린 듯, 쉽게 상대편에 말을 꺼내지 못했다.

    네리스가 쥐어짜듯 목소리를 크게 냈다.

    "코렌드! 들어라.

    여기는 멜브릿. 용사 육성 기관 멜브릿이다. 네놈은 와야 할 곳을 잘못 골랐다.

    리케 가문의 아이, 네리스 리케가 여기서 너를 쓰러뜨리겠다!"

    "……."

    코렌드가 몸을 움직였다.

    나를 포함해 정령을 가진 이들은 모두 정령핵을 최대로 활성화했다.

    적이 어떤 식으로 나서도 대응할 수 있게끔.

    코렌드는 서서히 몸을 앞으로 기울이더니…….

    앞으로 고꾸라졌다.

    "……?"

    모두,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마왕군 최강의 유격대장 코렌드…….

    그런 놈이 발이 걸려서 넘어져?

    그런 게 아니다.

    넘어질 때부터 코렌드의 상태는 명백히 이상했다. 알아차리는 게 늦었을 뿐이다.

    코렌드는 이미…… 죽었어?

    코렌드의 등에는 이미 치명상이 있었다.

    그 상처가 짓이겨진 모양새가, 종선자들을 해친 방식과 닮아 있었다.

    나는 오싹했다.

    알 수 없는 한기가 내 몸을 휘감고 심장을 움켜잡았다.

    ……언제, 이런 일이 한 번 있었다.

    우리가 모두 예정된 적과 싸울 준비를 마치고 쳐들어간 순간.

    그곳은 이미 역겨운 지옥도가 되어 있었고, 모든 일이 끝나 있었지…….

    그래.

    그때도 그랬다.

    이건 그때의 재현이다.

    하지만 이번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

    마왕군 유격대장 코렌드가 쓰러진 자리 뒤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 명의 여성이 서 있었다.

    우리 둘은 마치 명암.

    나는 밝은 곳에, 그녀는 어두운 곳에 있다.

    "아핫…….

    오빠의 친구들이 잔뜩 있네요……?"

    드르륵. 드르륵.

    여성은 코렌드의 시체를 지나쳐, 피가 잔뜩 엉겨 붙은 작두를 바닥에 질질 끌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박서연.

    세상 너머, 나를 추격해온…… 전 여자친구…….

    내가 사랑했던 여자.

    땋아서 내린 검은 머리카락, 풍만한 가슴, 예쁜 얼굴……. 모든 게 그대로였지만, 또한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작두를 들고, 피칠갑 하고, 세상에서 가장 미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 박서연의 세상에는 나밖에 없다.

    다른 것들은 그저 물건처럼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행복해 보이네요.

    오빠…….

    많은 여성에게 둘러싸여서……. 우후후. 하지만, 오빠는… 역시 저와 있는 게 가장 행복하겠죠."

    "……."

    이스티가 활대에 화살을 얹었다.

    일격필살로 끝낼 생각이다.

    나는 이스티를 말리지 않았다. 다음에 만날 땐 적이다. 이미 그렇게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생활을 지키기 위해 박서연을 또다시 죽게 한다.

    "해!"

    나는 소리쳤다.

    이스티의 솜씨를 여러 번 봐온 지금이라면 알 수 있다.

    공간을 가르고 날아간 이스티의 화살은, 틀림없이 그녀가 쏠 수 있는 화살 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위력을 갖고 있다.

    자비도 용서도 없는 한 발.

    그런데.

    박서연은, 눈길도 주지 않고 화살을 쳐냈다.

    작두를 휘둘러서 쳐냈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뭘 하는지 내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스티의 화살을…… 쳐냈어……?

    화살과 작두의 충돌음이 뒤늦게 터져 나왔다.

    서연은 눈을 부릅뜬 채 미소 지으며 말을 잇는다.

    "오빠. 서연이가 왔어요. 당신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서연이가.

    제 가축이 되어주세요. 매일매일, 매일매일, 매일매일 사랑하는 오빠의 모든 것을 제가 관리해 줄게요."

    이런 시발…….

    레벨을 얼마나 쳐 올린 거야. 이 녀석은…….

    나는 좆됐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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