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 이세계 최면물-142화 (142/414)
  • 대충 이세계 최면물 142편

    <-- 빛의 여신 -->

    조용하다.

    왕래가 없을 시간이기는 하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 고요했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연결하는 회랑을 따라서 걷는다.

    후보생은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나를 감시하는 집행관들은 여럿 있었다.

    그게 집행관의 일이다.

    이 학교는 젊은 남녀의 밀회를 경계하고 있기 때문에,

    남 후보생이 늦은 시간에 혼자 돌아다니면 자연스럽게 집행관들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상관없다.

    내 목적은 여자 기숙사로 숨어드는 일이 아니니까.

    그것도 재밌기는 하겠지만, 지금 내가 향하는 곳은 멜브릿 본관.

    곰급부터 본격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멜브릿의 핵심 시설.

    곰급이 되기까지 대단한 성과를 올린 건 아니지만, 우여곡절이 없지는 않았다.

    굵직한 임무를 해결했고, 짧은 시간이지만 멜브릿의 최상위 랭커들과도 만났다.

    틸리아 뱅가드와 네리스 리케.

    헤르카는 만나지 못했지만, 본관을 드나들수록 마주칠 확률도 커질 것이다.

    오늘은 수수께끼 학생회장 시아를 만나러 왔다.

    그녀가 가진 비밀들을, 최면으로 남김없이 털어낼 생각이다.

    쓰리 사이즈는 몇인지, 입고 있는 속옷 색깔은, 선호하는 체위는.

    중요한 것부터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전부.

    간단한 일이다.

    언제나처럼 해온 일을 할 뿐.

    본관에 다다르니 다른 후보생들이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처럼 이 시간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없다.

    자정까지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고 했던가.

    문을 잠그기 전에 들어가자.

    "……."

    입구에 있던 덩치 큰 집행관들이 내 얼굴을 쓱 보고 눈을 돌렸다.

    들어가도 괜찮은 것 같군.

    거리낌 없이 안으로 들어간다.

    1층 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예쁜 여자의 모습을 본뜬 조각상이 눈에 띄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 조각상은 빛의 여신 일레시아의 모습을 본뜬 조각상이라고 한다.

    …….

    나는 계단을 올라간다.

    도서관은 2층에 있다.

    2층을 올라가면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큰 문이 도서관 문이다.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밖에서 흘낏 보기만 해도 엄청난 양의 책들이 보관된 장소라는 걸 알 수 있다.

    지금 그 문은 굳게 닫혀 있어서 안을 들여다보거나 할 수는 없지만, 괜히 그 사실이 나를 묘하게 긴장하도록 만들었다.

    "……."

    괜찮아.

    나는 문을 열었다.

    문 크기가 상당해서 그런지 꽤 힘을 넣어야 밀 수 있었다.

    밖에서 봤을 때는 이미 이용 시간이 끝나서 닫혀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잠겨 있지는 않았다.

    물론 안에는 아무도 없다.

    진작 다른 사람들은 모두 빠져나간 것 같았다.

    단 한 사람. 시아, 그녀를 빼고는 말이다.

    "왔어."

    나는 내 존재를 알리듯, 소리를 내어 말하고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안으로 들어오니까 문이 제멋대로 닫혔다.

    긴장된다.

    하지만 좋은 느낌이었다.

    두렵거나 일이 잘못 풀릴 것 같은 종류의 긴장감이 아니라,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를 앞에 두었을 때 느끼는 긴장감이다.

    시아. 그녀는 내가 본 여자 중 가장 아름답다고 할 만했다.

    "오셨군요. 데칼 님."

    "날 기다리고 있었어?"

    "네."

    예쁜 여자를 수없이 농락해온 나지만, 시아는 그중에서도 으뜸이었다.

    단순히 꼴리기로 순위를 매긴다면 카렌이나 네리스, 에페처럼 돌출된 매력을 가진 여자가 더 낫다.

    그리고 예쁘기로 치면 가장 예쁜 건 이스티와 벨라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설명하기 힘든 우아한 기품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구름처럼 틀어 올린 검은 머리카락, 내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은 지적인 녹색 눈.

    조화를 이루는 이목구비와 깨끗한 피부, 가장 완벽한 순간을 사진으로 찍어낸 것 같은 단정한 몸가짐.

    뻔뻔한 게 특기인 내가 무심코 할 말을 잃게 될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처음 봤을 때도 놀랐지만 단둘이 있으니까 머리가 마비되는 것 같았다.

    "그러면, 뭐부터 얘기할까요?"

    딱!

    나는 바로 손가락을 튕겼다.

    에페 때와 마찬가지로, 번거로운 과정은 전부 건너뛰고 바로 최면을 건다……!!

    "……."

    시아는 미소 짓는 얼굴을 무너뜨리지 않고, 가만히 날 보고 있었다.

    "어……."

    통하지 않아.

    위험하다. 상대는 여신이었다. 그것도 벨라처럼 최면 대책을 세운 여신……!

    어떻게 알았지? 아무리 여신이라고 해도 최면 대책을 세우려면 최면술의 존재를 알고 있어야 할 텐데?

    "대책 없이 오셨군요?"

    그 한마디에, 심장을 차갑게 움켜쥐는 압박감을 느꼈다.

    추측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안 좋은데. 이건……!

    시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마치 다른 사람이 없나 확인하는 동작처럼 보였다.

    "철벽의 심사관에게 협력을 구하지도 않고서, 혼자서."

    "맞아."

    나는 깨끗이 인정했다.

    "대책 없이 왔어. 나는 언제나 그랬으니까. 비웃으려면 비웃어. 네가 뭘 노렸든, 내 노림수는 끝났어."

    최면이 통하지 않는다.

    그 사실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상대는 이미 날 알고 있고, 내 능력에 대해서도 알고 있고,

    대응법도 이미 실행한 상태.

    그러면서도 내 주변 관계와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낱낱이 꿰뚫고 있다.

    "비웃지 않아요. 알고 있었으니까."

    "알고 있었어……?"

    시아의 태도는 묘했다.

    날 함정에 빠뜨린 악당치고는 부드러운 어투였다.

    그녀는 그저 나와 얘기하는 게 기쁜 것처럼,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언제나 그랬죠. 데칼 님은."

    "어……?"

    전율이 멈추지 않는다.

    무언가가 생각날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가까이 와주세요."

    시아는 테이블에 살며시 걸터앉아, 나한테 안아 달라는 듯이 팔을 쭉 내밀었다.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허니 트랩? 무언가 노리고 있는 건가? 혼란스러워서 눈앞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어차피 대책은 없잖아요. 생각해봐야 의미 없는 일 아닌가요?"

    "……그, 렇지."

    어차피 대책은 없다.

    나를 왜 그렇게 잘 아는 거야……?

    나는 홀린 듯 다가가 시아를 안는다. 시아는 부드럽게 날 포옹했다.

    좋은 향기가 난다. 그렇게 많이 사정하고 왔는데도 내 자지는 시아를 범하고 싶다고 주장하듯이 딱딱하게 발기했다.

    시아의 의도를 전혀 알 수 없었다.

    왜 나를 안아주는지도 모르겠어.

    내가 떨어지자, 시아는 입을 열었다.

    "진정되었나요?"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는 일어나서 내 앞에 섰다. 너무 가깝지도 않고 너무 멀지도 않은 편안한 거리감.

    그녀는 날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 학교는 어땠나요? 멜브릿을 본 감상을 들려주시겠어요?"

    "멜브릿을 본 감상?"

    "네."

    왜 그런 걸 묻지?

    학생회장이니까 궁금해서? 설마, 나 하나의 의견 따위를 들어서 뭘 하겠어?

    모르겠다.

    하나 확실한 건 이 여신이 내 머리 꼭대기에서 놀고 있다는 것.

    촘촘하게 계획을 짜서 실행하는 타입처럼 보인다.

    만에 하나라도 빈틈은 없다.

    내가 어떤 계획을 짜서 왔더라도 이 여자에게는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대책이 없다」는 식으로 주고받은 일련의 대화는,

    그녀가 나한테 생각이 없다고 힐난하려고 꺼낸 말이 아니다.

    「계획을 짜는 자」일수록 최면에 취약하다.

    광기로 무장한 박서연의 존재가 내 천적이듯이

    그 반대, 생각하고 계획하는 자일수록 최면에는 약하다. 내가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게 나의 본질이다.

    최면술사의 본질이기도 하다.

    당장 누구에게든 다가가서 손가락만 튕기면 모든 걸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데 그 전에 면밀하게 준비하고 검토한다?

    최면을 얻은 지 얼마 안 되었으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생활에 스며들고, 모든 걸 최면으로 지배하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다르다.

    그때는 그런 준비하는 기질은 물과 기름처럼 맞물릴 수 없다.

    말하자면 나는 내 능력에 걸맞게「저지르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 인간.

    「대책이 없다」는 그런 나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즉 이 여자는 나를 아주 잘 알고 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나라면 준비 없이 바로 혹해서 달려올 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멜브릿에 오기 전까지 이 여자 얼굴도 몰랐는데, 이 여자는 내 모든 걸 알고 있다.

    그런 생각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렇게 생각하자,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도리어 편안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멜브릿 전체를 본 인상은, 그래……. 말도 안 되는 곳이라고 생각했지. 화도 났어.

    멜브릿에는 구조적으로 큰 문제가 있으니까."

    "경쟁을 부추겨 선별하기 때문에 그런가요?"

    "설마. 나는 경쟁을 나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 특히 여기 학생은 세상을 구하는 일을 맡는 자들이잖아.

    그 누구도 세상을 구하는 일을 어설픈 사람이 맡기를 원하지 않을 거야.

    그런 점에서는 합리적이지."

    특히 멜브릿은 밖에서 거둔 상질의 영혼을 영혼병으로 만들어, 투자할 가치가 있는 인원에게 배분한다.

    그 시스템 자체는 놀랍다.

    백 명의 숙련된 병사보다 한 명의 괴물 같은 인간을 만들기로 한 거니까.

    "그게 현실적인 시스템이라면 말이야. 기분 나쁘기 짝이 없는 곳이야. 여기는, 학교라고 할 수도 없어."

    내 혐오감을 이해하는 듯, 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멜브릿은 그 시스템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모든 국력을 쏟고 있어요.

    왕국 전체의 고혈이 모이는 곳이라고 할 수 있죠."

    당연히 그렇겠지.

    전국에 있는 영혼이 알아서 모일 턱이 없으니 엄청난 인력과 자금을 투자했을 것이다.

    이런 좆만한 나라의 행정력으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겠지.

    작은 마을의 모험가 길드에서조차 영혼석을 즉시 그 자리에서 화폐로 교환할 수 있는 환금 시스템이 정비되어 있었다.

    길드가 알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라에서 힘을 쏟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힘을 쏟아서 하려는 일이 영혼을 잔뜩 먹은 높은 레벨의 괴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란다.

    정상적인 나라가 할 생각인가?

    "이 나라는 지금도 마물과 전쟁 중이에요. 바깥에서도, 안팎에서도."

    "전쟁도 전쟁이지만, 학교는 재난으로부터 보호 받아야 하는 곳이야. 그런데 여기는……."

    "생각하신 대로, 멜브릿은 최전선에서 싸울 용사 후보를 올바르게 길러내는 곳이 아니에요.

    만들어내는 곳. 생산 공장과 같아요. 영혼을 먹여서 레벨을 키우고, 빠르게 성장시켜서 전쟁터에 투입 시키는 곳이죠.

    말하자면, 인마전쟁의 핵심시설이에요."

    이곳이 학생을 길러내는 곳이었다면 나라가 학교를 지켜야 한다.

    하지만 여기는 국운이 걸린 용사 생성 시설.

    이 영혼 시스템이 상대편에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속된 말로 '몰빵' 했다는 걸 알면?

    당연히 최우선 타격 대상이다.

    사람도 아닌 것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겠는가?

    마물을 막지 못하게 됐을 때 이 학교라는 이름의 생산 시설에서 어떤 지옥이 펼쳐질지 쉽게 예상이 간다.

    둘 중 하나다.

    인류의 정신적 지주인 용사가 죽거나,

    멜브릿이 우선 타격당하면 인류는 멸망한다.

    나는 여기가 전쟁터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분이 더러웠던 것이다.

    "너는 그 핵심 시설의 관리자고."

    "네, 올바른 인식이에요. 짧은 시간이었는데, 이 세계의 진실을 알아차린 점. 칭찬하겠습니다."

    "망한 세계라는 건 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어.

    어떻게 망했는지 알았을 뿐이야. 대단한 일은 아니지."

    이 여자는, 선별되고도 용사 곁을 보좌하는 일을 고사한 게 아니다.

    이 시설을 지키는 게 용사 곁을 지키는 것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관리자로 남은 것이다.

    석연치 않은 건 여자의 정체다.

    "너는 누구야?"

    능력 있고 젊은 여자가 인류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면, 내 눈앞에 서 있는 건 성인(聖人)과 진배없다.

    하지만 여신이라면 얘기는 좀 다르다.

    여신은 대리인을 통해서 세계를 구제한다.

    실제로 인류가 멸망하면 여신 성격에 따라서는 뼈아프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자기랑 상관없는 일이다.

    애초에 자기가 직접 나서서 세계를 구할 수 있다면, 그럴 마음이 있다면, 대리인을 내세울 이유가 없다.

    자기가 직접 하면 되잖아?

    여신이라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왜……?

    "왜 모든 걸 알면서도 멜브릿에 있기로 하셨나요?"

    돌아온 건 질문이었다.

    "내 알 바 아니니까. 나는 이 학교에 너 같은 여자와 섹스하러 왔어. 오늘도 그러고 오는 길이야.

    나는 그러면 족해."

    "……."

    시아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꺼낸 말이다.

    날 경멸해도 그건 그것대로 시아가 어떤 성품인지 알 수 있으니까 좋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필요한 건 정보다. 이 여자의 속을 떠볼 수 있는 단서다.

    하지만 시아는 전혀 뜻밖에도.

    "네, 알고 있어요."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뭘 해도 태연한 얼굴로 받아치는 이 여자에게 처음으로 화가 났다.

    그럼 이것도 예상했는지 볼까?

    나는 시아의 젖가슴을 난폭하게 주물렀다.

    끌어안아서 다짜고짜 입맞춤한다.

    시아는 가만히 서서, 저항도 하지 않았다.

    "용사는 알아서 애쓰라고 해! 나는 마음에 든 용사 후보생들이랑 잔뜩 섹스해서 임신시킬 거야.

    만삭인 배로 싸울 수 없어서 마물한테 살해당해도 좋다 이거야.

    임신시킨 여자 중에 마음에 드는 여자들만 쏙 데리고 나가서 나머지 인간들은 죽든 말든 방치할 거야!"

    "……."

    "너도 나랑 같이 가는 게 어때? 내 아이를 배고 안전한 곳에서 매일 섹스하는 거야.

    당연히 용사도 임신시킬 거야. 용사의 보지에 대책 없이 싸지르고, 최면 걸어서 허덕이게 만들고 내 뜻대로 할 거야.

    나는 그런 게 너무 좋아서 이 학교에 남았어! 여기까지도 예상했어?!"

    어때? 역겨워 죽겠지!

    뭐라고 말해. 날 경멸해 보라고! 쓰레기 새끼라고 욕해봐!

    시아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내 입맞춤에 응했다.

    나는…… 놀라서 움직일 수 없었다.

    시아가 혀를 넣어, 나와 키스한다. 무척…… 애정이 어린 입맞춤이었다.

    "츄우……. 쮸……. 네……. 예상했어요. 전부."

    "우, 웃기지 마!"

    나는 동요한 나머지 시아를 힘으로 밀쳐냈다.

    시아는 가만히 서서, 날 보고 미소 짓고 있었다.

    "너, 너는 대체 뭐야! 사람 마음이라도 읽는 거야? 넌 내 적이야? 아군이야?"

    딱!

    손가락을 튕긴다.

    딱! 딱!

    멈추지 않고 계속 튕기지만, 시아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때, 모든 것이 밝아졌다.

    사물의 윤곽을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밝은 빛.

    순간 내가 죽었나 생각했다. 뒤로 손을 뻗자 의자 등받이가 잡힌다. 장소는 변하지 않았다.

    이 광채는 시아를 중심으로 뻗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시아의 모습만은 명확하게 보였다.

    빛무리가 모든 걸 감쌌다.

    분명히 지면에 발을 대고 서 있는데도, 천장이 없고, 벽이 없고, 나는 얼마나 낮은 곳에 있는지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지.

    모든 걸 분간할 수 없는 새하얗고 거센 빛의 흐름 속에서, 시아는 조용히 말했다.

    "저는 빛의 여신 일레시아입니다."

    그 한마디로.

    그녀의「신격」이 발휘된 것처럼, 빛에 성스러움이 깃든다.

    ……끝났다.

    지금까지 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받으며 지옥에 떨어지는 내 모습이 그려진다.

    그러나, 시아는 심판의 창을 내리꽂거나 하지는 않았다.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데칼 님. 모든 걸 알려드리겠습니다."

    "모든 것……?"

    "이걸 봐주세요."

    시아의 손에 무언가 나타났다. 그것은…….

    "붉은 영혼석……이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 영혼석은 훨씬 격이 높은 것.

    신의 영혼석입니다."

    "신의 영혼석……."

    "이 안에 들어있습니다."

    "뭐가?"

    머리를 태울 것 같은 호기심에, 재촉하듯이 캐묻는다.

    시아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데칼 님이 신이었던 때의 기억이."

    4