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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세계 최면물-167화 (167/414)
  • 대충 이세계 최면물 16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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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억을 되찾는 여행조차도.

    그녀가 열심히 준비한 어트랙션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용을 조작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본래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 할, 내 권능과 기억을 되찾아준 게 일레시아라는 뜻이다.

    '복잡한 일은 전부 시종에게 맡긴다'

    대책이 없는 날 대신해, 그녀가 고민했다.

    이제 모든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얼마나 긴 시간 동안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그 황량한 땅에서. 다른 세계에서.

    첫마디로는 뭐가 좋을까.

    무슨 말을 꺼내야만 할까.

    나는 그냥 시아를 끌어안았다.

    "시아. 많이 힘들었지."

    "……."

    시아는 내 팔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저씨가 걸어준 최면 덕분에,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아저씨뿐이라고…… 그 마음이 식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아니야. 그건 아니야."

    나는 시아를 더욱더 세게 끌어안았다.

    "아저씨?"

    "나는 너한테 최면을 걸지 않았어. 신께 맹세코 거짓이 아니야."

    "……네?"

    이것은 기억을 되찾은 내가 가장 먼저 전해야만 하는 진실이었다.

    나는 일레시아의 마음을 조종하지 않았다.

    생애 최후의 최면은 불발이었다.

    "너는 이미 날 사랑한다며, 내 최면을 자기 의지로 거부했어."

    "……!"

    "그런 너에게 도저히 최면을 걸 수 없었던 나는, 허세를 부리고 죽었을 뿐이야."

    "그럼, 저는……."

    "그래. 네 마음은 온전히 네 것이야. 고맙다."

    시아가 내 품에서 무너졌다.

    날 세차게 끌어안은 손이 떨고 있다.

    "……힘들었어요!"

    시아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얼마나 외로웠는지 알아요?

    몇 번이나, 몇 번이나 포기할 뻔했어요. 아저씨가 보고 싶어서, 어쩔 수 없어서……."

    "미안해."

    철두철미한 학생회장.

    성스러운 빛의 여신. 그런 껍질들은 깨지고, 시아는 연약한 여자가 되어 내 품에서 울었다.

    얼마나 털어놓고 싶었을까. 나한테 얼마나 말하고 싶었을까.

    "아저씨. 사랑해요……."

    "나도 사랑……."

    "흐응."

    벨라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아주 못마땅한 표정으로.

    "있지. 마음대로 장르 바꾸지 말아 줄래.

    나한테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줘야 하는 거 아냐?"

    "그랬었지……."

    시아는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다.

    나와 하나가 되려는 것처럼, 머리카락이 헝클어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내 품에 얼굴을 비비적거린다.

    억눌려 있던 외로움과 서러움이 터져서, 아이 같은 상태가 돼버린 것 같다.

    "하, 그래. 나는 병풍이라 이거지.

    아무리 보지 노예라지만, 저는 정말 서운한데요. 주. 인. 님."

    "하하……."

    과거의 기억이 끼어들어서 순서가 혼잡해지기는 했지만.

    벨라와 섹스하기로 했던 일은 잊지 않았다.

    기대치를 그렇게 높여 두고는 눈앞에서 다른 여자와 사랑한다며 속삭이고 있으니, 화가 날 만도 하지.

    "시아. 나는 이제 어디도 안 가. 진정해."

    "……훌쩍."

    "주인님, 자상하네."

    우리 불의 여신님이 많이 토라진 것 같다.

    볼을 뾰로통 부풀리고 팔짱을 낀 채 비아냥거리고 있다.

    "잠깐 떨어지자. 알았지?"

    "네."

    시아와 떨어져서, 분위기를 바로 잡는다.

    "시아. 나는 모든 기억을 되찾았어.

    하지만 기억을 되찾았음에도 아직 알 수 없는 것. 새로 생긴 궁금증들이 있어."

    "네, 전부 말씀드릴게요."

    "왜 너는 스스로 공략되기를 원했어? 실전을 대비한 연습의 의미는?

    내 기억을 바로 돌려주지 않은 이유는 뭐야?"

    나는 쉴 새 없이 질문 공세를 쏟아부었다.

    궁금한 게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시아는 조용히 내 말을 끝까지 듣고, 입을 열었다.

    "모두 하나로 연결돼요. 저는 데칼 님. 아저씨의 권능, 영혼, 기억을 셋으로 나누어 관찰함과 동시에

    어떤 계획을 준비했어요."

    "어떤 계획?"

    "제르미나에게 복수할 계획이에요."

    "복수?"

    눈이 번쩍 뜨였다.

    바로 그거야!

    "아저씨가 유언으로 그랬잖아요. 제르미나와 관계 맺기 전까지는 용서할 수 없다고."

    문득 뇌리를 스치는 나의 유언.

    '보지에 질싸하기 전에는 용서할 수 없다!!'

    ……아니. 무슨 이따위 유언이 있어? 창피했다.

    가슴을 관통당하고 말할 힘도 없어서, 힘차게 외치지는 않았지만…….

    "주인님. 그런 유언 남겼구나……. 주인님다워."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잠깐만. 제르미나라면, 그 제르미나? 어떤 신에게 원한을 샀나 했더니."

    벨라는 경악하며 말했다.

    "맞아. 그 제르미나야.

    북극여우 털처럼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예쁘지만 성격은 최악인 여신이지."

    "음……. 아, 말 끊어서 미안해. 계속해줘."

    "아저씨의 영혼을 윤회전생에서 벗어나게 하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하지만 제르미나는 아저씨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면 손을 쓸 가능성이 컸어요.

    비록 금제 때문에 직접 움직일 수는 없었겠지만, 그 사실이 제르미나를 더욱 불안하게 했을 거예요."

    벨라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흠칫했다.

    "금제? 주인님이 제르미나한테 금제를 걸었어?"

    "네. 저와 아저씨에게 간섭할 수 없다는 금제를 걸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좀 어이가 없군.

    상급 신이 거는 금제라길래 좀 더 강제력이 있는 줄 알았는데.

    내 최면만도 못할 줄은……."

    "주인님의 최면이 이상하게 센 거라니까.

    제르미나가 금제의 허점을 이용해서 주인님을 죽일 수 있었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해.

    주인님이 에페를 심문할 때도 금제를 요리조리 피해서 말할 수 있었던 거 기억 안 나?"

    "아."

    "그게 만약 주인님 최면이었다면?

    「주인님에 관한 비밀을 발설하려고 할 시 자해한다」 같은 게 걸려 있었다면."

    "……에페는 죽었겠지."

    금제는 생각보다 단순하게 발동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파괴력은 절대적이야.

    금제를 건 본인도 쉽게 줄타기를 할 수 없을 만큼."

    "불의 여신님 말대로예요.

    저는 아저씨가 건 금제 덕분에 안전했어요. 처음에는 도망 다녔지만,

    나중에는 제르미나가 부릴 수 있는 신 중에는 저를 위협할 수 있는 자가 없어졌죠."

    "8급에서 3급까지 용케 올라왔구나.

    장하다. 장해."

    나는 시아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시아는 고개를 들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설마 그 신비의 학생회장님이 이렇게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어줄 줄이야.

    과거의 나, 잘했다. 네가 고른 여자는 최고였어.

    "……그래서. 복수 계획이 뭔데."

    벨라가 재촉하듯 묻는다.

    질투심이 뚝뚝 묻어나오는 태도다.

    "아저씨가 최면을 걸 수 있게 제르미나를 제압하는 거예요."

    "아…!"

    그렇구나.

    "복수를 어떻게 할지는 내 마음대로 해도 돼?"

    "네. 그걸 위해서 준비한 계획이에요."

    이럴 수가. 일레시아는 하늘이 내려준 여신님이 분명하다.

    아니, 여신님이 맞지만.

    날 위협하는 여신이 제르미나임이 확실해진 가운데, 이토록 든든한 아군이 있을까.

    "하지만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어요.

    아저씨가 제르미나에게 들키지 않고 성장한 후 제가 만든 세계로 무사히 전이해야만 했죠."

    "어…….

    그래서 혼돈계에서 자랐나? 내가."

    벨라가 현대를 혼돈계라고 불렀지.

    "맞을 거야.

    혼돈계는 신들이 다스리지 못하는 세계.

    신보다 위험한 게 있다고는 하지만……. 나도 자세히는 몰라.

    하지만 혼돈계로 진입한 신들은 대다수 돌아오지 않아. 에페처럼 드나든 케이스도 없지는 않지만."

    "나는 감시의 눈을 피해서 잉태한 셈이군.

    이 세계로 온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우연이 아니었어요.

    예상치 못한 건 아저씨가 너무 일찍 죽어버렸다는 거예요."

    "일찍……. 아아."

    그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 중 하나였지.

    편의점에서 돌아오는 길에 칼 맞고 사망.

    나중에 들은 바로는 에페가 그 일에 관여했다고 하지만, 어쨌든 박서연이 내 암시로 미쳐버린 건 확실하다.

    근데 나, 두 번이나 뒤통수 맞고 죽은 거야……?

    "시아도 날 죽이려고 했어?

    이 세계로 부르기 위해."

    "저는 사람에게 점지된 천명(天命)을 읽을 수 있어요.

    그때 막 전생한 아저씨는 신체적 전성기에 사고로 죽을 운명이었기 때문에, 죽는 날짜를 파악할 수 있었어요."

    …….

    세상에. 상급 신이라고 별것이 다 되는군.

    나는 애초에 젊을 때 요절할 운명으로 태어났다는 소리다.

    "우연이 아니었다는 건.

    내가 주인님의 영혼을 데려갈 수 있었던 것도 그쪽이 뒤에서 조종했기 때문이야?"

    벨라가 날 선 태도로 물었다.

    "그렇지 않아요.

    원래는 이 세계로 전이할 루트가 있었는데, 방금 말씀드린 대로

    아저씨의 사망은 예상치 못했던 사건이라 대응하는 게 늦어졌어요.

    그때 불의 여신님이, 전생할 뻔했던 주인님의 영혼을 구한 거예요."

    "오."

    나는 벨라를 보며 씩 웃었다.

    "진짜로 내 구세주였네. 벨라는."

    "읏……."

    벨라는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새, 새삼스럽게 그런 말 들어도 안 기쁘거든."

    이렇게 쑥스러워하는 벨라는 오랜만이네.

    "저도 감사드립니다. 불의 여신님."

    시아가 고개를 꾸벅 숙이자, 벨라는 당황했다.

    "고, 고개 숙이지 마!

    3급 신이 그렇게 쉽게 고개 숙이면 안 돼.

    당신, 정말 주인님만 바라보고 살았네."

    "그러면 또 이어지는 의문이 있군.

    나는 스스로 세계를 골랐는데? 벨라도 알지?"

    "맞아. 그건 어떻게……. 아."

    벨라는 무언가 알아차린 듯했다.

    "설마……."

    "네. 이 세계를 아저씨 취향에 맞게 개조한 건 저예요."

    일레시아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

    벨라와 나는 동시에 할 말을 잃었다.

    상상 이상이다…….

    이 녀석,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일레시아의 계획 안이었던 거지?

    "아저씨는 하렘 좋아하니까요.

    모두 제가 꾸몄어요. 이 세계의 문명화를 적절한 수준까지 유도하고,

    아름다운 여성의 영혼들을 각 세계에서 끌어모았어요.

    가장 아름답고 강인한 영혼을 대리인으로 삼아 용사로 만들고, 마왕으로 만들고.

    ……서로 버티어 대항하는 세력을 만들어 평화를 꾸며냈어요."

    벨라가 스치듯이 종종 하던 얘기다.

    이 세계에는 묘하게, 미형(美形)의 영혼이 많이 모인다고.

    그리고 이 세계만큼 적절한 조건을 가진 데는 없다고.

    그게 만약,

    누군가가 나를 위해 만들어낸 최상의 환경이라면?

    "아저씨라면 반드시 용사 학교에 올 줄 알았어요.

    예쁜 여자들로 가득 채워 둔, 아저씨를 위해 준비한 보물상자니까."

    "……."

    "주인님은…….

    용사가 여자라는 말을 듣고 허겁지겁 학교행을 정하기는 했지."

    나는 꼴리는 대로 움직일 생각이었는데.

    내 취향을 단단히 파악한 누군가가, 나를 용사 학교로 이끌고 있었다니.

    하하하. 제대로 꿰였구나.

    "그런데 보통…….

    그렇게까지 해……?"

    "천 년이나 기다렸는걸요.

    아저씨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사랑하니까, 기뻐해주길 바랐어요."

    "사랑하면 주인님의 그릇된 취향을 바로 잡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 게……."

    "전 구제 불능인 아저씨가 좋아요.

    아저씨를 바꾸려 드는 짓은 할 수 없어요."

    "음. 뭐, 그런 사랑의 형태도 있는 거겠지……?"

    ……날 쳐다보며 묻지 마.

    솔직히 소름 끼친다. 아무리 날 위해서라지만, 시아의 행동은 도를 넘었다.

    하지만…… 이 기분은 뭘까.

    한편으로는 기쁘게 생각하는 나도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폭주해버린 건 내 잘못도 없지 않다.

    천 년이라고 말했다. 시아는.

    나를 천 년 기다렸다고.

    어떤 여자가 그럴 수 있겠어. 시아의 고독과 외로움을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시아가 나를 위해 해준 일을 긍정하는 정도라면 해줄 수 있었다.

    "아저씨……?"

    "이 세계는 내 마음에 쏙 들어.

    예쁘고 꼴리는 여자들이 가득해서 좋아."

    "다행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일은 하지 마.

    다음에는 나와 얘기하면서 균형을 맞춰나가자. 알았지?"

    "네!"

    나는 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 타일렀다.

    시아는 애썼다. 노력의 방향이 엇나가기는 했지만, 그건 좀 미친 짓 아니냐며 매도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는 내가 옆에 있어 주면 된다.

    "대충 여기까지 온 경위는 알겠어.

    처음 했던 질문으로 돌아가자. 네가 스스로 공략되려고 한 이유.

    이게 실전을 대비한 연습이라고 한 이유는……."

    "제르미나를 공략하기에 앞서,

    어떤 식으로 여신을 강림시키는지. 어떤 위험이 도사리는지 알았으면 해서예요."

    실전이란 제르미나에게 최면을 거는 것.

    아마도 방식은 시아 때와 똑같겠지.

    다른 점이 있다면, 제르미나가 시아처럼 협조적이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해보는 편이 훨씬 와닿는 법.

    시아의 가르침은 효과적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신의 영혼석은 바로 드릴 수 없었어요.

    기억을 되찾는다는 건, 멈춰있던 시간이 흐른다는 뜻이에요."

    기억을 되찾은 지금이라면 알 수 있다.

    제르미나가 누군지, 나한테 뭘 했는지 알아버리고 나면, 이 이야기는 멈출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어느 한쪽이 예정된 파멸을 맞이할 때까지 굴러갈 수밖에 없는 수레바퀴가 된다.

    "그래서 네 의지로는 줄 수 없다고 했구나."

    "네. 최소한, 아저씨가 불의 여신님을 믿고 저를 공략하러 와주셨을 때.

    최면에 거는 일에 성공했을 때 비로소 준비된다고 생각했어요."

    영혼석을 가져가면 준비는 끝난다.

    시아가 했던 말 그대로다.

    여신을 공략하는 법을 알았고, 제르미나를 향한 복수심도 찾았다.

    "이제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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