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이세계 최면물 15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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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는 최면 노예들이 줄지어 서 있다.
하나 같이 처형대에 오르기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야?"
"죄송합니다. 주인님. 정신 차렸을 때는 이미 이렇게……."
노예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눈을 돌린다.
밭이 엉망이었다. 사람이 한 짓이 아니라는 건 한눈에 알았다.
멧돼지 떼가 산에서 내려와 휩쓸기라도 한 것처럼, 멀쩡한 구석 하나 없이 전부 파헤쳐져 있다.
부끄럽지만 시아와 섹스하는 데 너무 몰두한 나머지, 밖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몰랐던 것 같다.
오히려 안심했다.
날 엄습했던 불안감은 이 정도가 아니었다.
겨우 밭을 망친 정도라면 얼마든지 수습할 수 있다.
사실 어찌 되든 상관없는 일이다.
…….
왜 밭의 수확물을 기대하던 시아의 얼굴이 아른거리지.
……그래. 상관없는 일은 아니다.
시아는 이 밭에서 난 수확물로 자기가 어떻게 할 계획인지를 즐겁게 얘기했었다.
대부분 흘려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되니 마음이 아프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파티를 한다고 경비를 소홀히 하는 일이 없었으면, 이런 일은……!"
노예들이 무릎을 꿇고 땅에 머리를 조아린다.
……저런 행동은 가르친 적 없는데.
그들은 진심으로 슬퍼 보였다.
시아의 권유로 그들의 개성을 남겨 놓았기 때문이리라.
"다시 처음부터 하면 돼.
식량은 내가 조달하지. 그밖에 피해는 없어?"
"그게……."
노예를 따라 축사로 갔더니, 끔찍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가축이 전멸했다.
축사는 돼지, 소, 양의 피로 넘칠 것만 같았다.
이 모든 것이 악의적인 괴롭힘이라고 확신하기에는 충분한 단서였다.
"작물도 건질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마치 병충해에 노출된 것과 같이……."
"병충해?"
「오염의 권능」…….
흔적을 들켜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겠지.
시아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일레시아 님!"
노예들이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시아가 나를 따라서 나온 것 같았다.
"아……."
파괴된 밭과 축사를 보고, 시아는 망연히 서 있었다.
이 모든 걸 꾸린 사람은 시아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겠지.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도 모르겠다.
"누가 이런 짓을……."
"신이 한 일이야."
"신이 왜 아저씨의 집을 망쳐요?"
"다들 날 싫어하니까."
"그런……. 아저씨도 뭐라고 해요.
능력을 써서, 그 신들을 꼼짝 못 하게 해요. 아저씨는 대단한 권능을 가진 신이잖아요."
"그럴 수 없어. 내가 권능으로 다른 신을 부리면, 모두가 날 공격하려고 할 테니까.
오히려 내가 그래 주기를 바라고 있을걸. 좋은 구실을 잡았다며 날 소멸시키려 들겠지."
"……."
그래.
나를 눈엣가시로 보는 상급 신들은 내가 대들기를 기다리고 있다.
아니, 그것도 기다리기 싫어서 날 도발하고 있다.
내가 인간이 아닌 신을 건드리는 순간, 천상의 법도를 어긴 것이 되고,
그들은 날 정당하게 소멸시킬 수 있어서.
"신들끼리 싸우고 있다니, 몰랐어요."
"신들끼리 싸우고 있기는 한데.
애초에 적대하고 있는 마물 쪽 신들이 날 괴롭힌 적은 없어."
"네? 그게 무슨……."
"날 괴롭히는 건 같은 편 신들이야.
니뮤엘의 가호를 받은 자들. 같은 편으로 두기에는 너무나도 꺼림칙한 권능이라고 생각했겠지."
"같은 편끼리, 아저씨를 없앨 기회를 보고 있다니.
그런 건…… 너무해요."
"그럴 만 해. 권능 빼놓고 봐도, 나는 여신들이 신뢰할 수 있는 남자가 아닌데.
권능으로 여자를 희롱하는 게 취미다 보니까. 날 벌레 보듯이 하거든.
숨죽이고 지나가기를 바라는 수밖에."
"……."
자주 있는 일이다.
하지만 다른 신이 이토록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낸 건 오랜만이다.
왜 축사에 사는 동물들을 모조리 죽였을까.
그것이 강도 높은 살해 위협이라고 느끼는 건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둬도 어쩔 수 없지.
죽은 동물들은 오염된 작물이랑 함께 매장하자."
나는 손뼉을 쳐 최면 노예들을 불러모았다.
"너희들. 오염된 작물은 빠짐없이 긁어모아서 땅에 묻어. 동물 사체도 같이."
"예!"
"돌아가자."
나는 시아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시아는 한참 말이 없었다.
충격받은 것 같다.
"이제 그런 건 관둬.
내가 희희낙락 잘살고 있는 것 같으면 또 저런 괴롭힘을 당하니까."
"아저씨는 그래도 좋아요?"
"어. 다행이지 뭐야.
쟤들이 아무리 지랄해도, 나는 눈 하나 깜빡 안 해.
나는 예쁜 여자와 섹스할 수만 있으면 족하거든."
"……."
나는 시아의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너만 있으면 돼.
어젯밤에는 좋았어. 오늘 아침까지 했는데 이런 말은 좀 이상한가?"
"풋."
시아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는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나는 멍하니 있었다.
내가 시아를 웃긴 건가?
"무슨, 이런 말에 웃어?"
"아하하. 아저씨가 그런 말 하니까 이상해요."
"뭐……. '너만 있으면 돼.' 이거?"
"아하하!"
시아는 폭소한다.
……내가 로맨틱한 대사를 입에 담는 것이 그렇게 웃긴 모양이다.
알 수 없는 패배감이 드는군.
"위로해줘서 고마워요.
아저씨가 좋다면, 저도 좋아요. 아저씨의 생활이 유지될 수 있도록 도와줄게요."
"진짜로?"
"네. 저는 아저씨의 시종이잖아요.
복잡하고 번거로운 일은 제게 맡기세요."
그래.
최소한 시아에게 일을 맡기면 바보 같은 실수는 안 하겠지.
나는 내 능력도, 주제도 잘 알고 있다.
신들이 날 괴롭히는 상황이 억울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마음을 조종하는 권능이 없었어도 나는 신들에게 미움받았을 것이다.
이 권능을 가지고 마물 신들과 적극적으로 싸우려고 했으면.
나를 신뢰하는 이, 따르는 이도 자연스럽게 생기고, 업적이 생기면 급도 올라갔을 것이다.
내가 위대한 신이었다면 아무도 감히 나한테 손가락질 못 하겠지.
하지만 실제로 나는 어떤가.
그런 것들은 하기 싫다고 내팽개치고 여자와 놀기를 택했다.
그러니까 내 권능이 위협적이어도, 나는 9급 신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권능에 걸맞은 책무를 지지 않으니까.
그래서 나는 구석의 구석으로 밀려 나와, 마물 쪽 신도, 인간 쪽 신도 나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결국, 실패했지만 기회는 있다.
"우선 도망칠까?"
"네!"
나는 시아와 함께 떠나기로 했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어차피 금세 들통나겠지만, 잠시뿐인 평화라도 좋다.
우리는 떠날 채비를 마치고 함께 누웠다.
"아저씨."
"응?"
"이제 아저씨 침대, 깨끗하네요."
"네가 정리하라며……."
"그래서 좋아요."
시아는 내 품에 안겨,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나는 시아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다가, 잠들었다.
여자는 무슨 짐이 이렇게 많은지. 정리하느라 한참 걸려서 피곤하잖아.
……하루 정도는 여유 부려도 괜찮겠지.
다른 노예들은 해방하더라도, 시아는 데려가고 싶다.
예쁘고 유능한 시종이니까.
다음날.
나는, 여자의 비명을 듣고 눈을 떴다.
시아는 내 품 안에 있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아, 아저씨……."
시아는 떨고 있었다.
"지하실에 숨어. 나오지 마."
나는 시아를 두고 밖에 나왔다.
"아악!"
"살려주세요!"
밖은, 무참한 학살 현장이 되어 있었다.
하얀 갑주를 입고 가면을 쓴 검사들이 내 노예들을 죽이고 있다.
저들은 신성 기사단. 야간 경비를 맡긴 몸종 따위가 막아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신성 기사는 신의 수족이 되기 위해 만들어진 괴물. 신을 찬양하는 일밖에 생각하지 않는, 뒤틀린 첨병이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신성 기사를 보는 건 처음이다.
얼마나 급이 높은 신이 강림한 거지?
"……."
보고 있기 힘든 광경이다.
신성 기사들은 노예가 전의를 잃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코 끝까지 쫓아가서 등에 칼을 찔러 넣었다.
곧 신성 기사를 데리고 온 여신과 눈이 마주쳤다.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억을 체험하고 있는 거 맞지? 실제로 눈앞에 있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아니, 실제로 눈앞에 있지만.
도망치고 싶어질 정도로, 저 여신의 존재감은 너무나도 압도적이다.
2급 파괴의 여신. 제르미나.
허리까지 기른 새하얀 머리카락과 붉은 눈.
창백하다 싶을 정도로 하얀 피부에, 잘 빠진 몸매.
제르미나는 극지에 산다는 하얀 여우를 생각나게 하는, 그런 여신이었다.
하지만 저 눈.
저 눈은 틀림없이 맹수의 눈이다. 제르미나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허세를 부리며 말했다.
"귀한 분이 누추한 곳에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번거롭게, 기사들까지 거느리고."
"닥쳐라."
제르미나는 가만히 있는데, 기사가 나서서 말했다.
"제르미나 님께서는 네 녀석이 입을 여는 걸 허락하지 않으셨다."
"……."
"고개를 숙여라!"
벨라와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도 벨라 옆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놈이 있었지.
신성 기사라는 것들은 다 이런가?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일이,
「기억의 재현」을 하기 위해 정해진 길로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면.
바로 최면을 걸어서 제압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최면이 성공했다면, 내가 신이었던 시절의 기억을 잃고 인간이 된 이유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제르미나와 섹스하고 그녀를 노예로 삼았을 테니까.
그녀는 최면 대책을 하고 내 앞에 나타났을 것이다.
그리고, 기억 속의 나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를 가능성이 컸다.
왜냐면 이때의 나는 신에게 최면을 걸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평범하게 신과 이웃하고 지내는 상태였기 때문에, 누군가가 권능에 노출되면 즉시 내 일이라는 게 들통나고 만다.
젠장…….
기억을 되찾는 과정이라지만, 너무 고통스럽다.
아직 되찾지는 못했지만, 이 바로 앞에는 정말 끔찍한 기억이 있다.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기억은 흘러간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제르미나가 입을 열었다.
"네가 다른 세계에서 납치한 사람들이야. 그렇지?"
"예."
"노예가 된 그들을 내가 해방했을 뿐이야. 감사받아도 모자랄 일이지.
너의 뒤치다꺼리를, 내가 해준 거니까. ……내 말이 틀려?"
"……감사합니다.
제 수고를 덜어주셔서."
나는 고개를 숙였다.
제르미나의 심기를 거슬러 좋은 일은 없다.
상대는 파괴의 여신……. 니뮤엘에게 가장 강한 파괴의 권능을 선사 받은 여신.
거의 창조신과 자매지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정도 감사로는 부족해."
제르미나가 중얼거리자, 기사가 억지로 나를 땅에 엎드리게 했다.
"더 숙이지 못할까!
머리를 조아리고, 흙바닥에 처박혀라!"
"……으, 으윽……."
젠장. 이 년이구나.
내 축사를 무너뜨린 것도, 작물을 망친 것도.
그리고…… 내 노예들을 죽여버린 것도.
사실 거의 대놓고 한 일이다. 마지막 일은 눈앞에서 보여주기도 했고.
제르미나는 날 도발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
"바, 발이라도 핥을까요?"
"……."
제르미나는 입꼬리를 비틀고 날 비웃었다.
"후후후, ……밟아주려고 해도.
자존심이 없어, 스스로 엎드리는 족속은 짓밟기도 어렵구나.
워낙 낮은 곳에 있어서 보이지도 않아."
"……."
"네놈의 식솔을 죽인 건 나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인사를 올리다니, 너는 정말 뻔뻔한 놈이다."
"예……. 뻔뻔한 놈입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눈에 띄지 않겠습니다."
나는 머리를 바닥에 박으며 사죄했다.
"……흐응.
뭐. 너 같은 놈도 니뮤엘 님의 축복을 받기는 하였으니……."
됐다……!
아무리 급이 높은 여신이라고 해도, 같은 신을 죽일 수는 없어.
1급신 니뮤엘의 축복을 받은 권속임은 같으니까.
내가 틈을 보이지만 않으면 된다. 이 여신이 기분 좋게 돌아갈 수 있게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하지만, 왜 처음부터 머리를 조아리지 않았지?
네 녀석의 눈은, 나를 불순한 동기로 훑어본 죄가 있다."
"너, 너무나 아름다우신지라……."
"닥쳐라!"
기사가 내 머리를 짓밟는다.
"너 따위가 감히! 제르미나 님을 보고 평가하다니, 괘씸죄로 골백번은 죽어 마땅하다!"
젠장.
오늘은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서 날 해치려고 왔구나.
"훗. 너무 그러지 마라. 내가 아름답다고 하지 않느냐. 그건 당연한 일이지. 태양이 지상에 온기를 내리듯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 하지만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기에, 가끔은 누가 말해주지 않으면 잊어버릴 것이다."
"옙!"
"나는 지금 기분이 좋다.
팔 한쪽만 내놓거라. 오늘은 그 정도로 봐주겠다."
"……."
"듣지 못했느냐? 팔 한쪽을 내놓아라."
기사들이 내 몸을 구속한다.
억지로라도 팔을 내밀게 할 생각이다.
내 영체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히려고 하는구나. 파괴의 여신이라면 하고도 남는다.
내줄 수밖에…… 없다…!
"아저씨!"
기사들이 홱 고개를 돌렸다.
"호오?"
제르미나의 흥미가 일레시아에게 옮겨간다.
큰일 났다……!
"아직 남아있는 게 있었구나."
제르미나의 손길이 일레시아를 향한 순간, 나도 모르게 기사를 뿌리치고 시아와 제르미나 사이로 뛰어들었다.
"끄악!"
'인간' 하나를 부수는 데 이 정도 힘을 쓰다니!
제르미나의 손에서 나온 붉은 빛이, 온몸에 침투해서 내 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제르미나는 흥미로운 듯, 미소 짓고 있었다.
"마음을 조종하는 신이여. 어떤 여자를 대해도 감흥이 없던 너한테, 아끼는 소녀가 있을 줄이야.
나는 그 사실이 무척 기쁘다고 해야겠구나."
"하하……. 씨발……."
망했다.
짝!
나는 권능을 사용했다.
"신성 기사단 전원! 내가 너희들의 신이다!"
"예!" "예!" "예!"
기사단은 모두 칼을 들고 내게 맹세의 서약을 한다.
"전원, 자결하라!"
제르미나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모두 스스로 목을 베고 죽었다.
어차피 제르미나를 막으라고 해봐야 도움이 안 될 게 뻔하니까.
가장 큰 위험인 제르미나를 남겨놓고, 나머지는 제거한다.
"……후. 후후후……."
제르미나는 기분 좋은 듯 웃고, 붉은 눈으로 날 노려봤다.
"권능을 썼겠다? 네 녀석……."
소, 소멸 당한다!
좋은 인생, 아니, 좋은 신생이었다!
========== 작품 후기 ==========
작품설정에 제르미나의 H 스테가 추가됩니다.
일레시아는 과거편 끝나고 추가하겠습니다.
재밌게 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